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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 마빡 이야기/2014

딴지일보 마빡 2014. 10. 24

by 꾸물 2022.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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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설]이 많은 장군님들을 어찌할꼬? <上>

 

기사 - [잡설]이 많은 장군님들을 어찌할꼬? <上>

2014. 10. 24. 금요일 펜더 에피소드 1. 몇 년 전 일이다. 예비역 장군님들이 모여 있는(단체가 입주한 건물의 소유주는 국방부인 걸로 안다) 단체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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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4. 금요일

펜더

 

 

 

 

에피소드 1.

 

몇 년 전 일이다. 예비역 장군님들이 모여 있는(단체가 입주한 건물의 소유주는 국방부인 걸로 안다) 단체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어필할 만한 영상물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대본을 만들고, 영상물을 만들어서 납품을 했는데... 문제는 이 장군님들에게 '비용 감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나온 결론이 프로젝트 파기였다. 중장 전역자였던 예비역 장성께서는 병장 만기제대자와 얼굴을 붉히며 싸워야 했고, 결국 민간 연구원이 중간에서 정리를 해줬다. 당시 내 짧은 식견으로는 '군'에 너무 오래 있어서 '비용'에 대한 생각이 없었든가, 아니면 장군님이 입만 열면 말하던 그 '애국심'이 내게는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지금도 그 장군님이 당한 봉변(?)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한다.

 

 

에피소드 2.

 

10여 년 전 일이다. 외삼촌이 전역을 했다. 진급철이 되면, 온 가족들이 모여서 가족회의를 하고 각자의 사정을 염두에 두고 얼마씩 갹출 했던 기억이 난다. 외삼촌이 진급을 하면 지프차에 운전병과 부관을 대동하고 가족들을 일일이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일종의 '군보험'이었다. 각자 다들 아들들이 있었기에(혹은 그 주변에 아들이 있었기에) 외삼촌을 진급시키면 훗날 도움이 될 것이란 현실적인 판단. 그리고 그 판단은 주효했다. 나는 그 혜택을 보지 못했지만(강원도 고성으로 보냈으니... 그것도 '빽'을 써서 말이다), 내 사촌들은 다들 편하게 군생활을 했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군대에서 제법 높은 위치까지 올라가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사회생활에, 아니 대인관계에 심각한 장애(!!)를 안고 있었다. 결국 외삼촌은 자신의 직위에 걸맞는 일자리를 찾다가, ‘영업’에 뛰어들게 된다. 누가봐도 바지사장이었지만, 외삼촌은 장(長)이란 직책에 연연했고, 가족들은 외삼촌이 한없이 ‘사기’에 가까운 사업에 발을 담근 걸 알면서도 돈을 갹출해 물건을 사줬다(다단계 비슷했다). 일종의 ‘퇴직금’이었다. 결국 외삼촌은 반 년 만에 호된 사회신고식을 치렀고, 이후 전역한 다른 동기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한나라당 공천. 외삼촌은 고향으로 내려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고, 그때마다 외삼촌의 레이더에 걸린 것이 나였다(와서 선거연설문 써달라고... 쿨럭). 몇 번의 공천 실패 이후 외삼촌은 조용히 연금생활자의 길을 걷고 있다(아이러니한 게 외사촌 형님의 아내 되는, 내게는 형수님 되시는 분은 민주당 공천을 받아 시의원이 됐다. 외삼촌이 얼마나 '빡치셨는지'에 대해선 말 않겠다).

 

 

에피소드 3.

 

모 업체에서 군납품을 하기 위해 예비역 장군 한 분을 섭외했다. 납품은 성공했고(방산업체의 군납비리와는 무관한 납품이다. 재화가 아닌 서비스였고, 나름 합리적인 선택이라 본다), 장군님은 멍하니 사무실에 앉아계셨다. 최소한 30여 년을 군문에서 활동하신 분이라 사회 돌아가는 사정, 특히나 이쪽분야에 있어서는 문외한인 분이시기에 뭔가 의욕적으로 발언을 하고 의견을 개진했지만, 정말, 미안하게도, 안타깝게도, 장군님의 아이디어는 시대와 동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져 있었다. 결국 장군님은 멍 때리고 있다(과도한 ‘긍정마인드’로 몇 달간 사내 이곳저곳을 쏘다녔지만, 그것도 반 년을 넘기지 못하셨다. 그 다음부터는 밥 먹고, 신문 보고, 인터넷 검색하고의 반복). 나중에 그쪽 팀장에게 확인을 했는데,

 

“아... O장군님요?(엄연히 ‘이사’란 호칭이 있었지만, 여기선 장군으로 통용됐다) 군계약이 2년 돼 있는데. 2년 지나면...”

 

말끝을 흐리는 팀장의 말 속에 장군님의 운명이 숨어있었다. 늘 그래왔듯이 군납계약이 끝남과 동시에 장군님은 회사를 떠날 것이다(이쪽 업체의 관례다). 그건 장군님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취재]법조타운 vs 교도소 <2> 사업 본격 디비기, 양측의 의견

 

기사 - [취재]법조타운 vs 교도소 <2> 사업 본격 디비기, 양측의 의견

2014. 10. 24. 금요일 보리삼촌 지난 기사 [법조타운 vs 교도소 <1> 의문의 제보자] 그간 많은 소식들이 전파를 탔다. "교도소 반대 거창 범군민비상대책위원회"의 상경 집회, 법무부 방문, 등교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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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4. 금요일

보리삼촌

 

 

 



지난 기사

[법조타운 vs 교도소 <1> 의문의 제보자]


 

 

 

그간 많은 소식들이 전파를 탔다. "교도소 반대 거창 범군민비상대책위원회"의 상경 집회, 법무부 방문, 등교 거부 등으로 각종 미디어에 관련 보도가 됐으며, 국정감사에서도 관련 내용이 언급 중이다. 여러분들도 여러 소식을 접했으리라 본다. 늦은 만큼, 쭉 간다.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 이 사업과 관련해서는 각 주체들을 먼저 알아본다.

1. 교도소 반대 거창 범군민비상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 : 학교 앞 교도소 반대를 외치는 대책위의 공식 입장은 다음과 같다.

1) 명의도용을 하여 유치한, 학교 앞 교도소 절대 불가.
2) 주민동의 없이는 거창 어디에도 교도소 불가.

2, 거창군청 : 도시 발전을 명분으로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을 추진한다. "구치소(교도소) 신축 사업"은 거창 법조타운 조성 사업의 일부다.

3. 법무부 교정본부 : 구치소·교도소 등 교정시설 설치의 주체다. 현재 거창구치소 신축 과정에 있어 부지매입 및 보상 문제는 거창군에 위탁한 상태다.

4. 거창 법조타운 추진위원회 : 거창 법조타운 조성을 희망하는 민간 단체다. 2014년 8월에 구성되었으나, 전신은 2011년 만들어진, 거창 법조타운 유치위원회다. 소위 지역에서 잘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거창에서 신축 예정인 교정시설을 구치소든 교도소든 이 글에선 하나로 통일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어 그것을 정할 겸, 알려진 쟁점 몇 가지 먼저 언급한다. 

 

 

 

쟁점 1. 교도소? 구치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교도소와 구치소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구치소 : 구속 영장에 의하여 구속된 사람을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수용하는 시설이다.

교도소 : 행형(行形) 사무를 맡아보는 기관. 징역형이나 금고형, 노역장 유치나 구류 처분을 받은 사람 등을 수용하는 시설이다.

 

좀 더 정확한 설명을 위해 법무부 교정본부에서 2013년에 발간한 홍보 책자를 보자.

 

교도소는 형이 확정된 수형자를 수용 

구치소는 재판중에 있는 미결수용자의 구금확보 목적

 

법무부에서 신축 예정인 거창의 교정시설을 군청에서는 구치소라 하고, 반대하는 측에서는 교도소라 얘기한다. 이 시설이 수용동 4개 중 3개동이 (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기결수용이고, 2013년에 발간된 법무부의 홍보 자료에서도 '교도소'라고 적힌 것을 확인할 수 있기에, 실질적으로 교도소라는 판단이 되어, 이 글에선 교도소로 통일한다.(군청 또는 유치 측의 직간접 발언 제외)   

 

 

거창군청은 이 시설에 대해 구치소라고 얘기하는데, 이것은 2009년에 신설된 밀양구치소의 사례가 참고가 될 듯하다. 다음은 밀양구치소 수용기록과 직원과의 통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 명칭은 구치소일 뿐, 실질적으로는 교도소.
- 수용정원 440명.
- 현재(14년 10월 기준) 수용률 90프로 내외.
- 미결수, 기결수의 비율은 정해져 있지 않고, 유동적.
- 현재는 기결수가 미결수의 10배. 작은 도시라 미결수가 많지 않음.
- 교도관 수는 180여 명. 관사가 있으나 전부 다 수용할 수는 없는 규모.
- 월 평균 출소자는 20~30여 명.

 

김윤기(밀양구치소 교정위원, 밀성여자중학교장) 님의 글 중 일부다.(전문

 

2005년 밀양 지역에 교도소가 들어선다고 했을 때, 지역주민의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법무부에서 시민들과 소통하며 의사를 수렴한 끝에 교도소 명칭을 구치소로 바꾸고

 

실질적으로는 교도소지만,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구치소로 바뀌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역사]한국재난사 <6> 광주 대단지 사건

 

기사 - [역사]한국재난사 <6> 광주 대단지 사건

2014. 10. 24. 금요일 돼끼 지난 기사 [한국 재난사 <1> 와우 아파트 참사] [한국 재난사 <2> 서해 페리호 침몰] [한국재난사 <외전>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 [한국 재난사 <3> 성수대교 붕괴사고] [한국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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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4. 금요일

돼끼

 

 

 



지난 기사

[한국 재난사 <1> 와우 아파트 참사]
[한국 재난사 <2> 서해 페리호 침몰]
[한국재난사 <외전>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
[한국 재난사 <3> 성수대교 붕괴사고]
[한국 재난사 <4>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상(上)]
[[한국재난사 <5>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하(下)]


 

 

 

광주 대단지 사건은 개발독재시대의 대표적인 참사다. 

 

그러나 그 기억은 희미해졌고 제대로 아는 이들도 얼마 없다. 허나 이 사건은 왜 독재정권이 민주화 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는지 보여주며, 훗날 5.18 학살이 이뤄지는데 신호탄이 되기도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살펴 보자.

 

 

 

1. 발단

 

1970년대 초 청계천 판자촌 풍경

 

경기도 광주 대단지는 본디 서울의 빈민가를 제거하기 위해 계획되었다. 1편에서도 말했듯이 개발의 상징이자 신문물의 심장이 되어야 할 서울에 너저분하게 널린 빈민가는 큰 문제거리였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용산역 부근을 정리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 지시를 당시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충실히 이행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 시장은 빈민촌 정리를 위해서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와우아파트라는 희대의 업적을 남긴 시민 아파트 건설과 서울 빈민 이주 계획이었다. 

 

1967년 7월 18일 김 시장은 23만여 동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고, 127만 명을 서울시 밖으로 이전시키며, 광주군에 50만 명이 거주할 수 있는 10만 5천여 가구를 건설하는 원대한 계획을 수립한다. 1969년부터 마장동, 청계천변, 용두동의 빈민 2만 명을 광주로 이전시켰고, 얼마 안 되서 봉천동, 숭인동, 창신동, 상&하왕십리의 빈민까지 광주 대단지로 몰려들었다.

 

수 많은 빈민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광주로 갔으나 광주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그 곳에는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고, 상업시설이라고 부를만한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약 15만명에서 2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허허벌판에서 천막을 치고 살게 된 것이다. 당시 그곳에 거주했던 전성천 목사의 말에 의하면 굶어죽은 사람 시체 치우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고 했으니 그 참상이 눈 앞에 선할 지경이다.

 

이런 막장스러운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계획을 입안한 자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은 사람 50만 명을 대강 때려 넣어두면 알아서 서로 나눠먹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는데, 실제로 나눠먹기는 했다. 굶주림에 반쯤 맛이 가버린 부모가 갓난 애기를 삶았고 그 냄새에 이끌린 이웃들이 나눠먹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 말이다.

 

 

광주 대단지의 천막들 

 

 

 

 

 

[생활]기쾌유 신해철

 

기사 - [생활]기쾌유 신해철

2014. 10. 24. 금요일 Anyone 1988년 국민학교(미안하다. 초등학교 다녀본 적이 없다.) 1학년이었던 한 꼬마의 눈이 머문 작은 TV 화면. 음악이나 가사를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었지만, 그 안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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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24. 금요일

Anyone

 

 

 

1988년 국민학교(미안하다. 초등학교 다녀본 적이 없다.) 1학년이었던 한 꼬마의 눈이 머문 작은 TV 화면. 음악이나 가사를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었지만, 그 안에 보인 어떤 형아의 모습은 너무나도 환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날에는 노래를 부르던 그 형아의 이름이 무언지도 알지 못했고 그 이름이 꼬마의 인생에 얼마나 깊이 들어올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알게 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요.

 

내 보물중 하나인 무한궤도 LP(1989년산)

 

신해철, 기타를 메고 노래를 부르던 잘생긴(씨바 당시엔 꽃미남이었다구) 형아의 이름이었습니다. 무한궤도 앨범과 솔로 앨범 1, 2집을 연달아 내며 시대의 아이돌(믿기 힘들겠지만 진짜 쩔었다구)로 떠올랐던 기억이 나네요.

 

꽃미남 신해철

 

그와 그의 음악 어떤 면에 빠졌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코찔찔이 꼬맹이는 그의 노래들을 줄줄이 외웠고 학교 장기자랑 시간에는 항상 그의 노래를 따라불렀습니다. 아,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같은 반 여자아이는 해바라기의 노래를 부르고 난 '슬픈표정 하지 말아요'를 불렀었습니다. 선생님께 어린놈이 그런 세속적인 노래 부르는 거 아니라고 혼났습니다. 씨바. 1집의 수록곡인 '안녕'의 영어가사가 궁금해서 대학생이던 사촌 형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던 기억도 납니다. 별게 다 기억나네. 신해철. 그가 한해 한해 커리어를 높여갈 때 꼬마도 한살 한살 나이만 처먹으며 그의 음악을 듣고 같이 나이를 먹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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