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로도 함 가볼까 아니면 그리스로 다시 돌아가 볼까 하다가 어째 또, 또, 또, 절대왕정의 그때로 끌려들어 가게 되었더랬다.꿈도 희망도 없다.
근대정체론의 종결자 몽테스키외를 다루는 만큼 간단히 흐름을 정리해보자. 16세기 초반 마키아벨리는 교회와 정치를 분리하고, 유능한 군주상을 그렸다. 17세기 초반 홉스는 이걸 꿀꺽 받아서 왕 아래의 평등과 법에 의한 통치를 구상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 더는 왕을 믿을 수 없었던 로크는 의회를 중심으로 한 권력의 분립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18세기 초반 몽테스키외는 이에 필을 받아,하나 받고 하나 더!라는 정신으로 사법권을 독립시켜 삼권분립의 원칙을 만들어냈다.
몽테스키외 (1689~1755)
공화정체에서는 덕성이, 군주정체에서는 명예가 필요한 것과 같이 전제정체에서는 공포가 필요하다. 전제정체에서는 덕성은 전혀 필요하지 않고, 명예는 위험하기까지 할 것이다.
-몽테스키외 지음, 이명성 옮김, <법의 정신>, '제3편 세 가지 정체의 원리', 홍신문화사, p.34
군주정체나 전제국가에서는 그 누구도 평등을 바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월을 지향한다. 가장 낮은 지위의 사람들도 그런 환경에서 벗어나려 하는데, 그것은 남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이다.
-<법의 정신> '제5편 입법자가 제정하는 법은 반드시 정체의 원리와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 p.51
절도 있는 국가에서는 법은 어디서나 지혜롭고, 누구나 알 수 있다. 따라서 아무리 하급 관리라도 그 법을 이행할 수 있다. 그러나 전제국가에서는 다르다. 법이 단지 군주의 의지일 뿐이므로, 군주가 제아무리 지혜롭다 해도 관리로서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의지를 따라갈 수 없는 것이다.
-<법의 정신> '제5편 ', p.72-73
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제 다들 아시리라. 로크와 몽테스키외 사이에는 둘에서 셋으로라는 단순한 버전업 이상의 차이가 있다. 도시로 부가 몰려들고, 그에 따라 터전을 잃은 하층민들도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화끈하게 큰 일을 벌일 때마다 공공부채는 쌓여가고 뭐 그런 흔한 공통점을 제외하면, 18세기 초반을 전후로 한 영국과 프랑스는 너무나도 다른 나라였다. 프랑스는(아직)왕의 목도 못 잘라봤고, 신 귀족(법복귀족)을 중심으로 신분제도 견고했다. 게다가 일상세계의 지배자라 불릴 만큼 교회 역시 여전히 만만치 않은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8세기 프랑스의 하층민들
법복귀족 출신으로 거의 전형적인 엘리트코스를 밟을 '뻔' 했던 몽테스키외는 당시 프랑스 상류사회에 만연했던 특권의식에 진저리를 치고 법관직을 팔아치운 후 이 책을 쓰는 데 인생을 바치게 된다. 루소처럼 대놓고 돌직구를 던져대지는 않지만, "법의 정신"에서는 자국 프랑스를 폭풍 디스하는 대목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요약하자면 왕(루이 15세; 무능력과 무책임으로 악명높지만, 그에게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더랬다. 앞선 세대의 그림자가 너무 컸던 것. 왕위와 더불어 궁정의 관료들과 법복귀족, 부채도 함께 물려받아야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는 손을 놓아버린 건 사실)에게는 명예가 없고 귀족에게는 덕성이 없으니 프랑스는 전제 국가라는 거다. 그럼 교회는? 옛날 옛적 언젠가에는 권력을 견제하는 역할도 했었더랬지.마봉춘처럼
계몽주의자였던 그에게 교회의 권력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특권층에게 모든 권력을 줘서도 안 되었다. 하지만 옆 나라의 정치변혁과정을 보아하니, 급격한 변화는 피와 혼란으로 얼룩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는 현존하는 틀의 연장선상에서, 그러나 당시의 계몽사상가들에게조차 파격적이었던 제안을 한다.바로 재판권을 평민들에게 넘겨주자는 것이었다.
제 1신분 성직자, 제 2신분 귀족, 제 3신분 그 외 모든 사람
재판권은 상설적인 원로원에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해마다 일정한 시기에 법률이 정하는 수속에 의해 필요한 기관에 존속하는 법정을 구성해야 하며, 또 그러한 시민단체로부터 선출된 사람들에 의해 행사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몹시 두려워하는 재판권은 특정한 신분이나 특정한 직업에 결합되지 않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은 것이 되어 버린다. 사람들의 눈앞에 항상 같은 재판관이 있을 일이 없고, 사람들은 재판관직은 무서워해도 재판관은 무서워하지 않게 된다.
중대한 공판에서 범죄인은 법과 협력해서 스스로 재판관을 선출해야 한다. 또는 적어도 많은 수의 재판관을 기피할 수 있어서 남은 사람이 그가 선택한 사람으로 간주되어도 좋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 '제11편 국가조직과의 관계에서 정치적 자유를 형성하는 법', p.162
영국의 계몽사상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또한 신분제 하의 법률가이기도 했던 몽테스키외는 법률체계를 사회계약에 기초한 원칙의 차원으로만 바라볼 수가 없었다. 법은 곧 정의가 아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 하나였으며, 또한 권력을 제힘으로 실현하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사회계약이 유효하려면 법체계도 사회적 합의에 바탕을 두어야 했다. 몽테스키외는 로마의 배심원제 등을 예로 들어,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어떻게 정치적 결정권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나간다.
명망과 재산을 갖춘 귀족과 시민의 대표로 구성된 의회가 법을 제정하고, 평민들로 구성된 재판정이 심판한다. 그리고 공권력을 지닌 왕이 공공의 결정을 실행한다. 만약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높으신 분-높으신 분-높으신 분으로 구성된다면왕-귀족-교회의 나눠 먹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동일한 인물이나 세력에 의해 세 가지 권력 중 둘 이상이 장악된다면 삼권분립은 단순한 형식에 불과해진다.
공화정체에서 과도한 권위가 갑자기 한 시민에게 부여되면 일종의 군주정체 혹은 군주정체 이상의 것이 형성된다. 군주정체에서는 법은 국가 구조의 결함을 메워 주거나 아니면 그것과 조화를 이루고, 정체의 원리가 군주를 제약한다. 그러나 한 시민이 과도한 권력을 장악한 공화정체에서는 법이 그 점을 전혀 예상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을 제약할 어떤 수단도 없으므로, 그 권력의 폐해는 보다 더 크다.
- '제2편 정체의 본성에서 파생되는 법', p.23
몽테스키외가 법에는 사회가 투영된다고 생각했다는 점은 꼭 기억해둘 만 하다. 사회가 잔인하다면 법도 잔인해진다. 똑같은 법 조항이라도 온갖 사회적 편견, 통념, 가치관, 사고방식 등에 의해 다른 의미를 갖는다. 정의란 무엇이냐는 질문은 법이 아니라 교육과 토론의 몫이었다. 법의 정당성은 폭넓은 합의에서만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공공의 의사결정을 대리할 대표자를 선출할 권한 이상으로 직접적인 의사결정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했다.
자유로운 국민에게는 개인적인 의논의 좋고 나쁨은 대개의 경우 아무래도 상관없으므로, 시비를 따지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거기서 자유가 생겨나고, 그 자유가 이런 토론의 결과를 보장해 준다.
이와 같이 전제정체에서도 사람들의 토론이란 좋은 나쁘든 모두 해롭다. 사람들이 이 정체의 원리에 대해 따지는 것만으로도 타격을 받는 것이다.
- '제19편 국민의 일반정신과 습속 및 생활양식을 형성하는 원리와 관계되는 법', p.309
기강이 느슨해지는 원인을 살펴보면, 그것은 범죄를 처벌하지 않은 결과일 뿐 형벌을 경감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 ) 부패와 타락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국민이 법을 준수하지 않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국민이 법에 의해 타락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고칠 수 없는 병폐이다. 왜냐하면 병의 근원이 치료법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 '제6편 민법 및 형법의 단순성, 재판의 수속 및 형의 결정 등에 관한 여러 정체 원리의 귀결', p.91-92
그럼 몽테스키외가 말하고자 했던 '법의 정신'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유추하실 수 있을 듯싶다.가장 중요한 원칙은 법이란 쉽게 쓰여야 한다는 것이었다.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가급적 간결하게, 일상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의미 그대로 사용해서 써야 한다. 여느 지식이나 사업이 그러하듯, 법도 어렵고 난해하다면 소수에게 독점될 수밖에는 없다. 특히나 법치국가에서 법의 독점과 권력의 독점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은 굳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
법은 쉽게 쓰여야 한다.
그리고 법은 자의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명확하되, 너무 세세한 규정이어서는 안 된다.왜냐하면 법은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변경되어야 하고, 예외나 제한, 수정이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반드시 효과가 있어야 한다. 불필요하거나 지켜지지 않는 법은 법체계 전체에 대한 존중을 약화시킨다.
정체의 원리가 일단 부패하면 가장 좋은 법도 악법이 되어서 국가에 위배된다. 그 원리가 건전하면 악법도 좋은 법의 효과를 가진다. 원리의 위력이 모든 것을 이끄는 것이다.
- '제8편 세 가지 정체의 원리의 부패', p.126
(그러나)유럽(프랑스)에서는 군주의 포고는 그것을 읽기도 전부터 사람들을 괴롭힌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필요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결코 우리 신민의 필요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 '제13편 조세의 징수 및 국가 수입과 자유의 관계', p.219
타락하는 것은 젊은 세대가 아니다. 그들이 방황하는 것은 어른들이 이미 부패해 있을 때뿐이다.
- '제4편 교육법은 정체의 원리와 관계가 있어야 한다', p.43
불경죄의 부당함이라든지, 노예제나 통상, 상속, 공채 등과 관련된 법을 살피면서 절대왕정과 중상주의, 신분제의 면면들을 아닌 척 골고루 씹어 드시는 솜씨를 모두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잔변을 남기지 않고 화장실에서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이쯤에서 그만. 아무튼 몽테스키외가 이야기했던 삼권분립은 세 가지 권력이 서로를 견제할 수 있을 만큼 동일한 무게를 가질 수 있는지, 또 왕정이 폐지된 이후의 정치에서 행정부와 입법부가 과연 나뉘어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여러모로 비판받고 또 대안이 고민되어왔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런 거다. 몽테스키외의 생각은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몫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의 사회를 '가난에조차 참가할 수 없는' 사회로 보았다. 삼권분립이건, 사권분립이건, 오권분립이건, 혹은 지방분권이건, 형식이야 어떠하든, 실질적인 결정이 소수의 손에 달려 있다면 몽테스키외의 구상과는 거리가 멀다. 음… 너무 진지했나? 게임으로 치자면,
"쪼렙도 유저다! 이거뜰아."
라는 뭐 그런 이야기. 중세법의 변천 과정에 대한 설명 중에 눈길을 끌었던 문장으로 끝맺고자 한다.
요즘 우리집 남자들은 <불멸의 이순신>을 다시 본다. 그런데 나는 조선 최악의 임금 선조를 보고싶지 않아서 같이 보고싶지 않다.
조선 제 14대 임금 선조는 최악의 조건을 두루 갖춘 임금이다. 무능력한데 오래 살았고 신하들 잘둔 덕에(?) 죽을 때도 왕이었으니까.
선조는 1552년에 태어나 1567년부터 왕이 되어 1608년까지 조선의 왕이었다. 할아버지 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아들, 그 중에서도 위로 형이 둘 있는 막내였다. 아버지도 적통이 아니고 아들도 적통이 아닌 흔히 말하는 방계 출신 제 1호다.
역사에는 정통성에서 두 계단 아래인 선조를 왕위에 세우면서 선왕 명종의 뜻이라는 명분을 내세웠는데 사실은 나이 제일 어리고 더 정통성 없는 왕을 골라야 자기 말을 잘 듣고 자기네 기득권을 대대손손 이어갈수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어서가 아닐까 한다. 그런 면에서는 명종 부인 인순왕후 세력이 선조를 찍었다고 보는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이렇게 왕이 된 선조는 죽는 날까지 정통성 없는 권력 컴플렉스와 그 합병증인 '나보다 능력있는 놈에게 자리를 뺏길것 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영토를 다스렸다. 동물의 세계에서 늙어가는 우두머리 사자가 자기 무리 내 젊은 수컷을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적대자 1호 정여립
정여립은 1570년 25세에 과거에 급제한 수재로 이이의 문하에 있으면서 "공자는 다 익은 감이요 율곡은 덜 익은 감"이라는 등 열혈 율곡당, 즉 서인이었다가 동인이 중앙정계를 장악하는 것을 보고는 누구누구처럼 당을 바꾸어 열혈 동인당이 되어 율곡을 씹기 시작했다. 적진에서 넘어온 사람이 빨리 자리를 잡기 위해 그렇듯 이제는 열혈 안티 율곡(서인)의 기수가 되었던 것이다.
인재들을 직접 가르쳐 키웠던 정조와는 달리 그럴 능력도 배포도 없었던 선조는 나이도 엇비슷한데다 능력잇는 정여립이 고와보일 리 없었을 테고 게다가 중앙 정계의 판세에 따라 제빨리 줄을 갈아타는 권력에 대한 기민성도 경계했을 것이다. 내가 틈을 보이면 언제든 나를 칠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적대감은 둘째치고 내가 실수라도 하면 꼬투리라도 잡아서 왕을 갈아치울지도 모른다는 권력 본능이 발동했다.
서로 물어뜯게 할 견제세력이 없는 한 최고권력자에게 위협감을 주는 능력있는 자는 발탁될 수 없는 법! 정여립은 끝내 낙마하고 만다!
그런데 문제는 정여립이 조용히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그가 군사를 조련해 한양을 정복하려 했다는 것은 믿거나 말거나지만 신원 복원 운동, 내시 자기 세력 규합 등을 통해 권력에 편입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선조는 그 싹까지 자르려 했다. 즉위 당시 윤원형 일파를 견재하기 위해 재야 사림들을 등용하면서 동인과 서인이라는 양당체제를 만들어 주었더니 동인이 지나치게 커지자 정여립을 이용해 동인을 제거하고 서인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정치적 의도도 다분했으리라는 게 내 생각이다.
적대자 2호 이순신
어느 분이 이순신의 전공을 논하면서 넬슨은 나라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고 이순신은 혼자 싸웠기 때문에 이순신이 훨씬 대단하다고 평했다. 나라를 지키는데 나라의 지원을 못 받는 것 그것은 조선시대 때도 있었던 우리 역사의 전통인 모양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고 창을 외부로 돌리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한 쪽은 양당 중 서인이었다. 십만 양병성을 주장한 이이가 그 대표주자다. 그밖에도 일본에 다녀온 통신사 등 중 서인 계열들은 다 안보위협을 주장했다.
하지만 동인에게 힘을 실어주었던 선조는 '국방 이상 무'라며 동인 손을 들어주고야 만다. 왜구와 환관들 때문에 정신 못 차리던 명과 4군 6진이 유명무실화되고 있는 틈을 타 여진족이 뭉치면서 후금의 기틀을 마련해 가고 있는 것도 묵살하고 '북쪽 안보도 이상 무'라는 말에 혹한 것처럼. 강력하게 키워 놓은 군대를 장악하는 사람은 곧 나의 적이라 생각해서 그랬을까? 지나친 억측이라 해도 할말은 없다.
그렇게 임진왜란은 터졌고 불방망이라는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은 신립의 처절한 저항 말고는 별 어려움 없이 걸어서 도성을 점령했고, 선조는 남몰래 의주로 도망쳤다. 한국전쟁 때 이승만이 국민을 안심시켜 놓고 몰래 부산으로 튄 것처럼.
이순신은 이 때 등장해 남해와 서해의 바다를 장악함으로서 일본군의 병력증강과 식량보급을 차단함으로서 전쟁에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전쟁에서 칼을 쥔 자는 책임을 물어 우두머리를 바꿀 수도 있다는 공포심과 잘난 이에 대한 열등감이 스물스물 이순신에게 촉수를 뻗었고, 이순신 같은 장수보다 힘이 없어서 조금만 도와주는 척 해도 말 잘 듣는 쪽, 선조와 그 떨거지들을 선택한 명의 뒷배도 있고 해서 선조는 정여립처럼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한다. 여기서 다시 오버랩 되는 그분 초대 대통령 이승만. 그분도 김구나 조봉암 같은 사람들을 적극 제거했다. 스펙에서 딸리는 기업 총수가 스펙 좋은 아랫사람에게 느끼는 그런 모멸감 내지 불안감, 열등감 등등이 한 몫했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거기다 김구나 여운형보다 말 잘 듣고 능력 없는 이승만을 선택한 미군정의 비호가 있었지 않은가! 역사는 정말로 돌고 도나보다!
대학 다닐 때는 이순신이 참 싫었다. 나라가 개떡같고 나라는 널 버렸지만 너는 끝까지 절대충성하는 아름다운 국민이 되라는 선전물의 표상 같아서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우리가 이순신을 그렇게 이용한 위정자들을 미워해야지 왜 엄한 이순신을 미워해야하는가! 물론 그가 완벽하다고 말하진 않지만 그의 업적을 깎아내려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죽을 만큼 얻어맞고 나을만할 때 딸랑 배 열세 척으로 명량대첩을 이뤄낸 이순신에게 내려진 '면사첩' 죽음을 사해준다는 종이 쪼가리 하나! 기르던 개가 마음에 안 든다고 개 패듯 패놓고 집에 든 도둑 잡아주니까 이제 맞을 짓 하지 말고 이런 것만 하라고 머리 쓰다듬어 주는 주인 같은 모습이다. 지가 잘못해놓고 용서해준다고 한마디 하는 우리네 사법 심판 같은 짓을 선조가 해버리고 말았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노량해전을 다룰 때 이순신은 스스로 갑옷을 벗는다. 내가 봐도 이순신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었을까 한다. 전쟁에서 이기면 나중에 선조와 명에게 맞아죽을 것 같고, -아니 멸문지화라는 걸로 연좌죄까지 걸 지도 모른다- 질 수도 없는 상황, 진퇴양난 속에서 그가 할수 있는 선택은 자살이지 않았을까. 다행히 요즘은 이순신의 백의종군도 다루지만 이런 얘기도 많이 하니 대놓고 이순신을 미워할 필요가 없다. 참 다행인 세상이다.
독립운동 변변이 안 하고도 초대 대통령이 되어 저보다 잘난 놈들 다 죽이고 역사 정리 제대로 못해 아직도 서북청년단 운운하는 세상을 만든 이승만 대통령과 능력없이 왕위에, 그것도 너무나 오래 앉아서 잘난 놈들 다 제거하고 전쟁 후까지 오래오래 살아남아 역사의 흐름을 막아버린 선조, 참 많이 닮지 않았나?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 남편에게 읽어줘야 하나
애절양
갈밭마을 젊은 여인 울음도 서러워라 현문 향해 울부짖다 하늘 보고 호소하네
군인 남편 못 돌아옴은 있을 법도 한 일이나 예부터 남절양은 들어보지 못했노라
시아버지 죽어서 이미 상복 입었고 갓난아인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삼대의 이름이 군적에 실리다니
달려가서 호소하나 동헌 문엔 호랑이요 이정이 호통하여 단벌 소만 끌려갔네
칼을 갈아 발에 들자 자리에 피가 가득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아 닥친 곤액
잠실음형 그 어찌 죄가 있어서리오 민 땅 자식 거세함도 가엾은 일이거늘
자식 낳고 사는 건 하늘이 정한 이치 건도는 아들 되고 곤도는 딸 되는 법
말 돼지 거세함도 가엾다 이르는데 하물며 대를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부자들은 한평생 풍악이나 즐기면서 한알 쌀, 한치 베도 바치는 일 없으니
다 같은 백성인데 이다지 불공한고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읊노라
조선시대 르네상스인, 다산 정약용의 시를 퍼 왔다.
대학 때 근대사를 배울 때 교수님이 들려주신 시다. 제목을 두고 한 내 옆에 있던 선배가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이라고 번역해 교수님께 된통 혼나던 기억이 난다. 창자가 끊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 거세하는 기막힌 슬픔이라고 하는 거라고.
부모가 물려줄 게 없으니 아이들을 결혼할 때까지 서로 웃고 울고, 사회를 향해 시민의식을 나눌 수 있게 형제라도 물려주자는 마음으로 아이 둘을 낳았다.
포유동물이 설마 새끼 못 낳을까보냐는 무모함과 병원에서 동물 취급 받고 싶지 않다는 이기심, 아이들이 처음 보는 세상이 이상한 아저씨 아줌마, 기계같은 것만 가득한 엿같은 곳이 아니라 엄마 쭈쭈와 아빠 목소리, 조용하고 편안한 곳이라는 인상을 줘 안심시키고픈 마음에 집에서 낳는 이벤트도 해 주었다.
박원순 아저씨와 다른 분들의 노력으로 탄생한 아름다운 가게 덕에 착하지 않은데 착한 일 조금 하면서 형제들 중에 제일 돈 없으면서도 제일 풍족하게 아이를 키웠고, 밖에서 일하는 것이 자아실현이라는 자본가들이 만든 착취공식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아이를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사육시키지 않고 학교라는 곳으로 보낼 수 있었다.
작은 아이는 이제 다섯 살. 남편은 셋째를 가지고 싶어선지 유모차와 아기 욕조 같은 걸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게 말을 못한다. 나도 자신이 없다. 다섯 살 짜리 작은 녀석은 본인 의사를 깡그리 무시하고 유치원 사육을 시켜야 하는지, 그러고 나는 일터로 나가야 하는지 자문 중이다.
다산이 강진에서 <애절양> 쓰고 60년쯤 지나 진주를 중심으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171개소에서 진주 농민항쟁이 터졌다. 강화도에서 농사짓다 이씨 혈통이라는 이유로 김씨들이 세운 허수아비 왕, 철종은 이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할 능력이 없는지라 김씨 작폐들이 시키는 대로 삼정이정청이라는 걸 만들었다. 컨텐츠 없는 나랏님이 다스릴 때는 예나 지금이나 밑에서 시키는대로 하게 마련인데 시키는 방법이 옳았던 적 또한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지금 그 역사와 싱크로율 백 퍼센트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우리나라 식량 생산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곡창지대인 삼남지방이 무너지면 자기네들도 뜯어먹을 게 없는 관계로 하층민을 달랜답시고 만들어 놓은 삼정이정청이라는 것의 수장은 안동 김씨와 그 작폐들! 제대로 될 리가 만무한 일이다. 지금의 세월호법 논의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역사는 돌고 있기 때문에 역사에서 현재를 배우는 게 아니라 현재에서 역사를 배워야 할 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정이정청은 다산이 노래한 군역의 슬픔과 토지를 소유자가 내야 할 대동세나 결작세 같은 세금도 소작농에게 고스란히 전가하고, 죽지 말라고 쌀 빌려 주고 엄청난 이자로 더 처절하게 받아내는, 국가가 공식 인정하는 쌀 고리대인 환곡제 등을 개혁한답시고 설치는 척 하다 <삼정이정절목>이라는 책 한 권 딸랑 펴내고 해체되었다.
애초에 수사권도 기소권도 집행 인력도 없는 이름만 있는 기관인데다 자기네가 망가뜨린 삼정을 스스로 고치라고 앉혀놨으니 애초부터 뭘 하자고 만든 게 아닌 것이다. 지금의 그 많은 위원회들과 국회라는 곳에서 만든 세월호법의 현재와 미래를 짚어보게 하는 기관이라고나 할까.
이런 역사를 보면서 나는 남편에게 아들이라도 좋으니 셋째 낳자는 말을 할 자신이 없다. 오늘 남편에게 이 시를 읽어주면 뭐라고 할까? 우리도 스스로 피임이란 이름의 거세를 하고 있는데 참 씁쓸해 하려나.
화냥년에서 기지촌 이모들까지
우리 네 식구 산책길을 가로막을까봐 잽싸게 휙 지나가는 고양이 한 마리를 보고 아들 둘이 먼저랄 것도 없이 '도둑고양이다'라고 외쳤다.
누군가에게 버려져 배신감을 추스르며 추워지는 날씨에 처절하게 생존투쟁하고 있는 당찬 녀석에게 도둑이라니? 대책 없이 내몰아 도둑으로 만든 게 누군데 도둑고양이? 고 녀석 참 억울하겠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꼭 길고양이나 집 없는 고양이라고 부르라고 일러주었다.
억울한 게 어디 도둑고양이 뿐이랴. 우리 역사에도 이렇게 억울한 이름들이 한둘이 아니니 그 중 으뜸은 '화냥년'이 아닌가 싶다.
대책 없이 남자만 밝히는 몹쓸 여자라는 화냥년이란 말은 환향녀에서 나왔다. 금의환향 할 때의 그 환향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는 뜻이다.
자리보존과 무능, 전 정권에 대한 무조건적 반대로 주변 판세를 잘못 읽어버리는 -마치 명박이 아저씨의 그것과 같은- 삽질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이어져 백성들을 난민으로 격하시켰다. 화냥년도 이 때 생겨났다.
임진왜란으로 명과 조선이 초토화된 틈을 타 누루하치라는 사람이 나타나 흩어진 부족을 모아 후금을 새우더니 몇년 지나지 않아 중국처럼 한 글자로 된, 딴에는 정식 나라랍시고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정신 못차리는 인조를 압박해오니 인조는 입으로만 전쟁을 외치다 원래 피난지인 강화도까지도 못가보고 남한산성에서 잡혀 우리 역사에 '삼전도의 굴욕'이란 이름을 남겨주었다.
그래도 인조는 맨 땅에 해딩하면서 이마 좀 깨지는 걸로 왕 자리를 사수할 수 있었는데 애먼 백성들 50만이 포로가 되어 심양으로 끌려갔고 그 중에 체력과 피붙이의 재력을 두루 갖춘 운 좋은 사람들만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걸 어려운 말로 속환이라 부르는데 속환된 포로들 중에 여자를 환향녀라고 불렀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기네들이 지켜주지 못한 것을, 살아 돌아왔으면 위로금을 주지는 못해도 잘 돌아왔다고 도성 안에서 잔치라도 벌여주었어야 하건만 조선 남자들은 이들에게 '오랑캐 남자들을 섬겨 음란해지고 문란한 기운을 갖고 조선에 들어와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낙인을 찍어버림으로써 적보다 더한 인권유린을 하고야 말았다. 섹스를 강요 당해 몸이 망가졌다는 것보다 강요 당할 때의 굴욕감과 그 이후의 몹쓸 여자, 음란한 여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더 무서운 법 아니던가!
꼭 그래야 했나?
그래 꼭 그래야 했지.
왜?
기득권 유지 때문이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거나 잘 살아돌아왔다고 받아들여주는 순간 백성을 지키지 못 했다는 안보무능이 고개를 들 수 있고 그리 되면 백성을 통제하고 내 자리를 보존할 수 없게 될 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너희들은 살아돌아오면 안 됐고, 살아돌아와서도 죽은 척 엎드려 있어야 하는 거지. 너희들이 얼마나 음란하고 몹쓸 년들인지 보여줄게. 정조라는 걸 지키기 위해 우리에게 순종하다 간 열녀들과 그 비문들을 봐! 그래서 조선후기부터 열녀비와 열녀문이 넘쳐났군 그래!
권력자들이 자행한, '문란한 여성' 낙인찍기의 적반하장은 300여 년 뒤 그대로 계승되었다. 위안부 할머니들과 기지촌 이모들로!
안타깝게 좌절된 반민특위와 친일파들의 권력 재장악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몹쓸년들', '그 몸으로 제대로된 애나 낳겠나'하는 식의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까지 빼앗는 무시무시한 낙인을 찍어 해방된 내 나라에 와서도 반겨주는 이 없는, 불가촉 천민의 나락으로 내몰았다. 일본군에 복무했고, 내 나라 여자들을 일본군의 성노예로 몰았던 사람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미얀하다고 사과할 리 만무했다. 그러면 내 권력을 내놓아야하는데 그런 의로운 권력자를 나는 우리 정치사에서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자기 기득권 유지를 위해 경제개발비라는 명목으로 6.3 한일정상화라는 이름으로 위안부 할머니들의 정당한 보상권마저 앗아가고 말았다. 내 나라도 보상 안 해주는 판에 원고 측에 고발도 못 하게 하였으니, 할머니들의 한이 수요집회로 이어졌다는 건 말 안해도 알 수 있다.
권력자들이 친일에서 친미로 전향해 잘 먹고 사는 동안 누구한테도 수용받지 못한 할머니들은 먹고 살기 위해 미군기지 주변에서 다시 성을 팔 수밖에 없었고, 전쟁 후에 먹고살기 힘들었던 가족을 위해 자기 몸을 팔아 소중한 외화를 벌어들여 가족과 나라를 먹여살린 이모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국가에서 암암리에 장려한 미군 상대 성매매 이모들! 우리는 그들을 기지촌 이모들, 양공주 이모들이라 불렀고 국가는 그들에게 나라를 위해 달러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라 불러주며 계속 성노예하라고 부추겼다. 그러면서 지금 국가가 그들에게 해준 국민연금 같은 사회보장정책이 있는가? 코드 원부터 그 이하 위정자들은 그들이 힘들여 일하기 싫고 천성이 게을러 쉽게 돈버는 길로 들어선 막나가는 여자들로 낙인찍고 있지 않은가?
<Yes means yes......>라는 독투를 보며 꼭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다. No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하고 맥없이 당해야 했던 그네들의 한의 역사와 지켜줘야할 국가가 지켜주지 못한 무능에 대해서! 그리고 리더들을 잘못 만나 두 번 죽어야 했던 인간에 대해서!
1992년 삼성에서 만들어 어리석은 백성이 아닌 결국 삼성 임직원에게만 쓰였던'우리나라 최초의 윈도우즈 워드프로세서'인 훈민정음(정음 글로벌)은 2014년 9월 30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삼성은 훈민정음을 9월 30일 이후 3개월간 MS 워드와 병행사용하고 2015년 1월부터는 MS 워드로 대체한다. 전세계 업무 표준인 엑셀과 파워포인트와의 호환성을 위해 결정한 사항이라 한다. 2001년 10월 9일 한글날 기념으로 훈민워드 한글날 버전을 무료 배포했었고(기억이 가물가물하다) 2014년 한글날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중단을 공지했다.
워드프로세서는 컴퓨터에서 실행하는 문서 제작 툴이다. 즉, 문자를 컴퓨터에 입력하여 종이에 출력할 수 있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기능으로 보면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유용한 기능을 수행한다. 이는 인류의 역사와 땔래야 땔 수 없는 문자와 관련된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시기는 기원전 6~7천년 경으로 추정된다. 소통의 전달 수단으로 말을 대신하여 약속된 기호로 만들어진 문자는 인류에게 기억을 연장하도록 하였고 문자를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게 하였다.
문서를 복제하기 위하여 인류는 종이가 발명된 후 손수 직접 필사본을 만들었다. 그러다 문자를 다량으로 복제하기 위한 '활자'를 이용한 판각기술 발명되고 결국인쇄술*로 이어지게 된다.
무주정광대다라니경
판본의 역사는 종이의 역사(기원전 2세기 경)와 같이하는데 이는 묘비 등 석판에 쓰여있는 글자를 먹물 등으로 찍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1966년 10월에 발견한 '무주정광대다라니경'([산하칼럼] 무구정광다라니경 빛 보다 참고)으로 목판본으로는 세계 최초로 704~751년 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고려 때 '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 1372년으로 추정된다만 역사적으로 금속 활자 기술로 가장 유명한 발명품은 1450년에 구텐베르크 활판으로 인쇄한 '불가타 성경'이다.
2. 하드웨어 워드프로세서
대표적인 하드웨어 워드프로세서 Wang 1200
워드프로세서의 직접적인 직계 조상은 타자기다. 타자기는 글쇠(활자)를 손가락으로 타격하여 종이 위에 잉크로 찍어 출력한다. 상품으로 성공한 최초의 기계식 타자기는 1867년 레밍턴社에서 만들었다. 그 후 작업 내용을 메모리에 저장할 수 있고 수정 테이프로 수정이 가능한 전자식 타자기가 등장하였다. 전자식 타자기를 개선한 하드웨어 워드프로세서가 등장하였다. 지금은 워드프로세서 하면 소프트웨어가 떠오르지만 1980년대 이전까지 현업에서 쓰는 워드프로세서는 프린터가 내장된 휴대용 문서 제작 기기를 칭했다. 발전된 하드웨어 워드프로세서는 보조기억장치로 플로피 디스크와 모노크롬 디스플레이가 장착되기도 했었다. 활자를 전동망치로 때리는 전자식 타자기와 다양한 소프트웨어 설치가 가능한 PC와 구별된다. 하드웨어 워드프로세서의 대표상품으로 Wang 머신 1200이 있었다.
3. 소프트웨어 워드프로세서 기능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워드프로세서는 기존의 하드웨어 워드프로세서와 텍스트 편집기와 차별된다.
(1) Clipboard (Copy & Paste) & Word Block
1968 . 12. 9. Engelbart 박사의 'Mother of all Demos'
클립보드 시연은 당시 처음 시연한 마우스 보다 충격적이다.
'Ctrl+C,X'와 'Ctrl+V' 기능은 너무 익숙하여 거의 반사적으로 활용하지만 이 기능이야말로 현대적인 워드프로세서의 진정한 초석이 된다. 이 기능 하나로 문서 수정이 자유로울 뿐 아니라 문서를 순서대로 작성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디스플레이에 보이지 않는 '임시 저장' 기능은 워드프로세서 뿐 아니라 컴퓨터 발전에 있어서 가장 혁신적인 기능이 아닌가 싶다.(GUI를 가능하게 해 준 기본 기능 중 하나다) 엔겔바트 박사가 이를 시연한 시기가 1968년이라는 것이 놀랍다. 또한, Shift와 방향키로 문자를 선택하는 워드 블록 기능을 통하여 Clipboard 및 WYSIWYG 기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2) WYSIWYG
워드프로세서와 텍스트 편집기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보이는 데로 출력하는 것에 있다. WYSIWYG(What You See Is What You Get) 기능은 보통 GUI를 채택한 OS의 기본기능이라 생각되지만 GUI OS가 주류가 되기 이전 워드프로세서에서 먼저 구현되었던 기능이다. 다양한 글자체, 규격 문서 및 문단 간격 등 지원 그리고 그 기능들을 가능하게한 레이저 프린터와 드라이버*를 통하여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에서 먼저 구현되었다.
맥과 윈도우즈 등 GUI 환경에서는 프린터 드라이버를 OS에서 관리했지만 CLI환경인 DOS에서는 개별 프로그램마다 프린터 드라이버를 따로 설치했어야 했다. 이는 글자체 또한 마찬가지다. 진정한 WYSIWYG 실현은 Postscript Type 1, TrueType 윤곽선 글자체(Outline Fonts)가 적용된 GUI 환경이 맞다.
(3) Style
워드프로세서에서 글자체 적용으로 WYSIWYG를 구현, 편집과 출력의 일치를 시킬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탁상 출판이 가능하기 위해선 더 많은 기능이 있어야 한다. 제목, 부제, 본문, 장(Chapter), 머리말(Head) 등 문장마다 각기 다른 속성을 필요로 한다. 워드프로세서에서는 문장마다 속성을 저장하는 기능이 있는데 이를 스타일이라고 한다.
Style은 글자와 문단의 속성을 위상에 맞게 지정하여 문서를 체계적으로 만들게 해준다. 한/글에서는 '개요'에 해당되는 기능으로 글자, 문단 속성으로 문서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어 수백 페이지가 넘는보고서 작성 시 발생하는 엄청난노가다를 덜어준다*. 워드프로세서 기능이었던 Style은 HTML에서 스타일과 레이아웃 기능을 제대로 가능하게 한 CSS(Cascading Style Sheet)를 도입하게 된다.
스타일 지정으로 자동 넘버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스타일을 말로 설명하긴 어렵다. 그 중 목차 기능을 예를 들면, '머리말'이라 이름 지은 스타일로 목차 번호 I.-II.-III.-VI.… 자동 순서를 가지게 하고 싶으면 '머리말'에 일련번호 기능으로 'I'를 지정하면 된다. 스타일 '머리말'로 지정된 문장이 다음에 또 나오면 숫자를 일일이 수정할 필요가 없이 다음 문장은 자동으로 'II'가 된다. 그리고 이 기능 사용함으로써 페이지가 자동으로 업데이트 되는 목차를 손쉽게 만들 수 있다.(그림 참조, 다음에 이 기능에 대하여 여러분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따로 정리해 보겄다.)
4. 워드프로세서 춘추전국시대
IBM 메인프레임 컴퓨터에서는 1969년 FORMAT이라는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가 있었지만 WYSIWYG 등 현대적인 워드프로세서 기능은 없었다고 한다. 마이크로컴퓨터(MITS Altair 8800)에서 실행된 최초의 워드프로세서는 쉬래어(Shrayer)가 1976년 12월에 개발한 Electric Pencil이다. Electric Pencil은 기초적인 Clipboard기능을 갖춘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였으나 1978년에 등장한 워드프로세서 WordStar와 Magic Wand에게 시장을 바로 내주게 된다.
WordMaster였다가 1979년 개명한 WordStar는 1978년 CP/M에서 실행되는 대표 워드프로세서가 된다.(CP/M이 구동되는 대표적인 마이크로컴퓨터 Osborne 1의 번들 프로그램이었다) WordStar는 WYSIWYG 기능을 구현된 최초의 워드프로세서였다. DOS용 WordStar를 CP/M WordStar을 포팅하여 내놓으면서 1979년도에 50만 불에서 84년도에 7천2백만 불로 매출이 급상승하게 되고 그 결과 워드프로세서 시장에서 가장 높은 점유율을 가지게 되었다.(전체 시장의 23%) WordStar를 만든 MicroPro社는 1984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소프트웨어 회사가 되었다. 그러나WordStar의 DOS 버전은 CP/M에서 만든 프로그램을 그대로 포팅한 수준*이었고 PC 하드웨어가 발전하고 있었지만 WordStar는 DOS 환경에서 큰 개선을 하지 않았다. 하드웨어와 OS가 발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85년까지 가장 잘 팔리는 워드프로세서였기 때문이다.
DOS용 WordStar 3.0, 단축키로 Ctrl(^)만 있다.
일례로 WordStar는 DOS에서 표준으로 지원하는 Alt 키를 무시했다. 또한 1983년 DOS 2.0에서 지원했던 주요기능인 하위디렉토리와 하드디스크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는 사용자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WordStar에서 생성한 문서를 하드디스크에 저장하려면 프로그램이 실행된 Floppy Disk 혹은 RAM Disk에서 문서를 우선 저장하고 난 후 프로그램을 닫은 다음 DOS로 돌아와서 Copy 명령으로 하드디스크에 다시 저장해야 한다. 당시는 프로그램 실행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RAM Disk(메모리를 하드디스크 처럼 사용)을 이용했는데 저장했더라도 휘발성 메모리에 저장한 것이기에 전원이 꺼지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의 완성형 WordPerfect 5.1
WordPerfect 1.0은 1979년 Data General 마이크로컴퓨터 용 워드프로세서로 선보였지만 1982년 IBM PC MS-DOS 환경으로 바로 갈아타게 된다. DOS 최초버전은 2.2 였지만 WordStar와 달리 WordPerfect는 MS-DOS 환경에서 완전히 새롭게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다 하드디스크와 하위 디렉토리를 지원하는 1983년 DOS 2.0이 나오자 새로운 기능에 추가한 WordPerfect 3.0을 바로 선보이게 된다.
WordPerfect는 기능을 부지런히 추가 하였다. 스타일의 핵심인 자동넘버(위 스타일에서 언급), 미주, 각주 등 다양한 기능을 두루 갖춘 WordPerfect 4.2 버전을 1986년에 선보인다. WordPerpect 4.2 부터 점유율에서 WordStar 완전히 압도하게 되고 DOS 환경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상품이 되었다.
스프레드시트 Lotus1-2-3과 달리 MS-DOS 환경에서 워드프로세서는 독점적인 프로그램이 없었다. WordPerfect가 가장 잘 팔린 제품이었지만 점유율 50%를 넘지 않았었다.
DOS 환경에서 스프레드시트 Lotus 1-2-3과 달리 워드프로세서에서는 독점적인 제품이 없다.
5. MS Word 무혈입성
DOS용 Word 5.0
MS는 1981년 제록스 PARC에서 최초의 GUI 워드프로세서 Bravo를 개발한 찰스 시모나이(Charles Simonyi)와 제록스 인턴이었던 리차드 브로디(Richard Brodie)를 고용한다. Xerox PARC은 세계 최초로 GUI를 구현한 Xerox Alto를 1973년에 개발했었다. MS는 애플 맥킨토시 소프트웨어 개발에 1981년부터 참여(5편 참조)하게 되는데 제록스 PARC 개발자들을 영입하는 시기와 절묘하게 일치한다.
내가 바로 Xerox Alto.
1983년 Multi-Tool Word라는 이름으로 MS-DOS 용 워드프로세서를 선보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Microsoft Word로 개명한다.당시 MS Word는 비록 DOS 프로그램이었지만 개발 초기부터 GUI 환경에서 주 입력장치인 Mouse를 염두해 두고 프로그램을 작성하였다. 이는 기존 워드프로세서인 WordStar나 WordPerfect와는 차별화된 기능이었다. 그래서였는지 1985년 DOS용 Word 2.0에서 GUI 환경인 맥킨토시 Word로 포팅을 손쉽게 하지 않았다 싶다. MS-DOS에서는 WordPerfect가 주류였기에 MS-DOS용 Word보다 맥킨토시용 Word의 매출이 더 높았다.
맥용 Word 1.0 1985
1989년 MS는 성공적인 프로그램 Windows 3.0이 나오자 기존의 여러 플랫폼에서 산만하게 매겨진 버전 넘버를 버리고 Word 1.0 for Windows를 선보인다. 1991년 Windows 3.1과 더불어 Word 2.0을 선보이고 그러다 갑자기 1993년 맥킨토시용과 윈도우용 Word를 동시에 개발하면서 윈도우용 버전 넘버를 맥용 버전 과 함께 6.0으로 다시 명명했다.(아이고 복잡하다.) 이는 일종의 마케팅적인 꼼수도 일부 작용하었다. 당시 DOS 환경의 워드프로세서 강자였던 Wordperfect의 버전이 5.1이었기 때문이었다.
OS마다 버전 넘버가 제각각이다.
1991년 이후 윈도우즈 3.1 성공과 더불어 MS Word는 WordPerfect를 압도하게 된다.WordPerfect는 Lotus 1-2-3과 마찬가지로 윈도우즈 환경을 무시하였고 1991년이 다 지나서야 DOS용 5.1 버전을 그대로 포팅한 윈도우즈용 Wordperfect 5.1이 나오게 되었다. 그땐 이미 윈도우용 MS Word 시장에 안착한 다음이었다.
결국 1995년 윈도우즈 95가 나온 이후 워드프로세서 시장은 MS Word가 독점하게 된다.
완전한 승리자 1994년도 Word 6.0
하편에서는 한국에서의 Word 유일한? 경쟁 워드프로세서 한/글에 대해서 함 털어보겠다. (좋은 얘기였으면 좋겠지만... 써봐야 알겠다)
영화 리뷰가 아닌 여성 딴지스의, 여성 딴지스에 의한, 여성 딴지스를 위한 영화 잡담으로 남성 딴지스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필자가 그 점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여 읽어 내려간다면 여성 심리 이해에 피가 되고 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외다.
대한민국 최고의 포수 백만배.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군복스타일의 옷,어깨까지 내려오는 야성적인 머리카락 그리고 평생 감정 따윈 표현한적 없는듯 한 무표정한 얼굴.필드생활20년 경력의 싸나이of싸나이가 여자에 꽂혔다.그녀가 구성지게 트로트를 부르며 내민 손을 잡는 순간 마초의 심장엔 하트가 뿅뿅뿅.마이크를 잡고 뱅그르르 도는 그녀가 슬로우 모션으로 보인다.
사랑에 빠진 마초는 그녀 옆에 찰싹 붙어 앉아 한 살배기 애처럼 우유를 질질 흘리질 않나,입가에 커다란 빵조각 하나 붙인 채 배시시 웃질 않나, 그녀가 덥썩 잡아준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질 않나,일행이 잠든 사이 그녀에게 몰래 뽀뽀하려고 얼굴을 들이대질 않나 이렇듯 너무나 귀엽고 수줍은 행동을 보여준다.그 모습에 나는 그만 홀딱 반해 버렸다.이쁘다! 이뻐죽갔다!
2009년도 작<차우>는 감히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말하고픈 영화다. <차우>외 신정원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는<시실리2km> <점쟁이들>이있고 현재<더 독>이라는 영화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작년에 캐스팅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 별 이야기가 없어 엎어진건지 진행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차우>가 개봉했을 당시 내 주위에서는 난리가 났다.이 영화는 꼭 봐야한다고 침을 튀기던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몇 년이 지난 후에야<차우>를 봤는데 옴마야,크나큰 충격에 몸져 누울 뻔했다.한국영화계에 이런 걸작이 나타나다니...그래서<점쟁이들>이 개봉하자 바로 극장으로 달려갔는데 몹시 실망 했다는 사실을 밝혀야겠다.차우빠인 지인들과 내린 결론은 신정원 감독이 각본까지 써야 제대로라는 것.한낮의 똥개마냥 축늘어져 리모컨을 돌리던 나를 각 잡고 앉게 만들었던<시실리2km>의 각본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가있다. 감독님, 어서 빨리 신작 개봉하소서.
전설의 제작발표회.
주연배우마저 웃음을 참을수 없어
보는 사람을 오글거리게 만드는 선언문 낭독의 현장
<차우>는 식인 멧돼지와5인의 추격대의 살벌한 대결을 다룬 영화다. 포스터에는 ‘괴수 어드벤처’라고 되어있는데 뭐,틀린 말은 아니지만 절대로 혹하지 마시라. 엄태웅이 김순경,정유미가 생태연구원,장항선이 포수,윤제문이 포수,박혁권이 신형사 역을 맡았다. 조연들 역시 연기력이 끝내준다. 주조연의 절묘한 앙상블이 코미디를 살렸다고 본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개봉 당시 이 영화를‘호러’로 마케팅했다. 차라리 ‘코미디’라고 했으면 - 이게 더 진실에 가깝기도 하고- 더 흥행했을지도 모르겠다. <차우>는 미장센과 코믹 장치가 아주 영리한,섬세함이 박찬욱&봉준호에 뒤지지 않는 코미디영화다.
'느끼아 느끼아'
'휘바 휘바'
'비달 사순?'
팬들 사이에 회자되는 차우의 명대사 중 일부다. 맥락없이 늘어놓는 바람에 이건 뭐지 싶겠지만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서 손가락을 자르는 심정으로 봉인을 걸었다. 워낙에 명장면, 명대사가 많아서 하나하나 언급하기 어렵지만 요 세개는 단언컨대 최고의 대사가 아닐런가 싶다.뭐,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만고 내 생각이다. <점쟁이들>개봉 때는 코믹호러라고 해서 코미디에 좀 더 초점을 맞추기는 했는데 문제는 영화가 별로...헛헛 흐압.
우연찮게 본 영화가 지금껏 존재도 몰랐던 배우를 재발견하게 해주곤 한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은 류승룡을, <박수건달>은 조진웅을, <군도>는 마동석을 내게 각인시켜주었다. <차우>는 윤제문의 매력을 흠뻑 느끼게 해주었다.사랑에 빠진 상남자의 모습을 어찌나 찰지게 연기했는지 평소‘남자의 의외의 귀여움’에 페티쉬가 있는 소녀 독구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윤제문의 모습만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왔다고 고백해야겠다.
간헐적 무도빠로서 방영 초기부터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도니도니 정형돈이 어느 순간 눈에 쏙 들어온것도 그의‘귀여움’때문이었다.쑥쓰러워하는,몸둘바 몰라하는 그의 순진한 행동거지에 총 맞은 것처럼 어지러웠다.귀,귀여워.최근‘형광팬’편에서 팬들의 애정공세에 심히 부끄러워하던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깨,깨물어 버리고 싶어.나만 그런가.
2.마초의 마음
우람한 등치에 우락부락한 얼굴,말은 없으나 불의에 굴하지 않는 행동을 보여주는 남자.목숨 걸고 나를 지켜줄 것 같은 남자.흔해빠진 할리우드 영화 주인공처럼 낭만적이고 정형화된 마초가 내 이상형이었다.그래서 연세대 농구팀을 목이 쉬어라 응원했지만 은밀히 현주엽에게 눈길을 주었고(나도 모르게 연식 노출을 ㅜ.ㅜ)다모로 뜨기 전 모델로 활동했던 김민준의 야성적인 화보를 벽에 붙여놨으며,대학생 때엔 머리가 크고 산적같이 생긴 선배를 좋아했더랬다.특히 선배는 생긴 것과 달리 부끄럼이 많고 유머감각이 뛰어나서 내 마음을 마구 흔들어놨는데 다른 년을 좋아했어.쳇.
마초라고 하면 로드리게즈 영화<마셰티>에 나오는 주인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마초는 일단 외모만으로도 식별 가능하다.여기서 잠깐.마초는 나쁜 남자와 다르다.나쁜 남자가 닳고 닳은 인간이라면 마초는 인간보다 짐승에 가깝다고 해야할까나.전자가 개체를 존속시키기 위해 이기적 유전자가 내놓은 진화의 산물이라면 후자는 종을 존속시키기 위해 이타적 유전자가 내놓은 진화의 산물이라고 비유하고 싶다. (리차드 도킨스 책 참 지랄맞게 어렵더이다.)
마초와 나쁜 남자는 둘 다‘남성’이라는 생물학적,사회적 특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하지만 행동의 동기와 결과는 분명하게 다르다.
이들에게서는 남성우월주의의 냄새가 물씬 풍겨난다.우월하기에 나쁜 남자는 여자를 등쳐먹고,마초는 여자를 보호–존중이 아니라 열등하니까 지켜준다 식의–해준다.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공통점이다.그래서 권위,즉‘남자니까 강해야 하고,참아야하고,눈물 따윈 필요없다’는 매우 중요하다.권위를 세우기 위해 마초가 무식하게 무기를 들고 싹 쓸어버리는데 반해 나쁜 남자는 가식이라는 엄폐물을 내세운 후 뒷작업을 통해 뺏고 싶은 자리를 차지한다.여인들이 바치는 동경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마초와 달리 나쁜 남자는 여인을‘막’대하며 권위를 행사한다.하렘은 하렘인데 운영방식이 다르다고 할까.
폼에 살고 폼에 죽는 묵직한 남자.스위스제 금고보다 단단한 마초의 마음이 열렸을 때 어찌 녹지 않으리오.
여자는 남자가 마음을 보여주길 바란다.아주 먼 옛날부터 여자들은 걸핏하면 동굴로 들어가려는 남자라는 동물이 쉽게 마음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그이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고 싶은데 확인할 길이 없다.사랑한다고 말은 하는데 진짜인지 뻥인지 확신이 안 든다.속에서 천불이 나는데도 내 옆에 앉은 남자는 눈만 껌벅일 뿐 가타부타 말이 없다. 이 색...
고대인들은 신에게 소원을 빌기 전에 일단 제물을 바쳤다.제물은 내 진심과 성의를 표시하는 증표다.여자 역시 남자가 희생을 통해 진심을 보여주길 바란다.말은 너무 쉽고 가벼우니 증표가 될 수 없다.그래서 명품가방이 됐든,반지가 됐든,꽃이 됐든 나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증거가 필요해졌다. (물론 마음 따위보다 선물을 중히 여기는 나쁜 년들이 곳곳에 있다는게 문제지만)
<차우>속 마초 윤제문의 수줍은 행동은 그의 내면에 꼭꼭 숨겨져 있던 순정을 보여주는 증거다. 고독하고 과묵한 마초는 비록 십원짜리 하나도 여인에게 바치지 않으나 어찌할 줄 모르는 그 행동만으로 충분하다. 마초의 천진난만한 행동은‘아프냐,나도 아프다’라는 말보다 더 가슴 떨리게 다가온다.남자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기에 여인의 마음은 두근두근.
3.나를 진짜 사랑하는거야?
그리하여 여자들은 오늘도 증거확보를 위해 쌍라이트 번쩍 켜고 남자를 살핀다. 이 시점에서 우리 재미있는 사례를 살펴보자.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루이스C. K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미드 <루이 louie> (<럭키 루이>아니다!)의 시즌1의9편과 시즌2의10편을 보자.
먼저 시즌2의10편.할로윈을 맞아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사탕을 받으러 다니는 아빠 루이.어느새 밤이 되자 집으로 가기 위해 그들은 후미지고 어두컴컴한 길을 걷는다.그런데 양아치 새끼 두 명이 갑자기 나타나 위협을 가한다.아빠 루이는 쫄았다.본인도 무섭고,혹여나 아이들이 해꼬지라도 당할까봐 걱정이 되어‘이러지 말라’고 애원조로 말을 하니 양아치들은 더욱 기세 등등.이렇게 갑갑한 실랑이가 벌어지는데 유치원생 막내딸이 갑자기 요정막대를 휘두르며 양아치들을 혼내기 시작한다.그러자 당황한 양아치들은 슬슬 뒷걸음질을 친다.이때 루이가 버려진 의자를 번쩍 들어 이들을 쫓아낸다.
다음으로 시즌1의9편.루이는 간만에 괜찮은 여자랑 즐거운 데이트를 한다.도넛가게에서 시끄러운 고등학생 패거리에게 조용히 하라고 했다가 졸지에 폭력을 당할 위기에 처한 루이.실컷 조롱 받고 쪽팔리게 자기를 때리고 말라고 애원한 끝에 고등학생들이 물러난다.그런데 이런 그의 모습에 여자는 대 실망.루이가 옳은 행동을 했다고 맞장구는 쳤지만 솔직히 깨는건 사실이라며‘제 마음에선 루이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어요,하지만 제 본능은 루이씨가 완전 루저라고 말하는데 어떡하나요’라고 말한다.결국 빠이 짜이찌엔.데이트는 망했다.
이 상황에서 영화 속 마초라면 두 주먹 불끈쥐고 일어나 상대방을 때려눕혔을 것이다. 자기 몸엔 상처 하나 안 입고. 그런데 우리가 사는 요 현실세계에서 양아치나 고등학생과 치고 박고 싸웠다가는 누가 손해일까.그러다가 엄하게 죽을 수도 있다.개죽음 당하느니 순간 쪽팔려도 그 상황을 모면하는게 훨씬 현명한 일이다. 미드 속 여자의 대사대로 우리 모두 이것이 옳다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다.그런데 내 안의 본능은 이 남자가 찌질한 놈이고 겁쟁이고 쓸모없는 놈이라는 지령을 내린다. 그러니 매몰차게 갖다 버려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여자들은 내 남자가<테이큰>의 아빠처럼<007카지노 로얄>제임스 본드처럼 나를 지켜줬으면 하는 판타지가 있다.실제로는 가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이것 역시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보자.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를 지켜준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왜냐? 나를 사랑한다메!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허세라도 부렸으면 하는 바람이 생긴다.그 뒤에 벌어질 일은 일단 제껴놓고 말이다. 여인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자는 물러설 수가 없다. 그래서 어떻게 되겠는가? 뻔하다. 사달이 난다. 재수없으면 몸 상하고 돈 깨지고 시간 낭비하는 대 참사가 벌어지겠지. 남는건 후회와 원망과 이별 뿐. 어리석은 중생들이여.
나는 추울 때 남자라면 응당 겉옷을 벗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래서 직장 동료가‘남자도 똑같이 춥다’고 말했을 때 충격을 받았다.남자라면 당연히 추위를 안 느낄거라 생각했던게다.대학도 나온 여자가 이런 생각을 했다니 솔직히 내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남자에 대한 착각이 뭐 이것 하나랴. 친구가 술만 마시면 개가 되는 해병대출신 남자랑 사귀느라 온갖 시비에 말려들어 고생하는걸 알고 혀를 찼지만 막상 내 남자가 자기는 깡패를 만나면 무조건 도망갈거라고 말했을 때엔 저주를 퍼부었다. 이런 식으로 나도 강한 남자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대다수의 여자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내 여자에게는 따뜻한 차가운 도시 남자? 과연!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현명한 남자가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결국 이 모든게 다 기대 때문이 아닌가.바로
‘정말 나를 사랑하는 건가’
란 질문에 나를 확신시켜주길 바라는 기대. 현명한 여자는 안다. 기대가 충족되면 또 다시 새로운 기대를 한다는 것을. 요란하게 날 사랑한다고 지랄을 떨어도 실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가오는 좀 떨어져도 별탈없이 나와 오래오래 함께 있을 수 있는 진실한 사람이라면 겉모습은 비록 마초스럽지 못하다 하여도 사랑하리라.그가 수줍은 행동으로 나를 향한 사랑을 보여준다면 내 마음은 활짝 열리겠지.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Mon coeur s'ouvre a' ta vi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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