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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마빡 이야기/2014

딴지일보 마빡 2014. 10. 07

by 꾸물 2021. 1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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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투불패]형아가 하는 가게 자랑 좀 할게

 

기사 - [독투불패]형아가 하는 가게 자랑 좀 할게

2014. 10. 07. 화요일 육두불패 공 zone 편집부 주 이 글은 육두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 하루하루가 이상하게 좆같아. 뉴스라도 하나 뜨면 좆같은 마음을 다 잡을 수 없어. 그리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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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07. 화요일

육두불패 공 zone

 

 

 



편집부
 

이 글은 육두불패에서 납치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 하루하루가 이상하게 좆같아. 뉴스라도 하나 뜨면 좆같은 마음을 다 잡을 수 없어. 그리고 외롭기까지 해. 그 많던 친구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세상엔 일베같은 어린 아이들만 넘치고 있어. 손님으로 오는 대학생 어린 아해들도 모두 일베스러워진 참 희한한 세상이야. 

 

요즘 너도 그렇다면, 너도 그런 느낌이라면, 우리는 딴지키즈 란 말이지. 

 

지금 이 게시판에서 놀고있는 니들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외로워서 여기 한 번 들려본 딴지키즈, 바로 너에게 쓰는거니까 잘 들어주라.

 

 

어릴 적 피씨통신 시절부터 딴지를 접했고  어준이형은 그냥 별것두 아닌게 존나 대단한 엉아였지. 시민사회단체 한답시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때 어준이형을 3번 정도 알현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한 말이 진심이었다.

 

"우리 세대에 정신 제대로 박힌 놈들은 다 엉아가 키운거나 마찬가지에요. 저희도 마찬가지구요 "

 

맞아. 90년대 후반부터 딴지는 대한민국 레알 오피니언 리더들의 집합소였어. 한때 다음 아고라나 지금 일베 또는 오유같은 한정적 집단이 아닌,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었던 그런 현실적 에너지의 응집태였어. 대한민국 역사상 대한민국 최고 지성의 집단은 단 하나, 딴지 밖에 없거든.

 

일베를 눈팅해보면 과거 딴지의 온갖 정보의 집합소 역할을 하고 있더라고. 물론 '재미있게'를 놓치지 않고 자신들만의 언어를 통해서 말이야. 일베 조차도 딴지의 한 아류일 뿐이라는거지.

 

그렇게 말야,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치열하게 논쟁하지만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던 우리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난 이 의문이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아. 그래서 그냥 내 근황을 우선 밝혀보고 다시 찾고 싶어졌어. 그때의 우리들은 분명 여기저기에 다 있을테니까.

 

우선 내 소개를 해야겠지?

 

난 77년생이고 인천 살아. 

 

딴지랑 연관된 부분을 밝히자면 당연히 열혈회원이였고, 딴지에서 명랑완구를 발매하자마자 구매했던 사람 중 한 명이야.

 

그리고 지금은 과거 데이터가 사라져서 없지만 조계사 빨갱이 난입사건이라고 김장행사를 기획했었던 적이 있어서 (사진 밑의 링크를 눌러 보시라_편집자) 파토 형님도 몇차례 알현한 적이 있었어. 2009년 12월이니까 벌써 5년전이네 씨바. 

 

출처 - [현장출동] 조계사 빨갱이 난입 사건

 

기억하죠, 파토형님? 그 진알시라고, 청년들 중에 날나리 새끼 말예요.

 

하튼 지금은 끔찍하지만 그때 명바기는 차라리 귀엽기라도 했던 것 같아. 그리고 당시엔 우리 힘이 덜 빠져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지금 나는 뭘하냐. 

 

난 지금 인천에서 레스토랑을 해.

 

 

그거 자랑하려고 글을 올렸냐구?

 

아니. 첨부터 얘기했지만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걸 보여주고 딴지키즈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쓰는 거라고.

 

레스토랑 이름은 '착한소비프로젝트 공존' 이야. 이제부터 잘 봐.

 

 

 

 

 

[비화]안티 개스통 할배의 월남참전기 <1>

 

기사 - [비화]안티 개스통 할배의 월남참전기 <1>

2014. 10. 07. 화요일 sydney 편집부 주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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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07. 화요일

sydney

 

 

 



편집부 주

어느 날, 회사 대표메일로 날아든 한 통의 메일,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다 메일을 보낸다는,
딴지일보 창간부터 독자이며 연식 좀 나간다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편의 글과 함께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이런 류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곳은 딴지 밖에 없을 것 같아서 보냅니다.
젊은 세대들이 알아야 할 월남전의 진실, 이제까지 아무 곳에서도 알져지지 않았던
월남전의 실상들을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흥미위주로 썼습니다."

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꿀잼 허니잼이니
함 읽어보시고 의견들 주시면 좋고.

 

 

 

1965 9 20일, 역사상 최초로 첫 전투부대인 해병대가 월남에 파견되는 결단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환송사를 읽어내려 가다가 그만 연설문을 놓쳐 원고가 연단 아래로 날아갔다. 주변의 별들은 바람에 굴러 다니는 연설문을 잡기 위해서 네 발로 기어 다니고 박 대통령은 그 모습을 태연히 지켜보고 있었다.

 

결단식을 마친 병사들이 막사로 돌아와 보니 갑자기 막사 안이 어두워져 있었다. 방금 낭독 했던 '자유의 십자군'이니, '평화의 사도'니 하는 미사여구가 무색하게 보안상의 이유로 창문을 모두 합판으로 가려버렸고 출입구를 모두 막았기 때문이었다. 막사 밖에서는 대통령이 인근에서 동원한 여고생들에게 둘러싸여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금년은 1964년 시작된 국군의 월남참전이 50주년 되는 해이다. 나의 월남전 이야기는 대양의 한 바가지 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한 바가지 물에서도 바닷물의 기본적인 속성은 찾을 수 있다.

 

 

초대 월남전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이 전쟁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이루어야할 만한 목표가 없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5,099명이 희생 되었다.

 

1970년대 미국은 CBS에서 방영한 한 편의 월남전 다큐멘터리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존 로렌스라는 기자가 월남의 한 중대에 들어가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실상을 그대로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작전을 위한 부대이동을 앞두고 상부에서 이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산길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병사들이 이를 거부하는 장면이 그대로 전파를 타고 나갔다. 부대원들은 베트콩에게 훨씬 익숙한 지형인 산길을 택하는 것은 아군이 공격 당할 가능성이 많아서 자살행위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비록 명령위반으로 감옥엘 가더라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월남전 당시, 정글에서는 절대로 남이 갔던 길은 가지 않고 새로 길을 내면서 가는 것이 상식이었다. 왜냐하면 적이 어디에다 매설물을 설치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찰리 중대>에서 공공연히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미군의 행태가 보도되자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전쟁의 현실은 그런 것이다.

 

사람을 죽일 때는 상대가 멀수록, 보이지 않을수록 쉽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공군, 해군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적다고 한다. 일단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판정을 받으면 치료가 필요한데, 아예 후방으로 빼버리면 다시는 복귀를 못하기 때문에 통상 3일 후에는 원대복귀를 시킨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월남전이 전면전이 아닌 게릴라전이어서 적과 대면할 기회가 적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공식집계에 의하면 베트남전에 참전한 8년 동안 한국군이 사살한 적군의 숫자는 4만 명이다. 그렇다면 4만 명을 죽이는 현장에 있었던 병사들의 심리 상태는 어떠했을까?

 

월남전에서 십자성 부대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는 부상 전우들을 방문하는 것이 내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부상병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입원한 환자들 가운데 자기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다고 이야기하는 전우는 거의 없었다간혹 자기가 베트콩을 사살했을 것이라고 믿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군인이 팔자일 것 같은' 전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진짜로 자기가 쏜 총에 적이 맞아 죽었을 것이라고 인정하기를 꺼려했다. 그것이 인간이다.

 

먼저 밝힐 것은, 나는 전장에서 적과 조우하는 직접적인 전투는 해보지 못했지만 적이 나타날 가능성에 대비하는 매복과 정찰의 경험은 있다. 즉 전투 준비의 심리적 경험은 있되 직접 전투의 경험은 없다는 것이다. 전투 준비의 심리와 직접 전투의 심리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또는 그것이 계량이 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막상 적이 내 눈 앞에 나타났다면, 그때 나의 심리는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용기가 더 생길까, 불안이 더 앞설까' 하는 것이다. 만일에 모든 병사가 전투를 앞두고 공포심에 사로잡힌다면 전쟁은 수행될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구분 되어야 할 것은 전투에서 타의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병사들과 자의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더 큰 지휘관의 심리 차이다. 전투를 앞두고 느끼는 지휘관의 부담감과 일반 병사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아무래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타의적으로 움직이는 일반 병사들이 느끼는 공포심이 더 클 것이고 전투의 결과에 따라서 자신의 앞날이 달려 있는 지휘관은 보다 계산적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냉철한 지휘관을 만나도 정작 죽어 나가는 것은 병사들이다.

 

미국은 월남에서 1 700억 달러의 전비를 소모했고 전쟁이 끝난 뒤로도 월남전 참전 군인을 위해 2천억 달러를 더 지불했다. 1982 11월 헌정된 월남전 참전 기념관은 280만의 생존 귀환자들에게 통곡의 벽이었다. 그중 80만의 귀환 군인이 전후 정신질환과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렸고, 1970년대 초만 해도 수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퇴역군인 중 약 6만 명이 자살했다. 이 숫자는 실제로 전쟁기간에 죽었던 군인들의 숫자보다 많은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나는 지금까지 월남전에 참전했던 전우들 가운데 TRAUMA(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 편집부 주)에 시달린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더 독종이어서 그런가? 아니다. 한국인은 만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서 면역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사는 것이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원인이 분명치 않게 애매하게 겪는 일과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겪는 일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이 다른 법이다. 한국군의 경우 대게 '외국에 대한 막연한 선망', '돈을 벌어야겠다' 등등의 이유로 지원을 했었다. 그러므로 월남전을 바라보는 '내 일이 아닌, 남의 일'이라는 시선이 객관적인 자세를 갖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 것은 아닐까? 한국 군인과 비슷하게, 2차 대전을 치룬 일본 군인들이 TRAUMA에 시달리는 비율이 낮은 것은 스스로를 윤리적인 책임의 주체로 설정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주장을 접한 기억도 있다. 한마디로 전체주의에 빠진 윤리적 감수성이라고 할까?

 

TRAUMA라는 측면에서 월남전의 결과를 객관적으로 보면 미국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개인적으로 겪고 있고, 월남은 그것을 민족적으로, 집단적으로 겪고 있다. 때린 놈은 개인적인 TRAUMA를 느끼지만 맞은 놈은 집단적인 TRAUMA를 느낀다는 것이다. 전쟁의 상처가 개인적으로 내상을 입히기도 하지만 민족이나 국가도 집단으로 내상을 입는다.

 

치렀던 전쟁의 성격, 정도에 따라 후유증도 다르게 나타난다. 월남전은 형식상 내전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외세와의 싸움이었고 한국전은 유엔 16개국이 참전하고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기본적인 성격이 내전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외세와의 싸움이 아닌, 우리끼리 싸우다 지친 한국은 서로 간에 의심만 늘었다.

 

 

 

 

 

[현장스케치]외출

 

기사 - [현장스케치]외출

2014. 10. 07. 화요일 퍼그맨 편집부 주 이 취재기는 특정 종교를 권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아닌, 순수하게 그 분만을 추종할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경건하게 읽읍시다. 10월 5일 경기도 용인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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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07. 화요일

퍼그맨

 

 

 



편집부 주

이 취재기는 특정 종교를 권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아닌, 
순수하게 그 분만을 추종할 목적으로
쓰여졌습니다.

경건하게 읽읍시다.


 

 

 

10월 5일 경기도 용인의 한 교회...

 

이 곳에 초특급 VIP께서 방문하신다는 제보를 입수, 취재에 나섰다. 

 

 제1금융권도 무시 못할 정도로 큰 규모의 교회다. 

 

 ATM을 찍고 있는데 지하로 바삐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어 따라가 보았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인도하시는 '조용기' 목사님이었다.

 

내리는 모습을 찍지 못해 아쉬웠지만 이 분이 오늘의 VIP는 아니시다. 

 

현재 시간은 17시 54분. 

 

 본 행사에 해당하는 저녁 예배는 아직 시작할 기미를 안 보인다. 

 

알고 보니 이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 책을 쓰셨는데 

 

그것이 중국으로 번역 출판...

 

이를 축하하기 위해 이번 저녁 예배를 특별히,

 

 출판 감사 예배로 드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국민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에 글도 기고하는 저명한 분이라 그런지 

많은 축하 화환이 보였다. 

 

엘리베이터에 안내문도 붙여 유사시 통제할 수 있도록 해두고 

 

7층 출입을 제한하는 등 교회 측의 빈틈 없는 준비성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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