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하루하루가 이상하게 좆같아. 뉴스라도 하나 뜨면 좆같은 마음을 다 잡을 수 없어. 그리고 외롭기까지 해.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세상엔 일베같은 어린 아이들만 넘치고 있어. 손님으로 오는 대학생 어린 아해들도 모두 일베스러워진 참 희한한 세상이야.
요즘 너도 그렇다면, 너도 그런 느낌이라면, 우리는 딴지키즈 란 말이지.
지금 이 게시판에서 놀고있는 니들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외로워서 여기 한 번 들려본 딴지키즈, 바로 너에게 쓰는거니까 잘 들어주라.
어릴 적 피씨통신 시절부터 딴지를 접했고 어준이형은 그냥 별것두 아닌게 존나 대단한 엉아였지. 시민사회단체 한답시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때 어준이형을 3번 정도 알현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한 말이 진심이었다.
"우리 세대에 정신 제대로 박힌 놈들은 다 엉아가 키운거나 마찬가지에요. 저희도 마찬가지구요 "
맞아. 90년대 후반부터 딴지는 대한민국 레알 오피니언 리더들의 집합소였어. 한때 다음 아고라나 지금 일베 또는 오유같은 한정적 집단이 아닌,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었던 그런 현실적 에너지의 응집태였어. 대한민국 역사상 대한민국 최고 지성의 집단은 단 하나, 딴지 밖에 없거든.
일베를 눈팅해보면 과거 딴지의 온갖 정보의 집합소 역할을 하고 있더라고. 물론 '재미있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만의 언어를 통해서 말이야. 일베 조차도 딴지의 한 아류일 뿐이라는거지.
그렇게 말야,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치열하게 논쟁하지만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던 우리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난 이 의문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아. 그래서 그냥 내 근황을 우선 밝혀보고 다시 찾고 싶어졌어. 그때의 우리들은 분명 여기저기에 다 있을테니까.
우선 내 소개를 해야겠지?
난 77년생이고 인천 살아.
딴지랑 연관된 부분을 밝히자면 당연히 열혈회원이였고, 딴지에서 명랑완구를 발매하자마자 구매했던 사람 중 한 명이야.
그리고 지금은 과거 데이터가 사라져서 없지만 조계사 빨갱이 난입사건이라고 김장행사를 기획했었던 적이 있어서 (사진 밑의 링크를 눌러 보시라_편집자) 파토 형님도 몇차례 알현한 적이 있었어. 2009년 12월이니까 벌써 5년전이네 씨바.
하튼 지금은 끔찍하지만 그때 명바기는 차라리 귀엽기라도 했던 것 같아. 그리고 당시엔 우리 힘이 덜 빠져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지금 나는 뭘하냐.
난 지금 인천에서 레스토랑을 해.
그거 자랑하려고 글을 올렸냐구?
아니. 첨부터 얘기했지만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걸 보여주고 딴지키즈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쓰는 거라고.
레스토랑 이름은 '착한소비프로젝트 공존' 이야. 이제부터 잘 봐.
손님들은 자신이 소비한 음식에 대해 5%의 할인쿠폰을 돌려받아. 그리고 그 쿠폰은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기부를 할 수도 있는거야. 그 모든 선택은 손님들 스스로 할 수있어.
우리 동네에 이미 있던 아름다운센터와 연계해서 모인 할인쿠폰을 현금으로 지원해. 물론 자원 봉사를 함께 하는건 기본이고.
이건 예전부터 생각만하다가 7월달에나 시작한 해외아동 1:1 결연이야. 왜 하필 르완다인지는 르완다 내전의 끔찍함을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
르완다 4달 동갑내기 친구들이야. 그 마을에 5명 밖에 없어서 우선 5명을 선택했어. 이렇게 되면 인천의 이 마을 사람들이 포기한 이득이 르완다 한 마을의 아이들을 키우는 그림이 되는거지. 다들 은근히 모르더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르완다 마을까지 단 한 공간도 끊겨있지 않다는거.
그런데 우리가 모은 쿠폰이 얼마나 될까?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 이득을 포기하고 남들에게 기부할까?
나도 정말 궁금했었어.
생각보다 많지? 다들 나보고 웃기는 소리라고 했는데 이번엔 내가 이겼어.
작은 공동체로 엮여만 있어도 사람들은 언제든지 자신의 연결된 상태를 느끼더라고.
우리 동네 사람들이야..
참 이쁘지??
그래. 잘 사는 동네에 사는게 자랑스러운 건 이해가 안가. 좆같은 허영일 분이지. 하지만 자기가 사는 마을이 멋져지는 건 정말 자랑스러운 거야. 안그래?
솔직히 백운역 근처가 인천에서도 잘 살지 못하는 편에 속하긴 해. 하지만 이미 존나 멋진 그림을 만들고 있다고.
쭉 보고 있으면 이해가 가지? 내가 뭔일을 저지르고 있고 저지르고 싶어 하는지. 이해한다면 아마 니가 바로 잃어버렸던 내 기억속의 딴지키즈일거야.
거대담론에 묻혀있던 우리 스스로의 변화. 난 그 목표를 작은 공동체의 변화로 잡았어. 조금은 더디고 힘들지 모르지만 그게 가장 근원적인 변화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었지. 좌파, 우파를 나누고 특정 정치이념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란거 이젠 다 알잖아.
최소한의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다시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끊김없이 연결되어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이곳과 지구 반대편은 끊김없이 이어진 공간이라는 것을
너와 나는 끊김없이 이어진 인간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다시 깨닫는데에서 시작하는것 아닐까?
가게 입구 간판이야.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대사를 발췌한거야..
자. 딴지키즈들이여!
내 근황을 소개했어. 다시 모여봐. 씨발 좀 다시 해보자. 뭐든....
애새끼 커가는거 보고 있으면 뭐 하나라도 더 해놓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현실은 좆같이 답답하잖아.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편의 글과 함께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이런 류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딴지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젊은 세대들이 알아야 할 월남전의 진실, 이제까지 아무 곳에서도 알져지지 않았던 월남전의 실상들을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흥미위주로 썼습니다."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꿀잼 허니잼이니 함 읽어보시고 의견들 주시면 좋고.
1965년9월20일, 역사상 최초로 첫 전투부대인 해병대가 월남에 파견되는 결단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환송사를 읽어내려 가다가 그만 연설문을 놓쳐 원고가 연단 아래로 날아갔다.주변의 별들은 바람에 굴러 다니는 연설문을 잡기 위해서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박 대통령은 그 모습을 태연히 지켜보고 있었다.
결단식을 마친 병사들이 막사로 돌아와 보니 갑자기 막사 안이 어두워져 있었다.방금 낭독 했던'자유의 십자군'이니, '평화의 사도'니 하는 미사여구가 무색하게 보안상의 이유로 창문을 모두 합판으로 가려버렸고 출입구를 모두 막았기 때문이었다.막사 밖에서는 대통령이 인근에서 동원한 여고생들에게 둘러싸여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금년은 1964년 시작된 국군의 월남참전이50주년 되는 해이다.나의 월남전 이야기는 대양의 한 바가지 물에 불과할 것이다.그러나 한 바가지 물에서도 바닷물의 기본적인 속성은 찾을 수 있다.
초대 월남전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이 전쟁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루어야할 만한 목표가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5,099명이희생 되었다.
1970년대 미국은CBS에서 방영한 한 편의 월남전 다큐멘터리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존 로렌스라는 기자가 월남의 한 중대에 들어가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작전을 위한 부대이동을 앞두고 상부에서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산길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병사들이 이를 거부하는 장면이 그대로 전파를 타고 나갔다.부대원들은 베트콩에게 훨씬 익숙한 지형인 산길을 택하는 것은 아군이 공격 당할 가능성이 많아서 자살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비록 명령위반으로 감옥엘 가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월남전 당시, 정글에서는 절대로 남이 갔던 길은 가지 않고 새로 길을 내면서 가는 것이 상식이었다.왜냐하면 적이 어디에다 매설물을 설치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찰리 중대>에서 공공연히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미군의 행태가 보도되자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그러나 전쟁의 현실은 그런 것이다.
사람을 죽일 때는 상대가 멀수록, 보이지 않을수록 쉽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공군, 해군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적다고 한다.일단 외상후스트레스 장애판정을 받으면 치료가 필요한데, 아예 후방으로 빼버리면 다시는 복귀를 못하기 때문에 통상3일 후에는 원대복귀를 시킨다고 한다.그런 면에서 월남전이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이어서 적과 대면할 기회가 적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공식집계에 의하면 베트남전에 참전한8년 동안 한국군이 사살한 적군의 숫자는4만 명이다.그렇다면4만 명을 죽이는 현장에 있었던 병사들의 심리 상태는 어떠했을까?
월남전에서 십자성 부대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는 부상 전우들을 방문하는 것이 내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부상병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입원한 환자들 가운데 자기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다고 이야기하는 전우는 거의 없었다. 간혹 자기가 베트콩을 사살했을 것이라고 믿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군인이 팔자일 것 같은' 전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진짜로 자기가 쏜 총에 적이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그것이 인간이다.
먼저 밝힐 것은, 나는 전장에서 적과 조우하는 직접적인 전투는 해보지 못했지만 적이 나타날 가능성에 대비하는 매복과 정찰의 경험은 있다. 즉 전투 준비의 심리적 경험은 있되 직접 전투의 경험은 없다는 것이다. 전투 준비의 심리와 직접 전투의 심리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또는 그것이 계량이 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막상 적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면, 그때 나의 심리는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용기가 더 생길까, 불안이 더 앞설까' 하는 것이다. 만일에 모든 병사가 전투를 앞두고 공포심에 사로잡힌다면 전쟁은 수행될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구분 되어야 할 것은 전투에서 타의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병사들과 자의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더 큰 지휘관의 심리 차이다. 전투를 앞두고 느끼는 지휘관의 부담감과 일반 병사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타의적으로 움직이는 일반 병사들이 느끼는 공포심이 더 클 것이고 전투의 결과에 따라서 자신의 앞날이 달려 있는 지휘관은 보다 계산적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냉철한 지휘관을 만나도 정작 죽어 나가는 것은 병사들이다.
미국은 월남에서1천700억 달러의 전비를 소모했고 전쟁이 끝난 뒤로도 월남전 참전 군인을 위해2천억 달러를 더 지불했다. 1982년11월 헌정된 월남전 참전 기념관은280만의 생존 귀환자들에게 통곡의 벽이었다.그중80만의 귀환 군인이 전후 정신질환과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렸고, 1970년대 초만 해도 수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베트남전쟁에 참가한 퇴역군인 중 약6만 명이 자살했다.이 숫자는 실제로 전쟁기간에 죽었던 군인들의 숫자보다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나는 지금까지 월남전에 참전했던 전우들 가운데TRAUMA(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 편집부 주)에 시달린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한국인이 미국인보다 더 독종이어서 그런가?아니다.한국인은 만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서 면역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우리는 '사는 것이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원인이 분명치 않게 애매하게 겪는 일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겪는 일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다른 법이다.한국군의 경우 대게 '외국에 대한 막연한 선망', '돈을 벌어야겠다'등등의 이유로 지원을 했었다.그러므로 월남전을 바라보는 '내 일이 아닌,남의 일'이라는 시선이 객관적인 자세를 갖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 것은 아닐까?한국 군인과 비슷하게, 2차 대전을 치룬 일본 군인들이 TRAUMA에 시달리는 비율이 낮은 것은 스스로를 윤리적인 책임의 주체로 설정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주장을 접한 기억도 있다.한마디로 전체주의에 빠진 윤리적 감수성이라고 할까?
TRAUMA라는 측면에서 월남전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보면 미국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개인적으로 겪고 있고, 월남은 그것을 민족적으로,집단적으로 겪고 있다.때린 놈은 개인적인TRAUMA를 느끼지만 맞은 놈은 집단적인TRAUMA를 느낀다는 것이다.전쟁의 상처가 개인적으로 내상을 입히기도 하지만 민족이나 국가도 집단으로 내상을 입는다.
치렀던 전쟁의 성격,정도에 따라 후유증도 다르게 나타난다.월남전은 형식상 내전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외세와의 싸움이었고 한국전은 유엔16개국이 참전하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기본적인 성격이 내전이 아니었던가?그러므로 외세와의 싸움이 아닌, 우리끼리 싸우다 지친 한국은 서로 간에 의심만 늘었다.
군용열차를 세운 여자.
어떤 이유로든 자기가 속한 집단과'다르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기가 속한 집단과 정서를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은 고통일 수 있다.왕따든 자따든 소외의 결과는 타인과 다른 자기만의 내적 동기가 더 강화되거나 왜곡되어 나타날 수 있다.그런 면에서 최근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일베 현상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월남전에 참여했을 당시의 내 처지도 그러했다.
1971년 한 해 미국의 대학에서4,800회의 반전 데모가 벌어졌고 체포7,400명, 3분의2가 경찰이었던 부상자462명,방화247명,사망이8명이나 되었고 도서관이나 연구소에도 방화가 발생했었다.닉슨 대통령이 한 베트남 참전 장교의 부인에게 베트남에 있는 병사들은 훌륭히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 대학에서 일부 건달패(Bums)들이 소동을 부리고 있다고 언급한 말이 보도되어 학생들의 반전 데모를 더욱 점화시켰다.
오하이오 주 켄트 주립대학에서 주지사는 주방위군을 파견하였고 발포명령이 떨어져 대학생4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잇달아 전국적으로 데모가 번져450개에 달하는 대학이 휴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미국에서 대학생들이 반전운동을 주도하여 미국의 전의를 감소시키고 있을 때에 남베트남 대학생들은 격렬한 반정부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매달 수천 명의 젊은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남베트남의 대학생들은 징집이 연기되어 상아탑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의 젊은이로서 가장 큰 특혜를 누리고 있는 셈이었다.따라서 그들도 국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했다.
그들의 생각은 존망의 기로에 서있는 나라의 대학생들이 이대로 학업만을 계속해서는 안 되고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는 독재정부를 타도하여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러나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왜냐하면 박정희 정권은 외신을 통제해서 한국군이 파병되어 있는 월남에 관한 부정적인 정보는 일체 보도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
6, 7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땅에서 탈출해보려고 몸부림쳤었다.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아르헨티나나 브라질로 집단 이민을 떠나 가족 단위로 길을 찾았고 개인별로는 독일의 광부나 간호사로, 노동자들은 중동건설 현장으로 살 길을 찾아 떠났었다.
월남 참전 초창기 또한 마찬가지여서참전군인들 가운데는 부산 제3부두에서 태극기 물결 속에 배에 오를 때 속으로는 가족을 위한 희생양(scapegoat)이 되겠다는 생각에서‘고기값이라도 해보자.’즉 죽으면 보상금이라도 타서 부모님에게 효도하자는 자조적 농담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최소한 누구나“내가 무사히 돌아가면 우리 집에 황소 한 마리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파월 되었던1972년은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그때는 월맹 정규군이 마지막 총공세를 펼쳐서 한국군 사상자가 많이 나온 시기였던 만큼 진급을 위한 경력 관리를 하려고 하는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는 지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부대에서는 부대별로 할당이 떨어져도 지원병이 없으니까 할 수 없이 차출을 하는데 보통 평소에 부대장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병사를 보냈다.그래서 월남차출이 떨어지면 부대장에게 '앞으로 부대 생활 착실하게 할 터이니 제발 보내지 말아 달라'고 울고불고 사정을 하는 희극도 벌어지곤 했다.
후유증을 줄이기 위해 당사자에게는 바로 전날 통보를 해서 정신 없이 보내버리기도 했다.실제로 대대에서PX병으로 근무하던 대학 동창은 월남차출이 되어서 내일 떠난다며 연대본부에 있던 나에게 인사과에 돈을 써서라도 자기를 빼달라고 울면서 전화를 했었다.일개 사병인 내 입장에서 더욱이 출발 전날 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나는“야!인마 월남 간다고 다 죽냐?걱정 하지 말고 가.나도 곧 뒤 따라 갈게”라고 했다.실제로 당시의 나의 삶은 너무 단조롭다 못해서 권태롭기도 했고 아무 희망이 없는 삶이었다.
사실 나는 훈련소에 입대를 하자마자 기회만 있으면 월남으로 가려고 했던 참이었다.그러나 나는 연대장이 필요해서 특별히 데려다 놓은 필수 요원이었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그런데 마침 연대장이 사흘간 서울로 휴가를 간 기회에 월남차출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때는 이 때다’하고 지원을 했다.내가 지원을 하자 사병계는 이상하게 생각해서 인사과장에게 보고를 했고 인사과장은 부연대장에게 보고를 했다.
지금도 그 모습이 어제 일처럼 너무도 선명하다.인사과장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를 연대장실로 데리고 가서 부연대장에게"이 녀석이 연대장님이 월남 간다고 하는 것을 허락하셨다는데 어떻게 할까요?”하니까 부연대장은“그렇다면 허락하셨겠지.뭐?”라고 하며 눈을 껌벅이던 모습이.
아마도 내가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 좋은 부연대장은 나중에 연대장에게 혼 좀 났을 거다.요즘처럼 휴대폰이 있는 시대였다면 그런 거짓말이 통하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나 사흘 후에 연대장이 돌아와서 내가 없어진 것을 알더라도 연대장의 힘으로는 이미 사단 밖을 벗어나 있는 나를 도로 불러 올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저지른 행동이었다.항상 아는 놈이 범죄도 저지르는 법이다.
오음리 제7보충단에서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월남으로 떠날 날이 다가왔다.흰 색깔로 선명하게 백마가 그려진 부대마크가 달린 얇은 흑록색 정글복을 갈아입고 보니 기분이 좀 이상해지고 막연하기만 했던 월남이란 나라가 비로소 조금씩 피부에 닿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새벽녘에 우리를 태운 트럭들은 끝없이 노란 흙먼지를 피우며 구비 구비 꼬부라진 배후령 고개(일명 빼찌 고개)를 넘어서 춘천역에 도착했다.
춘천역에는 푸르죽죽하고 시커먼 군용열차가 색종이를 칭칭 감고 큼직한 태극기와 함께 머리와 꼬리에는 형형색색의 꽃다발이 걸린 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어울리지 않는 그런 군용열차의 모습이 내게는 꼭 거대한 영구차 같아 보였다.
춘천역 광장에는3군단 군악대가 쿵작거렸고,평소에 사병들을 보면 승냥이처럼 '뜯어 먹을 것 없나'하고 눈을 부라리던 헌병 녀석들도 그날만큼은 모처럼 상냥한 눈빛-사실은 불쌍하게 보는 눈빛이었겠지만-을 보내주었다.그러나 그런 모든 광경들이 정작 나에게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오직 나의 관심은 '과연 마지막으로 정희를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을지 없을지' 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훈련생 신분인 나로서는 막연히 오늘 출발하는 것만 알았지 부대가 몇 시에 출발할지 정희에게 정확하게 알려 줄 수가 없었다.정확하지도 않은 시간에 맞추어서 서울의 북쪽 끝인 구파발에서 춘천까지 오기는 어려운 일일 것이다.맞은 편에서 경춘선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하자(이 당시 경춘선은 단선이었기 때문에 반대편의 기차가 와야 출발 할 수가 있었다)간단한 환송식을 마친 군용열차가 드디어 출발할 시각이 왔다.
맞은 편 철로에 방금 서울에서 도착한 경춘선 열차에서 승객이 쏟아져 내리는 사이로 이쪽을 향하여 정신 없이 달려오는 하늘색 투피스를 입은 정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정희를 알아 볼 수 있었지만 정희는 똑같은 제복을 입고 창가에 매달려 있는 수백 명의 병사들 가운데서 나를 찾을 수 없었다.나는 통로에 서 있는 녀석들을 제치고 승강구로 달려가서 정희를 향하여“여기야!여기!”하고 소리를 질렀다.정희가 혼란스런 상황에서 나를 발견하고 다급한 표정으로 내가 있는 승강구 쪽으로 다가왔다.그러나 승강구 마다 헌병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승강구를 내려갈 수가 없었다.그런데 막 군용열차가 그 거대한 몸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우리는 그저 서로 황망한 시선으로 서로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순간 우리의 상황을 보고 감을 잡은 다른 병사들이 이구동성으로“태워!태워!”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그 소리에 홀려서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정희의 손을 붙잡아 승강구로 끌어 올렸다.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자 놀란 헌병이 제지를 하려고 열차에 올라타려 했다.그러자 승강구에 있던 파월 병사들이"어딜 올라와?개새끼들아!" 하며 발로 걷어차버린 것이다.이 광경을 보고 순식간에 주변의 헌병들이 달려오자 내가 서 있는 승강구로 몰려든 병사들과 기차에 올라 타려는 헌병들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평소 같으면 고양이 앞에 쥐처럼 헌병 앞에 주눅이 잔뜩 들 수밖에 병사들이었지만 그때는 보이는 것이 없었다.죽으러 가는 마당에 더 이상 헌병이 무서울 리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주변에서 높은 사람들을 비롯해서 많은 시민들이 보고 있는 판이라 헌병들은 평소처럼 거칠게 할 수 없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병사들은 개판을 쳐도 상관이 없기 때문에 상황은 헌병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는 군용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헌병들은 닭 쫒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어 버렸다.
베트콩보다 헌병을 먼저 물리친 전공(?)을 세운 병사들은 기세등등해졌다.우리가 객실에 들어서자 병사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거기 자리 비켜줘!”, “모포로 가려 줘!”하고 술과 과자를 가져다주고 난리도 아니었다.평소에는 지나가던 여자들만 보아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천박한 군바리 기질은 순식간에 어디로 가버리고 그 순간에는 모두 중세 기사가 된 것 같았다.어떤 병사들은 먹을 것과 음료수를 가져다주면서‘부산까지 가야 돼.절대로 내리면 안 돼!' 하고 후까시를 잡기도 했다.훈련을 끝내고 전장으로 가는 마당에’뭐 시비 걸 게 없나? ‘했던 병사들의 심리상태에서는 재미있는 판이 벌어진 셈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우리 둘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차분히 할 수 있는 상황이나 기분이 아니었다.우리는 상당히 난처한 입장에 빠져서 말도 못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우리들의 일은 이미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리 제대 전체의 사건이 되어 버린 것이다.열차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병력을 부산까지 수송하는 책임을 맡은 호송 장교 대위가 나타났다. 물론 그는 우리와 같이 월남으로 가는 사람이 아닌 군용열차를 관리하는 수송부대 장교였다.대위는 우리들에게 명령이 아닌 통사정을 했다.
“나도 여러분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그러나 규정상 군용열차에 민간인이 탈 수가 없다.그리고 용산에 도착하면 육군본부에서 고위 장성들이 나와 환송식을 하는데 이대로 타고 가면 나는 영창에 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수송 장교 대위가 통사정을 해도 병사들은 한 마디로'좆까지 마라!영창을 가면 네 놈이 가지 내가 가냐?’는 식이었다.이제는 다른 열차 칸에서 심심한데 재미있는 일 생겼다고 관광(?)을 오는 상황까지 벌어졌다.천 명의 젊은 병사들이 탄 군용열차에 젊은 처녀가 한 명 타고 있다는 것만 해도 관심거리일 터인데 전쟁터로 가는 군용열차이니 그 기분이 어떠했겠는가?그 시간만큼은 정희는 전체 병사들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한 참 있다가 스피커에서 점잖은 목소리로 방송이 나왔다.
“장병 여러분!나는 여러분과 같이 월남으로 가는 제대장 김OO중령이다.여러분과 나는 한 마음이다.그러나 어떻게 하냐?우리는 군인 아닌가?보안대가 모두 보고 있다.이 문제는 우리가 월남으로 간다고 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보안대는 월남에도 있다.여러분을 월남까지 인솔하는 것은 본관의 책임이다.여러분의 협조를 간곡히 부탁한다.이제 열차가 역이 아닌 곳에서 설 것이다.그 때 전우의 애인이 내릴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한다.”
우리와 같이 월남으로 파병되는 장교 가운데 가장 계급이 높은 중령이 공갈 반 호소 반으로 하는 소리였다.같은 말도 시어머니가 하는 말 다르고 친정어머니가 하는 말 다른 법이다.김 중령의 합리적이고 간절한 부탁이 있은 다음 분위기가 갑자기 수그러지기 시작했다.
방송이 끝나고 잠시 후 기차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더니 드디어 섰다.호송장교 김 대위가 다시 우리 칸으로 와서 정희 보고 내려 달라고 했다.다른 병사들이“그런데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역도 아닌데 여자를 혼자 내려놓는다는 말이냐?”고 시비를 걸었다.호송장교는“군용열차는 운행 계획에 없는 역에 세울 수가 없다.양해해 달라.”고 설명을 하고 정희에게 논두렁으로 조금만 가면 경춘 국도가 나오니 안심하고 내리라고 난처한 표정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열차가 선 곳이 마침 오른 쪽으로 굽어진 곳이라서 정희가 내리는 모습을 모든 열차 칸에서 볼 수 있었다.모든 병사들이 창문마다 승강구 마다 매달려서 정희에게 미친 듯이 손을 흔들어댔다. “영자야!말자야!순자야!”제멋대로 이름을 부르면서 마치 제 애인에게 작별이라도 하는 듯이“잘 가라!잘 있어라!”하고 소리를 질러댔다.어떤 놈은“고무신 거꾸로 신지 마라!”라고 소리를 질렀다.너무나 당황한 정희는 뒤도 돌아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논두렁을 따라서 걸어가고 기차는 서서히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그렇게 광란의 시간이 지나고 서울이 가까워지자 열차 안은 점점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버렸다.
박..ㅈㅎ
군용열차가 서빙고역에 멈추었을 때는 이미 날이 완전히 어두워진 밤이었다.샛노란 전등이 환히 켜진 플랫폼에는 춘천역의3군단 군악대보다 훨씬 세련된 육본 군악대가 뿡빵거렸고 허우대 좋은 육군본부 의장대와 옷깃에 별들이 반짝이는 고위 장성들이 도열해 서 있었다.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파월 장병 가족들이나 민간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헌병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는 가운데 공식 환송행사가 서빙고역에서 잠시 벌어졌다.이미 파월 장병을30만 명이나 보냈기 때문에 별 새로운 것도 있을 수가 없는 닳을 대로 닳아빠진 완전히 기계적인 환송행사였다.
행사가 끝나고 기차가 막 출발하려고 한 차례의 기적이 울릴 때였다.갑자기 아무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또 다시 벌어졌다.도대체 어떻게 삼엄한 헌병들의 경비를 뚫고 들어왔는지 어디선가 뚱뚱한 처녀 아이 하나가 갑자기 철로로 뛰어들더니 사색이 되어“오빠!오빠!”하고 울부짖으면서 열차 창문에서 제 오빠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그 여자애는 열차 창문마다 새까맣게 매달려 있는 똑같은 군복의 병사들 사이에서 제 오빠를 찾을 수가 없으니 거의 제 정신이 아니었다.아마 두 시간 전의 춘천역에서 정희의 심정이 그랬으리라!
그런데 헌병들이 미처 그 여자애에게 다가가기 전에 기차에서 한 병사가 총알같이 뛰어내렸다.필경 그 놈은 나보다도 훨씬 절박한 놈이었던 모양이었다.두 남매가 철석같이 달라붙은 채 철로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며 몸부림치는 것이 아닌가?무슨 절절한 사연이 있는지 두 남매가 처절하게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남매는 오빠가 군에 오기 얼마 전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서 고아가 된 처지였다는 것이었다.그 광경은 아무리 목석 같은 인간이라도 감정이 동요되지 않을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열차에 탄 파월장병의 눈에는 모두 이슬이 맺히고 마음 여린 병사는 새로 입은 정글복 소매로 연실 눈물을 닦아냈다.환송행사에 나왔던 높은 장교들도 제대로 쳐다보지를 못하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높은 사람들은 말은 못하고 헌병들에게 손으로 빨리 떼어 놓으라고 신호를 보냈다.
기차 안의1,000여 명 장병들이 쳐다보고 있는데 두 남매를 떼어 놓아야 하는 헌병들의 입장은 아주 난처했다. 결국 친절한 유치원 선생처럼 태도를 바꾼 헌병 장교의 간곡한 설득 탓에 드디어 남매는 떨어지고 오빠는 헌병들에게 마지못해 등을 떠밀려 승강구에 올랐다.그런 오빠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하는 듯 기차도 느릿느릿 출발하기 시작했다.멀어져가는 기차를 바라보면서 여동생이 철로의 자갈 위에 주저앉아서 발을 구르며 넋을 놓고 우는데 내 생애에 그렇게 절망적으로 우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오빠!오빠!”부르며 울부짖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사들이 하나 둘 눈물을 짓기 시작하더니 금방 돌림병이 번지듯이 열차 안은 너나 할 것 없이 오열하는 소리로 가득했다.여기저기서 울다가 코가 메여 코를 풀어대는 놈,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다가 슬픈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상이 누구에게라고 할 것도 없이 욕지거리를 해대는 놈,있는 대로 소주건 맹물이건 닥치는 대로 들이키는 놈 등등 열차 안은 통제 불능의 분위기가 되어버렸다.그 때 어느 열차 칸에선가 군가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그동안 훈련기간에 이가 갈리도록 불러서 듣기도 싫던 군가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갈수록 격렬해졌다.
마치 군가소리가 작으면 누가 때려죽인다고나 한 것처럼 모든 병사들은 모두들 악을 쓰는 듯 군가를 불러대기 시작했다. 1,000여 명의 병사들이 두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 것이나 두드리면서 바락바락 악을 써대면서 아는 군가라는 군가는 모조리 메들리로 불러 제켰다.마치 악을 쓰며 군가를 부름으로써 마음 속 밑바닥에서부터 밀려오는 허전함을 물리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우리를 태운 군용열차가 기적을 울리며 점점 캄캄한 어둠 속을 달리는 동안 악을 쓰며 군가를 부르던 병사들은 더 이상 목이 쉬어 군가를 부르지도 못하고 하나씩 지쳐서 잠에 떨어졌다.눈을 떠보니 기차는 이른 새벽 부산항의 제3부두에 도착해 있었다.
또 다시 간략하고 형식적인 환송식이 벌어졌다.부산에 있는 여고생들이 한 달에 한 번씩 있는 파월장병의 환송식에 순번제로 동원되어서 나눠가진 태극기 몇 번 흔들다 가는 것이 행사의 전부였다.드디어 배가 바다로 미끄러져 가고 육지가 점점 작아졌다.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는 나라 한국을 떠난다는 것이 시원했지만“드디어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살아서 돌아 올 수 있을까?
미군 수송선의 선실은 마치 영화 <빠비용>에 나오는 죄수 호송선 같았다.누에가 고치를 치기 위해 시렁 위에 누운 것처럼 병사들은3층짜리 철제 침대 위에 올라가서 잠을 잤다.코를 찌르는 바다냄새,병사들의 땀 냄새가 뒤죽박죽이었지만 전쟁터로 가는 길이었기에 불평스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 취재기는 특정 종교를 권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아닌, 순수하게 그 분만을 추종할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경건하게 읽읍시다.
10월 5일 경기도 용인의 한 교회...
이 곳에 초특급 VIP께서 방문하신다는 제보를 입수, 취재에 나섰다.
제1금융권도 무시 못할 정도로 큰 규모의 교회다.
ATM을 찍고 있는데 지하로 바삐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어 따라가 보았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인도하시는 '조용기' 목사님이었다.
내리는 모습을 찍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분이 오늘의 VIP는 아니시다.
현재 시간은 17시 54분.
본 행사에 해당하는 저녁 예배는 아직 시작할 기미를 안 보인다.
알고 보니 이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 책을 쓰셨는데
그것이 중국으로 번역 출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이번 저녁 예배를 특별히,
출판 감사 예배로 드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국민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 글도 기고하는 저명한 분이라 그런지
많은 축하 화환이 보였다.
엘리베이터에 안내문도 붙여 유사시 통제할 수 있도록 해두고
7층 출입을 제한하는 등 교회 측의 빈틈 없는 준비성이 엿보인다.
"초청자 분들은 성함을 말씀해주세요. 명찰 드리겠습니다."
1층으로 돌아왔다. 불우한 이에게 손을 내미는 예수의 동상 앞,
그리고 이 커다란 교회 건물을 짓는데 공헌한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 앞이다.
고급차들이 속속 도착한다.
마중 나온 이들과 악수를 하고는 예배당으로 향한다.
나는 왜 마중 안 해주냐는 듯 눈을 흘기며 또다른 고급차 오너가 지나간다.
교회의 방송팀은 카메라 테스트를 시작했다.
저녁 6시 22분이다. 혹시 그 분께서 이미 도착하셨나 불안해져서 예배 시간을 확인해봤다.
원래 예배 시간은 저녁 7시인데,
오늘은 10분 늦게 시작한댄다.
새누리당 소속의 황우여 장로님의 존함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이 분은?
요즘 마음 고생 심히 하신 남경필 도지사 님!
검소하게 카니발을 타고 오셨다는데 내리는 장면을 못 찍어드렸다.
이제 멍 때리지 말아야지.
신도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길 건너에서
주차장에서
시간은 6시 38분, 예배는 30분 가량 남았다.
경기도의 공직자들은 에쿠스보다 카니발을 애용하는 모양이다.
참으로 모범적인 모습이다.
이어 도착한 CBS 노컷뉴스...
제보를 받은 건 우리 만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 빨리 와 있었다.)
복잡한 와중에도 도로 통제에 만전을 기하는데
아이들이 참 안 도와준다.
'저 쪽 가서 놀아야 된다'
찬양을 시작했다.
한복을 입고 '환영합니다, 국민의 이름으로' 노래와 율동을 연습하는 아이들.
빨리 오셔서 이걸 보셔야 할 텐데...
난데 없이 나타난 지역난방공사 차량...
얼른 빼준다.
교회 셔틀 차량도 한 쪽으로 밀어놓고
경찰도 주위를 순찰 중이건만
아이들만 이 상황을 모른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발을 동동 굴러봐도
님은 오지 않으신다.
이미 시작했다.
혹시 무슨 일 당하신 건 아니겠지...
앗! 경호 차량이 붙은 에쿠스!
교회 뒤 주차장으로 바로 올라가시길래 얼른 쫓아 올라가봤다.
드디어 뵙게 되었다.
역대 가장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시어, 5년 동안 '국민과 희노애락을 함께 해오셨고
특별히 우리나라를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로 국격을 상승시켜서
국민들의 자부심을 한껏 드높여주신', 그리고 한 교회의 장로이기도 하신
대한민국 제 17대 대통령, 이명박 가카, 이 분이 오늘의 VIP이시다.
사진을 찍다 경호원한테 제지를 당해서 본지의 명함을 주며 인터넷 신문 기자라
(경호원 분께서 딴지일보라 그러면 모르실 것 같아서) 소개드려야 했었다.
알고 보니 교회 측에 외부 촬영은 없도록 해달라 요청했었다고 한다.
해서 보안상 문제되는 사진은 지우거나 블러 처리하여 올리고 있다.
기자 명함을 갖게 된 이후 가장 벅차오르는 순간이다.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예배당 안에서는 이미 조용기 '큰' 목사님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자리가 없어서 위층으로 가야만 했다.
착석!
느껴지시는가?
이 축복 받은
교회의 규모가!
담임 목사님이 잠깐 대기실(?)로 가시는 걸 보니 그 분의 도착을 전해들은 모양이다.
예배가 끝난 뒤 기념식이 있는데 거기서 격려사를 말씀하실 예정이다.
"모두 일어나셔서 박수로 맞아주시길 바랍니다."
화답의 미소로 주위를 밝혀주고 계시다.
(현직 대통령의 환함이 형광등에 비견될 수 있다면
이 분의 밝디 밝음은 UAE로부터 수주받은 원자로 내부의 그것에 빗대어 드리고 싶다.)
박수와 갈채가 계속 되는 와중에
맞은 편까지 걸어가셔서 미소를 보여주시는 여유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능숙한 매너에 얌전히 앉아있던 신도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나올 정도...
정가운데에 큰 목사님과 함께 착석.
망원 렌즈가 없는 게 이렇게 안타까웠던 적은 없었다.
"짧게 하는 이는 복이 있나니, 다시 초청을 받을 것이요..."
(좌중을 폭소케 한 이 분은 농림부장관을 지내신 김영진 장로님이시라는데 솔직히 정치인 얼굴 잘 모른다.)
간간히 클로즈업해주는 카메라맨의 센스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경필 도지사, 조용기 목사와 함께 4샷으로 잡히신 장면.
오늘의 포토제닉이다.
중국 출판사 대표란 분의 얘기가 끝나고
드디어 말씀하실 차례!
화동으로부터 꽃다발을 건네받으시고는 포즈를 취해주신다.
(여자 아이의 천진난만한 포즈까지 더해져 완벽한 그림이 되었다.)
사회자 왈,
"퇴임 이후에는 해외 초청으로 더욱 바쁘신데도 불구하시고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늦게나마 와주신 것이다!
이런 인격을 가진 분의 격려사를 혼자만 간직하는 건 죄일 것이기에
여기 전문을 공개한다.
길게 하면 초청 못 받는다 그래서 짧게 하겠습니다. (일동 웃음) 네, 오늘 참 우리 소강석 목사, 제가 아주 좋아합니다. 또 사실 여러분 다 좋아합니다, 제가. 장모님도 좋아합니다. 우리 소강석 목사가 나를 지지하지 않았는데 (일동 웃음) 알고 보니까 우리 장모님이 내가 대통령 된다고 기도 응답 받았다고 빨리 가서 밀어라 그래서 밀기 시작했다 그래요. 그래서 제가 장모님을 내가 모셨어요.
아무튼 저는,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우리 소강석 목사 아주 제가 특별나게 좋아하고 또 여러분 절 위해서 기도해주신, 기도 많이 해주신 걸로 제가 은혜 받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아주 감사를 전합니다. 조금 전에 제가 지방에서 올라오느라 조금 늦었습니다만은 옆방에서 티브이를 보니까 조용기 목사님이 말씀을 다 하셨더라고요. 조용기 목사님도 스토리가 많으신 분이었네요. 또 김삼환 목사님 또 스토리가 많아요. 그런데 두 분 다 스펙은 별로에요. (일동 웃음) 여러분 좋은 얘기하면 박수 안 치고 나쁜 얘기하면 박수 치네요. (일동 또 웃음) 아마 소강석 목사님도 내가 볼 때는 정말 스펙은 별 볼일 없다. 그러나 스토리는 매우 감동적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그래서 이 책이 중국에서도 발행된 게 아닌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독교 서적이 이제 많은 젊은이들이 21세기 소위 디지털 시대에 아주 귀중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 이 책이 중국에서 번역이 된 거 같고 또 출판사가 아주 잘 한 거 같아요. 내가 볼 때. 책 많이 팔아줬으면 좋겠어요. (통역사에게) 좀 통역 좀 하세요. (일동 웃음) 중국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게 되면 소강석 목사에 대한 인식도 좋아질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또 나아가서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도 달라집니다.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라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저는 소강석 목사님을 보니까 이 선배 목사님 깎듯이 하는 걸 알어요. 나 그거 놀랐어요. 그래서 아마 여기 오신 우리 조용기 목사님이나 김삼환 목사님, 정말 바쁘신 분들입니다. 교회 비우고 주일날 여기 와 있을 분들도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기꺼이 여기 오셨지 않나 이래 생각하는데 저도 이렇게... 좀 우리 교계가 약간 분열기가 있죠? 근데 우리 소강석 목사께서는 다 아래 위 화합을 하려고 이렇게 참 하는 것을 볼 때에 참 옆에서 보면서 참 잘 하고 있다. 이렇게 봅니다. 또 그러더라고요. 아, 기도 많이 드리는 목사를 좀 초청을 해야 된다고 날 이래 독촉을 해서 내가 떠나기 전에 모셨어요. 그래서 또 그러니까 남을 배려하는 거에요. 그런 분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열심히 또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 해야할 일을 하는 걸 보고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하는 일이다. 또 참 중요한 일이 아닌가 이렇게 보기 때문에 아마 하나님 보시기에도 잘 하고 있다 이렇게 하지 않을까 저는 그래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해야할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또 많은 더 감동을 줄 만한 스토리를 계속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미 어려서부터 젊어서부터 이 교회를 이렇게까지 되기까지 어느 하나를 계속 답을 하셨겠지만은 하나님도 열심히 하지 않고 딴 맘 먹는 사람을 복을 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정말 감동적으로 헌신적으로 이렇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계신 거 아닌가,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가끔 영상으로 설교하는 걸 봅니다. 그러고 와서 단상을 보니까 단상이 좁아서 갔다왔다 하다가 떨어질까봐 걱정이에요. (일동 웃음) 오늘 와서 보니까. 단상이 좁은데 보니까. 그런데 영상으로는 그렇게 안 보이더라고요. 아주 뭐 역동적으로 이렇게 하시고. 또 제가 금요 예배 이렇게 보는 걸 가끔 몇 개 이렇게 보기는 합니다만은, 아무튼 저는 계속 해서 소강석 목사님께서 어떤 감동적인 스토리를 계속 만들어 나가서 새에덴 교회 목회자로서 성공적 목회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계에 나아가서 우리 사회에 정말 제대로 역할을 해주셨으면 참 좋겠다. 이렇게 저는 생각을 합니다.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예. 개인의 심성이나 신앙 이런 걸 다 보고 단순한 믿음이 아닌 것이에요.
저도 이번에 그 미국에 가서 이제 기독교실업인이 간 세계 대회가 4년만에 열려가지고 거기 가서 이제 설교할 때 진땀 빼고 왔습니다. 우리 조용기 목사 외국 가면 영어 설교를 막 쉽게 하시는데 나는 사십 분 할려니까 진땀 빼겠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가서 보니까 우리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고요. 조금 전에 이 분이 설명했습니다만은 제가 ??(부정확한 발음)고 원조 주는 나라가 됐다, 그리고 가난하게 살다가 남 도와주게 됐다, 우리 소강석 목사 가난하다가 지금 이렇게 됐다, 이거 정말 스토립니다. 이거. 스토린데, 내가 오바마 대통령한테 딱 한 마디 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에 신세진 게 없다. 아, 그러니까 눈이 땡그래져가지고 내가 반미를 하려나보다 싶어서 깜짝 놀랬나봐요.
왜냐하면 하고 설명했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 미국 선교사들이 여자 선교사들이 헌옷을 박스에 많이 넣어 와서 우리 초등학교에 하나씩 준다고 학생들 운동장에서 줄을 쪽 섰는데 내가 바지를 하나 입으려고 사실 줄을 재빠르게 앞에 서야 되는데 내가 좀 소극적으로 뭐 좀 창피하다 그래서 뒤쪽에 섰어요. 그랬더니 내 앞쪽에서 물건이 다 떨어져 버렸어요. (일동 웃음) 물건이 떨어졌어요. 그러니 나는 좀 허망한 거라고요. 그래서 남 다 ???(부정확한 발음)질인데 내가 우리 운동장에 이래 서있으니까 여자 선교사가 와서 뭐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뭐라고 뭐라고 난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데 이거 뭐 주는 거 없이 말로 하니까 이게 뭐 형편이 없는 거에요. (일동 웃음) 그렇잖아요. 행함이 없는 믿음이 뭐에요. 헛거잖아요? 내가 미국 가서도 그런 이야기 했어요. 페이스 위드아웃 액슈얼리 이즈 댓! 말로 뭐 믿음이 있다.
그런데 선교사고 뭐고 날 쓰다듬는데 나는 눈치가 빨랐어요. 원래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눈치가 빠르잖아요. 말은 못 알아듣는데 위로할라카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내가 당시 미국에 헌 바지 하나 얻어 입지 않았으니까 개인적으로 신세진 게 없다, 그렇게 해명을 하고 그러나 국가는 큰 신세를 졌다. 육이오 전쟁 때 그 이름도 처음 듣는 나라에 젊은이들이 가서 삼만칠천 명이 죽고 수십만 명이 부상을 당하고 그런 내가 감사,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게 되고 사회주의를 택한 북한은 저렇게 됐고 우리는 이제 남을 도와주는 나라가 됐다 하는 걸 내가 자랑삼아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나보고 또 들었으면 가만히 있어야 되는데 그 핵심이 뭐냐 또 이러는 거에요. 또 갑자기 난 거기까지 생각을 안 했는데 (일동 웃음) 그래서 얼떨 결에 생각에 교육이다. 내가 이랬어요. 대한민국을 오늘 날 이렇게 만든 것은 교육이다. 제가 이야기를 해서 미치려 하니까 당신 저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 애들 교육 시키는 거 봤느냐,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가 밥을 못 먹어도 자식들 공부시키고 그 애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의 중심이 됐다. 이렇게 했더니 이 분이 미국에 돌아가자 마자 대한민국 교육이 제일이라고 계속 소문 퍼트리는 거에요.
그렇습니다. 대한민국 모두가 다, 소강석 목사도 가난 속에서 본래 이렇게 됐고 대한민국도 가난 속에서 이렇게 됐어요. 남을 도와주는 나라가 돼서 전후에 이차 대전 끝나고 원조를 받다가 원조를 주는 나라는 이 지구 상에 대한민국 하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인 거 같습니다. 이제는 소강석 목사님,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새에덴 교회는 물론이지만은 우리 교계 대한민국에 많은 갈등 있는 대한민국 사회에 큰 감동적 스토리를 많이 만들어주시길 제가 기도드리고 하나님께서도 아마 그런 역할을 주지 않겠냐고 제가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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