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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마빡 이야기/2014

딴지일보 마빡 2014. 09. 12

by 꾸물 2021.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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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무죄인듯 무죄아닌 무죄같은 유죄판결

 

기사 - [정치]무죄인듯 무죄아닌 무죄같은 유죄판결

2014. 09. 12. 금요일 벨테브레 연휴가 끝나 허탈한 가슴에 담뱃값 2천 원 인상이라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겹쳐 애연가들의 빡침을 유발했던 어제 9월 11일. 예상은 했지만 받고 보니 더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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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12. 금요일

벨테브레

 

 

 

연휴가 끝나 허탈한 가슴에 담뱃값 2천 원 인상이라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겹쳐 애연가들의 빡침을 유발했던 어제 9 11. 예상은 했지만 받고 보니 더 황당한 판결 하나가 금연 7년 차인 필자에게도 담배 사재기를 고민하게 만들었으니,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의 1심 판결이 그것이다.

 

 

작년 6월 공직선거법과 국가정보원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던 그는, 7월에는 개인비리 혐의로 구속되는 연타석 홈런을 맞으며 두 가지 재판을 동시에 진행해야 했다. 더 놀라운 건 뒤늦게 기소된 개인비리 혐의에 대해선 이미 대법원에서 3심이 계속 중인 가운데 2심에서 선고된 잠정 형기인 징역 1 2월을 모두 복역하여 사실상 만기 출소한 다음이라는 것. 반면에 먼저 기소된 대선개입 의혹 사건은 1 3개월이 지나서야 가까스로 1심 재판이 끝났으니, 역전당한 것도 모자라 진도가 한참 벌어진 셈이다. 보아하니 대법원까지 갈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과연 현 정부 임기 안에 마무리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결과는 다들 아는 바와 같이 공선법 위반은 무죄, 국정원법 위반은 유죄로 징역 2 6월에 집행유예 4년이라는 무죄인 듯 무죄 아닌 무죄 같은 유죄 판결. 대선 당시 그리고 작년 내내 정국을 떠들썩하게 들었다 놨다 했던 핵폭탄급 이슈였던 걸 생각해보면, 그 최고 책임자에 대한 결론치고는 조금 시시한 느낌이랄까. 실제로 댓글을 다는 등 대선 정국에 참전했던 국정원 직원 대다수가 상관의 지시에 복종한 것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기소유예 등 선처를 받은 걸 생각해 보면 끝판왕 대접이 영 시원치 않다.

 

 

사실 필자는 약 50일 전인 7 22일경에 이미 원세훈이 최소한 법정구속을 당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촉이 왔다. 이날 개인비리 사건 2심 판결에서 징역 1 2월이 선고되는 바람에 원세훈은 9 9일 자정을 기해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대선개입 의혹 사건의 1심 판결이 9 11일에 선고된다는 걸 알고 있던 재판부에서, 1 2월이라는 자주 보기 힘든 형량(1년 이상의 징역형은 6개월 단위로 맞추는 것이 일반적)을 맞추어 하필이면 선고 이틀 전에 석방되도록 배려(?)한 것이다. 대한민국 법원이 아무리 야박하더라도 감옥에서 나온 지 이틀 된 사람에게 다시 콩밥을 먹이는 건 가혹한 일일 것이기에, 이 판결은 대선개입 의혹 사건이 재판부에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공선법 위반이 유죄가 될 경우 무려 국가기관의 조직적 대선개입을 사주한 최종 보스가 되는 원세훈에게 집행유예란 불가한 일. 물론 집행유예 없는 징역형을 선고하더라도 방어권 보장 등의 이유를 들어 법정구속을 하지 않으면 된다. (오히려 구속할 경우 최대 6개월인 구속기간 내에 항소심 재판을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ㄷㄷㄷ) 그러나 그보다는 역시 무죄판결이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만일 법원에서 국정원 차원의 조직적 대선개입을 인정한다면 지난 대선은 물론 그 결과로 출범한 정부의 정통성에까지 흠집이 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한 바와 같다. 정부·여당이 이 사건의 쟁점화를 어떻게든 막으려 한 것이나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공직선거법 적용을 한사코 반대했던 점 또한 이 같은 이유를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2년 가까이 지난 이 시점에서 대선을 무효화하는 건 현실적으로나 법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뒤늦게나마 '태생부터 관권선거로 출범한 정부' 딱지를 붙이는 건 법원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웠을 게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들이 대선 기간에 트윗을 날리거나 댓글을 다는 방법으로 대선 정국에 참전했던 것은 엄연한 사실로 드러났기에, 이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감정에 반하는 일. 그리하여 '정치에는 개입했지만, 선거운동을 한 것은 아니다'는 논리가 등장했다. 형사판결은 아니지만, 이 논리가 적용된 유명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헌법재판소에서 행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이 그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 2 18일, 경인지역 6개 언론사와의 기자회견에서 "개헌저지선까지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는 저도 정말 말씀드릴 수가 없다" 고 발언하였고, 6일 뒤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대통령 기자회견에서는 "국민들이 (열린우리당을압도적으로 지지해 주실 것으로 기대한다.", "대통령이 뭘 잘해서 열린우리당에 표를 줄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정말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 "대통령을 노무현 뽑았으면 나머지 4년 일 제대로 하게 해 줄 거냐 아니면 흔들어서 못 견뎌서 내려오게 할 거느냐는 선택을 우리 국민들이 분명히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다가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 및 선거운동 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다른 여러 이유와 함께) 탄핵소추를 당하였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위와 같은 대통령의 발언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무에는 위반된 것이나, 선거운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취지로 판시하였다. 특정 후보의 당선 또는 낙선에 대한 '목적성'이나 '능동성', '계획성'을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선거운동은 아니라는 것.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원세훈 판결과 매우 비슷한 구조이다. 선거운동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목적성, 능동성, 계획성을 든 것도 유사한 대목. 모르긴 몰라도 결론을 내리고 논리를 구성하는데 헌재 결정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싶다.

 

출처 - 조선일보

 

 

 

 

 

[독투불패]선거에 관여해도 공직선거법으로는 무죄를 쟁취할 수 있는 방법

 

기사 - [독투불패]선거에 관여해도 공직선거법으로는 무죄를 쟁취할 수 있는 방법

2014. 09. 12. 금요일 정치불패 porklover 편집부 주 이 글은 정치불패에서 납치되었으며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 21부의 어떤 판결에 관한 기사 문면을 검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0. 서론 사진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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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12. 금요일 

정치불패 porklover

 

 

 



편집부 주

이 글은 정치불패에서 납치되었으며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 21부의 어떤 판결에 관한 
기사 문면을 검토하여 작성되었습니다.


 

 

 

0. 서론

 

사진속의 남성은 아래 내용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이 한몸 바쳐 정권재창출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모 기관장님들을 위한 글이다. 그러므로 모 기관에 취업할 생각이 없는 일반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력을 쌓아 모 기관장까지 하게 될 경우, 당신의 정권재창출 및 이후의 보신에 크게 도움이 될 만하다고 자부한다. 정권재창출에 공헌하여 호의호식하고 잘 살아보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지고 있다면, 일독을 권하고 싶다.

 

당신이 종북좌빨을 척결하느라 시간이 없다면, 내가 세 줄 요약까지 해주기는 좀 귀찮고... 각 꼭지의 제목만 명심하더라도 충분하다. 다만, 그렇게 할 경우 '이 글만 믿고 있다가 콩밥먹게 됐다' 는 식으로 말해봐야 난 콧구멍이나 팔 테니까, 어지간하면 국가를 위해 분골쇄신하시느라 바쁘더라도, 좀 다 읽길 바란다.

 

 

 

1. 부하직원들은 생각이 깊은 사람들로 두어야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꼬봉이다

 

재판부는 검찰이 주요 증거로 제시한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과 이슈 및 논지 어디에서도 대선 개입을 지시한 내용은 없었다고 봤다.

(전략) 특히 11월에는 선거에 불필요하게 연루되지 않게 각별히 유의해달라는 발언까지 했다고 설명했다.

 

당신이 술 한잔 하다가 불현듯 "마담 홍" 하고 평소 연모하던 룸살롱 새끼마담의 이름을 되뇌였다. 그런데 더듬이가 정치적으로만 과대발기한 아랫것들이 "바람 풍"하고 알아들어서 북풍이나 카트리나, 셀마가 불어닥쳤다. 그런 상황이라도 내가 평소에 홍 마담을 연모해왔다는 증거가 쌓여있으면 선거개입의 고의는 인정되지 않는다. 누가 그랬냐고? 재판부가.

 

물론 그 자리까지 올라가셨는데, 아랫것들이 정치적인 감각이 없을 리 전무하다. 언제나 눈치빠르게 윗 분의 심중을 알아서 잘 헤아려왔기 때문에 당신의 바로 밑 포스트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겠지. 그러나 만사불여튼튼이라고, 당신이 '마담 홍' 하고 말했을 때 진짜 당신이 홍 마담의 속살이 그리운 것이라 판단하고 엄하게 당신을 홍 마담네 룸살롱에 모시는 눈치없는 부하들을 둔다면, 당신은 잘 말아드시는 형님이나 울보 누님의 사랑을 받을 길은 요원하다.

 

당신이 굳이 '홍 마담' 하고 말하지 아니하고, '마담 홍' 이라고 이야기한 이유를 고민할 수 있는, 생각이 깊은 부하직원을 두어야 한다. '특히 11월에는 선거에 불필요하게 연루되지 않게 각별히 유의해달라'고 이야기한 이면에 '10월 말까지는 쌩 난리를 쳐도 아무 지장없다' 내지는 '11월 이후라도 우리가 연루되었다는 것만 부인할 수 있으면 역시 지장없다' 는 언외언을 읽어낼 수 있는 부하직원들이 절실하다. 이러한 부하직원이 없다면, 선거에 개입하는 건 포기해라. 물론, 호의호식하면서 홍 마담의 허벅지를 주무르는 것도 포기해야겠지만.

 

 

 

 

 

[이슈]애플의 혁신은 처음부터 없었다

 

기사 - [이슈]애플의 혁신은 처음부터 없었다

2014. 09. 12. 금요일 퍼그맨 9월 10일 새벽, 애플은 신제품 발표회를 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올 줄 알았던 게 나온다. 4.7인치 아이폰과 5.5인치 아이폰, 스마트 워치 그리고 혁신은 없었다는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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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12. 금요일

퍼그맨 

 

 

 

 

9월 10일 새벽, 애플은 신제품 발표회를 연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올 줄 알았던 게 나온다. 4.7인치 아이폰과 5.5인치 아이폰, 스마트 워치 그리고 혁신은 없었다는 언론 보도까지. 

 

매번 기대하고 실망하고 매일 똑같은 언론 보도를 보며 지겨워하는 것의 반복이 명랑 사회 이룩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판단 하에 펜을 함 들어보고 싶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플은 병신된 게 아니며 망할 징조를 보이는 것도 아니다. 애플의 혁신은 의무가 아니라 장사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니, 본 기레기는 아예 '애플의 혁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노라' 선언하고 싶다. 이번 발표를 두고 '애플이 안드로이드 폰을 따라 했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이 반증이다. 애플은 왜 안드로이드를 따라 하는 처지가 되었는지 살펴보면 우리가 기대했던 '애플의 혁신', 그것의 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는 거다. 

 

 

 

애플은 왜 안드로이드의 팔로워가 되었나 

 

아이폰은 2007년 세상에 등장한 후 수많은 휴대폰 제조사들의 목표가 되었다. 감압식 터치스크린은 하나둘 정전식으로 교체되었으며 핀치 줌 등을 통해 화면을 확대, 축소할 수 있게 함은 물론, 온라인 마켓을 통해 어플리케이션의 제작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날 수 있게 하는 것을 포함해 심지어 디자인까지 베껴댔다. 그러나 그들은 미숙했으며 삼성의 옴니아, LG의 안드로1 등 초기 모델들의 결함으로 인한 무수한 소비자 불만을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 7년이 지나는 동안 둘의 위상은 사뭇 달라져 버렸다. 애플이 역으로 안드로이드폰을 벤치마킹하고 있는 것이다. 멀티태스킹이 처음 지원되던 순간부터 그 기미가 보이나 싶더니 iOS7에서는 제어센터와 앱 종료하기 방식, 심지어 OS 특유의 아이콘 디자인이나 바탕 테마의 알록달록함에서도 안드로이드의 데자뷰가 느껴졌다. 잡스가 그렇게 비난하던 7인치대 타블렛을 새로이 제품군에 추가한 데다가 최근에는 한 손에 들어가는 크기라 자랑하던 가로 길이(세로 길이는 한 번 길어졌으므로)를 포기한 아이폰6를 발표해 안드로이드 팔로잉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안드로이드폰에 비해 부족해 보이는 부분도 있다. 아이폰6+는 베젤을 줄이지 못해 같은 크기의 화면을 채택한 경쟁 기기보다 가로, 세로 길이가 커져 버렸다. 카메라 화질은 좀처럼 업그레이드되지 못하고 있으며 기타 하드웨어 사양 역시 경쟁 모델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지만 가격 경쟁력에서마저 밀리고 있다. 

 

 

안드로이드 진영의 폰들이 내세우는 건 하드웨어 스펙 밖에 없더라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다. 버전이 바뀔 때마다 극적인 변화를 보여줬던 안드로이드는 소프트웨어에서도 애플의 iOS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고 있다. (최적화나 즉각적인 터치감, 색 재현 등은 아직 멀었지만) 킷캣에서부터 선보인 'OK 구글' 명령 인식 기능은 버튼을 길게 눌러야 하는 '시리'와 비교해 접근성도 좋으며 음성 인식률도 높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올 땐 자동으로 검색하여 이름을 띄워주는 기능도 주목할 만하다. 구글맵에 등록된 기업 번호만 대응된다지만 모르는 번호에 이름이 표시되어 나오다니, 이건 많은 사용자가 바라던 기능 아닌가. 

 

그러나 안드로이드 폰들의 이런 변화들을 혁신이라 소리 높여 칭송하는 이들은 적다. 애플이 따라 했고 앞으로 따라 할 것으로 보이는 기능들을 선보였다 해도 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겠다. 하나는 안드로이드 진영이 다수의 기업들이 뭉쳐있는 형태이기에 애플보다 브랜딩이 어렵다는 것, 또 하나는 수많은 삽질 끝에 제대로 된 거 몇 개 건지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이유는 다시 하나의 단어로 설명이 된다. '오픈'이다. 

 

 

 

 

 

 

[위인]찌질한 위인전 <22> - 어니스트 헤밍웨이 (下)

 

기사 - [위인]찌질한 위인전 <22> - 어니스트 헤밍웨이 (下)

2014. 09. 12. 금요일 편집부 홀짝 지난 기사 [찌질한 위인전 <1> - 시인 김수영 (上)] [찌질한 위인전 <2> - 시인 김수영 (下)] [찌질한 위인전 <3> - 반 고흐 (上)] [찌질한 위인전 <4> - 반 고흐 (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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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9. 12. 금요일

편집부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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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 <1> - 시인 김수영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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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 <17> - 허균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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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 <19> - 스티브 잡스 (上)]
[찌질한 위인전 <20> - 스티브 잡스 (下)]
[찌질한 위인전 <21> - 어니스트 헤밍웨이 ()]

 

 

 

세 번의 이혼, 네 번의 결혼

 

어니스트는 대작을 쓸 때마다 새 여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F. 스콧 피츠제럴드

 

헤밍웨이는 첫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과 1921년에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폴린 파이퍼(1927), 마서 겔혼(1940), 메리 웰시(1946)까지 네 명의 여성과 결혼했다. 헤밍웨이의 결혼과 이혼에는 몇 가지 공통점과 반복되는 패턴이 있는데, 그는 현재의 부인과 이혼하기 전 이미 다음 결혼 상대와 연인 관계에 있었으며 첫 번째 부인 해들리를 제외한 나머지 셋(불륜으로 시작된 관계)은 모두 헤밍웨이와 처음 만날 당시 기자 신분이었다.

 

앞선 두 번의 결혼 상대자인 해들리와 폴린은 헤밍웨이보다 연상인데다 헤밍웨이의 집필 활동을 지원해줄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해들리는 세상을 떠난 부모에게서 상속받은 재산이 있었고 폴린은 재력가 집안의 딸이었다. 반면 마서 겔혼과 메리 웰시는 모두 헤밍웨이보다 연하였고 그들과 결혼할 당시의 헤밍웨이는 이미 작가로서의 명성과 함께 그에 못지 않은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앞서(상편) 밝혔듯이 헤밍웨이는 20대 초반에 전장에서 만난 애그니스에게서 배신-헤밍웨이의 자의적 판단이지만- 당한 후 평생 동안 배신과 외로움을 당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가 이혼하기 전 이미 다음 결혼 상대자와 불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919년에 애그니스와 결별한 뒤 1921년 스물셋의 나이로 첫 번째 부인인 해들리와 결혼한 후 1961년 사망할 때까지 평생 단 한 순간도 완전하게 홀로 남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해들리 리처드슨 부부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불륜의 시발점이자 주요 무대가 된 곳이 전쟁과 사냥여행 등 평소 그가 매혹되었던 위험의 현장이었다는 것이다. 평전의 저자 제프리 메이어스에 따르면 헤밍웨이가 전쟁과 육체 활동 매혹되었던 것은 그것이 헤밍웨이에게 있어 가장 큰 불안요소라 할 수 있는 여자를 제거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헤밍웨이에게 전쟁이 불륜의 현장이었다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헤밍웨이에게 여성은 가장 큰 불안요소였지만 외로움은 그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집필 중에는 성관계도 자제할 정도의 헤밍웨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여인과의 사랑이야말로 헤밍웨이가 가진 창작열의 원천이었다. 헤밍웨이는 해들리를 만나고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를 완성했으며 폴린을 만난 뒤에는 <무기여 잘 있거라>, 마서와 메리를 만나고 있을 때 각각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를 썼다. ‘헤밍웨이는 여인과 사랑이 빠질 때 대작이 나온다는 피츠제럴드의 견해는 그 당시의 헤밍웨이에게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헤밍웨이는 지적이고 활동적인 여성에게 끌렸다. 해들리 이후 헤밍웨이와 결혼한 세 여자의 직업이 모두 기자였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그러나 헤밍웨이는 막상 불륜 상대자와 결혼하고 난 뒤에는 아내가 된 그들에게 집안과 아이를 돌보는 가정적인 역할을 강요했다. 장시간 집을 비우고 위험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헤밍웨이에게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안정적인 가정이 필요했다. 그리고는 다시 현장에서 만난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뿐만 아니라 불륜의 상대를 가족 앞에 데리고 나타나 아내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헤밍웨이의 불륜녀 앞에, 본의 아니게 집안을 돌보는 가정주부가 다 된 그의 아내들은 상대적으로 초라함을 느끼고, 절망에 빠졌다.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진 헤밍웨이는 아내에게 온갖 모욕적인 언사와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그의 아내는 어떻게든 가정과 부부관계를 지키려 애쓰다 결국 헤밍웨이의 뜻대로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해들리가 집에 있을 때 헤밍웨이는 밖에서 폴린 파이퍼를 만나 그렇게 해들리를 괴롭히다가 폴린과 결혼하여 그녀를 집에 들어앉혔, 폴린이 집에 있을 때에는 밖에서 마서 겔혼을 만나 같은 상황을 반복했다.

 

이혼 과정에서 헤밍웨이가 아내에게 보인 잔인하고도 치졸한 모습은 부부 관계를 정리하고 나서도 계속되었다. 헤밍웨이의 인간관계 전반에서 발견되는 책임 전가의 행동 양상이 여기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헤밍웨이는 아내가 자신을 떠나가게 만들어 놓고는 이혼을 하고 나자 오히려 자신이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처럼 반응했다. 이혼의 책임을 떠나간 아내에게 돌리면서 피해자 행세를 하는 한편 공개적으로 전처를 공격했던 것이다. 심지어 버림받은 아내에게 창녀 같은 여자라고 욕하는 헤밍웨이의 모습은 간통으로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남자의 행동치고는 지나치게 뻔뻔했다.

 

그의 적반하장은, 때로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당당해서 더욱 기가 막혔다. 마서 겔혼과 바람난 헤밍웨이가 그것도 모자라 아예 폴린과의 부부 관계를 청산하려 하자 이에 격분한 폴린 파이퍼는 헤밍웨이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헤밍웨이가 보인 반응이 압권이었다. 유부남이었던 자신을 만나 해들리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폴린이 마서 겔혼에 의해 같은 일을 당하게 된 것은 결국 그녀의 자업자득이라는 것이었다.

 

결혼 당시의 헤밍웨이와 폴린

 

반면 마서 갤혼은 헤밍웨이의 다른 아내들과는 다른, 새로운 양상의 갈등을 빚어냈다. 헤밍웨이가 처음으로 맞이한 연하의 아내였던 마서는 애초에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헤밍웨이가 강요하는 가정에 충실한 아내 역할을 마서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끝까지 기자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다. 마서의 그런 모습에 끌려 사랑에 빠진 헤밍웨이였지만 막상 그녀가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자 부부 관계는 금세 위기에 빠졌고, 이번에도 헤밍웨이는 그 원인을 모두 마서에게로 돌렸다. 따지고 보면 헤밍웨이가 겪었던 세 번의 파경 가운데 그나마 마서 겔혼과의 불화가 원인 제공의 측면에서 가장 덜 일방적이기는 했다. 덕분에 그녀는 이혼 후에도 헤밍웨이의 다른 전처들보다 더 가혹하고 악의적인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마서 겔혼 또한 지지 않고 그런 헤밍웨이에게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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