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게 아마 1994년이었지?. 그때 나는 컴퓨터 통신 하이텔의 ‘언더그라운드 뮤직 동호회’라는, 나름 회원 2천명을 거느린 록 동호회 회장이었고 형은 넥스트의 1집 앨범 <Home>을 성공시키고 2집을 준비하고 있었던 때였어.
기억하겠지만 그 만남은 그리 우호적인 동기로 마련된 건 아니었우. 내가 왜, 넥스트 1집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글을 우리 동호회 게시판에 썼었잖아. 그런데 당시 하이텔 활동을 꽤 하던 형이 내 글을 읽고 나를 녹음 스튜디오로 초대하더라고. 뭐 만나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좀 긴장도 됐지만 못 갈 이유야 없었고 나 역시 이래저래 궁금하기도 했고.
당시 형이 작업하던 스튜디오는 대방동의 한 건물 지하였다우. 형은 특유의 털털한 분위기로 나를 맞았고, 의외로 내가 쓴 비판적인 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더군. 그리고는 마치 오래 된 친구인양 2집 녹음이 진행되고 있는 스튜디오에서 모든 작업 광경을 보여줬지. 잠시 견학시킨 게 아니라 그냥 종일 죽치고 있게 하고서 ㅎㅎ
그래서 그날 나중에 내 노래방 레파토리 중 하나가 된 <날아라 병아리>의 코러스와 기타가 녹음되는 광경을 지켜봤고, 또 앞으로 녹음 작업에 들어갈 데모테잎 전체를 리스닝 룸에서 함께 앉아서 감상하며 형의 자세한 설명까지 듣게 됐었지? 2집에 수록될 곡 한곡 한곡에 가지고 있는 형의 열정과 자부심은 참 인상적이었우. 특히 <껍질의 파괴>와 <The Ocean>에 대해 설명하던 모습이 기억에 선하네 그려.
이 앨범을 녹음하던 때 말야.
그 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 자기에게 비판적인 사람에게 욕을 하거나 싸움을 걸거나 구구절절 해명을 하는 대신 음악을 들려주고 작업 광경을 보여주는 게 신해철이라는 사람의 방식이구나. 사실 난 첨엔 형이 나랑 현피 뜰려고 오라는 줄 알았거든ㅋㅋ 그래서 그 언저리에서 호형호제 하게 됐지. 성격상 지금까지도 그런 거 잘 안 하는데, 이래저래 이 양반은 형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구나 싶었어.
하지만 정작 내가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지. 녹음 끝나고 밥 먹고 꽤 시간이 늦었서 대충 집에 가야지 하던 중에, 형이 나를 집으로 초대한 건 정말 뜻밖이거든. 그래서 졸지에 형 벤츠를 같이 타고 밴드 멤버들과 같이 살던 대림동 아파트로 가서 맥주와 양주를 마시며 새벽까지 주다스 프리스트의 비디오를 보지 않았겠어. 그리고 형의 넓지 않은 침대에 함께 누워 수다를 떨다가 잠들었으니 말이우. 남자 중에 형이랑 그런 경험 한 사람도 그리 흔하진 않을 것 같으이.
이제서야 이야기지만 내가 그 침실에서 형한테 살짝 감동한 장면이 하나 있어. 형 왜 그 시절에 책꽂이에 만 원짜리 다발을 몇백 장씩 쌓아두고 있었잖아. 당시만 해도 신용카드가 지금처럼 일반적일 때가 아니니 본인과 밴드의 비용으로 현금이 많이 필요했겠지. 하지만 누군지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그 방에 함께 누워 자는데도 거기에 전혀 신경을 안 쓰더라. 막말로 내가 맘만 먹는다면 형 화장실 갔을 때 몇십 장 집어갈 수도 있는 거였잖아?
그래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
...음악이고 뭐고 다 떠나서 멋진 남자였어, 형은.
그때 형이 대략 이런 모습이었을거야.
정말 젊었다...
그런 다음에도 몇몇 록 페스티벌에 같이 참여했고 연세대에서 함께 특강을 한 적도 있고 이래저래 만나고 또 마주쳤지. 의견이 대립한 적도 있었고. 2천 년대 초에 딴지일보 지면으로 촉발된 MP3 논쟁 기억나우? 내가 먼저 형 주장을 기사로 씹고 형이 라디오에서 우리 기사를 씹었던가 그랬을 거야ㅎㅎ 사실 형도 주관이 원체 강한 사람이고 나도 그래서 쉽게 양보하고 융화되고 머 그런 타입들은 아니지.
하지만 그건 일이고, 우리는 여하튼 형 아우 사이 아니었우? 그래서 그 MP3 논쟁 이후에 사적으로 연락해서 소주나 한잔하자 하려고 벼르다가 외국 나가게 되고 어쩌고 하면서 기회를 놓쳤어. 그리고는 또 세월이 한참 흘러 버렸고.
...그리고는 결국 이렇게 됐네.
내가 형의 추모글을 쓴다면 사람들은 어떤 걸 떠올릴까. 인간 신해철의 생을 되돌아보고, 아티스트 신해철의 명곡들을 재조명하고 그 음악사적 의미를 되새긴다? 그리고 이제 푹 쉬십시오, 점잖은 영면의 인사를 하고 끝을 맺는다?
이 사람 저 사람, 뮤지션들 떠날 때 그런 글들을 쓰기도 했었어. 하지만 그건 이번엔 다른 사람들이 하면 될 것 같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그냥 막 하겠수.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대체?
씨바. 형. 딴 사람도 아니고 신해철이잖아. 신해철. 어떻게 형이 이렇게 허망하게 가 버릴 수가 있냐고. 형 쓰러졌다는 기사 보고는 내가 페북에 뭐라고 썼는 줄 알아? 금방 멀쩡히 살아나서 심정지 중에 임사체험이니 유체이탈했다면서 구라풀 거라고 했어.
그게 맞는 거잖아. 그래야 되는 거잖아 형은.
그리고 내가 형한테 미안한 것도 하나 풀어야 했다고. 90년대 초반 그 시절에 이 나라에서 솔로 가수로 날리다가 엄한 록 밴드하겠다고 덤빈 형이야. 인기나 돈만 따지면 안 해야 하는 짓을 한 거지. 그때 이 나라 상황에서 그런 시도가 어떤 어려움이었을지 대략 짐작이 가. 단지 음악 스타일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소속사나 티브이 등 미디어하고의 관계, 팬들의 기대에 대한 부담... 얼마나 많이 것들이 덕지덕지 걸려 있는 일인지. 실패하면 가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를 모험이고.
다른 걸 다 떠나 그 시도 자체만으로 훈장이라도 받아야 할 일이었는데, 내가 첫 앨범을 너무 냉정하게 씹었어. 머 그 덕에 형을 알게 된 건 있지만 실은 그게 지금까지도 찜찜하다고. 그때의 나는 한국의 현실에는 눈을 감고 구름 위에서 살던 서양 록 덕후였으니 그랬지만, 또 막상 형은 호형호제하고는 잊어버렸을지 모르지만 암튼 맘 한구석에 계속 남아 있었어. 차라리 형이 그때 스튜디오로 불러서 진짜 현피 뜨는 분위기로 지랄이라도 했다면 모를까.
그래서 언젠가는 소주 한잔 기울이면서 그간 살아온 이야기도 하면서, 그때의 인간적인 미안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우. 그걸 못한 게 이렇게까지 맘에 걸릴 줄은 어제 오후까지만해도 몰랐어.
또 형은 누가 뭐래도 한 시대와 세계관의, 어떤 상징 같은 사람이라고. 게다가 나이도 아직 젊고 앞으로 할 일도 산더미처럼 많아. 우리 지난 몇 년동안 그런 사람들을 너무 많이 잃었잖아. 노무현 대통령 돌아가셨을 때 형 무대에서 펑펑 울던 거 기억나지? 이러고 지금 몇년이나 지났어. 근데 벌써 간다고?
이 공연 중에 형이 그랬지. 노무현의 죽음이 민주주의를 되살리는 전기가 될지 모르지만, 그런 것과 바꾸기에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고. 나도 그런 맘이야. 신해철은 가지만 그의 음악은 영원히 우리 곁에 남을 거다, 지금 차마 그런 소리는 못하겠네. 물론 그것도 사실일 거야. 하지만 그러기엔 형이 너무 아까워.
이제 우리, 형 같은 사람이 허무하게 가 버리는 걸 버틸 힘이 별로 남아 있질 않아. 끈질기게, 바퀴벌레처럼 살아 남아야 같이 이기든 지든 해야잖아. 장협착인지 패혈증인지 뇌손상인지 여하튼 무조건 살아 남아야 했다고. 아니면 죽을 때 죽더라도 독하게 싸우는 모습이라도 보여주고 갔어야지. 정신도 차려보고 눈도 떠 보고, 내가 누군지 알아, 신해철이다! 이러고 고함이라도 한번 지르고 말야.
그런 형의 삶, 음악, 생각, 감정들이 저 6일 동안 상처받은 뇌 속에서 조금씩 지워져 갔다는 생각을 하면 슬프지조차 않고 그저 아프우.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 기가 막히고 허망할 뿐이야.
...돌아가신 분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미안하우. 마흔도 훌쩍 넘긴 어른이라면 감정 추스르고 아름다운 말들, 덕담을 남겨야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충분히 크지 않은 모양이야.
더 길게 말하면 뭐 하겠어. 이제 보내 드리겠우. 형을 보내는 곡, 당연히 형 음악 중에서 골랐어. 첨엔 날아라 병아리 생각이 나더라. 죽음에 대한 노래고 내게도 형과의 기억이 있는 곡이고. 그런데 너무 약해. 씨바 형의 굵직했던 삶을 이 귀여운 병아리 얄리로 기릴 수는 없는 일이잖아. 그리고 형이 죽으면 뜬다던 민물장어의 꿈도 많이 울려 퍼질 테니 나는 생략할려고.
그래서 대신 이 곡 보내우. 형의 모든 곡 중에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곡이고, 가장 형 다운 곡이라고 늘 생각했어. 겉은 쎄게 보였지만 내면은 누구보다 여리고 섬세했던 사람이잖아. 그런 티를 낸 적은 없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알았을 거야. 아 좀 티내고 살아도 되는 거였다 진짜.. 그리고 몰랐던 사람들이라도 이 곡을 지금 볼륨 최대한 키우고 들으면 다들 느낄 거야.
남들보다 좀 더 멋져 보이고 싶은 마음,나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들이 나를 좀 더 존중하고 사랑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그걸 허세에 가득 찬 말과 행동으로 표출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비록 그게 현실과는 상관없는 허세이며,실제로 우리 모두는 남들과 거의 한치도 어긋남이 없는 똑 같은 군상들이며 남들보다 뭔가 더 훌륭해 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다 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게 얼마나 오글거리는 일인지를 깨닫는 순간,남들의 눈을 의식하는 마음으로 그런 허세를 포기하고 만다.하지만 마음 깊은 구석 어딘가에는 그런 허세가 남아있고,그 중2병의 소양은 평생,늙어 죽을 때까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탑골 공원에서 소일하는 어르신들의 귀여운 허세를 보시라.나름대로 곱게 늙으신 할머니 한 분이 등장하는 순간 삽시간에 그 주변은 중2병 중증 할아버지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벌어지기도 한다.
인간의 본성이다.
그런 인간의 본성을 숨기고 감추려고 애쓰는 대신,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던 남자가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자 '고스'(고스는 한 때SBS에서 방송되던 고스트 스테이션이기도 하고,나중에MBC로 옮긴 뒤에는 고스트 네이션이기도 했다.)를 주름잡는 마왕,신해철이었다.
나는 그와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다.그럴뿐더러 사실 그의 음악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었고,그의 정치관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지도 잘 모른다.특히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평가할 소양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평가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없다.다만 그의 음악은 나의 청년기 이후의 삶에서 나와 떨어지지 않고 있었으며,그의 족적은 기묘하게도 나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만 말해 두기로 하자.
1968년5월생으로 알려진 그는 내가 태어난 지 겨우3개월만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물론 세상은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 해도 태어났을 때부터 축하하지는 않기 마련이므로 그와 내가 태어난 사실을 세상은 알아주지도 않았었다.
그가 대학가요제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순간,모름지기 대학가요제라는 것은 통기타 들고 나와 얌전하게 또 품위 있게 하는 노래의 경연장이라는 세간의 인식을 뒤엎으며 강렬한 사운드로 무대를 뒤집어 엎어 버리던 시절,그와 나는80년대 중반을 가로 지르는 거의 동년배의 대학생들이었다.
그 이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며 점차 자신의 색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시작하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살아온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다.
우리 시대의 울분을 토로하고,우리 시대의 비겁과 굴종을 노래한다.우리 시대의 사랑을 얘기하고 우리 시대의 실연을 노래하고,버림받고 소외된 연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함께 아파한다.
그가 시위 도중 잡혀가는 여학생을 지켜보며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숨어있던 자신의 비겁한 경험을 고백할 때 나 또한 가슴을 저미는 굴욕적인 추억을 떠올려야 했으며,그가 가식을 비웃으며“그렇게 산다고 누가 상주니,또 누가 상 준다고 그거 받아 어따 쓰니?”라고 외칠 때,나 또한 그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곤 했었다.
내가 돈 버느라 정신이 없던 시절,그는“한 손엔 휴대전화,허리에 삐삐차고 집이란 잠자는 곳 직장이란 전쟁터”라며 나를 비웃었고,어느 밤 도시의 한 구석에 있는 술집에서 내가 왜 이러고 사나 하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에는“토론하는 남자와 술에 취한 여자”가“모두가 깊이 숨겨둔 마음을 못 본체하며 목소리만 높여서 얘기”한다고 마치 내 모습을 지켜보는 듯 내 귀에 속삭이기도 했었다.
그가 동성동본은 결혼도 못하게 하는 이 시대의 괴상한 율법에 저항하며 그 비인간적인 율법에 의해 고통 받는 연인들을 위한 노래를 불러 줄 때,나는 소외된 사람들을 왜 우리가 보듬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깨달았으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을 뜯어 고치는 데에 나서야 하는지를 배웠다.
모든 것에 다 실패하고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어질 때,그는“눈물 흘리며 몸부림 치며 어쨌든 사는 날까지 살고 싶어”라고 외치며“그냥 가보는 거야”라고 절규해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머니가 도대체 뭐니,그게 뭔데 이리 생사람을 잡니”라며 돈의 덧없음을 설파해 주기도 했다.
연예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자신이 좋아하는 한 정치인을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직접 카메라 앞에 서서 나를 포함한 수많은 동시대인들을 울리고 주머니를 털어 갔으며,그 정치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삭발을 하고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이 개새끼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불을 토해내 수많은 사람들의 피부에 소름을 돋게 하던 기억도 있다.
그는 중2병 환자가 맞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자신의 속내를 감춰야 한다는 세상의 질서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살아갔다.
그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장난인 줄 알았다.이젠 하다 하다 자신의 생명을 걸고 농담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이 인간이 중2병이 도져서 자신의 죽음마저도 가지고 노는 걸로만 알았다.
그러던 그가 어이없게 우리 곁을 떠나가 버렸다.
아마도 돈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죽음의 원인을 깊이 파헤쳐 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다시 활동을 재개하기로 하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까지도 저 인간이 돈이 떨어져서 저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굳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기도 했다.
어찌되었거나 그는 자신의 죽음마저도 이 세상을 향한 하나의 메시지로 멋지게,허세 가득하게,중2병스럽게 던지고 떠날 것이라는 내 예상을 뒤엎고 그는 조용히 허무하게 스러져갔다.그리고 그와 함께 내가 살아온 시대는 어느덧 조용히 막을 내리고 있었고,내 안에서 나를 지탱해 주던 무언가도 한 뭉터기가 뜯겨져 그와 함께 땅에 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난 슬퍼하지 않을 생각이다.눈물 흘리며 몸부림 치지도 않을 것이며 절규하듯“그냥 가보는 거야”라고 외치며 시바 거릴 생각도 없다.담담하게,여태껏 해 오던 대로 그렇게 내 삶을 이어갈 것이다.쉽진 않겠지만 말이다.약간은 이를 악물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마왕 신해철,한 남자의 죽음을 통해 나는 내 삶의 무게를 다시 느끼며 곱씹어 보는 중일 뿐이다.
선물가게의 포장지처럼 예쁘게 꾸민 미소만으로 모두 반할 거라 생각해도 그건 단지 착각일 뿐이야
신해철1집, <안녕>
내가 처음 들은 신해철의 노래였다. 1990년,나는 국민학생이었다. 7:3가르마에 안경을 쓴 날카로운 눈을 숨긴 미청년.그는 내게‘잘생긴 대학생 형’의 이미지였다.
지금은 촌스러워 보일지 몰라도,그땐 존나 멋있었어...
<안녕>은 당시 꽤나 인기였던 곡이다.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몇 주간 가요프로그램에서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특히 간주 부분에 들어가는 영어 랩이 무척이나 신기했고 멋있었다.그건 서태지와 아이들이<난 알아요>를 부르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부모님을 졸라서 신해철의1집을 샀다.생애 첫 카세트테이프였다.고등학생이던 사촌형에게는<안녕>의 영어 랩 가사를 적어달라고 졸랐다.형은 친절하게도 영어가사와 함께 우리말 독음까지 적어주었고,나는 그걸 붙들고 달달 외우며 하루 종일 읊고 다니다시피 했다.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서 신화의 전진이 오디션에서 불렀다는 바로 그 랩이다.
수록된 모든 노래를 흥얼댈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노래를 좋아했지만,이듬해 발매된 그의2집부터는 왠지 그와 거리감을 느꼈다.국민학생의 신분으로 이해하기에 그의 음악세계는 너무 빠르고 멀리 움직이고 있었던 것일까.
<재즈 카페>나<50년 후의 내 모습>같은 노래들은 지금 생각해봐도 국민학생이 공감하며 흥얼거리기엔 꽤나 큰 거리감이 있는 가사였다.
빨간 립스틱 하얀 담배연기 테이블 위엔 보석 색깔 칵테일 촛불 사이로 울리는 내 피아노 밤이 깊어도 많은 사람들 토론하는 남자 술에 취한 여자 모두가 깊이 숨겨둔 마음을 못 본 체하며 목소리만 높여서 얘기 하네
신해철2집, <재즈 카페>
성인이 된 지금에야 카페도 술집도 다녀보았기에 저 가사에 담긴 분위기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지만,애초에 카페가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재즈는 더욱 모르는 꼬맹이의 머리로는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TV의 가요프로그램에 나와1위를 하거나,통기타를 메고 고개를 까딱이며CF를 찍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낯설고 멀어진 느낌이 들었던 게 가장 컸으리라.
그리고 다음해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해TV를 휩쓸었고,나 역시 그들의 형광색 모자와 반바지,회오리춤에 열광하게 되면서 신해철이라는 가수는 나와 큰 인연이 없는 이름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의 노래에 다시 빠지게 된 건 서태지와 아이들이 은퇴를 한 이후였던 것 같다.고등학생이 된 나는 아이돌 댄스 음악이 줄 수 없는 어떤 감정을 요구하게 되었고,그 욕구를 힙합 음악과 록에서 찾아 헤맸다.
그는 잘 생긴 대학생에서 긴 머리를 풀어헤치는 넥스트란 밴드의 록커가 돼있었다.강렬하고 직설적인 사회비판,심오하고 애절하기까지 한 자아의 성찰.넥스트의 음악은 사춘기를 채 벗어나지 못하고‘인생이란,인간이란 무엇인가’따위의 질문을 내던지던 내게 일종의 지침서 같은 역할을 했다.
부모가 정해놓은 길을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친구들과 경쟁하며 걷는다 각본대로 짜여있는 뻔한 인생의 결론 향해 생각 없이 발걸음만 옮긴다
세상은 날 길들이려 하네 이제는 묻는다 왜 왜 왜
Fight! Be free!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이대로 살아야 하는가
넥스트2집, <껍질의 파괴>
서태지와 아이들의<교실 이데아>와 넥스트의 음악을 번갈아 들으며‘그래 씨팔 길들여지지 않겠어’따위의 생각을 했지만,결국 착실하게 입시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는 대한민국 평균의 테크트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남들이랑 달리 그래도 난 저런 생각이라도 했어’하며 자위했을 뿐.
대학생이 된 무렵엔 첫사랑에 실패했다.수년간 짝사랑해오던 소꿉친구였다.나는 뒤늦게야 넥스트1집에 수록된<인형의 기사>라는 노래의 의미를 절절히 깨닫고,선배 동기들과 함께한 술자리-노래방에서 틈만 나면 청승맞게 그 노래를 불러 제꼈다.
이제는 너는 아름다운 여인 이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해
언제나 그 말은 하지 못했지 오래 전부터 사랑해 왔다고
넥스트1집, <인형의 기사>
회상하면 참 추한 모습이지만,그래도 내 청춘의 한 기억에 신해철의 노래가 있었구나 하며 새삼 쓴 웃음이 지어진다.
대학생 하면 또<그대에게>아니겠는가.전 국민의 응원가.내가 신해철이라는 이름을 알기도 전에 무한궤도라는 이름으로 불렀던<그대에게>는 전국에서 대학생이라면 아마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리라.별 대단한 시합도 아닌,과 대항 축구경기 따위를 할 때도 응원가로<그대에게>만 부르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운 좋게 그가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 와서 노래하는 것을 볼 기회도,또 강연을 하는 것을 들을 기회도 있었다.가까이서 직접 본 그는 어릴 적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은 키였지만,여전히 나는 그가 거대한 사람으로 보였다.
시간이 흘러 대학도 졸업하고,나 역시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사는 방식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면서,그때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눈시울을 붉게 물들였던 그의 노래들이 더는 유효하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넥스트5집도,그가 솔로로 발표한 재즈 앨범도,예전만큼 내 가슴을 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나는 아마도 무의식중에 내가 변했다기보다는 그의 음악이 변했음을 애써 탓했던 것 같다.
"한 물 갔어. 옛날이 나았어."
흔히 말하듯이,나도 내 청춘의 영웅에게 그런 말을 마음속으로 던졌다.
왜 그랬을까.
그럼에도,나는 여전히 그의 음악을 기대하고 있었다.일련의<응답하라199X>같은 드라마로90년대가 재조명되고,그때 그 시절의 뮤지션들이 다시금 의기투합하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내심 그가 윤상과 함께 했던 노땐스2집 같은 프로젝트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다.게다가 서태지가9집을 내놓고 컴백하기 전,신해철은 이승환,서태지와 함께 합동공연을 추진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서태지 역시 독불장군처럼 활동했던 이전과는 달리 그러한 화두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심지어 그의 앨범에는<90s Icon>이라는 노래가 실렸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노래를 듣자마자‘이건 신해철이 불러야 되는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단순히 가사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분위기나 멜로디가 마치 서태지가<소격동>을 아이유에게 부르게 했듯 신해철을 염두에 두고 쓴 것처럼,과장을 좀 보태서 신해철이 작곡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늘어 가는 변명들 세월이 흘러가도 망설임 따위뿐인걸 내 기타에 스미던 둔해진 내 감성 하지만 난 아직도 멈추지 못할 뿐
한물간90s Icon 물러갈 마지막 기회가 언제일까 망설이네 질퍽한 망상 끝을 낼까
(중략)
눈감은 순간 흩어지는 바람에 밀려 버려지는 당신의 삶과 같이한 너와 나의 쓸쓸한 이야기
해답이 없는 고민 하지만 밤이 온다면 나의 별도 잔잔히 빛나겠죠
서태지9집, <90s Icon>
서태지가,신해철이,이승환이 다시 대중의 화두에 오르고90년대가 비록 추억이지만 진행형으로 거론될 때, ‘나 역시 어쩔 수 없는90년대 인간이구나’느끼면서도 괜스레 뿌듯하고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가 불러줄<90s Icon>을,그리고 서태지 이승환 김종서와의 합동공연을 기대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올랐음을 부인할 수 없다.나는 그렇게 제2막,어쩌면 제3막을 열어젖힐 그들의 행보를 여태까지 그래왔듯,팬이라는 위치에서 마냥 서서 기다릴 뿐이었다.
씨발.
어제 저녁 그의 부고를 접하고 내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은 추잡스럽게도 욕설이었다.씨발.이렇겐 아니잖아.솔직히 그렇잖아.슬프기 이전에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사람들은 빠르게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명복을 빈다’는 말과 함께 그의 노래 가사에 빗대어 그를 추모하고 있었다.다시 한 번 말했다.씨발,너무 빠르잖아.어떻게 벌써 인정할 수 있어?어떻게 부고가 나가고 한 시간도 안 돼서<날아라 병아리>를 인용하며 그를 보낼 수 있나.누군가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그저 내 감정이 그랬을 뿐이다.
어젯밤 나는 작업실의 노트북 앞에 앉아서 한참을 그냥 멍하니 앉아있었다.그의 노래도 듣지 않았다.들을 수 없었다.그렇게 감상에 휩싸여서 그의 죽음을 빠르게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추모 기사를 써야 하나?꾸물 팀장에게 연락했다.뭐라도 한 번 써보겠다고 말을 했다.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한참을 앉아있었지만 추모를 할 순 없었다.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모르겠다.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형이라고 부르며 추모의 글을 쓰더라.부럽다.신해철을 형이라고 부를 수 있어서.난 하물며 그를 마왕이라고 부른 적도 없다.오글거리기도 했고,딱히 그럴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난 고스트 스테이션도 듣지 않았고, <안녕 프란체스카>도 시청하지 않았던 사람이다.그렇지만 난 신해철이란 가수의 팬이었다.어릴 때부터 그의 음악을 좋아했다.그것뿐이다.
내가 처음 좋아하게 된 그의 노래가 아이러니하게도<안녕>이다.지금 난 그에게‘안녕’이란 말을 하지 못하겠다.언젠가는 할 수 있을까.안녕이란 말 대신,그가 나보다 아주 약간 먼저, ‘인생이라는 이름의 꿈’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하고 싶다.
꿈결을 가듯 걸어온 세월 시간은 점점 빨리 가고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는 걸까 내가 슬픈 꿈을 깨어나 그댈 울며 찾을 때 그댄 어느 곳에 있나요 내가 인생이란 이름의 꿈에서 깨어날 때 누가 나의 곁에 있나요
신해철1집, <인생이란 이름의 꿈>
언젠가 나 역시 꿈에서 깨어날 때,먼발치에서나마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그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꿈을 깬 세상에서 그가 진짜로‘Reboot My Self’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딱히 충성도 높지도 않은 팬인 나 따위를 기다려달라는 말은 못하겠지만,나는 먼 훗날 언젠가,당신을 다시 볼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그때에는 형이라고 한 번 불러 봐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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