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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마빡 이야기/2013

딴지일보 마빡 2013. 12. 17

by 꾸물 2021.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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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찌질한 위인전 <11> - 넬슨 만델라 (上)

 

기사 - [위인]찌질한 위인전 <11> - 넬슨 만델라 (上)

2013. 12. 17. 화요일 편집부 홀짝 지난 기사 [찌질한 위인전 <1> - 시인 김수영 (上)] [찌질한 위인전 <2> - 시인 김수영 (下)] [찌질한 위인전 <3> - 반 고흐 (上)] [찌질한 위인전 <4> - 반 고흐 (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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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7. 화요일

편집부 홀짝

 

 

 



지난 기사

[찌질한 위인전 <1> - 시인 김수영 (上)]
[찌질한 위인전 <2> - 시인 김수영 (下)]
[찌질한 위인전 <3> - 반 고흐 (上)]
[찌질한 위인전 <4> - 반 고흐 (下)]
[찌질한 위인전 <5> - 간디 (上)]
[찌질한 위인전 <6> - 간디 (下)]
[찌질한 위인전 <7>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上)]
[찌질한 위인전 <8>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下)]
[찌질한 위인전 <9> - 존 F. 케네디 (上)]
[찌질한 위인전 <10> - 존 F. 케네디 (下)]

 

 

 

 

지난 12월 5일, 전 남아공 대통령 넬슨 만델라가 타계했다. 향년 95세. 이미 지난 6월 그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생명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알려졌고, 당시 만델라의 가족들은 회의를 열어 그의 마지막을 준비했다고 한다. 한평생 인종차별 극복을 위해 헌신한 노(老) 운동가이자 정치인인 만델라는 95세라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 쪽으로 방향을 돌이켰지만 끝내 2013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만델라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이목이 순식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집중됐다. 무려 91개 국 정상과 10명의 전직 국가 수반이 영결식에 참석했다. 이는 지난 2005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을 뛰어넘는 역대 최대 규모다. 며칠간 전 세계 언론은 만델라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데에 시간과 지면을 할애했고, 장례식이 진행되는 실황을 시시각각 보도하며 추모 분위기를 전달했다. 세계는 말 그대로 슬픔에 잠겼다. 만델라의 장례 기간 동안 만큼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그 자리에 넬슨 만델라가 누워 있었다.

 

찌질한 위인전의 여섯 번째 인물.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막 걸음을 멈춘 넬슨 만델라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식민 지배의 역사

 

여느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 또한 식민 지배의 역사와 그 시작을 같이 한다. 17세기 중반(165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케이프타운 상륙 이후 본격화된 네덜란드인의 이주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위치한 아프리카 대륙의 남부 지역은 여러 아프리카 원주민 부족이 넓게 산재하여 살고 있는 땅이었다.

 

그리고 식민 지배가 시작된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식민 지배 영역을 확보하려는 정복자들과 삶의 터전을 지키려는 원주민 사이의 치열한 전투-사실상 살육이라 불러도 좋을-가 100년 이상 이어졌다. 훗날 남아프리카공화국 영토가 되는 이 지역을 처음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네덜란드 출신 백인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보어’인이라 불렀는데, ‘보어(Boer)’는 네덜란드어로 농부를 뜻한다. 이들 보어인의 후손을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들이 남아프리카 지역에 최초로 정착한 백인’원주민’이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출신으로서 네덜란드어를 사용했던 보어인들은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남아프리카에 정착하여 오랜 세월 살면서 네덜란드 본국어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언어의 변천을 겪게 된다. 아프리카너들이 사용하는 이 언어를 아프리칸스어(Afrikaans language)라고 부르며, 지금도 아프리칸스어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용어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18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남아프리카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식민 지배의 패권이 네덜란드에서 영국 제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남아프리카에 상륙한 영국은 이미 1세기 앞서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보어인들을 북쪽으로 밀어내고 영향력을 점차 확장시켜 나간다. 이에 맞서 보어인들은 남아프리카 지역 내에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을 건설하여 영국과 대립한다.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 국기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와 오렌지자유국의 접경 지대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고, 트란스발공화국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면서 사태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영국이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을 침공한 것이다. 보어전쟁이라 불리는 이 전쟁은 1899년에 발발하여 1902년에 그 끝을 보는데, 결과는 끝까지 저항한 보어인들의 처참한 패배였다. 승자인 영국은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을 영연방에 병합하면서 남아프리카 전역을 제국의 깃발 아래 두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남아있는 보어인들과의 공존을 꾀하기도 한다.

 

이미 17세기부터 백인들에게 삶의 터전을 빼앗긴 남아프리카의 흑인 원주민들이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부족 차원의 국지적 저항은 이어나갔지만 이는 오히려 더 큰 피의 보복을 부를 뿐이었다. 보어인들에게 짓밟힌 삶의 터전에서, 이제는 서로 다른 백인들 사이에 일어난 전쟁의 틈바구니에 갇힌 흑인 원주민들은 그들의 땅과 부족이 유린 당하는 꼴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보어인이 지배하든, 영국인이 지배하든, 보어인과 영국인의 싸움에서 누가 이기든 간에 흑인 원주민들의 지위는 어차피 가장 아래였다. 백인들이 멋대로 갈라놓은 문명과 야만의 구분으로 인하여 그들의 검은 피부 위에 야만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야만’의 원주민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아프리카 대륙에서 살아오면서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다이아몬드와 황금 때문에 ‘문명’의 백인들은 서로를 살육했다. 원주민들은 너무나 야만적이어서 황금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고 때문에 저들이 왜 그렇게 악착같이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21세기가 된 지금,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광산은 여전히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이제는 ‘문명화’된 흑인들은 이제 그곳에서 몇 푼 안 되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들의 하루를 바친다. 예전에는 문명의 발굽 아래 짓밟혔던 이들은 이제는 자본의 발굽 아래 목숨을 잃고 있다. 2012년,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대규모 광산 파업으로 인해 진압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 45명이 사망했다. 아무튼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문명의 야만 정복은 남아프리카도 예외가 아니었다.

 

 

 

 

 

[독투불패]어쩌다 보니 혁명 - 프랑스 혁명 5

 

기사 - [독투불패]어쩌다 보니 혁명 - 프랑스 혁명 5

2013. 12. 17. 화요일 에헤이대략난감 지난 기사 [어쩌다 보니 혁명 - 프랑스 혁명 1] [어쩌다 보니 혁명 - 프랑스 혁명 2] [어쩌다 보니 혁명 - 프랑스 혁명 3] [어쩌다 보니 혁명 - 프랑스 혁명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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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2. 17. 화요일

에헤이대략난감

 

 

 



지난 기사

[어쩌다 보니 혁명 - 프랑스 혁명 1]
[어쩌다 보니 혁명 - 프랑스 혁명 2]
[어쩌다 보니 혁명 - 프랑스 혁명 3]
[어쩌다 보니 혁명 - 프랑스 혁명 4]


 


지금까지 이야기 -편집자 주

루이 16세 치하에서 대책없는 귀족들과 왕실 때문에 X꼬가 째지는 생활을 감내하던 백성들은 급기야 왕궁과 바스티유 감옥으로 진격하고, 어쩌다보니 성공(?)해버린 혁명의 운전대를 쥐게 된 자들 또한 가난하고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별 신경을 쓰지않는다. 뭐만 했다하면 일이 꼬이는 루이 16세, 그리고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뭐만 터지면 관심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는 정치인들. 안 그래도 졸라 정신없는 상황 속 혼돈의 프랑스에서는 힘있는 놈, 힘있고 싶은 놈, 가진 건 돈 밖에 없는 놈 등 별의 별 놈들로 인해 온갖 시바스러운 일들이 잔뜩 벌어지다가 결국은 왕 모가지는 날아간다. 왕이 없는 프랑스, 사자 없는 곳에 똥개들이 서로 아우성치고, 여러가지 전쟁과 전투가 벌어지며 영웅인 듯 아닌 듯한 인물들이 여럿 나타나는데...

 

 

 

13.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테르미도르의 반동(1794년 7월 28일)으로 불리는 쿠데타로 인해 끝을 맺는다. 로베스피에르는 쿠데타 전날에도 뜬금없이 의회에 나와 반혁명파의 숙청하겠다는 위협 발언을 했다. 예고 홈런도 아니고 예고 숙청이라니 아무래도 인간이 갈 때까지 간 상태였던 모양이다. 쿠데타는 한 순간이었으며 살아있었다면 한편이 되어 줄 수도 있었을 에베르파까지 숙청한 로베스피에르는 코뮨의 도움도 얻지 못한 채 허무하게 무너졌다.(인과응보인가?)

 

쿠데타 직후 가담자 중 한 명인 공안위원회위원 바래르는 의회에 나가 조국을 위한 거사였음을 밝힌 뒤 남부 피레네 주에서 올라온 승전 소식을 보고하였다.(엥??) 전쟁의 승리를 같이 엮어 보고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쿠데타에서 멀어지게 해보려는 얄팍한 언론플레이였다. 정말 눈가리고 아웅인 얄팍한 언론플레이까지도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는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철새정치의 선구자 베르트랑 바래르

 

혁명가이자 사상가인 그는 정치판에서는 철새종결자였다. 삼부회 때에는 미라보 후작 따까리 노릇하다 미라보가 사망하자 바이이를 따라다녔으며 바이이가 실각하자 남은 제헌의회 기간 동안 의장 노릇을 했다. 국민공회 때 다시 의원이 되었고 공포정치 때 공안위원회 위원이었다. 즉 이때는 권력의 가까이에 있던 인물이다. 하지만 뻔뻔하게도 테르미도르 반동 때 쿠데타에 가담했다. 그러나 결국엔 로베스피에르와 같이 공안위원회였는데 왜 처벌받지 않느냐는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사면받아 나폴레옹의 딸랑이 노릇을 한다. 그럼에도 나중에 나폴레옹이 패배하여 앨바섬으로 유배가자 왕당파로 변절을 맹세한다. 나폴레옹이 앨바섬에서 탈출하자 얼른 나폴레옹의 딸랑이로 되돌아갔으며 나폴레옹이 백일 천하로 끝나자 자기도 다시 왕당파로 돌아가려다 거부당해 한참 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헉헉 길다.)

 

쿠데타 이후 국민공회에 의해 자코뱅은 해산당하였으며, 공포정치로 숙청되었던 지롱드는 찌끄러기들이 다시 모여 재결성되었다. 또한 코뮨은 지속적으로 감시되었다. 테르미도르의 반동과 함께 완전히 사라져버린 방토즈 법(3편에서 말한 반혁명파의 재산을 몰수해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기로 약속한 인기정책이다. 로베스피에르의 집권시기에서조차 실행되진 않았지만 말이다.)에 여전히 미련을 가진 빈민이 많았기 때문에 코뮨의 반발이 언제 있을지 몰랐다. 요즘이라면 난리 났을 민간인 사찰을 대놓고 했다. 공포정치의 종식이라더니 지배층에게만 그렇고 민중에겐 그렇지도 않았다.(에휴~그럼 그렇지.)

 

사람들이 가끔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국민공회 = 자코뱅 = 로베스피에르 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국민공회 > 자코뱅 > 로베스피에르 정권이다. 국민공회는 그때 의회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자코뱅은 국민공회의 여당이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에 가입해있었다. 집권 자코뱅당 로베스피에르 내각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므로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당이 없어졌다고 국민공회가 없어지는 일은 없다.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의 실각 이후에도 계속해서 프랑스를 통치해 나갔다. 다만 권력의 아성이었던 공안위원회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어 원래의 역할인 군사와 외교만 담당하게 되었다. 안보에 관한 것은 안전위원회에 이관되었다.

 

공포정치 시기에 시행되었던 것은 대부분 폐지되어 버렸다. 그중에서도 물가상한제는 전격적으로 철폐되었다. 공포정치 시기 말에 부자들이 하도 경제가 안좋다는 언론플레이를 하며(근데 경제가 좋았던 적이 있던가?) 징징 짜길래 로베스피에르도 부자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임금을 제외한 물가상한선을 좀 높여준 적이 있었다. 그러자 물가는 즉시 상한선까지 폭등하였다. 임금은 오르지 않았는데 다른 물가만 갑자기 올랐으니 국민의 생활고가 어떻게 되겠는가? 로베스피에르의 인기는 여기서도 바닥을 쳤고 그가 몰락할 때 코뮨의 도움을 받지 못한 또 한 가지의 이유였다. 정치가의 인기는 참으로 즉물적이었다. 반대파들이야 그에게 역습을 가할 기회가 생겨 기뻤겠지만 말이다. 그랬던 전적이 있는 물가상한제를 이번엔 후폭풍에 대한 대책도 없이 전격적으로 철폐하고 본 것이다. 당연히 물가가 미친듯이 뛰었다. 생활 물가가 약 200퍼센트가 뛰었다고 계산하는 사람도 있고 약 800퍼센트가 뛰었다고 계산하는 사람도 있다. 간단히 말해 제대로 계산도 안될 만큼 폭등했다. 또다시 빈민들은 센강에 뛰어들기 시작했고, 물자를 장악하고 있던 기득권층들은 인플레로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ㅆㅂ)

 

기득권층을 위한 기득권층에 의한 정책에 분노한 민중들은 다시 들고 일어났지만(1795년 4월 제르미날 봉기, 5월 프레리알 봉기) 지배층들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이를 번번히 진압할 수 있었다. 이렇게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국민공회의 인기는 바닥을 모르게 떨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 회기의 마지막에 그 끝을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났으니 ‘방데미에르의 봉기’였다.(1795년 10월 5일)

 

단두대

살벌하게 생겼다. 시험삼아 목 넣어 보신분? ㅎㄷㄷ

 

원래는 왕당파(?)의 반란으로 시작된 사건이었다. 이 반란은 국민공회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국민공회는 앞서 말한 4월의 제르미날 봉기와 5월에 있었던 프레리알 봉기와 엮어서 자코뱅의 잔당들을 마저 숙청한 뒤 8월 선거를 치렀다. 그런데 선거 결과가 최악(?)이었다. 기존 의원들이 대거 낙선하고 민중의 지지를 받는 의원들이 대거 의회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3분의 2가 넘는 의원들이 물갈이가 되었다. 선거에서 참패를 한 것이다. 당연한 결과였다. 민생을 등한시하고 노골적으로 기득권층만 챙겨주는 정책을 폈으니 말이다. 비상사태를 맞은 국민공회. 결코 해선 안될 짓을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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