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태 전 국회의장. 6선 국회의원에 한나라당 대표를 지냈으며 현재는 새누리당의 상임고문이자 건국대 로스쿨의 석좌교수를 맡고 있다. 이중국적을 지닌 딸의 이화여대 특례입학 파문으로 법무부장관에서 열흘 만에 낙마하였고 전당대회에서 당협위원장들에게 돈 봉투를 돌리다가 불명예스럽게 정계를 떠나는 등 흑역사도 있었지만, 폭탄주의 원조이며 명 대변인으로서 정계에 나름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라 하겠다.
그러나 비슷한 연배의 서울대 동문들이 대통령 비서실장, 주일대사, KBS 이사장 등으로 승승장구하는 사이 잊혀진 인물이 되어버린 박희태. 역사 속의 인물인줄 알았던 그가 실시간 검색어로 돌아왔다. 문제는 뜬금없이 뉴스를 탄 이유가 성추행 의혹 사건이라는 것.
이 손가락으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추석 연휴 직후인 9월 11일 강원도 원주에 위치한 어느 골프장에서 법조계 지인들과 라운딩을 하던 박희태는 20대 여성 캐디에게 신체 접촉을 했고, 불쾌감을 느낀 해당 캐디는 라운딩 도중에 교체를 요청했다고 한다. 결국 박희태는 고소 크리를 당하게 되었고 조만간 강원지방경찰청에 소환 조사를 당할 거라는 이야기. 얄궂은 것은 강원지방경찰청에서 수사하는 사건의 경우 일반적으로 춘천지검이 관할하는데(박희태의 주소지나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이송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박희태는 한때(1983~1985) 춘천지검장을 역임한 대선배라는 것. 전임 제주지검장이 공연 음란 혐의로 제주지방경찰청→제주지검의 수사를 받고 있는 점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비추어 확정판결이 나지 않은 사실관계에 대해 단정적으로 언급하는 건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특히 명확한 물증을 찾기 힘든 강제추행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진술만을 근거로 처벌되는 이들도 적지 않기에, 억울하게 처벌받는 이들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원로 법조인으로 로스쿨 석좌교수가 될 정도로 권위 있는 법학박사 박희태 선생의 셀프 해명을 중심으로, 형사처벌 가능성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우선 MBN과의 전화인터뷰 내용이다.
"내가 손가락으로, 손가락 끝으로 가슴 한 번 툭 찔렀다는 이런 이야기에요. 그것을 이제 만졌다 이렇게 표현을..."
박희태 선수. 마이 억울한 듯싶다. 손가락 끝으로 가슴을 툭 찌른 것과 만진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인정! 그렇다면 박희태는 무죄인가?
박희태에게 적용될 것이 유력한 형법 제298조 강제추행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하는 것을 그 구성요건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손가락으로 툭 찌른 정도를 폭행이라고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무리 정치 9단에 폭탄주의 대가라고 하나 손가락으로 천하를 평정했다는 무슨 무협지에 나올법한 고수는 아니지 않겠는가? 물론 손가락으로도 세게 찌르면 아프다. 박희태도 이를 의식했는지 절대 세게 찌른 건 아니라고 강조를 한다.
"귀엽다는 수준에서 '터치'한 거고..." "예쁘다 정도로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터치) 한 것"
여기서 잠깐. 강제추행죄의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례이다. 손가락으로 귀엽다는 수준에서 터치를 했다면 항거가 곤란한 정도는 아니었겠지? 이런 변명을 예상했던 대법원 또한 가만있지 않았으니...
강제추행죄는 상대방에 대하여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하여 항거를 곤란하게 한 뒤에 추행행위를 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폭행행위 자체가 추행행위라고 인정되는 경우도 포함되는 것이며, 이 경우에 있어서의 폭행은 반드시 상대방의 의사를 억압할 정도의 것임을 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의 행사가 있는 이상 그 힘의 대소강약을 불문한다. (대법원 2002. 4. 26 선고, 2001도2417 판결)
즉 살짝만 건드려도 추행이 될 수 있다는 것. 위 판례의 사실관계에 대해 부연하자면 피고인은 와이프가 경영하는 식당의 지하실에서 여종업원 두 명과 노래 부르며 놀다가 그중 한 명이 노래를 부르는 사이 다른 한 명을 뒤에서 껴안고 블루스를 추면서 가슴을 만졌다는 것. 이에 대해 대법원은'피해자와 춤을 추면서 피해자의 유방을 만진 행위가 순간적인 행위에 불과하더라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행하여진 유형력의 행사에 해당하고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추행행위라고 평가될 수 있는 것으로서, 폭행행위 자체가 추행행위라고 인정되어 강제추행에 해당된다'고 판시하였다.
그러므로 박희태의 해명처럼 손가락 끝으로 가슴을 찔렀거나 귀엽다는 수준에서 터치한 게 사실이라면 박희태는 유죄를 피하기 힘들어진다.
이어지는 박희태의 해명. "다른 데는 내가 등허리를 쳤다 팔뚝을 만졌다 이런 건 큰 문제가 없지 않나 싶고."(MBN)
여성의 가슴은 객관적으로 보아 성적인 부위임에 틀림없을 터. 그렇다면 등허리나 팔뚝은 문제가 없을까? 대법원은 등 뒤에서 부하 여직원의 어깨를 주무른 사건(대법원 2004. 4. 16 선고, 2004도52 판결)에서'여성에 대한 추행에 있어 신체 부위에 따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없으므로 추행에 해당한다'고 판시함으로써 박희태의 해명을 궁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개인적으로 골프를 안 쳐서 잘 모르겠는데, 레슬링이나 유도라면 모를까 골프를 칠 때 캐디의 등허리를 치거나 팔뚝을 만지는 게 불가피한 신체 접촉은 아닐 것 같다. 결국 박희태의 해명과는 달리 등허리를 치거나 팔뚝을 만진 것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
다만 대법원은 아니고 하급심 판결(대구지방법원 2012. 6. 8. 선고 2011고합686 판결) 중에는 골프장에서 함께 근무하는 여직원의 쇄골 바로 아래 가슴 부분을 손가락으로 한 번 찌르고 어깻죽지 부분을 손으로 한 번 만진 정도로는 강제추행으로 처벌하기 어렵다고 하여 무죄를 선고한 게 있다.
또한"당사자는 불쾌감을 표시하지 않았다."는 해명(MBN)도 받아들여진다면 박희태에게 유리할 수 있는 부분. 그러나 라운딩 도중에 교체를 요청한 사정이나, 이후 고소까지 할 정도의 모습을 보면 과연 당사자가 불쾌감을 표시하지 않았을지는 의문이다.
팔만 잡았으니 괜찮은데 왜 그래, 응?
그러면서도 박희태는 캐디에게"'예쁜데 총각들 조심해라' 이런 얘기를 해줬다."(MBN)고 한다. 총각의 한 사람으로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예쁜데 왜 총각을 조심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예쁜 여성일수록 총각들과 적극적으로 교제하여 필자처럼 멋진 사람과 결혼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해준다던지 아는 사람 있으면 소개를 해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조심이라니. 물론 스토킹이나 성범죄 등을 염려하여 하신 말씀이겠지만, 그런 건 총각들만의 문제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 말씀을 하는 당신의 행실이...
이에 대해 박희태는"내가 딸만 둘이다, 딸을 보면 귀여워서 애정의 표시를 남다르게 하는 사람이다."(노컷뉴스)라고 말하거나
"내가 나이 80 아니에요 그 아이는 20대 초인데 내가 귀엽고 손녀 같고 그래서 애정의 표시로 아이고 귀엽다 예쁘다 하고 그랬으면 몰라도 내가 무슨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 만한 행동을 한적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평소 딸이나 손녀에 대해 어떻게 애정의 표시를 하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도 남다르다는 점을 인정한 걸 보면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스킨십이 아닐까 싶은데 본인은 그러면서 총각들은 조심하란다. 이것이야말로 유체이탈화법의 전형이자, 박희태의 가장 유명한 어록인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주관적인 애정의 표시도 상대방이 원치 않으면 강제추행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낮은 단계의 애정표현 내지 신체 접촉이자 남녀 합석 술자리에서 빈번하게 이뤄지는 러브샷에 대해 강제추행죄를 인정한 판례(대법원 2008. 3. 13. 선고 2007도10050 판결)가 있다. 공교롭게도 골프 후 식사 자리에서 골프장 사장과의 친분을 내세우며 골프장 여직원들에게 러브샷을 강요한 사례였는데, 여기서 법원은'피고인과 피해자들의 관계, 성별, 연령 및 위 러브샷에 이르게 된 경위나 그 과정에서 나타난 피해자들의 의사 등에 비추어 볼 때 강제추행죄의 구성요건인 ‘강제추행’에 해당하고, 이 때 피해자들의 유효한 승낙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라고 하여 강제추행죄를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어쨌든, 박희태 본인이 추행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는 기사의 제목들과는 달리 내용을 살펴보면 실질적으로는 신체 접촉을 인정하는 것 같은 희한한 해명이라는 느낌. 대법원 판례에 비추어 봐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게다가 언론 보도를 종합해 보면 박희태는 적극적으로 결백함을 다투기보다는 피해 여성에게 사과를 하는 등 어떻게든 사건을 무마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합의를 보려는 것 같은데 예전에는 이와 같은 일반적인 강제추행 사건의 경우 합의만 보면 공소권 없음이나 공소기각으로 끝났다는 걸 염두에 둔 듯. 그런데 작년 6월부터 법이 바뀌어 이젠 합의를 보더라도 혐의가 인정된다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진지한 반성과 사과, 피해의 실질적인 회복과 같은 범행 후의 정황은 중요한 양형 사유에 해당되므로 합의를 본다면 처벌이 많이 가벼워질 것 같긴 하다. 원래는 돈봉투 사건으로 집행유예 기간에 일어난 일이니 집행유예 취소나 결격사유에 해당될 뻔했으나, 위대하신 전임 가카께서 말년에 특별사면이라는 은총을 내려주신 덕분에 그럴 염려도 없어졌고.
글을 마무리하며 돈봉투 사건을 폭로하여 박희태를 정계은퇴로 몰아넣은 고승덕을 소환하기로 한다.
서울법대를 나온 법조계 출신 한나라당 정치인이라는 점 말고는 이렇다 할 공통점을 찾기 힘든 두 사람. 나란히 18대 국회의원이었지만 19대 총선에는 공천조차 받지 못해 정계를 떠나 있던 올해, 고승덕은 딸 캔디에게 박희태는 딸처럼 여긴 캐디에게 각각 비난을 받고 이런저런 변명을 했지만 끝내 사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대급 짤을 남겼음에도 교육감 낙선의 아픔을 겪은 고승덕이 하루속히 딸과 화해하길 바라며, 박희태 또한"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실수한 것 같다, 이해를 해라 이래서 대충 된 걸로 알았는데..."(MBN) 정도의 변명인 듯 변명 아닌 변명 같은 어설픈 사과 말고, 최장수 대변인으로 보여주었던 촌철살인의 능력을 살려 고승덕 급의 화끈한 '미안하다!'를 보여주거나, 검사장 출신 법조인의 명예를 걸고 스스로의 결백을 밝혀내길 바라 마지않는다.
자신의 삶을 던져 불우한 이들을 돕는 의사는 참 많다. 돈에 눈이 벌건 의사도 많은 게 사실이고 정치적으로 한심하다 싶을 정도로 꼴통인 의사도 허다한 건 맞지만, 그래도 자신의 능력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직업으로서 인간의 마음에 내재된 선한 본성을 기꺼이 발현시키는 이들도 적지 않아. 그 헌신의 도가 넘어서면 어김없이 붙는 칭호가 ‘슈바이처’다.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호칭은 고 장기려 박사에게 헌정돼 있고 얼마 전 돌아간 이태석 신부는 ‘수단의 슈바이처’라는 호칭이 붙어 있다. 소록도에 오래 근무하신 오동찬 의료부장님은 ‘소록도의 슈바이처’로 불리고 전진상 의원을 세운 벨기에 여의사 배현정 원장님은 ‘시흥의 슈바이처’라고 불리지.
이 슈바이처의 원조(?)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오랜 분쟁의 땅 알사스 로렌 지방 출신이야. 독일과 프랑스가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고 힘의 논리에 따라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하기도 했던 곳이지. 프랑스 혁명을 진압하려는 유럽 열강에 맞서서 프랑스인들이 소리 높여 불렀고 오늘날 프랑스 국가가 된 ‘라 마르세예즈’가 탄생한 건 바로 알사스 로렌 지방의 스트라스부르였어. 슈바이처가 태어난 도시지. 하지만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의 기세 앞에 프랑스가 만판 깨진 뒤 이 지역은 독일의 차지가 된다(1871).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은 그 상황을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지.
슈바이처는 1875년 생이야. 4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프랑스인이었겠지만 그는 독일 사람으로 태어난다. 이런 접경 지역 사람들의 특징은 대개 극단적으로 나타날 때가 많아. 일종의 변경 의식으로 어느 한 쪽에 편입되려는 완강한 집착을 보이거나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입장을 견지하거나. 슈바이처도 독일인이든 프랑스인이든 별 관심이 없었던 듯 해. 그의 성 자체가 독일어로 ‘스위스인’이라는 뜻이고 스위스 출신 이민의 후예라는 말도 있으니까.
그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고 좋은 교육을 받았으며 꽤 저명한 신학자이자 바흐의 권위자인 음악가이자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어. 그의 글을 아마 요즘 한국 기독교 목사들이 접한다면 아마 거품을 물고 이단 취급할지도 몰라. 그는 역사적 인물로서 예수에 접근했고 처녀수태니 하는 건 취급하지 않고 세례 요한을 만난 예수에서부터 출발하니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에 대한 견해만 해도 '묵시적 유대 선지자로, 그리고 세상 종말이 그의 사역 가운데 올 것(마 10:23)이라고 희망하였던 선지자'로 봤고 세상 종말이 오지 않자 죽음을 택했다는 식의 해석을 했으니 기독교 탈레반이라 할 한국 기독교 목사들로서는 눈이 튀어나올 일이지. 그래서 종종 슈바이처를 이단이라고 비난하기도 해. 하지만 하느님이 누구를 천국에 부르실지는 난 확실히 안다.
각설하고, 그 학자로서, 음악가로서, 연주자로서 안온한 삶을 누리던 그가 아프리카 정글 속에 뛰어들게 된 이유는 간단해. '나는 이렇게 행복한데 이 행복를 나만 누려도 되는가' 하는 아주 간단하지만 무척 복잡한 질문이었어. 눈 한 번 질끈 감으면 아무 문제가 아니지만 그 답을 찾으려면 인생이 무척 꼬일 수도 있는 질문.
일찍이 아프리카인들의 고통을 자주 설교에 인용했던 아버지의 기억과 독일계와 프랑스계 모두에게서 '돼지'라고 불리우면서도 말 한 마디 못하고 감내해야 했던 동네 유태인의 처지에서 받은 느낌도 그렇겠지만 그는 애초부터 떡잎이 좀 특이한 사람이었어. 좋은 옷을 입히려는 부모에게 '남들은 이렇게 입지 못하는데 왜 나만!'을 외치는 아이였고 ‘도련님’이라는 호칭에 상처를 받는 사람이 어디 그리 흔하려고. 그런 그에게 나병에 걸려 부락으로 쫓겨난 채 죽어간다는 콩고의 흑인들의 이야기는 큰 감응을 줬고 '그들을 어떻게 도울까?'의 고민은 금새 ‘의사’라는 답을 내 왔던 거지.
그는 나이 서른부터는 전혀 새로운 봉사자로서의 삶을 살 생각을 하고 의학 공부를 시작한다. 우리 나라로 치면 중견 신학자에 음대 교수님으로서 탄탄대로를 걷게 될 바로 그 순간에 인생 경로를 틀어 버린 거지. 그가 해부학 강의실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고. 내 친구가 그래도 미쳤다고, 다시 생각하라고 하겠다. 슈바이처 주변 사람들도 그랬어. 의대 공부하던 중 그는 헬레네 브레슬라우라는 아가씨를 만나게 돼. 나이 차이는 많았지. 동료 교수의 딸이었으니.
헬레네
주위 사람들은 좋아했다. 네가 가려는 곳이 도대체 어디인줄 아느냐며 통탄하던 슈바이처의 아버지나 파이프 오르간의 대가였던 비도르 교슈는 슈바이처가 사랑에 빠져 유럽에 눌러 앉을 수 있다고 봤을 거야. 슈바이처도 고민이 됐다고 해. 헬레네를 분명히 사랑하는 건 스스로 알지만 자신의 뜻을 따라 줄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고. 사랑을 따르자니 자신의 뜻이 울고. 뜻을 견지하자니 사랑이 아쉽고.
천하의 슈바이처도 몇 날 며칠 고민을 하다가 마침내 결연하게 자신의 뜻을 밝혔어. “나는 아프리카로 갈 사람이오.” 그때 헬레네의 답은 이것이었다는군, “제가 간호사가 된다면 당신을 현실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 같군요.” 슈바이처는 그렇게 자신 플러스 한 사람의 일생을 바꾸게 된다.
이 의사와 간호사 커플은 그 후로부터 수십 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자신들의 열정을 쏟아부었고 ‘오강가’(마술사)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포로 생활을 하게 되기도 하고 (세계대전 당시 슈바이처는 독일인으로 치부돼 프랑스 군에게 구금된다) 치명적인 병을 얻으면서도 무슨 꿀단지라도 감춰 놓은 양 아프리카에 돌아왔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해.
이른바 쿵짝이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아마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일지도 몰라. 물론 낭비벽 심한 남편과 경제 개념 없는 아내처럼 쿵짝 맞는 건 말고. '나는 의사로 아프리카에 갈 거요'라는 남자가 '어머 그럼 저 같은 간호사가 필요하시겠네요'라고 답하는 여자를 만났을 때의 느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니.
슈바이처 부부는 자신들의 인생을 바꾸면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의 인생을 바꾼다. 수많은 흑인들의 목숨을 구했고 많은 이들의 양심을 건드렸지. 한 이탈리아 소년의 아스피린 얘기는 유명하다. 슈바이처의 얘기를 들은 한 소년이 있었어. 이탈리아 주둔 미군의 아들이었던 그는 이탈리아 주둔 공군 사령관에게 편지를 썼지. “제가 아스피린 한 병을 샀습니다. 공군기를 시켜서 슈바이처 박사님의 병원에 떨어뜨려 주세요.” 흐뭇하게 편지를 읽은 사령관은 방송국에 이 편지를 보냈고 청취자들은 무려 40만 달러를 모아 슈바이처에게 기금 폭탄을 안긴 거지.
슈바이처가 바꾼 인생 중에 가장 인상 깊은 한 쌍이 있어. 래리머 멜런과 그 부인 그웬 멜런 커플. 1947년 가을 미국 갑부 집안의 막내 아들 래리머 멜런(1910~1989)은 잡지 <라이프>에 실린 슈바이처의 기사를 읽고 머리에 뭘 맞는 듯한 충격을 받아. 그 역시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하는 마음으로 슈바이처보다 더 늦은 서른 일곱의 나이에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해. 그 부인 그웬에게 결심을 얘기했을 때 그웬의 답은 이랬다고 해. "뭐 나도 목장에서 소들 보면서 앉아 있는 거 싫어요.” 그리고 남편이 의학 공부를 하는 동안 부인은 아이티로 가서 병원을 세운다. 대륙과 세월을 초월한 이 쿵짝 부부들의 평행 이론.
그로부터 18년 동안 슈바이처와 멜런은 여러 통의 편지를 나누면서 우정을 쌓게 돼. 슈바이처는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빠짐없이 전했고 '당신은 용감한 사람'임을 끊임없이 고백해. 멜런은 1989년 세상을 떠났지만 부인 그웬은 2000년까지 병원을 지키다가 죽었고 지금은 그 자식과 손자들이 여전히 봉사하며 살고 있다고 하네.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해. 여기서 사람이란 한 개인의 특성과 성격을 말하는 것이겠지. 동시에 그 사람이 쌓아온 개인사와 주변 환경을 가리키기도 해. 그러니 한 사람을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니. 그 일을 하는 것이 우리가 존경하는 ‘위인’일 거고. 하지만 사람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변화의 단초를 제공하거나 변화의 조짐을 일깨우거나 변화의 가능성을 던지는 건 우리도 할 수 있는 일인지도 몰라. 당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말이지. 거창한 사회 개조니 뭐니 할 것 없이 저 아들 녀석부터라도.
나이 많은 슈바이처가 젊은 아내를 반하게 만들고 또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용기를 준 비결(?)을 나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일화에서 그 답의 조각을 찾아 본다. 어느 기자가 물었대. “갑자기 왜 의사가 된 겁니까?” 그러자 슈바이처는 이렇게 얘기했다는군. “나는 도저히 말로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가 없더군요.” 아마 모든 매력적인 남자들이란 아내로부터 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일 수도. “허구헌날 말만!” 또는 “말로는 뭘 못해!”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미국이 최강국이 될 수 있었던 데에는뉴딜정책*이후 두터워진 중산층이 있었기 때문이다.
* 뉴딜 New Deal 정책
1929년 뉴욕 주식시장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추진하였던 제반 정책. 국가 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정책을 추진한 루즈벨트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지명 수락연설에서 사용한 용에 뉴딜 New Deal에서 유래되었다.
'뉴딜정책의 핵심은 MB가 이룩한 4대강과 같은 토목사업이 아니라 부자 증세에 있었다.'
영화 백투터 퓨처(1985년 작)에서 1950년대 중산층을 묘사하면서 거실에 있는 TV를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구매하여 보급된 대표적인 가전 제품이 TV다. 소리에 머물렀던 기존의 Radio 광고에서 상품을 눈으로 확인 시켜주는 TV광고로 인하여 중산층의 소비는 치솟게 되지 않았나 싶다. 1950년대 이후 미국은 시장경제 생산 및 소비의 중심이 중산층이 된 것이다. 경제 중심이 중산층 가정으로 들어오자 미국 문화의 중심 또한 중산층에서 시작하게 된다. (미국 문화의 시작이 차고(Garage)에서 부터 시작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맥OS 에서 제공하는 디지털오디오워크스테이션의 이름도 개러지 밴드(Garage Band)다. )
가정용 컴퓨터 시장을 가전제품 시장으로 완벽히 이해한 동갑내기 두 사람이 50년대 태어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바로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 말이다.
가정용 컴퓨터의 시작을 알린 MITS사의 Altair 8800
2. 가정용 컴퓨터의 시작
1977년 6월 10일 가정용 컴퓨터로 발표한 <Apple II>는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과 '히피' 스티브 잡스의 합작품이다. 물론 보드 설계와 구동 소프트웨어 일체를 스티브 워즈니악이 전적으로 만들었다. 잡스는 워즈니악이 만든 제품에 편승하여 이익만 취한 것일까?
스티브 워즈니악(좌)과 스티브 잡스(우)가 절친이던 바로 그 때.
당시 시장에 먼저 나와있는 가정용 컴퓨터는 <Apple II>가 아니였다. MITS사의 <Altair 8800>는 사용자가 직접 조립 해서 만드는 제품이었지만 1974년에 <Apple II>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Altair 8800>은 지금처럼 모니터와 키보드를 사용하는 제품이 아니었다. 본체 앞면에 On-Off 토글스위치와 표시등으로 입출력하도록 만들어진 장비였다. 가정용 컴퓨터라기 보단 인텔 808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장착한 공학용 장난감에 가까웠다. (MicroSoft의 빌 게이츠는 본 제품으로 BASIC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3. 워즈니악, TV와의 인연
2007 년 키노트에서 화면이 에러가 나서 멈추자 잡스는 워즈니악이 만든
TV 전파 방해기로 대학교 기숙사 학생들에게 장난친 이야기를 했다.(31초부터)
워즈니악은 자서전에서 홈브루 컴퓨터 클럽(Homebrew Computer Club : 1975년 실리콘밸리에서 만들어진 초기 컴퓨터 취미 생활자 클럽)에 참석하게 된 동기가 마이크로프로세서 등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친구 알렌이 “내가 HP에서 모임 하나를 알게 됐는데, 텔레비전과 비디오 단말기 같은 걸 만드는 사람들의 모임이야"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워즈니악은 대학생 때 기숙사 학생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TV-Jammer(방해 전파기)를 만들었고, HP에서 근무하면서 비디오 단말기(VCR)에 대한 작업, 잡스의 꼬드김으로 아타리(Atari)에서 아르바이트로 TV 콘솔게임을 만든 경험이 있었기에 홈브루 모임에 자연스럽게 참석하게 된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컴퓨터의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고, HP(당시 워즈가 다녔던 회사)의 계산기 업무에 온통 빠져있었다. 그러니마이크로프로세서*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깜깜한 상태였다.
그러나 TV 단말기에 관한 모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래, 이런 자리라면 내가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라고 생각했다.
떨렸지만 나는 그 모임에 나갔다. 어떻게 됐을까? 모임에 가기로 한 나의 결정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날 밤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밤 가운데 하나였다.
'iWoz (2장 괴짜 엔지니어의 천재적인 프로젝트) - 스티브 워즈니악 & 지나 스미스
*마이크로프로세서
마이크로프로세서는 보통 CPU라고 통용되기도 한다. CPU가 칩에 달려있는 경우가 마이크로프로세서이다. 1971년 인텔의 엔지니어 테드 호프에 의해 발명된 제품이다. 테드 호프는 Busicom사로부터 복잡한 계산이 가능한 전자계산기 회로설계를 의뢰받게 되는데 당시 칩은 On-Off 스위치기능만 있었기에 새로운 접근이 필요했다. 테드 호프는 컴퓨터에 저장된 명령을 확인하고 수행 하는 즉, 두뇌 역할을 수행하는 칩을 처음으로 만든 것이다.
4. APPLE I
<Apple I>은 케이스에 밀봉된 완제품이 아니었다. 두 스티브(잡스와 워즈니악)은 기판만 팔았다.
워즈니악이 홈브루 모임에 참석한 이후 표시등과 스위치로 작동되는 알테어에 머물러 있었던 가정용 컴퓨터는 TV 모니터와 키보드로 작동하는지금의 PC의 원형*인 <Apple I>으로 탈바꿈하였다. 워즈니악은 홈브루 회원들에게<Apple I> 설계도면을 공유**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설계한 제품을 직접 만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홈브루 회원들은 시간도 없고 능력도 안된다며 만들기 어렵다고 했다. 워즈니악의 기판보다 홈브루 회원들은 Altair에 관심이 더 많았다.
*1973년에 프로토타입 컴퓨터인 IBM SCAMP(Special Computer APL Machine Portable)이 있었다. 카세트 테잎 드라이버, CRT 모니터, 키보드 등을 갖춘 최초의 가정용 컴퓨터라고 하지만 프로토타입으로 판매제품은 아니었다. 그 프로토타입을 모델로 하여 나온 제품이 IBM 5100이었는데, 2만불이나 되는(탑재프로그램 사양에 따라 $8,975 ~ $19,975까지) 전문적용도의 컴퓨터였지 가정용 컴퓨터는 아니었다.(이어질 하편 참조)
무려 2만불 짜리 IBM 5100
**워즈니악의 <Apple I>의 설계도면 공개로 <Commodore PET>과 <Radio-Shack TRS-80> 또한 모니터와 키보드를 장착한 제품을 1977년에 발표하게 된다.
Commodore PET (좌) / Radio-Shack TRS-80 (우)
이를 상품으로 바라본 20살의 잡스는 홈브루 회원들에게 20달러에 만들어 40달러에 팔겠다고 제안하게 된다. 두 스티브는 홈브루 회원에게 50대 정도 팔 것으로 판단하고 워즈니악은 자신이 아끼던 HP65 계산기를 팔고 잡스는 폭스바겐 밴을 팔아 1,000달러를 마련하였다. 자본금 1,000달러로 애플사를 설립한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잡스는 바이트 숍 컴퓨터 매장 주인 폴 테럴에게 100대에 5만불 계약을 따낸 것이다. 대당 40달러에서 500달러 제품(판매 가격 666.66달러)이 되었던 것이다.
5. APPLE II
컬러 TV에 연결한 <Apple II>
홈브루 모임에서 스티브 워즈니악은 <Apple I>을 선보였다. 그러나 당시 <Apple I>은 케이스 없이 사용자가 조립해서 만드는 <Altair> 같이 전자장비 취미가의 제품이었다. 일반 사용자에게 팔려고 만든 제품이 아니었다.
워즈니악은 개인적인 기술 경험과 지식으로 집안의 TV를 출력 장치로 선택하였던 반면 스티브 잡스는 TV에 연결되는 <Apple I>을 바라보면서 워즈니악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워즈니악은 엔지니어 장비로 잡스는 TV와 같은 가전 상품으로서 <Apple I>을 바라봤다. 이 둘의 극명한 차이가 정식으로 <Apple II>를 발표할 때가 되어서는 환상적인 콜라보가 된 것이다.
잡스는 메이시스 백화점의 가전제품 통로를 거닐다가 쿠진아트 브랜드의 믹서를 보고 ‘이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가벼운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미끈한 케이스를 만들기로 했다.
'스티브 잡스 (Apple II: 최초의 통합 패키지형 컴퓨터)' - 월터 아이작슨
잡스는 홈브루 지역 컨설턴트인 제리 매넉에게 1500달러로 흥정하여 케이스 디자인을 부탁하였다.(워즈니악은 자서전에서 자신이 프라스틱 케이스로 하자고 제안했다고 하지만 여러 정황상 잡스가 한 것이 맞는 것 같다.) 잡스가 프라스틱 케이스를 베이지색으로 결정한 이유는 세탁기, 냉장고 등 가정에서 사용하는 가전제품의 기본색이 베이지 계통의 색이였기 때문이다.(베이지색 케이스 전통을 만들고 가차없이 버린 사람 또한 <iMac> 제작을 진두 지휘했던 스티브 잡스다.)
베이지 컬러를 버리고 애플의 부활을 알린 <iMac>
잡스는 1977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제1회 서부 연안 컴퓨터 박람회에 <Apple II>를 완제품으로 전시하였다. 잡스는 Apple II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게 될지 세세하게 체크하며 케이스에 있는 얼룩을 제거하기 위해 직원들을 시켜 사포로 닦았다. 또한 가정에서 조용히 사용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하여 아타리 알 아콘의 소개로 로드 홀트라는 엔지니어를 애플로 데려와 팬이 필요없는 스위치식 전원 공급장치를 개발, 장착했다.
워즈니악은 경쟁 제품과 차별하기 위하여 <Apple II>의 기술적인 부분에 매달렸다.
<Apple II>의 사양
1. 메모리는 최대 48kb(경쟁사들은 4kb, 8kb)
2. 칼라TV와 연결하여 색을 구현(280 x 192 (6 색) 혹은 40 x 48 (16 색))하여 베이직(BASIC)으로 짠 그래픽 게임을 선보임(경쟁자는 그래픽 기능이 없음) 3. 슬롯은 8개, 오디오 스피커, 게임 포트 등 4. 데이터를 보다 빠르게 전송하기 위하여 최초로 플로피 디스크 도입 (1978년 / 경쟁자는 카세트 테이프 사용)
두 스티브의 노력으로 외관 및 기술적으로 모두 당시 경쟁사(TRS-80, Commodore PET 등) 보다 기술적으로 월등한 제품을 만들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한 절대적인 공로자는 투자자 마이크 마쿨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쿨라는 애플에 투자하면서 컴퓨터 시대를 도래할 것으로 예언했다. 애플이 2년안에 포춘이 선정한 500대 기업 안에 들어갈 장담하면서 말이다.
6. 완전한 실패작 APPLE III
프랑켄슈타인 제품 <Apple III>
애플의 <Apple II>의 성공은 기술적으로 하드웨어 개방과 소프트웨어 확산에 있었다. 본체에 8개의 슬롯을 장착하여 많은 주변기기를 만드는 하드웨어 기업들이 참여하게 되었고 그래픽 지원으로 게임 등 소프트웨어 시장이 활성화 되었다. 지금의 서드파티 개념이 <Apple II>로 확립되었다.
또한 <Apple II>는 1979년 역사적인 프로그램 VisiCalc 등장으로 가정뿐 아니라 사무실에서 업무용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컴퓨터는 비로소 공학도가 쓰는 전문 장비가 아니라 가정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할 수 있는 친근한 기기이자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업무용 기기가 되었다. <Apple II>로 인하여 게임 컨텐츠 및 소프트웨어 소비가 활성화 된 것이다. <Apple II> 판매량은 1977년도 2500대에서 1981년 21만대로 껑충 뛰었다. <Apple II>는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성공했던 것일까? 애플사는 순식간에 대기업이 되어 관료화 되고 있었다. 애플사가 무너진 건 초 거대기업 IBM이 PC로 가정용 컴퓨터시장에 진입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일면 맞는 말이지만 대기업이 된 애플사 내부에 이미 어두워진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IBM PC가 나오기 1년 전 1980년 5월 애플은 차기작인 <Apple III>를 내놓았다. 가정용으로 <Apple II>를 사무실용으로 <Apple III>를 내세워 마케팅 하였다.(이원화 전략은 멍청한 마케팅이다.) 워즈니악에 따르면 <Apple III>는 스펙은 <Apple II>에 비해 높게 출시 되었지만 엔지니어 제품이 아닌 마케팅 부서 제품이라 혹평했다. <Apple III>는 스위치를 통하여 <Apple III>와 <Apple II> 모드를 변경하여 부팅하게 만든 제품이었다. 그 말은 <Apple III>와 <Apple II>의 프로그램이 서로 호환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Apple III>에서 <Apple II> 호환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하드웨어 성능을 낮추어 <Apple II> 모드로 사용하여야 했다. 이는 <Apple II>가 양산되고 있었기에 <Apple III> 판매에 절대 도움이 되지 않았다. <Apple II>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해 더 비싼 <Apple III>를 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Apple III>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었다. 치명적인 하드웨어 결함인데 시스템은 불안정하여 멈추기 일쑤였고 부팅 마저 한번에 성공하지 못했다.
잡스 또한 <Apple III>의 실패를 거들었다. <Apple III>에서 소음의 원인인 팬 자체를 아예 없애버린 것과 확장 슬롯을 2개로 제한해 버린 것이다. 회로기판에 더 많은 부품이 들어가는 상황에서 잡스는 자신이 정한 크기와 형태의 케이스를 절대 바꾸지 못하게 한 결과였다.
잡스는 <Apple II>가 성공한 것이 기술보다는 가전제품으로 포장한 자신의 능력이라 자만했던 것이다. 하드웨어 기술을 무시한 처사였다. 여하튼 애플 내부 부서 간 갈등이 심화된 결정판이 <Apple III> 였다.
가정용 컴퓨터가 가전제품이 될 것이라 본능적으로 알고 공학도들이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곳에서 상품 가치를 찾았던 스티브 잡스는 20대 초반에 너무 이른 성공을 했다. 그의 주변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하자 그는 자신이 이룬 업적에만 치중하였고 그것이 독이 되어 수년동안 그 대가를 지불했어야 했다. 그의 성공이 운이 아니라는 것을 20년이 지난 다음에야 증명 되었다.
참고로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물을 많이 소모하므로 술 마신 다음날 미친듯이 물을 찾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나는 아직도배 고프목 마르다
2. 알코올의 대사와 흡수
자, 기사를 다시 읽어봅시다.
앞으로 돌아가 링크를 누르기 싫은 딴지스들을 위하야 다시 보여주는 친절한 서비스
기사에서 대충 후려치고 넘어간 알코올의 대사와 흡수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봅시다.
몸에 들어온 알코올은 20%는 위에서 그리고 나머지80%는 장에서 흡수 됩니다. 혈관을 통해 체내 순환을 하던 알코올은 주로 간에서 대사 되는데 2가지 기전으로 이뤄집니다. 자자, 힘들어도 쫌만 쫓아오세요~
간의 대사작용 들어갑니다. 간의 cytosol (시트졸 : 세포기질) 이라는 곳에서 80% 가 대사가 되고 그리고 나머지 20%는 간의 microsome (마이크로솜) 이라는 곳에서 대사가 됩니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cytosol 의 대사기능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늘지 않지만 microsome에서는 약 30% 정도 대사량을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술은 먹을수록 는다'는 말은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 효과는 무척 미미하다고 말씀드려야겠네요. 신입생 환영회때 '저는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해요'하던 동기가 방학이 지나고 나면 괄목상대하여 나타나기도 하는데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술 느는 효과는 위에서 언급드린 대로 겨우 20%의 30% 정도니까 술을 잘 마시려면 다른 재능과 마찬가지로 타고 나야 한다고 보는게 맞을 듯합니다. 즉,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퍼마셔봤자 주량 증대보다 간 파괴 효과가 더 크다는거죠.
그리고 일반적으로 동양인 보다는 서양인이, 여성 보다는 남성이 ADH(alcohol dehydrogenase) 와 ALDH( acetaldehyde dehydrogenase)가 더 많습니다. 참고로 ALDH가 부족하면 우리의 체내에서 알코올이 분해되지 않아서 얼굴이 빨개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알코올 중독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이술피람(disulfiram) 이라는 알코올 중독 치료에 효과 있는 약이 있는 데 이것이 바로 이 효소를 막아 체내에 '아세트알데하이드' 를 축적시켜 더이상의 음주를 막아줍니다. (참고로 이 약은 술 깨는 약이 아니라 술 끊는 약입니다. 어떤 사모님이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오자 술을 깨게 한다고 꿀물에 이 약을 섞어서 줬다가 남편이 죽을뻔한 일이 전설로 내려옵니다. 술을 먹고 다이술피람을 먹으면 술이 분해 되지 않아 생명이 위태롭습니다.)
하지만 이는 원론적인 이야기이고 알코올이 위장관에서 흡수 될 때 위 내 음식물의 존재 유무, 알코올 음료의 종류, 알코올 농도, 섭취시간 등 여러 변수로 인해 흡수율이 달라집니다. 당연하게 빈 속일 경우 술이 빨리 흡수되며, 단백질이나 지방, 밥 같은 탄수 화물과 같이 먹으면 흡수가 느려집니다. 그리고 탄산 음료는 빠른 흡수를 촉진시키니 빨리 취하고 싶으신 분은 차가운 칠성 사이다와 같이 드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소주 같이 20 도 정도의 술을 물에 타서 먹어도 금방 취한다고 하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또 위에서는 음식을 많이 먹거나 하면 술의 흡수가 느려지지만 일단 소장으로 넘어가면 음식물과 상관없이 빨리 흡수되므로 빈 속에 알코올을 먹거나 혹은 위암 등에 걸려 위 절제술을 하여 위가 없는(?) 사람들은 같은 양의 술을 마셔도 남들보다 빨리 취하게 됩니다.
섭취한 알코올의 대부분은 산화되는데 섭취한 양의 2% 정도며, 비록 다량을 섭취하더라도 10% 미만이 땀 및 소변으로 배출 되므로 술 깨겠다고(특히 음주단속하기 전에 많이 이러시죠) 물을 많이 마시거나 이뇨제를 먹거나 혹은 사우나 가서 땀을 빼는 일은 체내의 알코올 농도를 감소시키는 데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술 어정쩡하게 마시고 운전대 잡으려 하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쓰잘데기 없는 몸부림 대신 그냥 대리 운전 하시는게 백번 천번 낫습니다.)
술은 오히려 분해가 안 될 때 몸과 정신에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지 못하므로 '구토' 나 '안면 홍조' 그리고 술을 분해 하려고 에너지를 많이 쓰다보니 쓰러져 피곤해서 자는 등의 현상이 나타나는데,술을 많이 마시고 나서 생기는 여러가지 부작용들, 그러니까 ' 남 패기' ' 깽판 부리기' ' 성희롱하기' ' 그랩하기 ' 등등은 술을 너무 잘 마셔서 생기는 짓거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할 말을 하는 신문'의 해당 기사를 쓰신 분이 어떻게 저런 이해 and 결과에 도달했는지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3. 알코올 중독과 술주정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나라는 실제로 먹는 술의 양에 비해 알코올 중독이 적은 편입니다.그 이유는 트위터를 보면 대표적으로 알 수 있는 데 기본적으로 안주를 먹다가 술 생각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술 보다는 안주가 먼저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주로 많이 먹다 보니 위에서 흡수가 느려지고 상대적으로 덜 취하는 것 같습니다.
서양 사람들을 보면 그냥 디립다 술만 먹습니다. 우리나라 중독자들도 마찬가지로 안주는 거의 안 먹습니다. 그래서 그런 지 알콜 중독자들 중에는 뚱뚱한 사람보다 마른 사람이 많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술꾼들은 소주를 주로 마십니다.
참고로 alcohol dependence는 술 없이 못사는 사람들로 술 주정꾼과는 다르지만 사회적으로는 비슷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는것 같습니다.
의학적으로 보았을때 술을 마시면 인지능력이 떨어지지만 - 계산을 잘 못하거나 사람을 못 알아보는 등- 행동을 할 때 실수를 하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술에 취해 나중에 기억을 못 할 지언정 설사 정신을 잃는다고 해도 정신 매커니즘을 살아있어서 자기가 의도 하지 않으면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난리부르스를 떨어도 최소한 자기가 사회 규범을 어기고 있다는 점을 인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술에 취해 술집 주인과 여기자를 헷갈릴 수는 있지만 자신이 성추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정확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나중에 기억이 안 나 더라도 말입니다. 결론은 술이 죄가 아니라 사람이 죄라는 말입니다.
저는 한국사회에서 술주정이 너그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유전자(체질)가 아니라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사회는 술에 너무나 관용적인 사회지요. 취해서 거하게 깽판을 벌여도 술이 무슨 죄냐며 용서해 주니까 다시 그리고 자주 술주정을 하는건 아닐까요?
우리 민족은 술과 인연이 깊어서 예로부터 취하도록 마시기를 즐겼습니다. 경주의 안압지에서 발견된 신라시대의 놀이용 주사위에는 한 잔 가득 술 마시는 벌칙이 적혀 있었습니다. 또한 오늘날에도 자주 말썽이 되는 폭탄주, 강권, 술잔 돌리기 등은 조선왕조 실록에도 빈번히 등장 합니다. 실록에서는 술에 의한 사망 사고가 간간이 기록되어있으며, 술 때문에 요절했다는 인재는 여러 번 등장 합니다. 까다롭게 예의를 지켰던 조선시대에도 임금이고 대신이고 술만 들어가면 볼썽 사나운 일이 자주 생겼다고 하니 술자리에서 벌어진 일은 탓하지 않는다는 관행도 음주 문화 만큼이나 오래 된 것 같습니다.
일례로 세조의 주량은 엄청나서 술로 대신들을 녹다운 시켰다고 알려져 있으며 연산군 때 이세좌라는 사람은 술을 못 마셨는데 연산군이 내리는 술을 쏟음으로써 유배 당하고 사형까지 당하게 됩니다. 하긴, 술 먹다가 정색하면 지릴정도로 무섭긴 하죠. 하지만 이런 일들은 모두 과거의 일입니다. 이젠 바꿀 때가 되었습니다.
술을 안 마셔도 어색하지 않게 소통을 자주 하고, 직장에서는 굳이 술자리가 아니어도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한다고 봅니다. 특히 상사와 부하 사이에 말이지요. 늘 억눌려 있고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으니 술만 먹으면 꼭지가 도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습니다. 윗분들은 제발 술 드실 때 본인은 긴장 좀 하시고, 아랫사람들에게는 긴장을 풀어주고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긴장 봉인해제한 채 이상한 짓거리 하다가 인생 망친 사람 많습니다.
음주운전 사고가 일반 교통사고 보다 더 무겁게 처벌 받듯 음주 성추행 또 음주 폭력도 그렇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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