바야흐로 세 치 혀가 사람 잡는 시대다. 검찰에서 명예훼손 전담팀을 꾸려 유언비어를 엄단하겠다고 천명하기가 무섭게 '만만회' 의혹을 제기한 새정치민주연합의 박지원 의원이 기소되었고, '박근혜의 7시간'을 남자관계와 엮어 므흣하게 보도했던 산케이신문의 가토 다쓰야 서울지국장 역시 출국금지 및 소환조사의 2단 콤보를 먹는 등 곤욕을 치르고 있다.
그리고 어제(9월 4일), 박지원이나 가토 다쓰야와는 감히 비교를 불허하는 일베의 아이돌, 변희재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되었다.
내가 이긴댔지?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아닌 변희재의 입장에서 집행유예 판결이 특별한 불이익이라고 보기는 힘들며, 항소심을 통해 감형될 여지도 충분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심 단독사건(판사 1명이 재판하는 사건, 보통 벌금형이나 징역 1년 내외의 가벼운 사건이 해당된다.)임에도 불구하고 벌금형 약식기소에서 시작해서 구속영장까지 발부되는 등 롤러코스터를 탄 사건의 진행경과나, 유사한 소송에 많이 얽혀 있는 변희재의 이력을 생각해 볼 때 한 번쯤 짚어볼 만한 판결인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명예훼손 등 민형사상 문제에 연루되기 쉬운 딴지스들에게도 타산지석의 좋은 귀감이 될 것이기에, 한가위특집 '변희재는 어쩌다 집행유예를 받게 되었나' 시작하겠다.
사건의 발단은 2013년 변희재가 운영하는 미디어워치에 게재된 기사에서부터 시작된다. 성상훈 기자(최근 미디어워치 기사에서는 '성상훈 전 기자'라고 표시된 걸로 봐서 모종의 사정으로 미디어워치를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가 쓴 이 기사는 '새정치민주연합 김광진 의원이 갈대나라라는 기업을 운영하며 의원 지위를 이용해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로고와 마스코트 사용권을 따내는 등 특혜를 받았다'는 내용으로 변희재는 이 기사에 기초해"김광진,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권력을 이용해 국민세금 털어먹고 지자체 압박하여 지정상품 만들어내는 등, 대단한 솜씨네요"등의 트윗을 남긴다.
그런데 김광진은 2011년 7월경 갈대나라의 갈대와인이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1차 인정상품으로 선정될 당시 갈대나라의 대표이사였으나, 당시는 그가 국회의원에 당선(2012년 4월)되기 전이었으므로 지위를 이용해 특혜를 받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었다! 순천시가 노스트라다무스같이 1년 뒤를 내다보는 혜안을 갖추었다면 모를까, 오히려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 조직위원회는 2013년 1월 주류품목 반입 불가 등을 이유로 갈대나라의 갈대와인을 상품화권자 선정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새정치민주연합 청년비례대표 국회의원 따위는 아랑곳 않는 쿨함(물론 김광진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다음이었고, 이후 김광진의 형이 갈대나라의 대표이사가 되었다고 한다.)을 보여주었으니 특혜 운운하는 미디어워치의 기사나 변희재의 트윗은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은 셈.
빡친 김광진은 변희재와 성상훈을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청구와 형사 고소의 2단 콤보를 먹인다. 김광진은 사실 이전부터 노예 채찍 수갑 등을 거론하여 SM플레이를 암시하는 육두성 트윗 사건이나 '백선엽=민족반역자' 발언으로 미디어워치와 변희재의 집중공격을 받아 감정이 좋지 않았던 상황.
그리하여 2013년 12월 19일, 서울남부지방법원 제15 민사부(재판장 유승룡 부장판사)에서 이 사건의 민사 1심 판결이 선고된다. 해당 판결을 인용한 미디어워치 기사에서 '선정자 변희재' 운운하는 표현이 등장하는 걸 보면 변희재는 성상훈이나 미디어워치를 선정당사자(민사소송에서 원고나 피고가 여러 명일 때 그중 일부를 같은 편 대표선수로 지정하여 소송수행을 위임하는 제도)로 삼고 별반 신경을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과연 법률전문가 변희재! 그러나 재판부는 미디어워치의 기사와 변희재의 트윗을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보아 불법행위로 인정하였고, 끝내 김광진에게, 변희재는 200만 원, 성상훈과 미디어워치는 각자 300만 원을 각 지급하라는 취지의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선고한다.
(위 판결에 대해 국민TV는 총 800만 원 배상판결이라고 보도한 바 있으나 이와 같이 배상액을 단순 합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닌 듯. 아마도 재판부는 문제의 기사를 성상훈과 미디어워치의 공동불법행위로 보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 경우 소위 부진정연대채무의 법리가 적용되어 성상훈과 미디어워치 둘 중 아무나 김광진에게 300만 원을 주면 시마이 된다능. 다만 재판부는 변희재의 트윗을 미디어워치의 기사와는 별개의 불법행위로 인정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 변희재는 성상훈이나 미디어워치와는 별개로 김광진에게 200만 원을 내놔야 한다. 즉 김광진이 받을 수 있는 돈은 총 500만 원이 되는 셈. 물론 여기에 해당 기사나 트윗이 게재된 날부터 판결선고일까지는 연 5%, 그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는 연 20%의 비율에 의한 지연손해금, 즉 이자가 붙었을 것이다. 김광진의 트윗이나 연합뉴스 기사는 손해배상액을 단순 합산하지 않았으니 오류라고 볼 수 없으나 국민TV는 ㅠㅠ)
1억 원을 청구했다는(이것도 표현이 불분명한데, 만일 피고들에게 각 1억 원씩을 청구했다면 최대 3억 원 ㄷㄷ)김광진의 입장에서야 액수가 조금 적은 듯 느껴지겠지만,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를 인정하는데 인색한 법원의 실무상 관행(사망 시의 위자료도 대략 5,000만 원 정도를 기준으로 한다. 물론 이 경우 위자료 말고도 노동능력 상실 등의 손해배상을 더 받을 여지가 있긴 하지만 정신적 손해에 대한 피해배상은 거기까지라는 것)을 감안해보면 나름 선방한 셈으로 볼 수도 있다. 변희재 측의 항소로 사건은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 2심 계속 중이다.
이번에는 형사. 2014년 3월 24일 서울남부지방검찰청은 변희재를 벌금 300만 원에, 성상훈을 벌금 200만 원에 각각 약식 기소하였다. 약식기소는 혐의는 인정되나 경미한 사건에 있어 정식재판을 하지 않고 서면심리만으로 벌금형을 선고하도록 하는 절차로 이대로 끝났다면 그냥 무난한 결론이 되었을지 모른다. 여기서 1차 반전이 일어나는데, 법원에서 이건 벌금형으로 끝낼 사안이 아니라면서 정식재판에 회부한 것. 센스 있는 사람들은 눈치챘겠지만, 여기서부터 이미 집행유예 이상의 가시밭길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벌금형을 주려면 약식으로 끝내면 그뿐, 뭐하러 굳이 정식재판을 열겠는가!
당초 "어차피 현역 국회의원의 부친 소유 회사에, 현재는 친형이 대표로 있는 친족 회사인데, 국회의원 취임으로 대표이사 그만둔 건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김광진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라고 표현했다면 괜찮은 것 아닌가"라는 변명을 늘어놓던(즉 디테일한 표현의 문제였다고 본 것이다!)변희재는 막상 형사재판에서는 공소사실을 대체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이렇다 할 다툼 없이 당일로 변론이 종결되었고 검찰은 벌금형을 구형했다.(자기들이 벌금형이 적당하다고 약식 기소한 사안에 대해, 정식재판에 회부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징역형을 구형할 수는 없을 테니까.)
변희재는 최후진술을 통해 기초적인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실수가 있었다고 인정했으나, 이는 보도 당시 경영 공백 상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면서 언론이 공인에 대한 의혹을 취재·보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벌금형을 선고하는 것은 너무하다며 재판부에 선처를 요청했다.
그렇다. 그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심 집행유예 이상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판사 앞에서 '벌금형은 너무하다'니.
이와 같은 안이한 현실인식 탓이었을까. 변희재는 7월 17일 예정된 선고공판에 나타나지 않았다. 법원은 8월 11일로 선고를 연기했지만, 이날도 변희재는 불출석.
격분한 판사는 변희재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하며 2차 반전이 일어난다. 정당한 사유나 기일연기 신청도 없이 2회나 불출석한 것을 볼 때 도주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 졸지에 변희재는 도망자 취급을 받으며 무상급식을 받을 위기에 몰리게 된다.
변희재는 참석 의무 여부를 착각했다며(변호사만 선임하면 당사자는 나올 필요 없는 민사재판과 헷갈렸을 수도 있긴 하다.)다음에는 반드시 출석하겠다는 취지의 의견서와 조갑제, 서정갑, 김동길 등 보수논객들의 보증이 담긴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하는 등 필사적인 노력으로 구속영장을 철회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운명의 9월 4일. 변희재는 앞선 두 번의 공판과 달리 30분 전부터 법정에 나타나는 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빠릿빠릿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형사3단독 서형주 판사는 공소사실 전부를 유죄로 인정한 후 서릿발 같은 양형 이유를 낭독한다.
피고인은 언론인이자 시민운동가로서 트위터 팔로워가 6만 명에 달하는 등 사회적인 영향력이 큰데도 기본적인 사실관계조차 파악하지 않은 채 허위내용의 글을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해 트위터에 게시해서 피해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으므로 사안이 절대 가볍지 않다.
그렇다. 한때 진중권으로부터 듣보잡이라는 놀림을 받던 변희재. 이제는 무려 대한민국 법원에서 언론인이자 시민운동가로서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건 축하해줄 일인 듯
그러나 서형주 판사는 그렇기 때문에 변희재의 잘못이 더 중하다면서 김광진 의원의 명예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는데도 잘못을 인정하고 피해자와 합의를 하지 않은 점 등을 고려하면 엄히 처벌해야 마땅하다고 꾸짖었다. 결국 예상을 깨고(?) 집행유예가 선고되었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사건의 진행 흐름을 보자면 어느 정도 수긍할만한 결론이 아니었나 싶다. 막말로 탄원서 아니었으면 실형 선고에 법정구속 크리를 맞았을 수도 있다.
반면 변희재는 판결 선고 후 인터뷰에서 집행유예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실 확인을 철저히 못 한 실수는 인정하지만 고의는 아니었다며, 국회의원을 어떻게 고의로 비방하겠느냐는 이야기.
그러나 변희재를 위해 충고하자면, 계속 그런 식으로 주장하다가는 항소심에서도 필패다. 미디어워치의 보도 내용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진 이상, 변희재가 빠져나가려면 어떻게든 그 내용이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근거를 찾아서 제출해야지 실수였다고 변명해봤자 법원에서는 씨알도 안 먹힐 거라는. 보도 내용이 객관적 사실이 아닌 이상 '비방할 목적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게 판례를 통해 확립된 명예훼손의 법리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일반 네티즌도 아니고 나름 언론계 종사자 아닌가. 2012년 총선 당시 민주통합당 청년비례대표 선출 과정에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온 변희재가 김광진이 언제 국회의원이 되었는지를 착각했다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 힘든 변명일 뿐이다.
결국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걸 변희재가 제 힘으로 입증해야 하는데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만으로는 그런 게 있을 성 싶지 않다. 해당 업무를 담당한 순천만 정원박람회 조직위원회 직원이 증언이라도 해주면 모를까. 여기서 삑사리 난 게 왕년의 경찰청장 조현오인데,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차명계좌가 발견되는 바람에 자살했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차명계좌를 밝혀내지도 못했고 사실이라고 믿을만한 출처도 대지 못해서(지인인 임경묵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이사장을 거명했으나 본인은 부인했고 대법원에서 인정받지도 못했다는)끝내 징역 8월의 실형을 살고 나와야 했다.
그렇다면 변희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 같아서야 '언론이 공인에 대한 의혹을 취재·보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무죄를 주장하고 싶겠지만 그건 앞서 본 바와 같이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을 때에나 가능한 일. 아울러 그 논리대로라면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한 의혹을 취재, 보도한 산케이도 처벌할 수 없게 될 테니 애국 보수진영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무죄는 텄고, 유죄를 전제로 집행유예를 면하고 벌금형이라도 받으려면 죽으나 사나 양형부당을 주장해야 할 텐데 객관적으로 잘못이 인정되는 상황인데도 반성하기보다 변명을 늘어놓는 모습을 2심 재판부가 어여삐 여겨줄지 의문이다. 게다가 2심도 1심과 같이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진행될 거라는 것도 긍정적으로 보이진 않는다.(정확한 통계가 있는 것은 아니나 체감상 1심 합의부 → 2심 고등법원 사건보다 1심 단독 → 2심 같은 법원 합의부 사건의 항소기각률이 더 높게 느껴지더라. 같은 법원 안에서 뻔히 아는 판사들끼리 누가 잘못했다며 파기하는 것도 껄끄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확실한 것은 합의, 즉 피해자인 김광진 의원의 고소취하 또는 처벌불원의사를 받아 제출하는 것이다. 명예훼손죄는 원래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처벌할 수 없는 소위 반의사불벌죄이므로 김광진 의원이 처벌불원의사를 표시하면 공소기각으로 끝. 그러나 이 또한 1심판결 선고 전까지만 가능하기에 이제는 합의를 보더라도 소용이 없... 지는 않고 양형에 참작은 될 것이다. 즉 집행유예는 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은 사실상 집행유예의 하한선이라고 보면 된다. 변희재가 항소심에서 양형 조건 중 한 가지만 유리하게 바꿔놓으면 벌금형으로 다운될 거라는 뜻이다.)
물론 김광진은 합의 볼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하고 변희재 또한 비굴하게 합의를 구걸할 사람도 아니라고 보이므로 현실성은 없어 보인다. 진지한 사과나 반성 같은 것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고.
변희재 구속영장 발부.. 법원 "도주 우려 있다" | http://t.co/zQFhHD0HqC 민형사모두 절대 취하도 합의도 조정도 선처도 없음을 명백히 밝힙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볼 만한 방법은 모든 걸 전적으로 기사를 작성한 성상훈 탓으로 돌리고, 기자가 벌금형인데 그 기사를 믿은 것뿐인 나에게 집행유예라니 말이 되느냐고 우기는 것. 그런데 그러자니 '당시 기사를 쓴 기자가 신입이었다'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내용이 걸린다. 신입이 쓴 기사인 줄 알았다면 좀 더 철저히 사실 확인을 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박할 수 있을 테니. 또한 영향력에 있어서도 성상훈과 변희재는 비교가 되지 않잖아?
이제 남아 있는 마지막 수단은 집행유예가 확정되면 인터넷신문의 발행인 등이 될 수 없고 그래서 일자리를 잃으면 생계가 곤란 운운하며 동정에 호소하는 것인데 미디어워치 홈페이지를 가보니 막상 변희재가 대표이사나 발행인, 편집국장 같은 걸로 되어 있지도 않더라는. 그리고 실형이 선고되어 구속되는 것도 아니고 부양가족도 없는 변희재에게 그런 동정을 베풀어줄 것 같지도 않다.
결국 일베와 수컷닷컴 등을 중심으로 '변희재를 지키자'는 여론이 들불처럼 일어나고 재판부에 탄원서가 쇄도라도 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항소심에서 원심의 판결을 뒤집을만한 내용은 적어도 현재까지는 보이지 않는 상황.
다만 변희재에게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벌금형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 검찰이 항소할 가능성은 없으니(중간에 추석 연휴가 끼여서 항소장 제출 가능한 날짜도 며칠 없다.)소위 불이익변경금지의 원칙이 적용되어 1심보다 무거운 형을 선고받지는 않을 거라는 점. 즉 아무리 찌질한 태도로 일관하더라도 실형을 선고받지는 않을 테니 재판정에 열심히 출석만 하면 구속은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변희재 vs 김광진의 법정공방 1라운드를 살펴보면서 명예훼손죄를 생각해 본다. SNS를 통해 누구나 미디어가 될 수 있는 오늘날, 우리 모두는 명예훼손의 잠재적 피해자이자 피의자가 될 수 있다. 분명히 남용 가능성이 큰 법이지만 개정될 가능성은 높지 않고, 명예훼손에 대해 갈수록 강경해지는 검찰과 법원의 태도를 볼 때 송사에 걸려 민형사상 책임을 지게 된다면 여러모로 좋게 될 가능성도 많다.(재미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혹시 원하는 독자들이 있다면, 명예훼손을 비롯하여 말과 글로써 형사처벌을 받을 가능성에 대한 심층 기획기사를 써볼까 싶기도 하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비판할 때 절대 쫄지는 말되, 적어도 사실관계를 거론할 때만큼은 믿을만한 근거를 갖추어 이야기하도록 하자.
맑다. 순찰하러 떠나 백야곶(여천군 화양면 백야도)의 감독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 권준(權俊)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렸다. 기생도 와서 종일 같이 놀았다. 비가 온 뒤라 산의 꽃이 활짝 피어 경치가 멋져 형언키 어렵다.
오오.. 충무공 이순신께서 기생들과 함께 노시다니, 살짝 놀랍긴 하지만 갑자기 이해도 간다. 호방한 무관들이 함께 풍류를 논하는데 어찌 기생이 빠질 수가 있으랴. 꽃이 흐드러진 봄의 풍경 속에서 말이다.
3월 9일 [양력 4월 6일]<병자>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계집종이라니, 관비를 말하는 것인가? 개라는 이름이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나 보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임자>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뭐? 광주목사의 딸과 같이 잤다고? 혼례도 안 올리고?
9월 12일 [양력 11월 1일]<을사>
바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여진은 또 누구인가? 여진족인가? 한자로 보면 '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인 것 같기도 하고...
9월 14일 [양력 11월 3일]<정미>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헉. 두 번 씩이나? 하기사 두 번 정도야 뭐, 힘 좀 내면 가능하겠지만 일기에 횟수까지 적다니, 충무공께서 좀 지나치게 솔직하신 거 아닌가?
9월 15일 [양력 11월 4일]<무신>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으아니. 세 번씩이나? 그것도 아파서 울 정도로? 이순신 장군이 당시에 몇 살이셨더라?
2월 12일 [양력 3월 10일]<기유>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부사 현감들이 모이는 자리에 나이 젊은 계집들이 단체로 왔었다고?
3월 5일 [양력 4월 2일]<임신>
맑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끄억. 이..이거슨, 쓰리썸도 아니고 파이브썸. 이게 당대의 관습으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별장 난교로 유명한 모 차관이 살던 시대도 아니고...
충무공, 성웅 이순신. 그는 당대의 무장이며, 임진, 정유 양 왜란을 맞이하여 조선을 구해낸 구국의 영웅이다. <난중일기>는 그가 전쟁 당시에 직접 적었던 일기이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모두 일곱 권으로 일곱 권의 일기와 서간첩 한 권, <임진장초>라는 책 한 권해서 도합 아홉 권으로 구성된 책이다. 현재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書簡帖壬辰狀草)>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위에 인용한 문구들은 소위 난중일기 해석본이라고 인터넷 상에 떠돌아 다니는 글이다. 정확한 출처는 확인하지 못했다 난중일기의 해석본은 매우 많이 존재하므로 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삼도수군 통제사라는 수군 최고 직책까지 올랐던 고급 무관이 군영에서 겪은 일을 적은 일기에 자신의 성생활에 대해 저렇게 진솔하게 적었다는 것, 상당히 신기한 일이다.
물론 저런 진솔한 이야기들이 박정희 시절 강력하게 추진되었던 이순신 영웅 만들기의 흐름 속에서는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은상이 쓴 <난중일기 역주해본>에는 저런 내용들이 모두 빠져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이순신을 영웅화 하기 위해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진솔한 구절들을 고의적으로 뺀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일견 그럴싸한 주장이다. 이순신은 무관이다. 그것도 고위직이었으며 전란 기간 동안 호남 지역에서는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렸을 것이다. 그런 그가 당대의 성 풍속도에 입각해 봤을 때 하등 흠이 안될 만한 행위들, 즉 계집종이나 기생들과 어울린 이야기를 일기에 못 쓸 이유가 없다. 여진이라는 어휘는 충분히 여성스러운 이름이며, 그녀와 관계한 횟수까지 기록하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오히려 무장으로써 강인한 체력(응?)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심지어 두 명도 아니고 네 명과 함께 하기까지 한 것으로 보아 개방적인 성생활을 즐겼을 것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까? 그럴까? 하여간 별 문제는 아니라고 봐 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권위주의에 찌든 사람들이 위선적인 의도로 저런 이야기를 뺀 것도 이해가 갈 법한 일이고, 그게 밝혀진다 하더라도 이순신의 명성에 하등 흠이 갈 일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는 이순신이라는 역사 속의 영웅을 좀더 친근하게 대할 수 있고, 생동감 넘치는 인격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저 문장들이 진실일까? 실제로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며, 그 내용을 이순신이 직접 쓴 것일까?
제7책은 〈무술일기 戊戌日記 〉로 8매(1598.9.15. ∼ 1598.10.7.)로 되어 있다.
그 밖에 장계(狀啓 ), 등본(謄本), 별책 부록 끝에 1598년 11월 8일부터 17일까지 최후 10일간의 일기가 1장으로 되어 있다.
눈치 빠른 독자는 알아챘겠지만, 을미년의 일기가 빠져 있다. 유실된 것이다. 그 상태로 지금까지 전해져 <난중일기 초고본>으로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에 후대에 다시 정리한 <이충무공전서>가 있다. 1795년에 목판본으로 만들어진 이 판본에는 원문과 다른 곳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 두 가지가 기존에 우리가 <난중일기> '원본'이라고 간주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기록이 하나 더 발견되어 추가되었다. 17세기 말에 난중일기 원본을 필사해 보관하려고 만든 것으로 보이는 <충무공유사>라는 책이 있었다. 즉 <이충무공전서>에 비해 100년 정도 앞서 만들어진 판본이다. 이 판본은 덕수 이씨 종가에 <난중일기>의 별책부록 비슷하게 보관되어 오다가 현충사로 옮겨졌고 해독하는 과정에서 유실된 을미일기의 일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밝혀져 귀중한 자료로 확인되기도 했다.
이미 이삼백 년 전부터 <난중일기>는 불완전한 카피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흔적을 쫓아 충무공이 직접 쓴 내용은 무엇일까 하는 것을 '추정'해 볼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거기다가,
충무공은 이 일기를 매우 난해한 한문으로 기록했다. 마치 이두와 같은 용법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결정적으로 이 책들은 아주 급하게 쓴 초서로 적혀 있다. 해독이 그리 쉽지 않다. 당시의 용어들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우리는 과연 충무공이 직접 일기를 쓸 때의 의도를 진실에 가깝게 해독할 수 있는 것일까?
<난중일기>는 매사가 그렇지만 역시나 일본에서 먼저 해석을 시도했고, 일어판 번역본이 나와 널리 읽히고 있기도 하다. 과연 일본 사람들은 이 난해한 문장들을 제대로 해석했을까? 충무공이 사용한 당시의 군사용어나 생활용어들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었을까?
어찌되었거나, 지금 중요한 것은 <난중일기>의 역사적 가치나 거기에 담긴 내용들의 난해함이 아니다. 과연 충무공께서는 꽃놀이를 나가 기생들을 단체로 불러 즐기며, 파이브썸을 즐기고,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파워섹스를 감행해 상대가 고통스러워 울게 만들 정도의 절륜한 정력을 자랑하는 플레이보이셨던가 하는 것이다. 논점을 일탈하지 말고 다시 주제로 돌아오기로 하자.
위에 인용된 내용을 놓고 진행되는 갑론을박을 인터넷 상에서 검색하기는 무척 쉽다. '저 내용이 맞다', '충무공은 그렇게 진솔한 분이셨다', '부럽다'라는 측과 '저런 내용이 사실일리가 없다', '원문에는 저런 기록 자체가 없다', '오역이다', 라는 주장이 충돌하고 있었다.
기생들 이야기나 '개'라는 이름을 가진 계집종에 관한 내용은 제쳐두자. 일단 도대체 그렇게 자주 등장하는 여진은 누구인가부터 따져 보기로 하자.
여진이라는 이름은 원문에 나온다. '女眞'이다. 그러나 일종의 메모 비슷하게 일기장 옆 공간에 적어 놓기를 女眞 十十, 女眞 十十十, 이라는 식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여진을 충무공의 섹스파트너로 해석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이 여진이라는 단어가 <이충무공전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날조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틀린 주장이다. 비록 귀퉁이지만 원문에 분명히 적혀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충무공전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 윤색이 가해진 기록이기도 하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상중인데 왕이 고기를 먹으라고 내려줘서 비통했다는 충무공의 솔직한 심정을 왕이 고기를 내려주셔서 감동했다는 식으로 윤색한다. 충무공이 왕에게 개기는 것이 보기 안 좋다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저 기호 같은 문장에서 일단 여진을 진이라는 이름의 여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그리 무리한 해석은 아니다. 아마도 관비였을 것이다. 문제는 반복되는 열십자이다. 20, 30을 의미하는 것인지, 마치 벽에다가 X표를 해서 횟수를 기록하는 것과 유사하게 횟수를 기록한 것인지 모른다.
즉, '여진과 두 번 했다', '여진과 세 번 했다'라는 해석은 여진을 여성의 이름으로, 열 십자를 횟수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열 십자를 두 번 연속으로 쓰는 것은 20(卄)의 의미일 수도 있다. 이렇게 따지면 열 십자 세 번은 30이 된다.
두 번, 세 번도 아니고 스무 번, 서른 번을 했다고? 아파서 울기 이전에 남자가 먼저 죽겠다.
이 부분을 놓고, 충무공 관련한 역사 전문가인 이용호 박사는 진작부터 오역설을 주장해 왔다. 그는 '석세(石世)를 돌세로 읽는 것처럼 충무공은 이두(吏讀)를 많이 사용했는데 다른 사람들이 봐서는 안될 전쟁터에서의 기록에 본인만 알 수 있도록 이두로 적은 것이며 이후 정조 때 판각에서는 후대의 오역을 막기 위해 아예 지워버렸다'라고 주장한다. 정조 때 판각은 <이충무공전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이용호 박사는 충무공이 여진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나의 군대(진영)'이며, 여진 20, 여진 30은 20명의 군사, 30명의 군사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뭐? 충무공이 군인 20명 하고 했다고?
즉,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다른 곳을 방문해 거기 함께 묵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용호 박사는 연세대에서 <난중일기 영역본>을 출간하면서 이 여진이라는 말을 'the night with chin(친과 함께 자다)'과 'spent the second night with chin(친과 함께 두 번째 밤을 보냈다)'라고 해석하면서 오역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 에서는 이 부분을 좀 더 자극적으로 해석한다.
'여진을 덮쳤다.' 이건 좀 심하잖아~~
<난중일기 완역본>을 최근 출간한 초서 전문가 노승석씨는 이 부분에 대해 또 다르게 해석한다. '卄'자는 초서로 共이라는 것이다. 즉 女眞 十十는 女眞共이며, 이는 그저 여진과 함께 잤다는 뜻이지 횟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그러면 十十十는 또 뭘까?
아파서 울었다 하는 부분은 원문에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건 의역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또 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는 서출이었다고 한다. 충무공의 신분을 고려한다면 광주 목사가 자신의 서출 딸을 충무공과 함께 자게 하는 정도는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이해가 갈 수도 있는 일이라는 판단이 든다. 그 경우, 충무공은 그 일을 일기에 기록했을 법도 하다.
네 명의 계집종과 함께 잔 내용은 원문에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난중일기> 정도의 자료를 인터넷으로 확인하기 어렵게 웹사이트를 만들어 놓는 만행을 저지른 덕분이다. 조만간 아산 현충사까지 가서 직접 <난중일기> 원본을 눈으로 보고 확인해서 다시 알려드리도록 하겠다.(근데 보여주긴 하려나??)
현충사
그리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더 있다.
위의 인용에는 없지만, <난중일기>에는 '세산월(歲山月)'이라는 한양 기생이 충무공을 찾아 전남 영광까지 내려와 밤 늦도록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나와 있었다. 이는 노승석 씨의 해석으로 인해 세산월(歲山月)이 아니라 내산월(萊山月)인 것으로 확인됐다. 역시 초서 문제로 인해 발생한 오해인 것이다.
내산월은 선조 때 문인 이춘원(李春元 1571∼1634)이 자신의 시에서 언급했을 정도로 유명한 기생이다. 그리고 그 내산월은 충무공을 좇아 전쟁 통에 전남 영광까지 찾아와 함께 술을 나눌 정도로 충무공을 사모했던 것이다.이건 오로지 파워섹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이다.
충무공이 직접 손으로 써서 남긴 일기. 초서와 이두체로 범벅이 되어 있는 혼란스러운 문장들이다. 역사적 사료로써의 가치가 엄청난 자료다. 그만큼 해석하기가 힘들지만, 우리는 그런 중요한 자료의 해석조차 아직 정설을 확립하지 못할 정도의 못난 자손들이다. 이유? 그거 해석한다고 돈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충무공이 절륜한 정력을 자랑하는 플레이보이였을 수도 있다. 또는
"남해 기효근이 배를 내 배 곁에 대었는데 그 배 속에 어린 색시를 싣고서는 남이 알까봐 두려워하니 가소롭다. 이같이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고도 예쁜 색시를 태우기까지 하니 그 마음 씀씀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 대장인 원 수사(원균) 또한 그러하니 어찌 하랴."
- (난중일기 중에서)
라면서 문란한 군 기강을 탄식하는 고지식한 군인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두 가지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호방한 고위 무관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란 말인가? 그게 현실이라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뿐이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그런 절절한 기록 하나 제 때 제 때 해독하지도 못하는 우리들의 찌질함이다. 돈 안 되는 일이라면 충무공이고 뭐고 관심도 없고, 도로 깔기 위해서 문화재 따위는 불도저로 밀어버리는 우리의 천박함이다.
그게 더 심각한 문제 아닌가?
그리고 끝으로, 나는 개인적으로 차라리 충무공이 호방한 플레이보이였다면 더 좋을 것 같다. 고지식한 꼰대 장군 보다야 삶을 즐길 줄 아는 로맨티스트가 구해준 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이 훨씬 더 자랑스럽지 않겠냐는 말이다.그래도 파이브썸은 너무 나갔다.
2001년 10월 23일 센프란시스코 예르바 부에나 센터 애플 키노트 발표 현장, 당시 Yahoo 등 닷컴기업들의 거품이 붕괴 중이었고 한달 전 벌어진 911 테러의 어두운 분위가 미국 전역에 지속되고 있었다.
당시 애플은 잡스가 1997년 돌아온 이래 iMac의 성공으로 서서히 회복중이었다. 1990년대 중후반 윈텔(Windows와 intel PC) 천하 아래 애플은 완전히 망했다가 1998년 ‘본디 블루’색의 반투명 일체형 데스크탑 컴퓨터 iMac을 성공적으로 시장에 선보였다. iMac은 베이지색 일색인 데스크탑 PC와 달리 디자인으로 시장의 뒤통수를 친 제품이었다.
하지만 애플의 미래는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잡스가 왔다지만 맥이 다시 컴퓨터 시장에서 주류로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또한 iMac을 어느 정도 성공했다하여도 iCEO(임시 CEO)에서 갓 벗어난 잡스에 대한 신뢰가 온전한 건 아니었다. 1년 전 2000년 7월에 야심차게 발표한 Power Mac G4 Cube가 시장에서 냉담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주류시장에서 밀려난 애플이 성공을 점칠 수 없는 맥 이외의 새로운 제품을 선보이는 것은 내, 외부적으로 매우 위험해 보였다.
그래서 일까. 2007년 iPhone이 혁명의 시작이라 자신감있게 말했던 때와 달리 2001년 10월 카리스마 대명사인 잡스는 아이팟을 소개하면서 시장에 제대로 된 제품이 없기에 ‘디자인에 자신있는 애플이 만들었다'고 소극적으로 얘기 하였다.
발표는 차분한 가운데 잡스는 10분 정도를 공들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곡을 가지고 다니면서 들을 수 있는 MP3 뮤직플레이어가 지금 현시점에서 꼭 필요한 제품임을 강조한 다음, 어디서든 들을 수 있게 호주머니에 꼭 맞는 제품(Fits in your pocket)을 애플이 만들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리바이스 501 청바지 앞 주머니에서 아이팟을 꺼내 들었다.
2. 1000곡을 주머니 안에, 아이팟
아이팟. 1000곡을 주머니 안에...
토니 파델(아이팟을 처음 설계한 사람)은 하드웨어 마케팅 책임자인 스탄 응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 새로운 제품(훗날 아이팟이 되는)을 위한 디자인 스토리를 신속하게 만들어 냈다. ‘노래를 주머니 속에’가 이 제품의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들 제품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크기와 형태였으니까요” 응의 말이다.
아이팟 제품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즉 상품 가치를 스펙이 아닌 크기와 형태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2001년 10월에 탄생한 아이팟 공식 카피는‘1,000 Songs in Your Pocket’으로 선보이게 된다.
아이팟의 특징으로‘고용량 하드디스크, 음장효과, 라디오 기능, 녹음 기능’등 기술에 상품 가치를 내세운 것이 아닌, 주머니 안에 음악을 1000곡이나 들고 다닐 수 있다는 단 1 문장으로 아이팟의 정체성을 내세운 것이다.클릭 휠 Click Wheel*을 이용한 검색의 편의성 등 음악 재생을 강조하고자 녹음, 라디오 등 부가기능은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클릭 휠 CLICK WHEEL 수 백곡을 2인치 작은 화면에서 찾기란 쉽지 않다. 기존의 조그만 플러스 버튼으로는 원하는 곡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곡 리스트를 보면서 엄지 손가락으로 클릭 휠을 휙 돌리면 원하는 곡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애플 마케팅 담당자였던 필 실러의 아이디어로 아이팟에 클릭 휠을 넣게 된다.
아이팟 가격은 $399(당시 환율로 60만원 정도)로 기존 MP3 플레이어 보다 오히려 높은 가격을 책정 했다. 애플 스스로 iPod은 최초의 MP3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현존하는 가장 가치 있는 제품이라 평했다. 제품 발표 직후 $399의 가격은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평론가들은 제품을 비판했고 제품 발표를 지켜봤던 누리꾼들은‘바보들이 우리 제품에 가격을 매겼다(Idiots Price our devices.)’라고 비아냥거렸다. 맥에서만 지원된다는 말이 더 시장을 어둡게 만들었다. (2003년 4월이 되어서야 윈도우즈 버전 iTunes가 발표되었고 그 이후 판매는 치솟게 된다.)
그러나 시장과 소비자는 아이팟 편이였고 아이폰이 나오기 이전 애플을 다시 태어나게 한 사용자들이 원하는 위대한 상품이 되었다.
3. 양복바지 호주머니의 의미
주머니를 강조한 2005년 iPod 광고
아이팟 슬로건을 보면, 이어령 교수 글 중 호주머니에 대한 문구가 생각난다.
한국의 바지에는 호주머니가 없다. 호주머니가 옷에 붙어 있느냐 없느냐는 꽤 간단한 차이인 것 같지만, 거기에는 벌써 과학적인 것과 비과학적인 사고의 갭이 놓여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옷에 호주머니를 달 생각을 하지 않고 따로 주머니를 만들어가지고 다녔다. 그러고 보면 ‘호주머니’란 말부터가 혹시 ‘호(오랑캐)의 주머니’, 즉 이방의 주머니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흙속에 저 바람속에'(이어령 저) - 한복바지, 양복바지 중>
이어령 교수 말에 따르면 옷에 기능을 더한 것(과학을 입힌 것)이 호주머니이다. 주머니가 옷 안으로 들어오자 이동의 편의성이 극대화 되고 지갑과 수첩을 넣고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호주머니 하나로 자본(지갑)과 지식(수첩)이 바지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바로 지식과 자본의 이동이 용이하게 된 것이다.
애플은 담뱃갑과 비유되는 제품의 크기와 형태를 통하여 사람의 손과 바지로 상품 가치를 결정하였다. 아이팟은 기존 바지 호주머니 영역에 문화에 까지 지평을 넓게 하였다.
물론 그 시작은 아이팟이 아니었지만.
4. 걸으면서 음악을 듣는다. Walkman TPS-L2
1979 년 소니의 첫 Walkman
개인용 모바일 휴대기기 시장을 만든 회사는 아이팟을 만든 애플이 아니다. 바로 소니다. 음악 애호가였던 소니의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는 장시간 해외출장 시 비행기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서 지루함을 달래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개인적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주변을 살펴봐도 이동하면서 간편하게 음악만 재생되는 크기가 작은 제품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1965년Musicassettes*출현으로 카세트 테이프 음반 시장은 열렸지만 모바일 음악 플레이어가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카세트 관련 제품은 Cassette Recorder로 녹음 기능을 넣은 손으로 들고 다니기 어려운 제품들 뿐이었다.
Musicassette(MC) 일명 음반 테이프로 음반회사에서 미리 녹음하여 판매하는 음악 테이프, 196 6년 머큐리 음반사(필립스 계열사)는 미국에서 처음 선 보였고, 1968년 85개 기업에서 240만 앨범 이상 판매, 70년대 후반 LP의 인기를 누르게 된다.
들고 다니기 편하도록 간단히 음악을 재생만 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하에 1979년 7월 소니는 개인이 음악을 들고 다닐 수 있는 제품 WALKMAN TPS-L2의 출시한다. 워크맨은 모바일 음악 플레이어 시장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70년대 카세트 기기는 재생보다는 녹음의 용도로 인식되어 명칭 또한 Cassette Recorder(카세트 녹음기) 이었고 Walkman 기획할 당시 소니 임원들은 녹음기능을 뺀 재생기를 누가 사겠냐며 반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료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재생기능을 충분히 즐길 것이다’하며 이부카 마시루를 지지하고 상품화 하도록 밀어붙였고 그 이름하야 카세트 플레이어 Walkman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Walkman은 녹음 등 기능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밖을) 걸으면서 음악을 듣는다.’를 내세워 개인 사용자 경험을 차별화한 제품이었다.
Cassette Tape 규격은 필립스에서 정하고 Cassette Recorder Player 또한 필립스에서 먼저 만들었지만 왕좌는 소니가 앉게 되었다. 바로 사용자가 구매하는 상품을 만든 덕분에 말이다.
5. 소니의 실패
워크맨 Walkman 상표로 4가지 다른 상품을 만든 소니 Sony. 과연 옳았을까?
1999년 음반시장은 격변을 맞이하게 된다. PC 사용자 간 음원을 공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Napster 소프트웨어의 등장으로 LP에서 CD로 안착했던 기존의 음반 시장은 삽시간에 붕괴되고 있었다. Walkman으로 모바일 음악 플레이어 시장을 만들었던 소니는 이에 속수무책이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LP 규격을 만든 Columbia 음반 회사를 인수하였는데 불법복제의 온상인 MP3로 플레이어를 만든다는 건 음반 업계(계열사 Sony Music, 음반 제작사, 아티스트 등)와 상충하는 것이었다. 또한, 소니는 1992년 MiniDisc를 선보이면서 만든 독자 규격인ATRAC*을 밀고 있었기에 MP3 음원 규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기술적이든 문화적이든 소니는 내부적으로 MP3를 재생하는 Walkman을 만들 것을 결정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ATRAC (Adaptive Transform Acoustic Coding) 소니가 독자 개발한 MP3, AAC 등과 같은 음원 규격(format) 단 MP3와 AAC(M4A)의 경우 산업표준으로 라이센스 적용이 ATRAC과 차이가 난다. 소니는 자신의 기술로 만든 독자규격인 ATRAC을 포기할 수 없었다.
소니 매니악 이었던 잡스는 Walkman의 상품가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Walkman의 가치는 라디오, 녹음 등 제품의 기술적인 기능이 아니라 걸어 다니면서 편하게 음악을 듣는 것이었고 그 것이 음악을 듣는 사용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애플은 과거 기술을 신봉하다 된통 당한 뼈아픈 기억(1편 참조)이 있었고 돌아온 잡스는 과거 기술을 버리는데 가차 없었다. 애플은 맥 이외에는 어느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도 오히려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데 득이 되었다.음반사와 저작권으로 법정에서 싸움(Apple Vs. Apple)*을 했었지만 음반사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5대 대형 음반사들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음반사가 당시 무서워한 기업은 공룡 MS였지 애플이 아니었다.
Apple Vs. Apple The Beatles가 1968년 만든 Apple Records(Apple Corps)사는 1976년 설립한 Apple Computer inc., 와 상표권으로 싸우게 되었다. 1차 싸움에서 Apple Computer inc.,가 음반시장에 진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합의 했다. 그런데 그 합의 조건은 2000년 iTunes, 2001년 iPod로인해 깨지게 된다..
그러나 80년대 도전적이고 영민했던 소니도 21세기에 와서는 내부 기술과 계열사 간 문화 갈등으로 새로운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게 된다. 잡스는 2001년 아이팟 발표 때에도 소니가 MP3 플레이어 시장에 제품 출시를 안 한 사실에 의아해 했을 정도니 말이다.
6. 상품의 가치, 편의성
워크맨 Walkman으로 1989년 시장점유율 50%를 장악한 소니 Sony
소니는 Walkman을 통하여 밖에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함으로써 모바일 음악 플레이어 시장을 개척하였다. 장시간 이동하는데 음악을 들으면서 지루함을 달래줄 수 없을까 하는 한 개인의 고민이 수억의 사용자들이 사용하는 상품으로 이어진 것이다.
애플은 iPod으로 음악 라이브러리(수천곡을 저장한다는 의미로)를 ‘호주머니 안에 넣고’ 밖에서 원하는 곡을 클릭 휠로 편하게 검색해서 들을 수 있게 하였다.
비슷한 상품을 만드는 다른 기업들이 상품 가치를 사용자의 편의성 보다는 제품 기능 유무로 생각할 때 소니와 애플은 음악 플레이어의 기본적인 요소인 ‘음악을 듣는다.’에 상품 가치를 두었다. 사용 편의성에 집중함으로써 같은 기능을 구현하는 기기가 기존에 있었을지라도 가치가 전혀 다른 상품을 만들게 되었다.
제품을 개발하다 보면 기술 본위의 사고를 하게 될 경우가 허다하다. 전자기기에서는 기술이 중심적인 차별화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술이 사용자가 원하는가는 다른 차원이다. 아니 더 직접적으로 말해서 사용자가 어떤 기능을 원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돈을 쓰면서 구매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잡스의 유명한 말 중에 '시장조사는 하지 않았다.'라고 한 말은 매우 오만불손하게 들린다. 얼핏 보면 사용자를 개무시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아이팟을 개발하면서 구현할 수 있는 기술에 집착하는 것 보다 사람의 행동을 면밀히 분석하여 손과 호주머니에 대한 고민을 하였다. 그 결과 아이팟은 음악을 듣는데 충실한 제품으로 세상에 나오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상품 가치를 기술에 두느냐 사용자에게 두냐 차이가 아닐까 한다.
최근 기사를 쓰고픈 의욕은 있었으나 쓸만한 마땅한 주제가 없어 방황하던 나에게 죽돌기자가 드디어 첫 번째 지령을 내려줬다. 약간은 유행이 지난듯한 '명량'과 인류 역사상 존재한 해전 관련 정보를 모두 긁어모아 의미를 찾아내라는(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 맞춰 뭔가 만들어 내라는)것인데 처음으로 내려온 수뇌부의 지령인지라 굉장히 신이 났지만, 다음의 이유로 인하여 상당히 주저했더랬다.
- 이미 유행이 지나버린 '명량' 떡밥
- 덕후에게 까이기 딱 좋은 주제
- 이순신 장군의 수백년된 까방권
- 나의 군사/역사 관련 지식 부족
그러나 난 쫄지 않는다. 나에겐 딴지스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잉여력과 남아도는 시간이 있지 않은가!평소 대 딴지일보 필진이라 자신을 부르기엔 부끄러운 지식의 깊이와 필력, 그리고 (한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지 않아서) 평균 이하의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나 차고 넘치는 잉여 시간 하나로 버티던 본 필자, 이번에 수뇌부에서 내린 시련(aka 욕먹기 딱 좋은 떡밥)을 견뎌내기로 했다.
그럼 뽤로 뽤로미~
한산도? 명량?
명량 해전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엔 좀 의아했더랬다. 어렸을 적 기억을 더듬어 보건 바 '이순신 장군의 해전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해전은 한산도 대첩인데, 그리고 그것이 '세계 4대 해전'에 들어간다고 들었던 기억도 어렴풋이 나는데, 왜 한산도 대첩이 아니라 명량 해전인가?'하고 말이다.
한산도 대첩이 아닌 명량해전을 영화화 한데는 아마도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이 대사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다른 말론, 아무래도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을 물리친 명량해전이 한산도 대첩보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반대로, 왜 한산도 대첩이 명량 해전보다 중요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일까? 임진왜란의 전체적 흐름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이다. 각 전투의 의미는 '얼마나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크게 무찌르느냐' 보다는 '이 전투가 전쟁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이다.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이 한산도 대첩에서 왜수군의 주력을 궤멸시킨 결과로 조선 수군은 남해안 일대의 재해권을 확보, 왜군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켜 전세를 유리하게 전환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고 한다.
"신에게는 아직...."
세계 4대 해전?
왜 명량 해전보다 한산도 대첩이 더 중요시 다루어 지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보았다. 그러면 이번엔 세계의 해전사를 한번 살펴보자.
세계 해전사의 흐름을 알기 위해 해전사는 물론 전쟁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만 갖고 있던 본 필자, 우선 네임드 전투부터 살펴보기 위해 세계 4대 해전에 대해 검색했다. (영어로) 그러나 그런 것은 없었다. 세계 10대 해전이 뭔지 투표하는 사이트만 뜰 뿐이었고, 아무 데도 세계 몇 대 해전이라 명확히 규정하는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한국 사이트의 도움을 받아 알게 된 사실.
'세계4대 해전에 한산도 대첩은 들어가지 않는다.'
엔하 위키에 의하면 세계 4대 해전은 살라미스 해전, 악티움 해전, 레판토 해전, 트라팔가르 해전이다. 서양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 해전들을 얼핏 들어봤을 것이다.
왜 한산도 대첩이 4대 해전에 들어가지 않는지 알아보기 전에 위에 나온 해전들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자. 앞서 말했듯 전투는 그 결과가 전쟁에 끼친 영향에 따라 그 중요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살라미스 해전은 페르시아의 침략에서 그리스를 구한 해전이다. 만약 이 해전에서 그리스 아테네가 패배했다면 구라파의 뿌리인 그리스 문명은 그 존립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악티움 해전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x클레오파트라 커플을 쳐부순 해전이다. 이 전투의 결과로 제2차 삼두정치가 마무리 되고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로마 시대를 마무리하고 제정 로마 시대를 열었다.
레판토 해전은 승승장구하던 오스만 튀르크를 베네치아, 제노바, 스페인 함대가 까부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서진을 하던 오스만 튀르크를 저지한 것도 있지만,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유럽 역사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게 된다. (대항해시대의 시작)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라팔가르 해전에선 영국의 넬슨 제독이 집 밖의 쥐를 굶기기 위해 대문을 걸어 잠그는 전략을 택한 (그러다가 그 전략이 멍청한 전략이었음을 깨달은) 불란서 제국의 나뽈레옹의 침략을 저지함으로써 그의 유럽 꿀꺽 야망을 저지하였다.
이렇듯 세계 4대 해전은 한 전쟁의 흐름은 물론 서양사라는 큰 강의 흐름에도 변화를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한산도 대첩은 어디에 낄 것인가? 안타깝게도 한산도 대첩은 서양사나, 세계사(종종 서양사와 동의어처럼 쓰이곤 하는)에 그다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왜 굳이?
이러한 이야기가 여러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본 필자도 이 글을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알던 진실이라 믿었던 그것이 사실은 거짓이라는데 큰 상실감을 느꼈으니 말이다. 마치 우리나라가 물 부족 국가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전부 구라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앞서 살펴본 세계 4대 해전도 사실은 딱히 근거가 없다. 원래는 세계 3대 해전(트라팔가르 해전 빼고)이었는데 영국 해군에서 트라팔가르 해전을 넣어서 4대 해전이라 가르친 것이 그 원출처라고 하는데, 어찌 되었든 이 역시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긴 힘들다.
최근 SNS에서'한 인문계 교수의 IT 상품 제안서'라는 글이 이슈가 되었다. 중국기업 샤오미의 급성장으로 입지가 불안해진 삼성에 소니의 예를 들며 충고를 하는 내용이었는데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마지막 부분이다.
그럼 방법이 없을까?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과학적인문자이다. 이 장점을 이용하면 CPU의 획기적인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다. 컴퓨터를 구동하기 위해서는운영체제(OS)가 필요하고, OS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기계어(Mechanical Language)가 필수적이며, 기계어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상용어(Commercial Language)가 필요하다. 컴퓨터의 다른 모든 프로그램 역시 상용어로 기계어를 불러내어 만들어진다. 만약 32bit CPU를 64bit CPU로 업그레이드하면서 기계어에 우리 언어의 단어들을 심어놓으면, 상용어는 거의 필요 없게 되어 컴퓨터의 속도가 몰라보게 빨라질 것이고, 시간당정보처리용량이나 속도도 크게 향상될 것이다. 이 같은 방안에 대해 일각에서는 '실용성이 없는 얘기'라는 주장도 있지만, 혁신적 사고를 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런 CPU가 개발되면 인텔이나 퀄컴은 물론이고 마이크로소프트까지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시동을 걸고 3분 후에 출발하는 자동차와 시동과 함께 출발할 수 있는 차가 있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더욱이 그 개발은특허권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아니, 높은 로열티를 받아낼특허권들을 다수 확보할 수도 있다.
다수의 IT업계 종사자들이 이 부분을 읽고는 실소를 감추지 못하곤 조리돌림을 시전하여 여기저기서 놀림을 당했다. 난 사실 IT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이 글의 문제는 바로 “한글”을 어떻게든 끼워 넣으려 한 필자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왜 문제(삼성의 부진)의 해결점이 굳이 “한글”이어야 했는가? 한글은 우수한 글자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왜 한글의 우수성을 설명하는데 “과학적이다.”라는 수식어를 섞어야 하며, 또 굳이 그것을 IT와 연관을 지었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 한글은 우수하다.
- 우수한 건 과학적이다. (과학 신봉적 사상이 깔렸다고 본다.)
- 그러니 첨단과학인 IT에 대입하자.
라는 간단한 삼단논법을 이용한 것인데, 이것은 그 교수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이루어 내지 못하였다. 비웃음만 샀을 뿐.
그리고 모두가 인지하듯, 한글을 이용한 세계 IT 시장 선도 및 삼성의 재도약은 불가능해 보인다.
세계 정복
현 정부가 '창조 창조' 하듯 YS 정부는 세계화를 부르짖었다. 현 정부 관계자 중 아무도 '창조경제'가 무엇인지 모르듯, YS 정부 당시에도 그 '세계화'가 무엇인지 몰랐다. 아! 최근 다시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전 대우그룹 소유주 김우중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세계경영이니 뭐니 하면서 그 비슷한 말을 지껄이고 다녔으니 말이다. (쓸데없이 DJ 정부 까대지 말고 추징금이나 내라)
“우리나라는 왜놈이나 떼놈처럼 침략은 하지 않는 평화로운 민족이다.”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다.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나라가 타국에 쳐들어갈 능력만 되었으면 언제든 그리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과 함께 까방권 트로이카를 이루는 광개토대왕을 봐도 그렇다. 그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저 '영토를 넓혔다.' 라는 사실이 전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이루어지지 않은 '정복의 야망'은 뜬금없이 21세기에 들어 피어나고 있다. 이것은 오히려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고 생각한다.
K팝, K드라마, K컬쳐, 그리고 K2 소총까지 K 붙은 거는 죄다 수출해서 그걸로 세계 정복을 하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물론 식민지 시대 이후 타국을 정복하는 길은 그 국가를 경제 식민지화하는 방법이 최고란 걸 미 제국이 잘 보여주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이러한 세계 정복의 야망이 수천 년간 이웃 나라의 깡패 짓에 억눌려 있던 범국민적 감정(트라우마) 표출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Do you know 강남스타일?"
눈치는 왜 봐?
이렇게 세계 정복의 꿈을 안고 세계를 향해 달려가는 우리나라는 한편으로는 눈치를 엄청 본다. 류현진이 승리라도 한 날엔 포털에 '류현진 현지 반응'이 상위권에 위치하고, 싸이가 신곡이라도 내면 '싸이 현지 반응'이 한동안 포털 실검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이렇게 전 국민이 궁금해하는 '해외 반응'은 정확히 말하면 '코쟁이 반응'이다. 즉 사대주의라는 말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다. 우린 절대 아프리카 국가들같이 우리나라보다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나라 사람들이 싸이의 신곡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다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자본의 원리에 따라 시장이 큰 미국/유럽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틀린 말이다. 시장의 크기로 보자면 중국이나 동남아 국가도 뒤지지 않는데, 중국에서 활동하는 연예인들은 그리 높게 쳐주지 않으면서, 북미에서 한인 마트나 돌며 팬 사인회를 하고 한인 타운에 콘서트 공짜표를 뿌려대던 자칭 월드스타는 금의환향하듯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서양 중심의 세계관을 비웃으면서도 한편 백인이 타 인종에 비해 우월하다는 그들의 우생학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21세기형 사대주의라 부르지 아니할 수 없다.
애국심의 올바른 방향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전투이다.
그러나 그것이 세계 4대 해전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한글을 뛰어난 글자이다.
그러나 그것이 IT산업을 선도할 필요는 없다.
류현진 선수는 훌륭한 선수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비빔밥은 훌륭한 음식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그것을 좋아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우선순위를 다른 데 두자. 세계 정복의 꿈은 그만 접고, 백인들의 눈치는 조금만 적게 보자. 본 필자가 경험한바, 코쟁이들은 사실 한국에 대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상당수의 코쟁이가 북한과 남한을 헷갈려 하고, 미디어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코리안은 싸이나 류현진이 아닌 노쓰 코리안인 김정은이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자랑스러워 하는 '외화를 벌어와 국가를 먹여 살리는 애국 기업'인 삼성, LG, 현기차는 일본이나 대만 기업으로 아는 사람이 많고, 그들도 굳이 그들이 한국 기업임을 밝히지 않는다.
그러니 종교적 신념에 가까워 보이는 애국심 대신 우리의 이웃을 보살피고, 우리의 다음 세대를 위한 일에 힘을 쏟는다면 또 모른다. 먼 미래에 우리나라가 세계를 정복할지...?(일단 각하가 대박이라고 하는 통일부터 성공적으로 이루어 내고...)
투입된 효모는 당분을 먹고 알콜과 이산화가스탄소를 생성하며, 발효과정에서 생긴 부산물로 맥주의 맛과 향에 영향을 주게 되지요.일반적으로 맥주 양조에 사용되는 효모는 순수 효모 배양법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배양된 효모인데 이때 인공 효모를 쓰는 이유는 야생 효모로부터의 간섭을 방지함으로써 양조가가 계획했던 맛을 만들고 그 맥주의 질을 균일하게 유지하기 위한 이른바 퀄리티컨트롤,그리고 대량생산을 위한 발효과정의 편리성이 가장 주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순수 효모 배양법-효모 인공 배양의 시작. 1888년 덴마크의 맥주 회사 칼스버그의 연구소 생리학과 과장이었던 에밀 한센(Emile Christian Hansen 1842-1909)에 의해 정립. 1883년 한센에 의해 최초로 인공 배양된 효모는Sacahromyces Carlsbergensis라 명명되어 그 이름에 당당히 칼스버그를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양조방법과 달리 람빅의 가장 큰 특이점은 자연 효모를 이용한 발효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맥주 양조과정에서는 효모 투입 이후 맥주가 담긴 통은 산화를 막기 위해 밀폐된 채로 발효과정을 거치는데 반해 람빅의 경우 통의 일부가 개방되어 있어서 발효장 내에 부유하고 있는 자연 효모들이 들어가 발효과정을 일으키게 되지요.
람빅의 발효에 사용되는 효모들은 브뤼셀 근교에 위치한zenne valley(젠느 계곡)의 습지에서 발견되어 Brettanomyces bruxellensis, Brettanomyces Lambicus라 명명된 것들입니다. 발효 과정에서 신맛을 만들어 내는 게 가장 큰 특징이지요. 람빅을 만드는 양조장에서는 발효장 내에 자연적으로 서식하게 한 후 발효에 이용하고 있는데 이 효모들을 잘 토닥여서 발효장 내에서 오래오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람빅 양조장만의 기술이자 노하우일 것입니다. 이들은 인공 배양법으로 배양되어 람빅 외에도 신맛을 특징으로 하는 sour계열의 발효주에 사용되기도 합니다.(어떤 람빅 양조장은 전통적인 자연 발효 방식이 아닌 인공 효모를 이용하기도 한다니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그려)
야생의 효모가 나타났다-brettanomyces bruxellensis
람빅은 보리와 밀을 사용해서 만듭니다. 밀이 들어가지만 람빅에 들어가는 밀은 발아되지 않은 것이며 그 양도30% 정도로 벨지안 윗비어와 비교하면 특성도 다르고 그 함량도 낮기 때문에 딱히 밀맥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원료 구성을 본 이후 벨기에 출신이고 밀이 들어가있으니 '벨지안 윗비어구나!'라 생각하고 마실 경우 크게 당황하실 수 있습니다.(참고 - 밀맥주 편)
대체로 sour계열의 맥주들이 그러하듯이 람빅 또한 홉을 사용하지만 그 캐릭터가 강하진 않습니다.긴 시간 발효과정을 거쳐야 하는 람빅의 특성상 부패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한여름에는 양조를 중지하기도 한다)이를 방지하기 위해 홉을 충분히 넣어줍니다.하지만,수확한 지 얼마 되지 않는 홉의 경우 쓴맛을 강하게 내기 때문에 람빅에서는 쓴맛이 나는 걸 막고자 수확 후 건조기간을 충분히 거쳐 쓴맛이 사라진 홉을 이용합니다.그런 이유로 람빅은 신선한 홉을 충분히 사용한 맥주들과 비교했을 때 홉의 특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람빅의 종류, 그리고 추천
람빅은 크게 unblended(언블렌디드), Gueuze(괴즈), Fruit Lambic(과일 람빅), Faro(파로)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unblended Lambic(언블렌디드 람빅)- 완성된 람빅은 밤나무나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포트나 셰리 배럴에 담겨져2~3년에 달하는 긴 시간의 숙성 과정을 거칩니다.이렇게 긴 시간 동안 숙성, 발효된 것들을 올드비어라 부르는데, 이 올드비어가 특별한 다른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제품화 된 것을 언블렌디드 람빅이라 부릅니다. 이 람빅은 브렛효모와 긴 발효기간이 만나 시고도 신 맛을 주요 특징으로 갖습니다. 순수하게 신맛만 뿜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어우 시다"를 내뱉지 아니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 기억과 정보가 맞다면 언블렌디드 람빅은 현재 정식 수입되는 게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Gueuze(괴즈 혹은 귀즈)- 2~3년 간의 숙성 과정을 거친 올드비어와 약 반 년 간의 숙성 과정을 거친 영비어를 블렌딩한 것으로 그 비율에 따라 정도는 달라질 수 있지만 언블렌디드 람빅과 비교했을 때 '마실 만한 시큼함'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신맛이 주를 이루지만 시큼털털, 치즈스러운 꿉꿉함, 꼬릿꼬릿, 생각 외의 청량감 등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sour계열 맥주에 아직 경험치가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섣불리 언블렌디드로 넘어가는 우를 범하지 마시고 일반적인 괴즈를 좀 더 접하신 이후에 도전하시길 바랍니다.
Fruit Lambic(과일 람빅)- 반 년 정도의 숙성을 거친 영비어에 과일을 첨가한 후 추가적인 숙성을 거쳐 람빅의 맛에 과일의 특성을 녹여냅니다. 영비어의 숙성정도와 2차 숙성기간에 따라-숙성기간이 길어지면 람빅의 특성은 커지고 과일의 특성은 줄어듭니다- 그 특성이 크게 달라질 수는 있지만 람빅의 신맛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 소비자에게 다가가기에 좋은 스타일로 여자분들이 참 좋아하더라는 정보를 남깁니다. 사용된 과일의 종류에 따라kriek(크릭-체리), framboise(프람부아즈-산딸기), pêche(뻬슈-복숭아), cassis(카시스-블랙커런트) pomme(뽐므-사과) 등이 있습니다.
Faro(파로)- 람빅에 얼음 설탕을 넣어서 만듭니다. 달콤하긴 하지만 과일의 단맛이 아닌 장난감스러운(?) 달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 맞다면 현재 국내에 정식수입되고 있는 람빅은 2개의 양조장 제품들 뿐입니다. 양쪽 다 나쁘지 않은 맥주들이지만 뭐랄까... 들어오는 제품군이 일반 소비자를 겨냥한 것들이라 맥덕후의 변태적 욕망을 가라앉히기에는 조금 모자라달까요. 그런고로 오늘의 추천은 수입되고 있는 2개 양조장의 가장 대중적인 상품인 크릭 람빅 사진만 올리고
左 린데만스, 右 생 루이
끝내면 좋겠으나 그러면 아쉬우니까 정식 수입되는 그날 마음껏 핥핥하며 추천할 칸티용 괴즈로 마무리.
*칸티용 양조장이 생산량 증대를 위해 확장 이전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퀄리티가 변하지 않기를 비나이다.
참으로 다양한 논쟁거리를 불러내고 있고, 또 우리가 인간이라는 존재를 보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꿔 온 대단한 분야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우리 '과학같은 소리하네'는 아직 이 예민한 주제에 접근한 적이 없다.
대체 왜!!??
머... 대단한 이유가 있었겠냐. 그냥 기회가 없었을 뿐.
그래서 이번에 드디어 모신다.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김대수 교수.
'생명과학'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아주 실제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필드의 과학자다. 예컨대 재작년에는 노화를 억제할 수 있는 베타-라파촌이라는 넘을 발견해서 유명 생물학 학술지에 논문이 실리기도 했는데, 이 라파 머시기는 자그마치 운동이나 다이어트 없이 세포 노화를 억제하는 물질이라고 한다. 우원이나 니들같이 무한히 게으르면서도 어쨌든 오래 살기를 바라는 잉여들을 위한 꿈의 물질인 것.
또 작년 말에는 모 대기업의 미래기술육성사업 과제로 그의 연구 분야 중 하나인 '소유욕 조절 중추 발견 및 작동원리 규명' 이 선정되기도 했다. 요거 먼가 사랑하고도 관련 있어 보이지만 여튼 굉장히 막 신경 그런 쪽의 전문적인 뉘앙스가 풍긴다.
범상치 않은 지력과 말빨이 느껴지는 그의 모습과 뒤의 비싼 기계.
조금 젊었을 때 같긴 하다.
사실 뇌과학이라고 하면 우리가 좀 헷갈리는 게, 원체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분야가 좀 넓게 여기저기 걸쳐 있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뇌과학은 어딘가 인문학에 가까운 것도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학 쪽도 같아서 뭐가 뭔지 혼란스럽다.
헌데 그건 뇌과학이 기본적으로 융합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다. 철학, 인지과학, 신경과학, 의학, 생물학 등등이 모두 뇌라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기관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게 바로 뇌과학이고, 그래서 이야기하는 톤이나 접근하는 관점도 천차만별인 게 당근인 셈.
와중에 종교계나 철학계의 반발도 있고, 적어도 우리가 보기에는 그 분야 내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갑론을박이 오간다. 철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알바 노에는 2009년 미국에서 발간된 <뇌과학의 함정 (원제 : Out of Our Heads)>에서 뇌과학의 환원주의를 나름의 관점으로 통박해 아마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의 활동으로 인간의 행동이나 감정을 해석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고 중요한 과학적, 철학적 의미를 갖는다, 고 우원은 생각한다. 특히 사랑처럼 뭔가 감정이 강하게 결부된, 그래서 ‘뇌가 아닌 내가’ 해야 할 것 같은 활동이 주제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신경과학 계통의 뇌과학자가 해석하는 뇌와 사랑이라는 이번 과소의 주제는, 그간 수시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어온 열분들에게 지대한 흥미는 물론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측면조차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니 무슨 의학강좌 같은 게 될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우리에게 신경전달 물질과 호르몬, 조건 반사 등만 줄줄이 읊을 전형적인 이공계 인물은 또 아니다. 철학과 고전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이해로 무장한, 뇌와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융합 혹은 통섭적 과제를 인문학적 시각으로도 함께 풀어줄 소양을 가진 그리 많지 않은 인물인 것이다.
또, 우원도 지난 4월 과천과학관에서 <당신이 사랑할 때 - 사랑의 과학>이라는 사이언스 버라이어티를 개최한 바 있었다. 그래서 이번 과학같은 소리하네는 그 비슷한 주제 하에서 뇌과학에 더욱 전문적인 포커스를 맞춰 필드의 과학자가 전해주는 심화된 논의의 기회가 될 거다.
울나라 과학행사 역사상 최초의 19금 공연으로
마련된 바 있었던
최근 각광받는 사이언스 북스의 <카이스트 명강> 시리즈.
그 2편의 주제도 뇌과학이고,
우리의 김대수 교수님도 합류했다.
그러니 다들 오셔야 한다는 거다. 사랑에 관심 있고 뇌에 흥미 있고, 무엇보다 니들 자신이 궁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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