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이다. 예비역 장군님들이 모여 있는(단체가 입주한 건물의 소유주는 국방부인 걸로 안다) 단체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어필할 만한 영상물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대본을 만들고, 영상물을 만들어서 납품을 했는데... 문제는 이 장군님들에게 '비용 감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나온 결론이 프로젝트 파기였다. 중장 전역자였던 예비역 장성께서는 병장 만기제대자와 얼굴을 붉히며 싸워야 했고, 결국 민간 연구원이 중간에서 정리를 해줬다. 당시 내 짧은 식견으로는 '군'에 너무 오래 있어서 '비용'에 대한 생각이 없었든가, 아니면 장군님이 입만 열면 말하던 그 '애국심'이 내게는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지금도 그 장군님이 당한 봉변(?)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한다.
에피소드 2.
10여 년 전 일이다. 외삼촌이 전역을 했다. 진급철이 되면, 온 가족들이 모여서 가족회의를 하고 각자의 사정을 염두에 두고 얼마씩 갹출 했던 기억이 난다. 외삼촌이 진급을 하면 지프차에 운전병과 부관을 대동하고 가족들을 일일이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일종의 '군보험'이었다. 각자 다들 아들들이 있었기에(혹은 그 주변에 아들이 있었기에) 외삼촌을 진급시키면 훗날 도움이 될 것이란 현실적인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은 주효했다. 나는 그 혜택을 보지 못했지만(강원도 고성으로 보냈으니... 그것도 '빽'을 써서 말이다), 내 사촌들은 다들 편하게 군생활을 했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군대에서 제법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사회생활에, 아니 대인관계에 심각한 장애(!!)를 안고 있었다. 결국 외삼촌은 자신의 직위에 걸맞는 일자리를 찾다가, ‘영업’에 뛰어들게 된다. 누가봐도 바지사장이었지만, 외삼촌은 장(長)이란 직책에 연연했고, 가족들은 외삼촌이 한없이 ‘사기’에 가까운 사업에 발을 담근 걸 알면서도 돈을 갹출해 물건을 사줬다(다단계 비슷했다). 일종의 ‘퇴직금’이었다. 결국 외삼촌은 반 년 만에 호된 사회신고식을 치렀고, 이후 전역한 다른 동기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한나라당 공천. 외삼촌은 고향으로 내려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고, 그때마다 외삼촌의 레이더에 걸린 것이 나였다(와서 선거연설문 써달라고... 쿨럭). 몇 번의 공천 실패 이후 외삼촌은 조용히 연금생활자의 길을 걷고 있다(아이러니한 게 외사촌 형님의 아내 되는, 내게는 형수님 되시는 분은 민주당 공천을 받아 시의원이 됐다. 외삼촌이 얼마나 '빡치셨는지'에 대해선 말 않겠다).
에피소드 3.
모 업체에서 군납품을 하기 위해 예비역 장군 한 분을 섭외했다. 납품은 성공했고(방산업체의 군납비리와는 무관한 납품이다. 재화가 아닌 서비스였고,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라 본다), 장군님은 멍하니 사무실에 앉아계셨다. 최소한 30여 년을 군문에서 활동하신 분이라 사회 돌아가는 사정, 특히나 이쪽분야에 있어서는 문외한인 분이시기에 뭔가 의욕적으로 발언을 하고 의견을 개진했지만, 정말, 미안하게도, 안타깝게도, 장군님의 아이디어는 시대와 동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결국 장군님은 멍 때리고 있다(과도한 ‘긍정마인드’로 몇 달간 사내 이곳저곳을 쏘다녔지만, 그것도 반 년을 넘기지 못하셨다. 그 다음부터는 밥 먹고, 신문 보고, 인터넷 검색하고의 반복). 나중에 그쪽 팀장에게 확인을 했는데,
“아... O장군님요?(엄연히 ‘이사’란 호칭이 있었지만, 여기선 장군으로 통용됐다) 군계약이 2년 돼 있는데. 2년 지나면...”
말끝을 흐리는 팀장의 말 속에 장군님의 운명이 숨어있었다. 늘 그래왔듯이 군납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장군님은 회사를 떠날 것이다(이쪽 업체의 관례다). 그건 장군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국방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할 때마다 곧잘 등장하는 게 '방산업체 근무' 기록이다. 다른 장관 후보자들이 대형로펌이나 유관기관에서 수십억대의 연봉을 받거나, 부동산 투기 등등의 의혹으로 낙마하는 것과 달리 국방부 장관 후보자들은 상대적으로 수수(?!)하다.
“역시 법대나 상대를 나와야 주류에 편입될 수 있다.”
란 단순한 품평으로 국방부 장관 후보자들의 수수함(?)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장군님들은, 갈 곳이 없다.
일반적으로 (육군)장교가 될 수 있는 길은 육군사관학교, 3사관학교, ROTC, 학사장교 등이다. 이 중 가장 많은 숫자를 채우는게 ROTC다. 매년 임관하는 육해공의 소위 중 80%가 ROTC 출신이다. 한해 평균 4200여 명의 (육, 해, 군)소위들을 배출하는 것이 ROTC다. 육군사관학교가 320여 명 내외를 매년 소위로 배출하고, 3사관학교가 400여 명 내외다.
학사장교와 ROTC들은 소위에서 대위까지의 계급을 대부분 책임진다. 초급간부의 대부분을 채워주는 건 ROTC와 학사장교지만, 계급이 점차 올라가다보면, ROTC와 학사장교, 3사관학교 출신들은 점차 사라지고 보이는 건 '육사'들 뿐이다.
2010년 기준으로 육군 각 출신학교별 장성 진출률은 육사 77.8%, 3사 14.7%, 학군 5.9%였다. 2011년 기준으로 육사 출신 장성 진출률은 78.4%로 늘어났고, 2012년은 육군 전체 장군 318명 중 육사 출신이 253명(79.6%)이다.
소위 시절에는 가장 적은 수였지만, 계급이 점차 올라갈수록 육사비중이 올라가더니, 장군이 되면 10명 중 8명을 육사 출신이 채우는 구조. 이게 대한민국 육군의 모습이다.
장군님들...어쩌지?
우리나라 장군님들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계속 애먼 보직이 늘어나서 장군 수는 계속 늘어난다) 최근에 업데이트된 내 기억속의 숫자는 440여 명이다. 휴전선 155마일에 장군님들을 한 명씩 세워두면 약 500미터에 한 명씩 세워둘 수 있는 숫자이다. 더 충격적인 건 장군 바로 밑의 대령 계급이다. 3천 명 내외 정도로 안다(역시나 애먼 보직이 계속 늘어나서). 대령이 3천 명 내외라는 것에 대해서 실감이 안 날 거 같은데, 이게 '꽤' 심각한 문제다.
군생활을 경험한 독자라면 알겠지만, ‘대령=연대장’이란 개념이 박혀있을 것이다. 대령 계급이 맡는 최고의 보직은 야전부대의 '연대장'이다. 그런데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연대장 보직은, 정말 많이 잡아봐야 400개 내외다. 그럼 나머지 2천여 명이 넘는 대령들은 뭘 하고 있는 걸까? 이들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도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장군'을 꿈꾼다는 것이다.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할까?(덕분에 장군을 포기한 대령 ‘장포대’들이 깽판치는 것도 문제지만 국방부에서 ‘진급적기 경과자’란 이상한 말을 만들어 낸 덕분에 상당수가 깽판을 포기해야 했다. 그 이전에는 장군 진급을 포기하더라도 정년이 보장돼 있으므로 깽판을 쳤는데, 이꼴 보기 싫은 국방부가 2년 마다 적격심사를 거쳐서 부적격자는 바로 제대를 시켜버리니... 몸 사려야지)
이러다보니 진급철이 되면 ‘난리’가 난다.
국방부에는 투서가 쌓이기 시작하고, 20여 년 전 어깨를 감싸 안고 푸른 제복에 청춘을 담겠다 맹세하던 동기들이 적이 되어 물어뜯고 싸우게 된다.
여기서 말하겠지만, 지금 이 '잡설'은 장군들을 비난하려는 목적으로 쓰는 게 아니다. 이 많은 장군님들하고 대령님들을 어찌할지를 같이 고민하자는 차원에서 쓰는 글이다.
별... 졸라 많다.
장군이 많으면 뭐가 필요할까요? 보직이요!!
삼국지 시절이나 만화 <킹덤>의 배경이 되는 춘추전국시대라면, 장군이 많다는 게 국방력 강화의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전에서 너무 많은 장군들은 오히려 문제만 양산해 낼 뿐이다. 군대가 전쟁을 해야지 정치를 하면, 그때부터 군대는 산으로 가기 때문이다.
군대의 고급간부들과 장군들이 정치를 하지 않는다 쳐도, 너무 많은 장군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전투력 약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가장 큰 문제는 '보직'이다. 일반 상식으로 보자면, 별 1개 준장의 경우 여단장 보직을 주면 되고, 별 2개 소장이면 사단장을 주면 된다라는 공식이 있다. 그러나 400여 개가 넘어가는 별들에게 줄 별자리가 없다. 늘어나는 장군들에 맞춰(군 규모는 줄어드는데, 장군수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보직을 마련해 주는 것도 일이다.
이러다보니 군대 안에서는 무슨 일이 터지면 ‘00사령부’를 만들어 낸다(사령부뿐만 아니라 별별 희한한 부대들을 만들어 낸다). 연평도 포격 사건 터지자마자 서북도서사령부란 걸 만들어 내고, 북한 미사일 문제가 한참 여론을 지필 때에 유도탄사령부란 걸 만들었다(북한의 탄도탄과 장사정포 등등 비대칭 무기를 상대하겠다고 만든 것인데, 올해 미사일 사령부로 확대개편 됐다. 유도탄 사령부 덕분에 소장 한 명의 보직이 생겼다). 항공작전 사령부도 마찬가지다 보병사단을 보면 자체적으로 항공부대가 있었다. 이걸 끌어모아 항공작전 사령부가 탄생하게 된다(1999년 4월 창설됐는데, 2009년이 돼서야 보병사단 항공대는 모두 해체됐다. 즉, 그 사이 육군 항공전력의 운영에 애매모호한 상태가 얼마간 있었다. 보면 알겠지만, 전력의 확충 없이 지휘계통을 통합하거나 하면서 사령부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교리의 발전, 아니 ‘재해석’을 통해서 사령부 창설의 논리는 만들고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사령부가 너무 많다. 교육사령부, 군수사령부, 인사사령부, 수송사령부, 의무사령부, 화생방사령부, 지휘통신사령부, 기무사령부, 정보사령부 등등등 (이것 말고도 우리나라에는 ‘사령부’가 넘쳐난다)
요즘 가장 핫한 사령부
사령부가 너무 많다. 실제로 이게 전쟁수행에 꼭 필요하고, 대한민국 군대의 전력(戰力)증강에 도움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아무리 좋게 봐도 보직 만들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꼭 필요한 사령부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가 기존 전력을 지휘체제 통합이란 미명하에 흩어져 있던 거 모으고, 거기에 새로운 장비 1~2개 추가해서(미국에서 ‘에이테킴즈MGM-140 ATACMS’ 몇 개 수입해서 기존의 미사일들 지휘체계 모은 다음 유도탄사령부 하나 뚝딱 만든거처럼) 사령부 하나를 뚝딱 만들어 내는 게 관례(?)다.
장군 자리 하나 만들어 내면, 장군 보직 하나만 생기는 게 아니다. 그 밑에 수많은 준장, 대령, 중령, 소령, 기타등등의 보직들도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걸 두고 ‘보직 돌려막기’라고 해야 할까?
보직이 많으면 무슨 문제가 생길까?
보직이 많으면, 뭐가 문제일까? 앞에 말 한 ‘사령부’ 이야기를 계속 이어서 말해야겠는데 ‘사령부’가 만들어지면, 어쨌든 ‘병력’이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병력’이 어디서 오냐는 것이다. 이미 대한민국은 군인이 부족하다. 2020년이 되면 병력자원이 되는 18세 연령의 남성인구수가 지금보다 30% 이상 줄어들게 된다. 즉, 65만 병력을 유지하고 싶어도 사람이 없어서 병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그렇다고 여자들을 징병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22사단 임모병장의 사건을 좀 더 파고들어가 보면 ‘병력’의 문제라는 게 내 생각이다. 왜? 병사 수는 적은데, 지켜야 할 범위는 다른 전방사단의 2배나 되기 때문이다(이건 언론에 많이 나왔지?). 그런데 말이다. 기존의 사단들이라도 완편, 그러니까 TO를 만땅으로 채우고 가도 병력이 부족하다. 경계만 서도 빡센데 이들은 봄 되면 풀 베고, 겨울 되면 눈 치워야 한다. 그 사이에 환자, 부상자 나오면 근무 열외시키고, 휴가자 빼고 하면 근무 돌릴 인원이 빡세다. 겨울철이면 하루에 4~5시간 자는 것도 많이 자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병력을 좀 더 채워주거나 사단을 더 투입해야 하는데, 그럴 ‘병력’이 없다.
재미난 사실 하나를 말해주겠다. 전 세계 최강인 미국의 경우 육군이 약 50만이다(얼추 대한민국 육군과 비슷하다). 그런데 이 미군의 사단 수는 10개다. 그럼 한국군은? 무려 42개나 된다(보병 사단 16개, 기계화 보병 사단 6개, 향토 방위 사단 12개, 동원 보병 사단 8개). 정말 많다. 소위 말하는 완편, 감편, 단편 사단들을 다 모은 것이다.
사단이라면 다 똑같은 사단이지. 완편, 감편, 단편사단은 뭘까?
완편은 우리 머릿속에 있는 1만 명이 넘어가는 완전한 사단들이다. 전투사단이나 예비사단, 해안경계사단 등과 같이 편제와 실제병력이 일치하는 경우다(예비사단의 경우는 약간 모자라는데, 전쟁터지면 예비군 보충해서 편제상의 병력을 맞춘다). 단편사단은 우리가 길거리에서 흔히(?) 보는 향토사단이나 동원사단을 생각하면 된다. 편제보다 압도적(!!)으로 병력이 적다. 전쟁 나면 예비군 모아서 사단을 만든다고 보면 된다.
무늬만 사단인 사단이 있다는 소리다(그것도 많이)
물론 향토사단이나 동원사단이 필요하고, 전쟁을 대비해 미리 사령부를 꾸려두고 예비군들 훈련시키는 것도 맞다(그런데 거기에 꼭 현역장성이 들어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무리 좋게 봐도 보직 만들어 주기처럼 느껴지는 건 뭐지?
그렇다. 지금 대한민국 장성들은 보직 찾아 삼만리를 하고 있다. 어쨌든 보직을 만들어야 하고, 보직을 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많은 별들을 미아가 될 것이다.
일단 별들을 위해서 보직은 만들어 놨는데, 이게 전투력 증진에 도움이 되냐는 전혀 별개의 문제가 된다. 분대를 만들고, 소대를 만들고, 중대를 만들고, 이걸 모아서 대대, 연대, 사단을 만든 건 다 그 전투력을 고려해서 인원을 편제하고, 조직으로 묶어놓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편제는 유지하되 병력은 줄이는 방식으로 장군들과 장교들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상황이 되고 있다.
국방부나 장군들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어쩔 수 없다. 일평생 군문에서만 살아왔는데, 이들이 옷 벗고 나가면, 할 게 없다. 정말 잘 풀리면 새누리당에 공천신청을 하는 것이고, 적당히 풀리면 국방부에서 마련해 준 건물에 들어가 골프 이야기나 한다. 아예 안 풀리면? 사기나 당한다.
별이 떨어지고 나면...
그럼 미국은?
우리나라 군대 편제와 각종 시스템은 미국의 영향 아래서 발전해 왔다(미군 걸 그대로 베껴서 만든 거도 많다). 그럼 미국의 상황은 어떨까?
현재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미군의 수는 150만 내외다. 그럼 장군 수는? 740여 명 내외다(많긴 많다). 까놓고 말하자. 미군도 장군들 때문에 골치 아프다. 이미 1980년대부터 미국의 국방개혁론자들이 말하는 단골논리가,
“야... 우리 인간적으로 장군이 너무 많지 않냐?”
미국은 1980년대부터 장군이 너무 많다며 사병 1만 명 당 장군 비율을 가지고 미국방부에 딴지를 걸었다.
2차대전 종전 때까지 미군의 장성 수는 2068명이었다. 사병 1만 명 당 장군은 1.9명이었다(사단단위로 나누자면, 사단장 1명, 부사단장 1명으로 보직을 나눠줬다고 보면 된다). 이게 냉전이 한참이던 1980년에 이르면 사병 1만 명 당 장군 수는 6.4명으로 급증하게 된다. 사병 수에 비해 장군수가 너무 많다는 압박 때문인지, 아니면 냉전 종식의 여파 때문인지 이후 사병 대비 장성 수는 꾸준히 줄어들었고, 2천 년 대 중반에 이르면 사병 1만 명 당 5명 내외까지 떨어지게 된다(병력수도 줄어들었지만). 그러나 여전히 장군수가 많다며 난리다.
그럼 한국은? 65만 병력에 장군 수는 440명(440명으로 고정했다치고)이니까, 대충 계산들 해봐라.
노태우 정부 때부터 국방개혁을 해야 한다며 저마다 국방개혁안을 내놓는데(노태우 때부터 따지면 818부터 시작해 노무현의 국방개혁 2020, 이명박 정부때의 국방개혁 307계획까지) 이제까지 성공한 적이 없었다. 군인 출신 노태우나 하나회 때려잡은 김영삼(이건 인정해야 한다!!), 군개혁보다는 나라 살리기 바빴던 김대중 대통령까지는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겠는데, 노무현 정부 때부터 시작한 국방개혁 2020은 307 때 뒤통수치더니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국방개혁 기본계획에서는 아예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
이조차 다시 원점으로...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장군 수 60명 감축안이 사라졌다는 것이다(대신, 장교와 부사관 1000명 감축안으로 후퇴했다. 아놔). 병력 수가 앞으로 더 줄어들 것이란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 장군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재미난 게 국방개혁을 할 때 마다 장군수는 계속 늘어난다는 것이다. 아니, 국방개혁 속에서도 장군수가 늘어난다고 해야 할까?). 만약 지금까지의 페이스가 앞으로도 이어진다면, 장군수는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많은 장군들은 다 어디로?
장군의 현역 시절에 내가 그 장군의 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뻔뻔하게도 일병 계급장을 달고 수도방위사령부로 들어갔다. 장군은 사복 차림이었다.'나 때문에' 부대에 들어간 것인데 덕분에 사령부가 뒤집어 졌다(미안하다 관사병들아!!!!) 휴일 날 테니스를 치던 부관들이 헐레벌떡 달려와 경례를 붙이고 난리도 아니었다. 대위는 껌이고, 영관급들이 달려와 ‘충성!’을 외치며 장군 앞에 벌벌 떨었다. 일병 나부랭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같이 ‘충성’을 외치며 굳어버렸다.
장군의 휘하 장교들이 슬그머니 내게 시선이 향하자 장군은 툭 한 마디 던진다.
“조카야.”
그 한마디에 그 자리에 모인 5~6명의 장교들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뒤이어,
“군생활 잘하게 생겼네요.”
“(사단마크보며) 전방에서 고생 많이 했겠네요.” (26개월 동안 장교들이 내게 그렇게 온화한 미소와 따뜻한 눈빛, 그리고 경어 비스므리한 어투로 날 대한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모인 장교들은 날 수방사로 차출하거나 안 되면, 전방에서 이곳으로 파견 보내는 방법을 고민하는 듯 했다. 당시 그 장군은 내게 ‘장군’의 위력을 잠깐 보여주기 위해 그랬던 듯 싶다(민간인 시절 그 ‘장군님’을 무시했고, 제대 후에는 의욕적으로 피해다녔다. 그러나 현역 시절에는 장군의 위력을 실감했다. 중대장 앞에서도 벌벌 기었는데 장군이라니... 쿨럭).
물론 그 ‘장군’은 아버지의 부탁(?)에 의해(‘저 새끼 사람 만들어야 한다’란 게 부탁이라면 부탁이겠지) 날 ‘그곳’에 계속 짱박아 뒀다.
그곳에서 ‘장군’은 왕이었다. 실감했다. 그 왕의 행차 덕분에(?) 휴일 날 꿀을 빨고 있었던 수백 명의(최소) 군인들은 비상이 걸렸다. 일병 나부랭이 앞에서 ‘가오’를 잡기 위한 행동치고는 좀 유치했다.
...그 장군이 퇴역을 했다. 퇴역한 장군은 은퇴한 정치인의 그것보다 더 비참해 보였다. 장군은 현역시절을 잊지 못했다. 검사는 은퇴해도 불러주는 곳이 많지만, 장군은 은퇴하면 불러주는 곳이 없다. 장군은 30여 년 간 뼈속 깊이 박혀 있는 군인방식의 ‘인간관계’를 말했지만, 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군복을 벗은 장군은 그냥 ‘아저씨’일 뿐이다. 장군은 다시 한 번 그 시절을 떠올리며 사회에서도 ‘장군’과 같은 대우를 받는 직책을 찾아 헤맸지만,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장군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
장군님이 가야 할 곳은?
꿈의 17사단의(지금은 아니라지만) 우리 송XX장군님. 이 분이 2009년 장군 진급 하셨는데, 이때 당시 육사 40기의 선두주자라고 여기저기 난리도 아니었는데, 격세지감이다. 이렇게 인생 쫑 칠지 몰랐다. 이 분이 구속되는 거 보면서(성추행 사건과 별개로),
“저 아저씨 군복 벗으면 뭐하고 살까?”
란 말이 튀어나왔다. 여군을 성추행한 파렴치한 사람이고, 죄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그 이후.. 송장군은 뭘 할까?
송장군 뿐만 아니다. 지금 현역에 있는 많은 장군들. 그들은 뭘 해야 하는 걸까? 별 2개 소장이라면, 대략 50대 초중반이다. 이때 전역을 한다면, 이 장군들은 뭘 할까? 연금을 받아서 그걸로 먹고 산다? (까놓고 말해서 은퇴 뒤의 장군은 나름 살만하다. 군인의 특성상 결혼을 일찍 한다. 때문에 이때쯤 되면 자식들 얼추 키워놓은 상태이기에 자기 몸만 건강하다면 별 탈 없이 잘 살 수 있다. 문제는 사람이 밥만 먹고는 못 산다는 것이다)
많은 장군들이 갈 곳이 없어 방황한다. 이러다 보니 이들은 호시탐탐 군 주변을 살펴본다. 뭔가 ‘아이템’이 있다 싶으면, 그걸 들고 국방장관실을 찾아간다.
“O장관? 내 후배야. 학교 다닐 때 엄청 예뻐했는데...”
대충 이런 레퍼토리다. 중장 이상 전역자의 경우에는 국방장관과의 연줄만 괜찮다면, 약속을 잡고 바로 국방장관실 문을 두들긴다. 재미난 게 국방장관도 학교에서의 관계를 떠올리면 깍듯이 ‘선배’ 대접을 해주며 응대한다. 그리고 그 ‘아이템’을 최대한 보기 좋게 거절하기 위해 해당부서를 떠올려 토스한다.
이런 게 아니라면 방산업체나 군납을 생각하는 몇 군데 회사에 취직하는 경우가 전부이다.
장군들은 사회가 두렵다. 군복을 벗고 살아온 시간보다 군복을 입고 살아온 시간이 더 많은 게 장군들이다. 이런 장군이 사회에 나와서 뭘 하고 사는지는 선배와 동기들의 모습을 통해 충분히 봐왔다. 장군들은 최대한 오래 군문에 남아 있으려 한다(어떤 분야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게다가 그들은 군에 있으면서 사람을 ‘부리던’ 권력에 어느새 중독이 돼 있었다. 다른 분야라면 또 다른 기회나 대체재가 있겠지만, 장군들은 옷을 벗는 순간 이 모든 권리와 권력을 같이 내려놓아야 한다. 준장 정도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대우를 받는 측이다. 아니, 성공했다!! 사회적 대우를 봐도 이사관급(2급)이다(우리나라에 8명 밖에 없는 ‘대장’들은 국방부 차관보다 의전서열이 높다).
공식적으로 전속부관, 운전병, 당번병, 공관병, 조리병(이건 비공식적이다)이 붙고, 행사 때마다 예포도 쏘고, 장성기에, 성판에...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게다가 장군 진급이 되면 가문에도 영광이라 족보에 등재되기도 하고, 현수막은 기본으로 붙는다.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다.
남자로서는 한 번 누려볼 만한 위세일 것이다(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자기 한 마디에 그 운명이 왔다갔다 하는 그 권력의 느낌이란. 쉽게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걸 군복을 벗는 순간 다 반납해야 한다. 또한 군복을 벗는 순간 자신의 정체성과 능력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이들이 진급에 목을 매다는 이유를 알겠는가?
...짧게 쓰려고 했는데 길어졌다. 여기서 끊겠다. 다음회에 이어서 마저 쓰겠다. 왜 이렇게 길어졌지?
그간 많은 소식들이 전파를 탔다. "교도소 반대 거창 범군민비상대책위원회"의 상경 집회, 법무부 방문, 등교 거부 등으로 각종 미디어에 관련 보도가 됐으며, 국정감사에서도 관련 내용이 언급 중이다. 여러분들도 여러 소식을 접했으리라 본다. 늦은 만큼, 쭉 간다.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 이 사업과 관련해서는 각 주체들을 먼저 알아본다.
1. 교도소 반대 거창 범군민비상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 학교 앞 교도소 반대를 외치는 대책위의 공식 입장은 다음과 같다.
1) 명의도용을 하여 유치한, 학교 앞 교도소 절대 불가. 2) 주민동의 없이는 거창 어디에도 교도소 불가.
2, 거창군청 : 도시 발전을 명분으로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을 추진한다. "구치소(교도소) 신축 사업"은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의 일부다.
3. 법무부 교정본부 : 구치소·교도소 등 교정시설 설치의 주체다. 현재 거창구치소 신축 과정에 있어 부지매입 및 보상 문제는 거창군에 위탁한 상태다.
4. 거창 법조타운 추진위원회 : 거창 법조타운 조성을 희망하는 민간 단체다. 2014년 8월에 구성되었으나, 전신은 2011년 만들어진, 거창 법조타운 유치위원회다. 소위 지역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거창에서 신축 예정인 교정시설을 구치소든 교도소든 이 글에선 하나로 통일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그것을 정할 겸, 알려진 쟁점 몇 가지 먼저 언급한다.
쟁점 1. 교도소? 구치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교도소와 구치소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구치소 : 구속 영장에 의하여 구속된 사람을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수용하는 시설이다.
교도소 : 행형(行形)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 징역형이나 금고형, 노역장 유치나 구류 처분을 받은 사람 등을 수용하는 시설이다.
좀 더 정확한 설명을 위해 법무부 교정본부에서 2013년에 발간한 홍보 책자를 보자.
교도소는 형이 확정된 수형자를 수용
구치소는 재판중에 있는 미결수용자의 구금확보 목적
법무부에서 신축 예정인 거창의 교정시설을 군청에서는 구치소라 하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교도소라 얘기한다. 이 시설이 수용동 4개 중 3개동이 (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기결수용이고, 2013년에 발간된 법무부의 홍보 자료에서도 '교도소'라고 적힌 것을 확인할 수 있기에, 실질적으로 교도소라는 판단이 되어, 이 글에선 교도소로 통일한다.(군청 또는 유치 측의 직간접 발언 제외)
거창군청은 이 시설에 대해 구치소라고 얘기하는데, 이것은 2009년에 신설된 밀양구치소의 사례가 참고가 될 듯하다. 다음은 밀양구치소 수용기록과 직원과의 통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명칭은 구치소일 뿐, 실질적으로는 교도소. - 수용정원 440명. - 현재(14년 10월 기준) 수용률 90프로 내외. - 미결수, 기결수의 비율은 정해져 있지 않고, 유동적. - 현재는 기결수가 미결수의 10배. 작은 도시라 미결수가 많지 않음. - 교도관 수는 180여 명. 관사가 있으나 전부 다 수용할 수는 없는 규모. - 월 평균 출소자는 20~30여 명.
2005년 밀양 지역에 교도소가 들어선다고 했을 때, 지역주민의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법무부에서 시민들과 소통하며 의사를 수렴한 끝에 교도소 명칭을 구치소로 바꾸고
실질적으로는 교도소지만,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구치소로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쟁점 2. 법조타운이다? 아니다?
먼저 사전적 정의를 보자. 법조타운이라는 단어는 없어서 법조만 찾았다.
법조 : 일반적으로 법률 사무에 종사하는 사람. 특히 재판관, 검찰관, 변호사 따위의 법률 실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이른다.
군이 조성하고자 하는 법조타운에는 창원지법 거창지원·창원지검 거창지청(이하 지원·지청)의 이전 신축과 더불어 교도소와 보호관찰소, 출입국관리사무소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그러나 사업은 각각 추진되며, 그 중 비용이 가장 큰 사업은 교도소 신축이다. 반대하는 측에선 교도소 외에 현재, 확정된 것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이건 법조타운이 아니라 교도소라고 말한다. "기존의 지원·지청과 그 앞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 등 15개 사무실을 포함한 이것이 법조타운 아닙니까? 원래 있는 겁니다." 즉, 말장난이라는 것이다.
구분을 하자. 거창군청이 추진하는 것은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이다. 그러나 법무부에서 현재 추진중인 것은 교도소 신축 사업이다.
쟁점 3. 주민들에게 알렸나
반대 측은 거창군이 사업 설명회나 공청회 등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추진 3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 뒤늦게 알고 반대를 하는 것이라고. 교정시설 설치는 대용감방 시설 개선 수준의 50여 명 정도라는 등, 제대로 알리지 않았고, 절차상 문제도 있다는 것이 그들의 얘기다.
그러나 군청은 사업 초기 인근 지역 주민 대표와 주민 간담회를 열었고, 성산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또한 시가지 등에서 서명운동을 했고, 홍보물을 통해 교정시설 설치 등을 알렸다고 한다.
쟁점 4. 위치, 타당한가?
고질적 민원 내용인 한센인 마을 악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게 현 위치 선정의 이유라는 군의 입장과 학교·주거밀집지역과 가깝고, 타 지역보다 비싼 사업비 들여가며, 왜 그 땅 하나만을 고집하냐는 반대 측의 주장이 맞선다.
빨간 표시가 거창군 전체,
화살표가 가리키는 녹색 원이, 사업이 추진되는 부지다.
교도소 부지(법조타운 전체 부지 아님) 끝과 대성일고(대성고와 다름)와의 직선거리는 200M
부지 안에 성산마을(한센인 마을)이 보인다.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의 개요는, 군청의 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이 중 사업 내용을 보면 "거창 구치소 신축"이 있다. 보다시피 사업 금액이 가장 큰데, 이 시설의 신축은 법무부의 소관이다.(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의 주체는 거창군청이다.) 이 시설의 신축은 다음 공문에 따르면 2011년 7월 22일에 결정되었다.
교정시설의 신축은 미결수용자들의 인권 개선 및 대용감방 폐지와 맞물려 있다.(대용감방은 경찰서 유치장으로, 법적 판결이 나지 않은 미결수는 재판이 진행되어 형이 확정될 때까지 교도소나 구치소에 구금되나, 인근 지역에 교도소나 구치소가 없는 경우, 대용감방에 구금된다.) 이 대용감방 수용자들의 인권 문제는 오래 전부터 언급되었다.(관련 기사 링크하나,둘)
2007-2011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대한민국 정부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중 일부를 보자. "라. 대용감방 개선" 중에서 "교정시설 신축을 통한 폐지" 항목이 있다. 이에 근거한 것 중 하나가 "거창 교도소 신축"이다. 물론 정부의 계획안을 군민이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의무는 없다. 다만, 타 지역의 상황과 더불어 거창에 지원·지청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거창교도소 신축 자체를 마냥 반대하긴 어렵다. 물론 교도소는 혐오시설로, 일반적으로 환영할 만한 시설은 아니다. 따라서 교도소 신축을 추진해야만 하는 법무부의 입장과 지역민과의 마찰은 당연한 결과다. 실제로 타 지역을 살펴 보면, 처음의 계획과 달리 개소가 늦어진 경우가 많다. (통영의 예,계획과개소)
말하고자 하는 건, 거창 교도소 신축은 본래 법무부의 사업이란 거다. 동시에 이것은 거창군의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의 내용 중 하나다. 그런데 단순히 여러 사업 중 하나로 보기엔 그 비중이 크다. 핵심 사업으로 봐도 무방하다. 만약, 거창 교도소 신축이 없다면?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도 없었을 거다. 각 사업의 진행 상황과 관련 내용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2014년 10월 22일을 기준으로, 각 내용의 진행 상황을 보자.
1. 거창 교도소 신축 : 법무부가 거창군에 부지매입(보상) 및 조성 부분을 위탁했고, 거창군의 주도로 현재 그 부분이 진행 중이다. 기본조사와 설계가 끝났고, 도시계획시설 인가 절차에 같이 걸쳐 있다. 보상이 끝나면 착공이다.
2. 거창 지청·지원 이전 신축 :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 중 금액으로는 두 번째 규모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지청·지원 이전 신축은 각각 법무부와 대법원의 일이다. 창원지법 거창지원(이하 거창지원) 서무과의 답변에 따르면, 거창지원은 1979년에 준공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전반적으로 시설이 낡았고, 공간들이 협소해 이번 사업과는 별개로 이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그러나 부지매입 및 조성 등 예산상의 어려움이 있었는데, 거창군의 협조로 이전 신축을 보다 빠르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단다. 군청에서 새로운 부지를 매입한 뒤, 현 지청·지원과 부지를 맞바꾸는 형식.
현 거창지원과 거창지청
현재, 지청·지원 이전과 관련하여 대법원의 세입세출예산명세서를 확인한 결과, 거창 지원 신축 기본조사설계비·실시설계비가 확보됐음을 알 수 있었다. 군청 창조산업과의 설명에 따르면 지청 역시 같은 항목의 예산이 확보가 됐다고 한다.
다만 부지가 확보되어야 다음 단계인 설계로 이어지는데 2014년 10월 22일을 기준으로 군청의 답변은 "지청·지원과의 조율이 끝나 내부적으로는 부지 확정이 되어, 공문을 기다리는 중"이며 법원행정처에 문의 결과, 거창지원의 이전은 아직 최종적으로 확정된 바는 없다고 한다.(부지 확정 결재가 아직 안 났기에) 창원지검 거창지청(이하 거창지청)의 이전은 법무부에 문의했으나, 대변인실을 통해 메일로만 남길 수 있어, (남겼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서 반대 측에선 "처음엔 계획에 없었고, 뒤늦게 무리하게 추진시켰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최근에 리모델링을 했는데 이전을 왜 하냐"는 의견도 있었다. 이전 신축이 언제부터 추진된 건지 확인하기 위해 법원행정처 설담당관실에 확인 전화를 하였으나, 담당자는 올해 1월에 현 자리에 왔으며, 본인이 오기 이전에 추진된 거라 하였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확인해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엔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거창지청의 이전 추진을 확인하기 위해 법무부에 메일을 남겼으나, 아직 답을 받지 못했다. )
리모델링 부분은 거창지원 서무과에 확인한 결과, 법의 개정으로 법정이 신축·증축이 되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형사법정, 민사법정으로 나누어 짐에 따라, 형사법정을 리모델링하고, 민사법정을 신축하여 전체로 보면 증축인 것.
"이전과 리모델링 등은 전체 계획의 일환에 있어요. 79년에 준공이 됐는데, 어쨌든 10년 안에는 옮겨야 합니다. 자체 안전 진단에 따라 40년을 넘어가면 안되거든요. 마침 거창군에서 도와줘서 예산 편성 없이 부지 매입 및 조성이 가능하게 됐습니다.
거창군 입장에선 지청·지원 부지와 건물의 활용도가 있다고 보고, 지정·지원 입장에서도 넓은 공간 확보 및 타지의 사람들도 좁은 읍내를 지나서 들어올 필요 없기에 전체적으로 접근성이 좋아진다고 봤거든요. 지금은 너무 안 쪽에 위치해서, 보다 찾기도 쉬울 것 같고요. 도로, 전기 등 기반 시설이 저 사업의 일환으로 같이 들어가니까 거창지원 입장에선 일처리가 수월하고, 전체적으로 비용 절감 효과가 큽니다."
3. 보호관찰소 신축 : 정확히는 창원보호관찰소 거창지소. 군청에서는 허가를 내줄 뿐, 관련 기관(거창지소와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에서 직접 추진하는 일이다. 신축을 위한 예산을 법무부에서 국회에 신청해 놓은 상황. 예산이 통과되어야 진행되기 때문에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4. 출입국 관리사무소 출장소 신설 : 이 부분은 군청에서 밝힌 바, 법무부, 안행부와 협의 중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
5. 도로개설 : 공사 예정인 도로 중 일부는 70년대 도시기본계획에 있었던 도로라 한다. 도로 개설과 관련된 사업비는 다음과 같다.사업비.hwp
노란색, 형광색 등이 개설 예정인 도로다.
사업은 대부분 진행 중이긴 하나, 아직까지는 구치소를 제외하고는 확정된 사업은 없었다. 하여, 각 사업비 산출 근거를 알 수 있냐고 물어 보았더니, 구치소는 법무부에서 설계를 하여 확정된 금액이고, 지원·지청, 보호관찰소, 출입국관리사무소는 타 사례를 참고해서 각 기관에서 알려준 대략적인 금액이라고 한다. 도로 및 한센인 마을 이주와 관련해서는 군청 도시건축과에서 산정했다고. 구치소의 경우는 사업비 산정 근거를 법무부 대변인실 메일을 통해 문의를 해 놓은 상태다.
예산·면적 등의 비중, 진행 상황 등으로 보면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의 핵심은 거창 교도소 신축이라 판단된다.
이 사업에 대하여 추진 배경 등, 관련 이야기를 군청 창조산업과를 통해 들어 보자.
창조산업과 인터뷰
Q. 처음에 어떻게 이 사업이 시작 되었습니까?
A. 이 사업이 2010년도에, 민선 5기잖습니까, 민선5기 때 군의원이라던지, 군수후보자들이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가 한센인 촌입니다. 한센인 촌에서 축사를 많이 하기 때문에 후보들이 전체적으로 가축 분뇨 등의 악취를 해소하겠다는 공약을 많이 걸었습니다.(평소 주민들이 악취로 민원을 제기)
2010년 11월부턴데, 참여정부 강금실장관 때 대용구치소가 거창, 영동, 남원에 남았었습니다.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이 나와서, 2017년까지 모든 걸 해소를 하겠다 했죠. 그 때 거창은 2015년 이후로 계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근데 합천군에서 법무부를 방문해서 거창군하고의 경계에 교정시설 설치를 제안했는데, 그런 움직임을 유치위원들이 조금 알았습니다. 그래서 2010년 11월경부터 포항교도소, 밀양교도소 견학을 갔습니다. 당시엔 합천으로 갈 수 있겠단 것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행정통합이 국가적으로 논의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면 국가기관이 하나라도 있는 게 행정통합의 거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공감대가 군민들끼리 있었다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Q. 군민들의 공감대가 있었다?
A. 네, 당시엔 있었고, 공약도 악취문제 해소가 있었는데, 야당의원들도 공약을 걸었습니다. 저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들어오는 시설을 저기 넣는데, 그것만 들어오면 군민들이 반대를 할 거 아닙니까? 하지만 법원, 검찰, 교정시설을 묶어서, 한센인 마을을 들어내고, 타운을 만들자, 거기가 가장 거창에서 낙후된 지역이거든요. 어차피 군비로는 해결을 할 수 없는 지역입니다, 국가시설을 유치해서 해결하자 해서 그 때부터 법조타운이라는 용어를 썼습니다.
보면은 인천 학익동이나 평택, 송파구 문정동(조성중), 그게 법원, 검찰, 교정시설 이렇게 타운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하기 위해서 인근 아파트 주민들하고 간담회를 가졌습니다.(학익동은 지원·지청이 아닌 지방법원, 검찰청 등이 구치소와 함께 있으며, 그 곳은 일제시대 때 이미 소년형무소로 시작된 위치다. 평택의 경우 96년에 생겼으며, 거창과 같은 지원·지청이 있으나, 구치소가 아닌 평택구치지소가 있다.)
Q. 인근이면 현대아파트 주민인가요?
A. 네, 현대, 대경, 주공아파트 대표들하고 간담회를 가졌는데, 저희가 만든 자료를 그 때 자료를 누군가 식당에 놓고 나왔어요. 그래서 지역에 있는 신문이 그거를 보도를 했어요. 교도소가 들어온다고. 아직 그건 확정된 게 아니기 때문에, 이건 아니라고 이야기 했어요.
Q. 지역신문은 어디에요?
A. 거창 신보입니다.(반대 측은 지역 신문 대부분이 군정 신문이라고 주장한다. 거창 법조타운 추진위원장 또한 지역 신문사주다.)그러고 나서 지역 원로들이 모여서 행정통합도 있고, 교정시설을 합천으로 빼앗겨 버리면 거창의 위상이 격하되지 않겠느냐 해서, 모식당에서 한 스무분 정도가 모여 ‘이걸 우리가 가져와야 한다’하여, 유치위원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그리고 2011년 2월 5일인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법조타운 유치위원회 발대식을 가졌습니다. 당시에 서명 운동을 3월 5일까지 받았었어요. 그 때 가두에 나가서 받고, 단체별로도 받고, 병원, 농협, 마을 등 이렇게 빨리 빨리, 제가 자료를 봐야 하는데.(직원에게 자료 요청)
서명부에 대해서는 제가 지금 고발을 당한 상태기 때문에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한 달에 3만 명, 정확하게 한 이만 팔천 몇 명입니다. 그게 급했던 게 2012년도 예산 확보를 했어야 했기 때문에 대법원하고 법무부에 서명부를 전달을 했습니다.
Q. 그게 없으면 예산 확보가 안 되나요?
A. 아 그건 상관은 없는 건데, 법무부에서도 실제론 서명부하곤 큰 관계가 없다 합니다. 어차피, 국가계획이고, 단지 거창에서 2년 앞당겨서 해달라고 하니까.
Q. 그리고요?
A. 3월달에 저희들이 서명부를 전달을 하고, 법무부에서 4월달에 1차 실사를 왔었습니다. 그 때 그 당시에는 일반주거지역이기에 땅값이 너무 비싸다, 거창 다른 지역이면 500억이면 되는데, 거긴 822억이거든요. 그래서 직원들의 후생 시설 등 이런 건 유리한데 땅값이 비싸가지고,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회신이 왔었어요. 그리고 5월달에 교정본부장이 다시 현장을 왔었습니다. 현장을 보고, 조금 땅값이 비싸지만 거창군의 문제도 해결하고, 타운화 하는 건 자기들도 좋다해서 2011년 7월 22일에 그 지역이 확정이 되었다고 법무부에서 공문이 왔습니다.
Q. 그 때는 교정시설 설치만 확정이 된 거죠?
A. 네. 당시에 법무부 당초예산에 편성을 못했어요. 7월달이 되다 보니까. 그래서 법무부에서 문제제기사업으로 국회에 요청을 해서, 2012년 기본조사 용역비가 2억원이 초과가 됐었어요. 그래서 2012년에 기본조사 용역이 법무부에서 되고, 나머지 이제 저희들은 지원·지청을 이전해야 되기 때문에 지원·지청 이전을 위해 계속 기획재정부와 협의했습니다. 근데 땅을 사는 건 돈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렵다고 해서 이전부지를 거창군에서 사서 부지 조성을 하고, 현 지원·지청 부지하고 일대일로 맞교환하는 걸로 그렇게 해 가지고.
A. 네. 협의를 했던 거죠. 그래서 2013년도, 14년도 예산안에 기본조사 용역비하고 설계비가 지원·지청 합쳐서, 약 9억 얼마 정도가 확보가 됐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이 지원·지청 부지를 매입하고, 부지를 조성하는 건 군비로, 일단은 2013년도부터 올해까지 약 60억 정도 확보를 했습니다.
Q. 네, 땅은 군비로 부지조성비까지 확보가 되셨고,
A. 네, 그걸 일대일로 교환을 하면, 그럼 현 지원·지청 땅은 거창군 땅이 되고(건물도 같이), 새 부지는 대법원하고, 검찰청 땅이 됩니다, 이건 그렇고, 요 안에 성산마을(한센인 마을) 이전이 사실 최고 문제였습니다. 그게 31가구에 71명이 살고 있어요. 그 분들이 서너집 빼고는 다 기초생활수급자입니다. 그래서 축사 현대화 이런 건 엄두를 못내고, 맨날 냄새 난다고 현대아파트 측에서 민원이 많이 들어옵니다. 과태료 같은 것도 물고 하지만, 생계 수단이 양돈양계라서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인데, 그 때 이 사업이 확정이 되고 나서 군수님께서 사업이 확정됐으니 가축 입식을 자제해 달라해서 그 때부터 가축 입식을 안했습니다. 그래서 냄새가 지금은 많이 나지 않아요. 큰 대형 축사 말고는. 그래서 만약에 계속 그걸 했더라면, 여기도 냄새 때문에 지금 이런 문제들이(반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실제 현대아파트 주민에게 가서 물었더니, "요즘은 덜한 것 같긴 한데, 악취가 심했다"고 했다. )
Q. 사업 진행 등, 앞으로의 계획은?
A. 그거는 저희는 모릅니다. 국가사업이기 때문에 지원은 대법원에서 하고, 교정시설하고 지청은 법무부에서 하기 때문에. 다만, 법무부 계획은 보니까, 어차피 계약은, 조달청 가서 입찰을 해야 하기 때문에 연말까지는 업체가 정해지지 않겠나 합니다.
Q. 구치소는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에 따른 거다?
A. 네. 그래서 저희들은 그걸 하면서 법원·검찰을 같이 묶어서 타운화하는 거죠. 보호관찰소가 지금 초등학교 앞에 있거든요. 그것도 옮기고, 또 하나는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여기서 가려면 마산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서 출장소를 하나 유치하려고, 저희가 법무부도 가고, 안행부도 가고 합니다. 그러면 거창, 합천, 함양, 산청, 전라북도 무주, 진안, 장수 이렇게 정도. 전북은 전주까지 가야 하고, 여기는 마산까지 가야하는데 그 업무를 통합해서 거창에서 하면 좋지 않겠나 합니다.
요즘 출입국관리사무소가 불법체류자 단속 이런 게 주가 아니고, 다문화 가정 관련 프로그램하고, 학습하고 이런 기능이 많기 때문에, 좋은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같이 해달라고 했고, 보호관찰소는 법원·검찰 부지 확정이 되면은 그 옆에 5억 8천 예산을 내년에 신청할 것 같습니다.
Q. 지도로 설명 한 번 해주시죠.
A. 요게 지금 국도 3호선이든요. 바로 산 밑입니다. 여기가 이렇게 야산이 있어서 다 가려져 있습니다. 법원검찰이 여기 들어오고, 보호관찰소나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이쪽으로 들어올 겁니다. 여기가 수용동이고, 나머지는 주차장, 공원, 직원 아파트단지입니다.
Q. 보니까, 학교하고 가깝다고 걱정을 하시더라고요.
A. 저 분들은 여기서 이렇게 직선으로 이백 미터인데, 중앙에서 재야지, 땅 끝에서 잰 거리예요. 그리고 실제로 여기 다 산이다. 막고 있어서 보이지도 않고. 그리고 성산 마을 사람들이 이 밑으로 이주를 하고요.
Q. 다른 위치로 변경 가능성은 없습니까?
A. 지금 법무부에서 여기 돈이 20억이 들어갔거든요. 설계비하고, 기본조사용역비가요. 그리고 저희 군에 지금 보상비로 63억이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법무부에서 어찌 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투입이 됐기 때문에. 저희군에 내려온 보상비로는 지금 감정평가 등 다 하고요.
보상 관련해서는 법무부에서 거창군에 위탁을 한 건데, 이제 막 감정평가가 끝났습니다. 협의를 해야 하거든요. 서로 돈을 먼저 찾아가려고 하니까.11월 쯤이면 완료가 될 것 같습니다.
Q. 교정시설 부지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번지로 알 수 있습니까?
A. 그건 가능합니다. 도시과 가면요. 공공시설로 확정이 되어 있습니다. 도시계획 시설 결정된 거 확인하시면 됩니다.
Q. 교정시설 S2 등급은 뭡니까?
A. 그건 공무원 범죄, 과실범, 경제사범, 교통사범을 수용하는 겁니다.
Q. 뭐뭐 있습니까?
A. S1에서 S4까지 있습니다. S1은 천안에 있는데 낮에는 일상 생활을 똑같이 하고, 잠은 교도소에서 자는 겁니다. S2는 좀 전에 말한 건데, 이렇게 되어 있는 곳이 영월입니다. 수형자 자치제 교도소라고 해서, 보통 교도소라 하면은, 각 방마다 배식을 넣어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고, 여기는 집단 급식, 자율 배식, 식당도 따로 있고, 그리고 교육 시설도 있고요. 북부 쪽에는 영월, 남부 쪽에는 거창, 이게 법무부 생각 같습니다.(영월교도소는 일명 황제교도소라고 해서, 고위직들이 많이 있으며, 수용률이 20프로가 채 되지 않는다. 관련 기사링크)
이상 추진 단체를 통해 법조타운 조성 사업에 대해 들어보았다. 반대 측의 의견 또한 들어봐야 한다. 그리하여 지난 인터뷰 중 일부를 요약해 봤다.
그들은 성토했다. 군민들을 속였다며. 그리고는 현 상황과 문제점, 갖가지 의혹에 대해 언급했다. 이미 많이 알아보았던,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법조타운이 아니라 교도소
"맨 처음에 법조타운이 들어온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런 줄 알았죠. 그런데 이게 기결수가 수용이 되는 교도소예요. 부지가 6만 평이에요.(군청이 조성하려는 법조타운의 경우 그러하나, 법무부의 교도소 신축 사업만 따지면 사만 팔천여 평) 500여 명 수용 규모의. 그리고 지원·지청 다 같이 옮기는 줄 알았는데, 계획이 없었어요. 교도소만 생기는 거예요. 주민설명회나 공청회 한 번이 없었어요.
"당시 서명을 받을 때부터, '이거 유치장 아니에요? 교도소 아니에요?' 라고 하면 '아니다, 대용감방 수준이다' 이렇게 말했다고 증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이건 거창군이 안 가져오면, 법조타운이 합천으로 간다, 지원 지청까지 다 가져간다'는 말로 위기의식을 조장하면서요. 근데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다른 곳은 갈 수가 없는 거였어요. 법무부에서 합천은 안 간다고 얘기를 해 놨대요. 여기가 거창, 산청, 함양, 합천까지 아우르는 곳이에요. 함양에서 합천을 가려면 너무 멀기 때문에 중간 지점에 둘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지원·지청이 안 들어오는 것도, 이번 8월 말에 알았어요. 원래는 다 같이 옮기는 줄 알았죠. 그래도 교도소가 대형교도소가 학교·주거 밀집지역에 들어서는 것 때문에 반대를 하는 거였는데, 그나마 이전하는 줄 알았던 지원·지청은 옮길 계획도 없고요. 그걸 법무부 모 사무관 입을 통해 정확히 들었어요. 녹음을 해놨어요. '지금 부지를 매입하려는 땅은 교도소밖에 없는 건가요?' '그렇죠'라고."(법무부 입장에서는 일단 교도소 신축 사업이기에)
"그 때 고등학생 중에 서명했던 애가 지금 서울에 가 있는데 얼마 전에 글을 올렸어요. 자기도 그 때 서명한 기억이 있는데, 추석이라고 집에 와 보니, 엄마가 얼굴이 안 좋더래요. 왜 그러냐니까 '그 때 너랑 했던 그게 실은 알고 보니까 교도소더라.' 그래서 법무부에 민원을 넣었다 하더라고요."
"아직 명칭도 정해지지 않았어요. 교정 직업훈련원이냐, 교도소냐, 구치소냐 이 세 가지 중에서 결정이 돼요. 거창군에서 명칭을 달라고 한 건 교도소가 아니라 구치소예요. 하지만 성격이나 규모를 보면 이건 교도소죠. 법무부에서도 구치소라는 이름을 원하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정부조직법이 통과되어야만 확정이 된다고 해요. 근데 교도소는 어감도 안 좋고, 혐오시설이라는 이미지를 주기 때문에 요즘에는 대부분 구치소로 하는 추세라곤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구치소에 미결수, 기결수가 다 들어가 있는 상황인 거죠."
"교정공무원이 200명이에요. 근데 논문을 보면, 우리나라 교정 시설이 포화상태기 때문에, 보통 백프로 이상 수용이 되어 있대요. 그런데 500명 기준이 되어야 교정·교화가 가능한데, 천 명 이상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 많기 때문에, 500명으로 맞추는 게 자기네들(법무부) 목표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500명 넘어갈 가능성이 많죠."
2. 서명부는 조작됐다
"처음에 말하길, '대용감방의 현대식화, 행정의 편의상 미결수들이 왔다 갔다 하는데, 그 규모는 대용감방보다 조금 큰 50명 정도의 수준일 거다' 그러면서 그들(유치위원회 포함 군 쪽 사람들)이 서명을 받았어요. 그래서 3만 서명을 완성해서 법무부에 올린 거예요. 그 과정을 보니까 법무부에서는 이 자리는 입지가 부적절하다고 두 번이나 지적도 했더라고요. 하지만, '아니다. 우리 군에서는 이렇게 호응하고 있다'는 의미로 서명부를 제출한 것 같아요."
"3만 명은 우리 군민의 반에 가까운 숫자거든요. 근데 우리가 자체적으로 조사를 해 보니, 거기엔 어린 애들, 돌아가신 분들, 요양원에 계신 분들 다 서명이 되어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군의원이 열람을 해서, 사진을 찍었어요. 그걸 봤는데, 그 자료는 공개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공식적으로 정보공개 청구를 해서 받은 건 매직으로 이름이 지워져 있었어요. 그건 현재 갖고 있어요."
지우다 보니, 느낌이 덜한데, 원본을 보면, 한 사람 필체 느낌이 많이 든다.
"처음에는 서명 인원이 얼마 없었어요. 근데 특정 마을의 경우 그게 며칠만에 확 늘어났어요. 이것 좀 보세요."
"근데 그 서명부에서 *** 씨가 자기 이름을 본 거예요. 그 분은 서명하지 않았다고 했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법조타운이다, 50명 수준의 대용감방 개선 시설'이라 해서 서명을 분명히 했거든요. 저는 정보공개 요청을 하니 나왔어요. 그런데 그 분은 정보부존재(청구인이 공공기관이 보유, 관리하고 있지 않은 정보를 청구한 경우)로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대리 서명한 사람들은 다 정보부존재로 나오는 거죠. 그래서 못 믿겠다 싶어서 법무부에 정보공개 요청을 했어요. 근데 법무부에서는 이사를 많이 다녀서 서명부가 어딨는지 모르겠대요."
대책위 측은, 법무부에서 교도소 유치를 결정함에 있어 서명부를 통해 군민들의 의견이 반영됐다고 생각한다. 고로 위조된 서명부이기에, 원점에서 다시 논의할 것을 주장한다.
3. 교육도시 브랜드, 학교·주거 밀집지역에 교도소라니!
Q. 간단히 말하면 어쨌든, 유치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고, 반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반대하시는 분들은 주로 학부모님이시잖아요. 그 반대의 이유가 아이들 교육이나 키우는 데에 있어서 마땅치 않은 시설이다 그런 겁니까?
A. 그것도 포함된 거지만, 주민동의가 없는 절차상의 문제가 있고, 개념에 있어서도 명확하게 교도소라 하지 않았고, 명의도용도 했다는 것, 거기에 11개 학교가 있는 주거 밀집지역 앞이라는 게 문제죠.
Q. 절차상의 문제는 분명해 보이니 잠시 차치하고, 교도소를 반대하는 이유가 주민생활시설 안에 들어오기 때문에 좋지 않다? 구체적으로 왜 안 좋은지 여쭤봐도 될까요?
A. 여기가 지금까지 교육도시의 브랜드를 갖고 있었단 말이에요. 교육, 환경, 문화, 생태, 귀농 이 이미지가 컸었어요. 이 이미지를 만들어 낸 데에는 군에서도 노력했겠지만, 군민들도 같이 노력을 했단 말이죠. 사과도 유명하고, 계곡도 있고. 연극제도 한단 말이죠. 그런 이미지를 구축해 왔는데, 난데없이 교도소를... 논문도 찾아보니까, 교도소는 핵폐기장과 같이 1급 위험시설이더라고요. 여기는 읍의 인구가 4만이에요. 거의 읍에 모여 살아요.
Q. 거창은 6만 3천 명 중에서, 읍에 모여 사는 사람이 4만 명이다?
A, 다른 군하고는 좀 달라요. 그리고 여기 아이들이 정말 많아요. 애 둘, 셋 낳는 건 보통이고요. 여기는 고등학생 비율이 높아요. 중학교 졸업생 수보다 고등학교 입학생 수가 많고요.
거창군 거창읍의 인구 밀집도와 학생 비율이 정말 높은 건지는 감이 잘 오지 않아 인접해 있는 기초자치단체와의 비교를 위해 직접 찾아봤다.
산청, 함양, 거창, 합천의 학교 분포도(좌측 상단부터 시계 방향)
거창군이 인접한 세 군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으며, 특히 읍내의 인구밀도는 월등히 높다. 학생 수 또한 타 군에 비해 많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실제 걸어본 거창읍 내의 학교 밀집도는 정말 높았다. 그냥 다닥다닥다닥.
"그리고 여긴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어요. 소도시의 삶을 즐기고자 사람들이 들어온단 말이에요. 물론 교도소도 필요시설이긴 해요. 근데 왜 굳이 이 한가운데에 들어오며, 학생들도 많은 이 곳에 아무 절차도 없이 들어오느냐, 여태 키워온 교육 이미지하곤 다르지 않냐 이렇게 반대를 하는 거죠."
"단순하게 학교 하나가 아니라, 학교가 밀집이 되어 있어요. 1킬로 내에 11개. 그리고 거창은 좁아요. 15분이면 여기 저기 다 걸어가요."
"그리고 자료를 보면 교도소는 폐쇄시설이기 때문에, 아무리 재소자를 위한다 해도 일단 징역살이인 거잖아요. 그래서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경비를 하는 요소들로 채워지더라고요. 저기 청송군 교도소도 진보면이라고 해서 읍하고는 멀리 떨어져서 보이지 않는다 하고, 현재 지금 다른 도시도, 도시가 확장되어서 도시 안에 교도소가 있다 하더라도, 도시 중에서 변두리에요. 그런데 여기처럼 신설되는 것이 밀집지역에 들어오는 건 없단 말이죠."
양측의 갈등
대화가 중요하지만, 양측이 서로 강경하다. 군은 대화를 하겠다고 하나, 기본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곧 그들이 말하는 대화는 반대 측을 설득하는 것이다. 반대 측은 군이나 법무부의 이런 태도에 대해 일방적이고 강경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감정적으로 강경하게 나가며, 예산을 막기 위해 국정감사 현장을 뛰어다닌다.
나는 얘기했다, 군청의 한 분께. 어떻게 하실 거냐고. 오해가 많아서 대화로 풀겠단다. 이미 사업비가 들어갔으니 돌릴 수 없고, 원안대로 진행할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들이 말하는 대화는, 상대가 그토록 싫어하는 설득이다. 일부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사업을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선 처음부터 조금 더 솔직·과감하게 오픈했어야 했다. 지금 겪어야 하는 과정은 초기에 겪었어야 할 일이다.
아무리 사업의 명분이 타당하다 한들 현재는 위치 문제로 인해 반대를 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반대하는 분들이 느끼는 불안한 감정, 이 부분은 구치소가 설치 되고, 직접 겪어봐야 해소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감정적인 부분이기에 대화로, 설득으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나는 얘기했다. 대책위 한 분께. 이건 명분 싸움이라고. 만약에 거창군 내 교도소 신축을 무조건 반대한다면 지역 이기주의라고.(공식 입장을 듣기 전) 하지만 시골 특유의 정서, 읍내에 있는 많은 인구, 학생이 많은 특수성 등을 감안하면 불안감을 전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래서 이들이 물고 늘어질 수 있는 것은 교도소 자체의 반대가 아닌, 현재의 위치다. 현재의 위치를 문제 삼을 때 절차상의 문제는 같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 외의 사람들 의견
취재를 다니면서 마주친 주민분들에게도 의견을 물어보았다. 그 중 공인중개사 직원, 학부모 등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의 의견은 제외했다.
1. 작년에 이사 온 30대 후반 여성
"잘 모르겠는데, 그게 교도소라는 것 같던데요. 사람들이 몰랐다는 것 같던데. 너무 마을에서 가까운 것 같아요."
2. 식당 운영 중인 60대 남성(자녀들은 다 성인이고, 타지에 있음)
"뭐, 내하곤 상관없어서. 뭐 필요한 거 아니겠어요? 필요한 건 필요한 건데, 너무 학교하고 가까운 것도 있고, 뭐 잘 모르겠어요."
3. 모 가게 운영 중인 30대 중반 남성
"그게 참 그렇습니다. 유치하려는 분들 입장이 이해도 되고, 반대하시는 분들도 이해도 되고. 저도 제가 지금 자녀가 없지만, 자녀가 있다면 신경쓰일 것 같고, 반대를 할 것 같은데, 그게 또 어딘가에는 분명히 있어야 되는 시설이고. 사실, 거창이 좁아서 지나다니면 전부 다 알거든요. 아무래도 신경쓰이는 부분은 있겠죠."
4. 관련 사업 중인 30대 남성 A, B
A "뭐 있어도 상관없지 않아요? 그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인데. 같이 어울려 살아야죠."
B "핵심은 돈이죠 돈, 땅값. 저도 학부모 입장이라면 반대할 것 같아요."
5. 군청 근처에서만난 여중생
"엄마가 교도소라카든데, 밤 12시에 나온다고. 안 좋은 거 아니에요?"(관련 기사 링크)
6. 야간에 공부하러 학교에 가던 여고생
"전 별로 관심없어요. 전 내년에 대학가서 여기 없거든요."
마지막으로 연세가 지긋하신 한 어른의 말씀이 떠오른다.
"양측 다 너무 극단적이라..."
p.s 취재 중, 대책위 공동대표 중 한 분과 같이 있을 때, 그 분이 협박 전화(입에 담기 힘든 심한 말 포함)를 받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다.
그러나 그 기억은 희미해졌고 제대로 아는 이들도 얼마 없다. 허나 이 사건은 왜 독재정권이 민주화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는지 보여주며, 훗날 5.18 학살이 이뤄지는데 신호탄이 되기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살펴 보자.
1. 발단
1970년대 초 청계천 판자촌 풍경
경기도 광주 대단지는 본디 서울의 빈민가를 제거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1편에서도 말했듯이 개발의 상징이자 신문물의 심장이 되어야 할 서울에 너저분하게 널린 빈민가는 큰 문제거리였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용산역 부근을 정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 지시를 당시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충실히 이행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 시장은 빈민촌 정리를 위해서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와우아파트라는 희대의 업적을 남긴 시민 아파트 건설과 서울 빈민 이주 계획이었다.
1967년 7월 18일 김 시장은 23만여 동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고, 127만 명을 서울시 밖으로 이전시키며, 광주군에 5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10만 5천여 가구를 건설하는 원대한 계획을 수립한다. 1969년부터 마장동, 청계천변, 용두동의 빈민 2만 명을 광주로 이전시켰고, 얼마 안 되서 봉천동, 숭인동, 창신동, 상&하왕십리의 빈민까지 광주 대단지로 몰려들었다.
수 많은 빈민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광주로 갔으나 광주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 곳에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상업시설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약 15만명에서 2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허허벌판에서 천막을 치고 살게 된 것이다. 당시 그곳에 거주했던 전성천 목사의 말에 의하면 굶어죽은 사람 시체 치우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고 했으니 그 참상이 눈 앞에 선할 지경이다.
이런 막장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계획을 입안한 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은 사람 50만 명을 대강 때려 넣어두면 알아서 서로 나눠먹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는데, 실제로 나눠먹기는 했다. 굶주림에 반쯤 맛이 가버린 부모가 갓난 애기를 삶았고 그 냄새에 이끌린 이웃들이 나눠먹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광주 대단지의 천막들
2. 분양권
이렇듯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에 놓여진 이들이 분양권을 포기하고 서울의 판자집 신세로 전락하는 일이 속출했다. 이곳에 대한 개발 논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터라 건축 브로커들은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분양권을 매입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의 개입으로 입주권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어떤 이는 입주권을 몇 십장씩 사들이기도 했다. 당연히 사기꾼 또한 몰려왔고, 위조 등의 사기사건과 철거관련 비리 등의 범죄들이 만연했었다.
이러한 개발 붐은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절정에 달했다. 당시 차지철 후보의 공약인 ‘1백 개의 공장 유치로 실업자 구제’, ‘토지의 무상상여와 5년간의 세금 면제’ 등등의 공약으로 이 저주받은 땅이 노다지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입주권을 사기 위한 아귀다툼 속에서 7월 14일, 갑자기 정부와 서울시는 입주권의 거래를 금지한다. 그 후 전매계약자들은 매수계약을 체결해야한다며 8천원에서 1만 2천원을 일시불로 낼 것을 요구한다. 이는 원래 계약하기로 했던 금액의 40배에서 800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토지 취득세로 1만원, 있지도 않은 주택에 대한 등기세로 1만원을 더 뜯어갔고, 보름 안에 건물을 올리지 않는다면 불하를 취소하기로 한다는 공고를 낸다. 결국 입주권을 산 이들은 스스로 지옥으로 가는 급행 티켓을 끊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미 좌절해 있던, 입주권을 산 이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3. 봉기
앞서 말한 전성천 목사는 단지의 분노가 폭발하기 직전에 각 단지의 반별 대표자들은 자신에게 모이라는 사발통문을 돌렸고, 이렇게 모인 이들은 1971년 7월 17일 ‘불하가격시정대책위원해’라는 조직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7월 19일에 유지대회를 열었는데 무려 2,000명이나 되는 인원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1만 5천명의 서명을 받아 요구사항을 작성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1. 대지불하가격 인하(평당 1500원 이하)
2. 불하가격 상후 10년간 연부 상환
3. 제 세금 5년간 면제
4. 구호대책과 취로사업 보장
경기도의 두 출장소는 이들의 요구사항을 깔끔하게 씹어버렸고,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당일 성남 출장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새로운 요구사항을 발표한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1. 대지를 무상으로 해줄 것
2. 세금을 면제시켜 줄 것
3. 시급한 민생고를 서울시에서 해결해 줄 것
8월 9일, 성남 출장소장은 삐라가 난립하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서울시 주택관리관에게 '긴급상황 발생, 현지에서 해결 불가능' 이라는 도움 요청을 한다. 이에 주택관리관은 최종환 부시장을 대동하여 황급히 광주 대단지로 향하는데, 이들은 300명의 주민들에게 둘러쌓인 채로 협상을 시작하나 결국 결렬된다. 다음날 11시에 양택식 서울 시장이 직접 와서 다시 교섭하겠다는 내용만 타결한 채 협상은 끝났고, 투쟁위는 시장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며 주민들에게 협상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여차하면 실력행사를 할 것도 각오한 채 말이다.
8월 10일, 오전 9시부터 거대한 민중들이 양택식 서울 시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빗길에 차가 막힌 나머지 양택식 시장은 11시가 되어도 도착할 수 없었고, 감정이 격양될대로 격양된 민중 속에서 한 외침이 터져나온다.
“서울 시장은 우리를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
서서히 술렁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11시 45분이 되자 이렇게 외친다.
“또 속았다. 내려가자”
궐기대회는 폭동으로 발전하고 "허울 좋은 선전말고 실업 군중 구제하라!", "살인적인 불하가격 반대" 등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출장소로 몰려가서 출장소를 아작을 내버린다.
당시 시위대에는 70대 노인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식칼과 곡괭이, 몽둥이 등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당시 목격자의 증언은 아래와 같다.
“참가한 군중 손에는 식칼, 곡괭이, 몽둥이 등이 쥐어져 있었고
눈망울은 먹이를 찾아 날뛰는 야수처럼 살기가 서려 있었다.”
(박기정, 1971)
단지의 골목 곳곳에는 '우리는 더 이상 속을 수 없다', '대책을 세워 달라' 등의 벽보가 붙어있었고, 군중은 "죽여라, 밟아버려라."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출장소에서 근방의 서울시 파견 광주단지 사업소로 몰려가서 기물들을 작살내놓고 방화를 시도했으나 비 때문에 사업소는 불타는 꼴을 면했다.
그리고 성난 군중은 지나가는 차들을 닥치는 대로 탈취하여 고함을 지르며 단지 거리를 누비고 다녔고, 일부는 서울로 가는 길목을 막아서서, 지나가는 택시들을 박살내며 “우리는 몇 끼니를 걸러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팔자 좋게 택시만 타느냐”, “죽어도 같이 죽자”, “왜 도망가려 하느냐”고 욕설을 퍼부으며 승객들을 강제로 하차시켰다.
한 시민은 경찰관에게 맞아서 머리가 터졌다며 자신을 때린 경찰관을 죽여버리겠다며 날뛰었다,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경찰들이 나타나자 시위대는 우리들에게 밥 줄 생각은 없고, 몽둥이로 막으려 한다면서 경찰에게 맞섰다. 이런 사태속에서 지나가던 참외트럭이 넘어져 참외가 길바닥에 구르자 굶주림에 미쳐버린 군중들은 순식간에 한 트럭 분량의 참외를 다 먹어치워버렸는데, 그 야수적인 실상은 소설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에 잘 표현되어 있다.
저것 좀 보라고 청년이 갑자기 소리칩니다. 그렇잖아도 난 이미 보고 있었는데요. 빗속에서 사람들이 경찰하고 한참 대결하는 중이었죠. 최루탄에 투석으로 맞서고 있었어요. 청년은 그것이 마치 자기 조홧속으로 그려진 그림이나 되는 것같이 기고만장입디다만, 솔직히 얘기해서 난 비에 젖은 사람들이 똑같이 비에 젖은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는 그 장면에 그렇게 감동하지 않았어요. 그것보다는 다른 걱정이 앞섰으니까요. 이 친구가 여기까지 끌고 와서 끝내 날 어쩔 작정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잠시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장면이 휘까닥 바뀌져 버립니다. 삼륜차 한 대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 가지고는 그만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거예요. 데몰 피해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느라고 요리조리 함부로 대가리를 디밀다가 그만 뒤집혀서 벌렁 나자빠져 버렸어요. 누렇게 익은 참외가 와그르르 쏟아지더니 길바닥으로 구릅니다. 경찰을 상대하던 군중들이 돌멩이질을 딱 멈추더니 참외 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습니다. 한 차분이나 되는 참외가 눈깜짝할 새 동이나 버립디다. 진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서는 어적어적 깨물어먹는 거예요. 먹는 그 자체는 결코 아름다운 장면이 못 되었어요. 다만 그런 속에서도 그걸 다투어 줏어먹도록 밑에서 떠받치는 그 무엇이 그저 무시무시하게 절실할 뿐이었죠.
이건 정말 나체화구나 하는 느낌이 처음으로 가슴에 팍 부딪쳐 옵디다. 나체를 확인한 이상 그 사람들하곤 종류가 다르다고 주장해 나온 근거가 별안간 흐려지는 기분이 듭니다. 내가 맑은 정신으로 나를 의식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였습니다.
-윤흥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 중
오후 2시가 되자 성난 군중은 광주 경찰서 성남지서를 다 때려부수고 경찰차를 불태워버렸다. 당시 광주 대단지내에 지나는 버스는 6대에 버스노선도 제대로 없는 지경이었지만 소요 동안 불탄 차만 22대에 달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격렬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민란은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진정될 수 있었다. 늦게나마 도착한 양택식 시장이 투쟁위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수락하겠다는 발표가 있고 나서야 주민들은 해산하였다. 양 시장은 추가로 조치를 취하기로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전매 입주자들의 대지가격도 원 철거 입주자와 같이 취급한다.
2) 주민 복지를 위하여 구호 양곡을 방출하고 자조 근로 공사를 아울러 실시한다.
3) 경기도 당국과 협의하여 취득세 부과는 보류토록 하겠으며 그 밖의 세금도 가급적 면제토록 중앙정부와 협의하겠다.
4) 주민들은 당국과 협조하여 계속 지역발전에 노력해 줄 것을 바란다.
이 민란속에서 주민과 경찰 100여명이 부상당했고, 민란의 주동자로 22명이 처벌당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 탄생한 도시가 바로 성남시였다.
4. 총평
이렇듯이 격렬하기 짝이 없는 역사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이 사건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 참고로 필자도 학창시절에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를 배웠으나 이 소설의 배경이 광주 대단지 사건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 많은게 변했을 것 같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시 정책입안자들과 대통령은 이러한 소요사태를 '사회 기강의 해이와 윤리적인 타락에서 오는 병폐'라고 규정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시위대를 더욱 더 잔학하게 탄압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저런 시각에서 벗어났는가? 그것은 생각해볼 일이다.
PS 1.
이 글은 김동춘《공간과 사회》 21 (4): 5-33의 내용을 사용하였음을 명시한다.
PS 2.
재난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다. 그 이후에도 씨랜드 화재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 등등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것은 더 이상 적지 않겠다. 너무 많기도 할뿐더러 상대적으로 최근의 이야기이기에 찾아보는데에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에 적지 않겠다.
글을 쓰는 내내 우리 사회는 만성적인 기억상실증에 시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사고가 일어나면 그 사고 행태가 이전의 사고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잊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가슴 아픈 일이라면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것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닌 당당히 트라우마와 맞서서 그 트라우마를 부숴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다음부터는 독재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첫 타는 지난번에도 말했듯이 포르투갈의 살라자르에 대한 이야기다. 참고로 아프리카와 중동의 이야기는 넘어가도록 하겠다. 너무나 많기에 다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 유럽지방과 아시아지방을 중심으로 이야기할 생각이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박정희 또한 나온다.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자.
1988년 국민학교(미안하다. 초등학교 다녀본 적이 없다.)1학년이었던 한 꼬마의 눈이 머문 작은 TV 화면. 음악이나 가사를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었지만, 그 안에 보인 어떤 형아의 모습은 너무나도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날에는 노래를 부르던 그 형아의 이름이 무언지도 알지 못했고 그 이름이 꼬마의 인생에 얼마나 깊이 들어올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알게 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요.
내 보물중 하나인 무한궤도 LP(1989년산)
신해철,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던 잘생긴(씨바 당시엔 꽃미남이었다구)형아의 이름이었습니다. 무한궤도 앨범과 솔로 앨범 1, 2집을 연달아 내며 시대의 아이돌(믿기 힘들겠지만 진짜 쩔었다구)로 떠올랐던 기억이 나네요.
꽃미남 신해철
그와 그의 음악 어떤 면에 빠졌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코찔찔이 꼬맹이는 그의 노래들을 줄줄이 외웠고 학교 장기자랑 시간에는 항상 그의 노래를 따라불렀습니다. 아,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같은 반 여자아이는 해바라기의 노래를 부르고 난 '슬픈표정 하지 말아요'를 불렀었습니다. 선생님께 어린놈이 그런 세속적인 노래 부르는 거 아니라고 혼났습니다. 씨바. 1집의 수록곡인 '안녕'의 영어가사가 궁금해서 대학생이던 사촌 형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던 기억도 납니다. 별게 다 기억나네. 신해철. 그가 한해 한해 커리어를 높여갈 때 꼬마도 한살 한살 나이만 처먹으며 그의 음악을 듣고 같이 나이를 먹어갔습니다.
신해철과 넥스트-97년 넥스트 해체에 관한 기사에도 '신해철과 넥스트'라는 표현이 있었다 씨부엉-를 결성하고 음반을 내며 대마초도 피고 감옥도 가고 아이돌이 아닌 음악인으로서 비상하게 됩니다. 1집 수록곡인 '도시인'을 전자댄스음악 취급했던 음악 기사를 보고 흥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훗날 신해철 본인도 '도시인'을 댄스음악으로 사용하기도 하지만)2집 '날아라 병아리'때에는"얄리를 죽인 게 신해철이라메?"라고 깐죽대던 친구와 싸웠던 기억도 있군요.
그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인 '음악도시'를 미친 듯이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경주로 수학여행 가서 그거 듣겠다고 섬세한 손길로 채널을 맞췄더라지요. 껠껠껠. 고스트스테이션도 열심히 들었지만 어쩐지 '마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해서 그를 불러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냥 해철이 형이었지요.
생각해보면 어이없게도 처음으로 넥스트의 콘서트를 갔던게 97년 12월 31일의 넥스트 해체 콘서트. 뭐 그것으로 끝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넥스트 공식 팬클럽에 가입하기도 하고 2000년대 초반에는 공식홈페이지랍시고 잠시 존재했던 ALCYON에서 활발히 술을 마시고 다니기도 하고 팬클럽에서 사랑을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이런저런 콘서트와 행사에 따라다니기도 하고, 따라다니다가 어느 날은 경인방송국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그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다 서로 웃기도 하고. 그날 그의 자동차인 링컨 뒷자리에 스페인 독립사에 관한 책이 있는 것을 보고 나중에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나는군요. 다른 멤버의 책이었을지도 모르지만.
9사단 훈련소에서 받은 친구의 편지에 적힌 그의 결혼 소식에 '오오 드디어!' 하며 마음속으로 축하를 보냈던 기억도 납니다.
그와 관련된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렇게 성장한 결과 그 꼬마는 300에 글을 싸지르는 "이런 잉여가 되었습니다!". 형광등 100개는 비교도 안 되게 빛나던 형아는 배 나온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구요.
그런데 그가 매우 아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약간 아픈 정도면 관리 못 한다고 화라도 내겠는데... 심각한 상황이라니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걱정에 잠도 오질 않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그의 이름을 검색하며 뭔가 나아진 점이 없나 확인해보고 있습니다.
내 삶의 또 하나의 영웅을 맘속에 묻기에 아직은 이르겠지요.
형.
술잔을 앞에 두고 있자니 형이 언젠가 라디오에서 나이트 캡으로 코냑을 한 잔씩 마신다는 말씀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쉽게도 코냑은 없어서 위스키를 앞에 두었네요.
그냥 해철이 형 생각을 하다 보니 많은 일이 생각나네요.
어여 깨어나고, 어여 건강해집시다. '50년 후의 내 모습'에 대답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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