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자마자 대뜸 말해보자면 이 사건은 2014년 현대 한국 사회, 특히 연예계와 인터넷/모바일 문화를 드러내는 상징성에 있어서, 후대에 긴 시간동안 연구 소재가 될 사건이 되리라 확신해본다.
사건 자체를 모르는 분덜을 위해 초압축 한문장으로 표현하자면, 'MC몽이 5년만에 컴백해서 음원차트를 싹쓸이 하는 걸 보고 분개한 다수 네티즌들이 합심하여, 군가인 ‘멸공의 횃불'을 음원차트에 올리면서 MC몽의 컴백을 보이콧하고 있다'다. 왜 하필 ‘멸공의 횃불'인지, 이러한 형태의 보이콧을 누가 어디에서 처음 제안했는지는, 필자가 졸라게 찾아봤지만 명확하게 결론을 낼 수 있을만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일단 졸라 미안하다만, 기사를 빨리 쓰지 않으면 짜장면을 안사줄 것 같은 너클볼러님의 포스에 밀려, 일단 이부분은 아는 분덜의 제보를 부탁드리겄다. 일단은 아주 확실치는 않지만, 필자가 조사한 내용을 전제로 기사를 쓴다.)
암튼 이러한 형태의 보이콧은 2009년도 영국에서, 가수 오디션프로그램인 X팩터 참가자들의 크리스마스차트 1위 독주가 2005년부터 계속되자 느닷없이 RATM(Rage Against The Machine)의 ‘Killing in the name’을 크리스마스차트에 올리자는 운동이 일어났던 것을 그 기원으로 한다. 뭐 그 전에 또 비슷한게 있었겠지만, 암튼 수 백년 후의 역사학자들은 분명히 이 사건을 기원으로 생각할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 영향으로 국내에서도, 씨엔블루의 와이낫 표절 의혹을 기반으로하여, 와이낫의 ‘파랑새'를 차트 1위에 올리는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그 운동에는 국내유일 민족정론지답게 딴지가 큰 축을 담당한 바 있다.
영국의 X팩터 보이콧이 2009년 12월이고, 씨엔블루 보이콧이 2010년 2월. 중간에 몇 가지 유사 사건이 있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명분은 상대적으로 약하고, 잉여력은 상대적으로 컸던 사건들이라 하겠다. 거의 5년 만에 등장한 ‘다른 음원 1위 만들어, 타겟 밀어내리기'형태의 보이콧. 5년 전에 비해 스마트폰 보급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게 이뤄졌고, 결국 그 어느때보다 빠른 속도로 그 보이콧을 성공시켜낸다.
이 과정 자체를 네티즌들이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네티즌들 사이에서의 반응은 매우 복잡하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매우 복잡한 지형구조를 보인다.
MC몽이 복귀와 동시에 실시간 음원차트 1위를 석권하는 기사가 오전에 퍼져나가면서, 다수 네티즌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빡친 네티즌들은 MC몽의 앨범 리뷰를 비판적이거나 조롱하는 내용으로 작성하기도 하고(내용보기 링크), MC몽의 컴백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코멘트를 남긴 동료 연예인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내용보기 링크)
이 모든 일이 11월3일 오전 1~2시간만에 벌어지는 과정에서, 몇몇 네티즌들이 'X팩터 보이콧' 및 '파랑새 사건'을 떠올리며, 군대에 안가려고 생이빨 뽑은 MC몽을 보이콧하는 의미로 군가를 1위로 만들자는 의견이 산발적으로 소수 드러나다가, 일베에 “멸공의 횃불 듣는 중이다(내용보기 링크)”라는 글이 올라가면서 조직력이 갖춰지기 시작한다. 잠깐동안 ‘나는 진짜 사나이가 더 좋다'거나 ‘전선을 간다로 하자'거나 하는 의견들이 대립을 이루는 듯 하다가, 금세 특정 앨범의 특정 음원에 집중하자는 제안이 다수의 동의를 얻으면서 실제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필자 주. 실제로 일베에 올라간 저 글이 최초라고 할 순 없다. 혹시 디씨나 기타 다른 커뮤니티의 게시물이 더 원조에 가깝다면 댓글이나 트위터 @miiruu로 제보 바란다.)
이 과정에서 음원 차트보다 더 빠르게 반영되는 실시간 검색어에 ‘멸공의 횃불’이 1위를 차지하기 시작한다. 생뚱맞기 그지없는 이 실검1위는 순식간에 화제가 되고, 이 소식은 오유와 같은 중도-진보 진영 커뮤니티나 뽐뿌, 클리앙 등 일베에 호의적이지 않은 커뮤니티들에도 알려진다. 이 과정에서 일부 네티즌들은 ‘일베가 한 짓이네.. ㅉㅉㅉ'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반면, 다른 일부는 ‘일베가 한 짓이지만 나도 화력지원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화력지원이란, '멸공의 횃불'을 검색하거나 음원을 구매해서 순위 올리기에 힘을 보태겠다는 의미다. 결국 이렇게 동참자가 많아지는 과정에서 실제로 음원차트에도 '멸공의 횃불'이 100위권 이내에 진입하고, 이어서 일부 음원 사이트의 ‘급상승 음원' 1위에 까지 오르게 된다.
이렇게 되다보니 일베에서도 반응이 갈린다. 워낙 누가 주축세력이고 누가 참여세력인지가 불분명한 사안이다 보니 일부 일베회원들은 이 보이콧 자체가 오유에서 시작해서 일베가 화력지원을 해주는 그림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어떤 회원들은 일베가 주축이고 오유에서 화력지원을 해주는 그림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같은 사건에 대해 이렇게 이해하는 구조가 다르다보니 어떤 댓글은 이 보이콧을 반대하기도 하고, 또 어떤 댓글은 그 보이콧 반대를 오유측의 심리전으로 보고 다시한번 반대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덜 예상하시다시피 이러한 반대, 반대의 반대, 반대의 반대의 반대 연쇄가 발생하면서 의견들은 점점 더 복잡해져간다. 이러한 복잡화 과정은 일베나 오유나 다른 커뮤니티나 다 마찬가지다.
이 복잡한 의견들을 날카롭게 파고들면, 어쩌면 정리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정리를 바탕으로 글을 쓴다면, 아마도 그 글은 궁극적으로 ‘행동의 주체는 나의 적이지만, 행동의 내용에 공감할 경우 이 행동은 지지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루게 될거다. 사실 필자도 이 글을 쓰라는 강요, 아니, 요청을 받은 직후 그렇게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건 그렇게 볼 문제가 아니다. 그런 접근에 매몰되면 보지 못할 지도 모르는,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건, MC몽을 보이콧하려는 네티즌들의 움직임이 음원사이트에서, 검색포털에서, SNS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불과 반나절도 안되는 시간만에, 그 시각 가장 인기있는 음원을 차트에서 위협할 수 있는 힘, MC몽의 컴백을 축하했던 연예인들은 곧이어 사과 글을 올려야만 하게 만든 그 힘이 드러났다는 말이다. 우연인지 뭔지는 몰라도, MC몽의 소속사이자 코스닥 상장사인 ‘웰메이드’는 오늘 오전 상한가를 치다가, 10시30분부터 장마감까지 10%가량 급락했다.
머 대략 요렇게...
필자의 사견으로는, 병역기피자가 연예활동을 해도 되는지 아닌지, 컴백을 한다면 몇년의 자숙기간을 지녀야 하는지 같은 기준은 없다고 본다. 1년 만에 컴백을 하든, MC몽처럼 5년 만에 하든, 유승준처럼 한국을 뜨든, 판단은 연예인 본인과 그 연예인을 ‘소비'할 소비자의 몫이다. 소비자들이 어떤 이유로든 컴백을 반기지 않는다면 그 연예인은 컴백에 성공할 수 없고, 소비자들이 괜찮다면 그걸로 끝이다. 뭐 시발 전과자가 대통령 임기 다 마친 나라에서 무슨 이런 걸로 절대적인 기준을 바래.
지금 내 얘기 하는 거냐?
MC몽이 5년만에 낸 컴백 앨범으로 음원차트를 석권한 것이 실제 소비자들의 구매량에 따른 것이라면, 그 자체로 소비자들이 ‘컴백해도 좋다'는 의견을 표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그 의견 자체에 반대하는 다수의 소비자들이 보이콧을 해서 이정도의 영향력을 보인다면, 결국 MC몽은 TV까지 출연하지는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한가지 확실한게 있다면, 이번 보이콧 사건에 직접 참여해서 '멸공의 횃불' 음원을 구매한 사람이 전 국민의 절반가량 될 정도의 비율일리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보면,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아니어도, 진영에 대한 선입견을 불식시킬 수 있을 정도의 공감대를 강하게 형성한다면, 그 공감대가 통일된 행동으로 성장하기만 한다면, 그 행동은 이 사회가 굴러가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고 볼 수 있는 거다.
인터넷과 모바일이 찻잔속의 태풍이라고? 그건 말그대로 전국민이 물리적으로 참여하는 선거에 대한 말이다. 투표는 격렬한 지지의 한표와 그냥 대충 던지는 한표가 똑같이 세어지지만, 다른 모든 것에서는 그렇지 않다. 선거에서야 단순한 표의 총량이 더 중요하고, 그래서 국민의 절반이 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겠지만, 선거 이외의 대부분은 그렇게 수천만 단위의 사람들을 필요로하지 않은 채 벌어진다. 그 대부분에서 필요로 하는건 수 천만이라는 머릿수가 아니라, 얼마나 넓은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공감대가 한명 한명의 가슴 속을 얼마나 깊게 파고 들어 그 행동을 하나로 합쳐내는지 여부다.
4화까지는 월남전에서의 내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했다. 5화부터는 월남전의 일반적인 비전투상황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다.개인적으로 월남전 전투는 장교 교육과정 내 전술학 교과서에 수록할만한 가치가 있겠지만 역사적으로는 부끄러운 전쟁,더욱이 지고 온 전쟁에 대하여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물론 전투에 참가한 개인들의 삶에는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지만.
베트콩도 양민이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이미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1971년6월13일 뉴욕타임스가'펜타곤 페이퍼'란 기밀서류를 입수해 기사화함으로써 미국내에서 조차'잘못된 전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이 서류에는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의 구실이었던'통킹만 사건'이 북베트남의 도발이 아니라 미국의 조작이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1964년8월 북베트남 어뢰정이 공해상에서 미국 구축함 매독스호를 선제공격해 미군이 베트남전에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는 '데소토'라는 정보수집 함정이었으며,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군 함정을 공격했다는 증거도 없다는 것이었다.이때부터 히피 머리에 나팔바지를 입은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반전'데모를 벌였다.불행히도 당시 한국안에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 탓에 그런 정보를 접할 수 없어 알지 못했을 뿐이다.
나는 월남전 다큐를 만들기 위해서 초대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 생전에 오랜 시간 인터뷰를 했었고2대 사령관인 이세호 장군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비서실장이었던H장군 (당시 대령)과도 오랫 동안 이야기를 했었다.그들을 통해서 일개 병사가 접할 수없는 고급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월남전이 이길 수없는 전쟁인줄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마치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롬멜 장군이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쟁을 수행했듯이 비극적이지만 지는 전쟁도 수행해야만 하는 것이 군인의 역할인 것이다.더 치사한 것은 이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철수를 하면서도 지휘관의 공명심 때문에 애꿎게 부하 장병들이 수 없이 죽어나갔던 전쟁이었다는 것이다.실제로 맹호부대는 철수를 앞 둔 1972년4월 안캐 패스 작전 때 지휘관들의 공명심 때문에 단3일 동안 75명이 전사했고, 104명이 부상을 당했다. 전쟁터에서 말단 사병은 자기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언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 수 없을 때가 많다.오직 주어진 명령에 따르기 때문이다.훈련에서부터 실전까지 그저 서라면 서고 앉으라면 앉을 뿐이다.
지금은 춘천에서 터널이 뚫려 단숨에 통과 할 수 있지만 당시 파월 교육대를 가려면 새카맣게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가 아찔한 배후령 고개의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 오음리로 들어가야했다. 교육대에서부터 나는 전혀 모르는 길을 가야했다.월남에 도착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주변에는 둥근 철조망이5중으로 설치돼 있고,밖에서 기어 들어올지도 모를 베트콩을 감시하기 위해 밤새도록 전등불이 촘촘히 밝힌 기지로 갔다.작전을 나가서 잔뜩 긴장한채 1미터 앞도 알 수없는 정글 속을 한 발 한 발 옮겨야 했던 길도 내가 모르는 길이었다.
나무 뒤에,바위틈에,숲 속에,나무 위에,베트콩이 숨어 있다가 따다닥쏘지나 않을까?보이지 않는 부비트랩 선이 나무 사이에 연결돼 있지는 않을까?그 무섭다는 독창이 바늘처럼 솟아있는 함정이 위장돼 있지나 않을까?몰라서 불안한 것뿐이었다.어디를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헬리콥터를 타고 작전지에 가서는 지루하게 기다리다가 찰나 같은 순간 동안 총질을 하고서 헬기를 기다리다 다시 올라타서 기지로 돌아왔다.월남전은 전선도 없고, 누가 적인지 우리 편인지도 알 수 없고, 진군도 없고 승리도 없는 전쟁이었다.
'한국군의 월남 참전 민간인 학살'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와서 참전 군인들의 심사를 불편하게 만든다.그러나 나라 안의‘군 의문사 사건'조차도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데50년 가까운 세월 전에 타국에서 벌어진 전쟁통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진실을 한국군 측에서 인정하고 사실을 밝히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부대와 작전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한국인 작전 지역에 민간인이 들어가 살 수도 없거니와 영농지역이 있으면 주간에 농사일을 하기 위해서 한국군의 검문 검색을 받는다.물론 그런 지역 민간인들 대부분이 항상 베트콩과 연관이 되어 있을 가능성이 많다.비록 그렇더라도 한국군과 전혀 관계가 없는 지역이 아니라 한국군에 의하여 통제되고 있는 전술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지만 한국군 편에서 보면 양민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한국군은 양민학살을 했다는 오해를 받는 것은 베트콩과과 양민을 구별할 수 없었던 전쟁의 성격 때문이다.
대단히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을 아주 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요즘 벌어지고 있다.대다수의 선량한 월남참전 할배들 가운데 가끔 시도 때도 없이 여기 저기 출몰하는 개스통 할배들이 있다.일반국민들의 눈으로는 선량한 할배들 가운데 섞여 있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일부 고엽제 피해자 난동꾼들을 구분할 수 없다.그런 까닭에 월남참전 할배 하면 무조건 개스통 할배라는 오해를 받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40여 년전 월남의 현실은 어떠했던가?
1968년7월15일 비둘기 부대 소속 소대장 김종수 소위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야간에 예정된 매복지점이 아닌(국방부 보고서)곳에 매복하고 있다가 자정이 넘은 새벽1시경,그곳을 통과하는 베트남인7명을 검거,체포했다.
이 와중에 갑자기 한 명이 도주했다.김 소위는 즉각 소대원을 시켜 추격,사살하게 했다.나머지6명을 끌고 이동하는 중에 이번에는 두 명이 도망쳤다.그 둘은 그만 놓쳐버렸다.나머지4명도 거세게 반항하며 도망치려 하자 다급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사살할 것을 명령했다.그 다음날 도주한 두 명이 그 지역 군수에게 사건 내용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보고했다.즉 학살했다는 것이다.그들의 선동에 편승한 그 지역 베트남 주민들이 한국군 부대 앞에 몰려와 대대적으로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낭패가 된 사령부 지휘부는 부랴부랴 사건 수습책 마련에 부심하게 됐다.김종수 소위는 혼자 죄를 뒤집어쓰고15년형을 살았으니 그는 주월한국군 참전 역사 가운데 최악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1970년11월27일,백마29연대2중대3소대장이 매복을 나갔다가 민간인5명을 베트콩으로 오인하여 오인사격을 하고 귀를 잘라다 전과보고를 한 사건이 발생했다.이 때 마침 갓 부임한 전두환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보고를 하고 이세호 사령관은 고민 끝에 대통령께 죄송하다는 편지를 보내고 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로 쓴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이세호 장군,
12월21일자 귀하의 편지는 오늘23일 접수하여 내용을 자세히 읽었습니다.요즘 월남 국내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한국군에 의한 양민살해사건에 관하여서는 합참의 한무협 장군에게도 상세한 보고를 이미 받고 있습니다.
소녀살해사건은 불행한 일이기는 하나 작전상 만부득이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다만 백마부대29연대에서 발생한 양민살해사건에 관하여서는 각급 지휘관은 물론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이 같은 불상사가 재발하지 않게끔 각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전과를 조작 보고하기 위하여 양민을 살해하고 하물며 죽은 자의 귀를 절단하는 비인도적 행위는 국군의 명예와 지금까지 수많은 전우들의 피의 대가로서 쌓아올린 국군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완전히 무너뜨리는 (무효화 시키는)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통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국군이 월남에 간 기본 목적과 정신을 다시 한 번 전 장병이 상기하고 재인식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세호 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는 박정희 전 태통령 (1970년)
나는 귀국 해서 명예롭지 못한 일로2주간 국방부 호텔(?)에 머물게 되었다.국방부 호텔은 법무부 호텔과 존재 목적이 달라서 숙박 시설이 아니라 교육시설이다.즉 병신이 되지 않는 선에서 수감자에게 단기간에 최대의 고통을 주는 것이다.그래야 영창을 나간 다음 영창에 대한 좋은(?)소문이 많이 나서 다른 병사들이 경각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이쯤 하면 그 방법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즉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지내야 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도 빽이 통해서 군대 나이로는 경로당에 갈 나이에 입대했던 나는 고참 헌병인 후배 덕분에 틈틈이 영창에서 나와 창고에서 월남전에서 기록했던 헌병대 문서를 정리하는 사역을 했었다.문서를 정리하다가 한국군이 월남에 있는 동안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 기록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물론 내 임무는 그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소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지금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은 대부분이 강간 사건이었고 살인 피해 배상은 물소 두 마리인가 세 마리 값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그 당시 월남에서는 물소가 우리나라 시골의 황소만큼 값이 나가기는 했지만 사람값이 그렇게 저렴했던 것이다.당시에는 병력이 이동하다가 잠깐 쉬곤했던 국도변에 공중변소처럼 담요로 칸막이를 쳐놓고 남편은 손님을 부르고 아내는 손님을 받는 매춘 업소도 있었다.그러면 병사들이 군화를 신은 채 바지만 내리고 일을 보는 것이다.전쟁터란 인간이 보통 때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곳이다.
국방부 기록에 의하면 베트남에 참전한 주월 한국군 가운데561명의 장사병(將士兵)이 범죄에 연루되어 전범(戰犯)으로 구속,처벌되었다.범죄 내용은 항명(抗命),명령위반,상관구타 및 살해,무단이탈,탈영 등 주로 하극상이 최다로 우리 한국군 자체 내부의 문제에 연류 된 사건이어서 현지 베트남인들과는 무관한 것이다.베트남인들과 연계된 사건가운데 소위 민간인 즉 양민학살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받은 숫자는 우리 군(軍)내부의 기강해이로 발생한 사건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어로는‘부수적 피해’라고 번역이 될 수 있는Collateral Damage는 군사용어가 있다.전쟁을 하는 당사자들은 전쟁 중 일어나는 민간인의 죽음과 사회 기관 시설 파괴를‘부수적’이라고 표현하지만 당한 사람들에게는 천추의 한이 맺힐 일이다.그러나 솔직히 생사가 한 순간에 갈라지는 전투에 참전했던 병사들에게는 월남인들의 안전은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밥을 먹다가 길을 가다가 아니면 휴식 중에 앉아있는 돌멩이에도 부비트랩이 매설되어 있으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안전 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인정하고 사과하고 보상을 해야 할 때이다.그것마저 부인한다면 일본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 했다는 일부의 주장에 대하여 베트남 정부는 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일까?베트남은 공식적으로"우리가 이긴 전쟁이므로 사과는 필요 없고,전쟁으로 인해 정 문제가 있으면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인 미국과 협상을 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1992년 베트남과 수교 당시 과거사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서로 동의한 데는 승전국으로써의 자존심도 있겠지만,한국군과 교전이 거의 없었던 북베트남이 현 베트남 정부의 실세인 탓도 있다.한국군과 주로 싸운 세력은 남베트남 공산당 소속 베트콩이었고 북베트남 정규군은 물자제공과 훈련 등을 돕긴 했지만 직접 한국군과 맞붙어 싸운 적은 드물었다.거기다 한국군과 주로 싸운,남베트남 공산당인 베트콩의 지도층은 구정 공세 당시 괴멸 당했다.북베트남에다가 죽어라고 폭격을 한 장본인도 미국군이지 한국군이 아니기도 하고.따라서 불필요한 마찰 없이 이러한 반응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북베트남 입장에서도 이런 문제가 공론화되면 피곤할 수 있는 게,자기들 역시 구린 구석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그들 역시 베트콩이 자리 잡던1960년대 초반 남부 촌락지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요즘 나라인지 집단인지 깽단인지 정체를 모를IS라는 것이 나타나서 세계를 공포를 몰아넣는 깽판을 치고 있는 것을 보라!
베트콩 역시 공포심으로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수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참고로 이건 미군이 전면 개입하기 전의 일로 당시 서방 각국의 통신사 종군 기자들이 남베트남 지역에서 촬영한 자료들이 지금도 남아있다.월맹은 파리 평화 회담 이후 미군이 철수하자 남베트남을 기습남침해 점령하는것으로 전쟁을 끝내버렸다.전쟁은 일단 이기고 봐야 하는 거지만 할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당시 대한민국의 이대용 공사같은 사람을 면책 특권을 가진 외교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붙잡아서 몇 년이나 투옥하고 북한으로 보내려고 공작하기도 했다.즉 피장 파장인 셈이다.
이대용 전 베트남 공사(왼쪽)와 즈엉 징 특주한 베트남 대사 (2002년)
땡 잡는 전쟁
남의 돈으로 치루는 전쟁이다 보니 병력과 물자를 아낄 필요가 전혀 없었다.물자는 물론이고 월급을 미군한테서 받다 보니 인원도 채울 대로 채워졌다.그래서 필요 없는 인원도 파병을 해서 머리 수를 꽉 꽉 채웠다.
위로는 소장 사단장 밑에 행정,작전 부사단장도 각기 준장이어서 사단에 별이3이나 되었고(덕분에 나는 행정 부사단장이 탁구 칠 때 공을 열심히 주워야 했다)아래로는 사단 본부에 인원이2명밖에 없는 참모부에도 상사 급의 선임하사가 있었다.내가 생각할 때 제일 어색한 일은 한국에서는 연대급에서도 제일 할 일이 없는(파월 전에 연대 정훈과에 있어 본 내 경험으로)정훈장교가 대대급까지 배치되었던 일이었다.그것도 한국처럼 대대 병력이 한 곳에 주둔하지 않고 중대가 몇Km씩 떨어져 있고 헬기로나 이동이 가능해서 일반 병사들을 만날 수도 없는 곳에서 말이다.그런 사정이니 정훈장교가 할 일이 없었고, 실제로 나중에 내가 만난 대대 정훈장교 출신에 의하면 파월 기간1년 내내 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죽이기가 너무 고되었다고 했다.
나는 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산처럼 쌓여 있는 군수물자들을 보고 미국의 군수물자 조달 능력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어느 책에서 보니 한국전쟁 당시 소모한 총알 대비 죽은 병사의 숫자를 보면 병사 한 명당 총알 한 가마니 정도를 소모한 셈이라고 하던데 아마도 월남전에서는 베트콩 한 명 사살 하는데 한 트럭분의 총알은 소모되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 생겨난 새로운 군사용어가‘초토화 작전’이었다면 베트남전에서는‘융단폭격’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융단을 깔듯이 폭격을 했다는 의미인데 사실상 비용은 많이 들고 효율은 낮았다.위험요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융단폭격을 한 것은 분명 고의적인 학살인 것이다.
미국이 월남에서1965년부터 사용한 폭탄 양은 제1·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사용한 총 폭탄 양을 합한 것의1.5배에 달했다.이런 식으로 미국은 베트남전에서7,200억 달러(당시 한국의1년 예산은10억 달러 정도) 라는 천문학적인 전비를 뿌려댔다.
월남이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남는 장사를 한 것은 아니다.전쟁배상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베트남은 거인 미국을 이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즉 미국의 자존심을 마구 구긴 대가로 이때부터 베트남은27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철저하게 경제적 보복을 당한 것이다.하지만 이후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한 미국 역시1971년 달러를 평가절하하고 그때까지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던 금태환 중지 조치를 취함으로써국제통화체계가 크게 동요하고 국제 금융 혼란이 닥쳤으며,세계질서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월남전의 피해는 월남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이웃에 있는 캄보디아에게도 혹독했다.우리가 흔히'킬링필드'로 알고있는 캄보디아에서의 학살은69년~73년간 벌어진 미국에 의한 폭격으로 인한 제1학살과 크메르 루주 집권기간인75년~79년까지 벌어진 제2학살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실제로 한국국방연구원의 세계 분쟁 데이터베이스에는 캄보디아 땅에 단지 베트콩이 지나간다는 이유로4년간 미군의 폭격으로인한 사망자가60만 명에 달한다고 밝히고 있다.지금도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자신이 불리할 때면 미국의 학살책임을 거론하며 국제사법재판소에 미국을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을 강조하고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해 캄보디아 폭격을 거부하다 군사법정에 기소됐던 도널드 도슨(당시 공군 대위·B-52부조종사)은“캄보디아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목표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증언을 한 바 있다.
미국은B-52전략폭격기를 동원해 캄보디아에 무려53만9129t에 이르는 각종 폭탄을 투하한 사실이 드러났다.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총량16만t의3배나 웃도는 엄청난 양이었고,파괴력은 히로시마 핵폭탄25배를 웃도는 것이었다.그렇게 캄보디아에 퍼부은 폭탄은 불바다를 만드는 네이팜탄이었고,고엽제로 자손 대대 치명상을 입히는 에이전트 오렌지였고,수백 개 새끼탄을 까며 시민들을 살해한 클러스터밤(CBU)이었다. (출처:정문태/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네트워크 팀장이 쓴 '킬링필드의 진실')
클러스트 밤
궁핍한 처지에서 정신력 하나로 버틴 베트콩 쪽에서는 힘든 전쟁이었겠지만 미군 쪽에서는 남아도는 전쟁 물자를 때려 붓는 전쟁이었고 그 편에 붙었던 한국군은 덕분에 호강 할 수 있었다.모든 무기와 보급품을 미국에서 지원 받았었기 때문에 고국의 가난한 군대 사정과는 수준이 완전히 달랐다.상황이 그렇다 보니 물건이 남아돌아 낭비하는 것은 기본이고 가능한 한 하나라도 더 빼돌려서 한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애국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이런 일도 있었다.당시 월남에서 수송 업무를 맡고 있었던 한진에서는 대규모 작전이 없어 수송물동량이 줄어들자 수송능력이 남아돈다며 물동량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안을 주월 사령관에게 부탁했었다.그런데 사령관이 지시한 방법이란 것이 기가 막혔다.전방부대에 야간 요란사격을 최대로 많이 하라는 지시를 내려 포탄의 수송량과 탄피의 반송량을 증가시켜 수송물동량을 증가시켰던 것이었다.한 마디로 미군과 수송용역을 맡은 한진이 더 많은 달러를 벌 수 있도록 포탄을 많이 쏘아 없애는 방법이었다.
일반적으로 파병된 한국군 장병들이 귀국할 때 사방1m되는 나무상자에 자기가 사용하던 사물이나 구입한 물품을 담아 갈 수 있는 귀국Box을 가지고 들어왔다.월남에서 보내온 귀국박스는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율화 이전에 한국인들이 단체로 외국의 문물과 대중소비문화를 받아들인 예로 의미가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사병들은 월급이 적고PX에서 구입할 수 있는 물품도 한정되다 보니 사실상 자기에게 할당된Box에 물건을 채워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그래서 자기 몫의 박스를 월급을 많이 받는 장교나 하사관들에게 주기도 하고 수단 좋은 사병들은 휴대식량으로 나오는C-Ration이나 하다못해 한국에 가서 고물로 팔 수 있는 신주로 된 포탄의 탄피를 넣어 오기도 했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와서 살아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사 해야지 물건에 욕심을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나 같은 소수의 결벽증환자들을 제외하고 월남전에 참전한 모든 군인들은 장교 사병 할 것 없이 하나라도 더 챙겨가려는 정신무장 하나는 투철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베트콩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말단 소총중대의 경우에는 중대장이라도 돈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사병들이 귀국 박스에 담아 올 수 있는 건 탄피와 맥주 캔뿐이었다.그러나 적과 싸우러 다니는 일반사병의 경우에는 탄피를 줍거나 만들 시간도 없었으며 탄피 모은다고 할 일없이 실탄사격을 할 수도 없었다.손으로 실탄을 분해해서 화약을 쏟아버리고 탄피를 모으기도 했으나 뇌관을 처리 못해 귀국선이 항해할 때 파도에 흔들려 귀국 박스 속의 탄피 뇌관이 터지는 일이 생기곤 해서 나중에는 탄피를 귀국선에 싣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탄피 말고 일반 병사들이 모을 수 있는 건 알루미늄 맥주 캔이었다.병사들은 부대내외 심지어 그 나라1번 국도변에 도로정찰을 나가서도 사람들이 마시고 버린 맥주 캔을 줍기도 했었으니 본질적으로 보면 요즘 독거노인들이 폐박스나 헌 병을 주워 모으는 모습이나 다름이 없다.다른 것은 노인들이 폐품 줍는 것은 개인들의 고단한 삶을 말해 주는 것이지만 전쟁하러 온 군인들이 폐품을 줍는 것은 나라의 가난 때문이었다.
PS. 지난 호 말미에 독구 기자가 편집장에게 슬며시 내년도 딴지 MT를 시드니에서 하면 어떠냐 하는 베트콩 스타일의 제안을 했다. 만일에 그런 봄날 따듯한 양지 볕에 앉아서 졸고 있는 개가 꾸는 꿈 같은 제안이 현실화 된다면 시드니의 딴지 독자들의 힘을 긁어 모아 월남에서 미군이 한국군에게 보급해주던 것만큼은 못해주어도 월맹이 베트콩에게 보급해 주는 수준 정도는 할 터이니 딴지 수뇌부는 작전 계획을 세워 보기 바란다.
자신의 시신을 처리할 사람들에게 국밥 값을 남기고 죽음을 택한 분의 기사를 읽었다. 사연을 읽어가면서 그냥 담담했다. 사는 게 힘들어서 죽는 사람들의 사연이 더 이상 통증 같은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무뎌지고 냉정해져서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국밥 값을 남기고 죽은 68세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라는 글을 보았다. 기억에 묻혀있던, 타인에게 신세를 지기 싫어 택했던 죽음 이야기와 감정들이 기억 난다. 우울한 주제로 우울한 이야기를 쓰다보면 우울해져서 힘들기도 한다.
십 여년 전에 지하방에서 살며 병든 아내를 간병하던 노인분이 아내가 죽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 남겼던 유서를 기억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삶을 이어가기 힘들고, 인간이하로 내려가 짐승이 되어간다고 느껴져서 사람으로 죽음을 택하신다고 했던 것 같다. 시간이 기억을 조금씩 왜곡하겠지만 아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병수발을 들어주느라 어쩔 수없이 살았지만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준 의무와 책임을 마치고는 더는 구차 하게 살기 싫어 죽겠다는 선언으로 들렸다.
가엾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땐 뭔가 그냥 먹먹했었다. 스스로도 가치를 두는 품성인 책임감과 자존심이 느껴지고, 어쩌면 나의 마지막도 저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남일 같지 않았다. 그리고 사느라 잊었다.
이명박씨가 대통령하던 시절 암에 걸린 한 늙은 아버지가 치료비와 남은 가족들 걱정을 하다가 산에 올라갔다. 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주변 풀을 깎고, 나뭇잎을 치우고 구덩이 안에 들어가서 몸에 불을 질렀다. 유서는 구덩이 근처 소나무에 묶여져 있었다.
장례비마저 부담으로 남기고 싶지 않았던 노인의 유서에는 그냥 타서 재가 된 유해에 흙만 덮어 달라는 말과 자살 장소로 택한 곳에서 혹시 타인에 대한 피해를 끼쳣을까봐 미안해하는 말이 적혀있었다. 불탄 시신을 발견한 발견자에게 놀람, 당혹감을 주는 것 혹은 남의 땅을 무단으로 이용한 것 같은 것들에 대한 사과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가난함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을 미안해하며 정규직 취업이 되길 소망하는 글을 남겼다.
미련할 정도로 우직한 사람이었겠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욕이 튀어 나왔었다. 씨발 정규직 그러니까 동네 농공단지 공장 말고 대기업 정규직 같은 거겠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는 정규직 말이다. 어차피 답도 없고 그냥 곱게 죽어주면서 선처를 바라는 마음이 법원에서 손해 배상을 뚜두려 맞고 곱게 목을 메다는 노동자들 죽음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떠올랐었다. 이제 그만 곱게 죽어 드릴 테니까 남은 가족들은 그냥 살게 해 주십시오 하는 읍소로 들렸다.
가끔 궁금했다. 남의 땅이었을 구덩이, 그러니까 본인이 풀 베어내고 다듬어 선택한 묘자리에 묻힐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과 그 아들이 잘 살아질까 하는 생각이 나곤 했다. 홍석동씨 아버님 사망기사를 보고 그분이 남긴 읍소가 적힌 유서를 보고 가끔 궁금해 하던 생각을 다시 했었다. 홍석동씨 아버님이 죽어가며 감사를 표하고 부탁을 했던 기사를 쓰신 기자님들은 그 죽음의 무게를 어찌할까 생각했다.
얼마 전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곱게 봉투에 담아 놓고 죽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세모녀의 이야기도 많이 아팠다. 죽어가면서도 살아가려고 바둥거리다 삶이 버거워 죽음을 택하면서도 돈의 무게에 허덕이던 무거움이 너무 짙게 남았구나 싶었다. 삶에서 돈이 너무 버겁고 무거워서 행여 집세 못 받아서 자신들의 버거움을 그대로 겪을지도 모르는 늙은 집주인을 걱정했었구나 싶었다.
가수 신해철의 죽음소식을 들었을 때, 쇼파공장에 나갔다. 하루 종일 타카를 박다 식사를 하는 식당에서 뉴스를 들었다. 한때 그의 노랫말이 위안이 되는 시절이 있었고 아직 좋아하던 구절을 가끔 흥얼거릴 때도 있었다.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뉴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나도 그 순간에 큰 충격이나 슬픔을 느끼진 않았다. 말없이 밥을 빨리 먹은 사람들은 쉴 자릴 찾아 곤한 몸을 눕혔다.
산재로 죽은 처남 장례식 일을 봐주고 헬쓱해진 얼굴로 만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친구가 생각이 났다. 서른도 못 넘긴 죽음은 안타깝지만 부럽다는 생각도 들더라며, 자신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지 이야기하며 한숨을 쉬던 모습이 생각이 났다. 그래도 큰 회사 일차 하청이라고 사람들이 많이 오고, 부조금도 꽤 들어왔다고, 안타깝지만 남기고 간 가족들은 살 수 있을 거라며 담배를 권해왔었다.
무감각한 얼굴의 지친사람들을 보며 비슷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신해철의 삶과 노래를 기억하고 죽음을 슬퍼해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의 죽음이 그리 슬퍼 보이지 않았다. 몸이 지쳐서 그랬을 수도 있다.
생각도 근육과 같다. 의식적인 외면과 집중으로 기형으로 발달 할 수도 있고 단련을 멈추면 작아진다. 감정은 신경감각과 같다. 되풀이 되는 자극에 무디어진다. 좀 덜 벌고 덜 쓰더라도 책을 조금 읽고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조금 쉬면서 좀 덜 버는 자리를 알아본다는 소리를 했을 때, 걱정하는 표정과 불안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던 집 사람의 얼굴이 조금 걸렸지만 허락을 받았다.
국밥 값을 남기고 죽은 68세 노인분의 기사를 읽었을 때는 머리로만 상황을 그려보았다. 슬프고 아픈 감정은 움직이질 않는다. 가고 싶은 곳도, 갈 곳도, 방법도 없이 퇴거하라는 통지에 '내일 퇴거하겠습니다' 하고 이승에서 퇴거준비를 하셨다. 행여 시체 치우느라 놀라고 욕볼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개의치 말고 국밥이나 한 그릇들 드시라고 빳빳한 신권으로 준비하신 마음도 이해가 가고 , 가장 싼 코스를 밟았을 때의 장례비 백만원과 본인이 사용한 공과금도 빳빳한 신권으로 남겨놓은 마음을 난방비 무료혜택을 당연하게 받아드리시는 사회지도층 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조금은 알 것 같긴 하다.
돈이라는 것, 재물이라는 것이 사유재산이라는 신성한 의미도 있지만 돈과 재물로 유지 되는 것들에는 공공재라는 것들도 있다. 무임승차자라는 도둑님들이 남의 몫을 먹어치우면 얼마 안 되는 몫으로 나눠야하는 분배의 맨 아랫부분 사람들에게는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가 된다. 그 부분이 서로 서로 미안하고 참혹해서 나 살자고 남의 몫을 못 뺏어 먹는 거다.
못 사는 게 무조건 선한 건 아니라서 떼나르디에(레미제라블의 악덕 여관주인_편집자 주)같은 사람들도 없진 않지만, 삶을 그렇게 사는 분들도 있다. 내가 덜 먹으면 다른 사람의 몫이 많아지고, 내가 더 먹으면 다른 이들의 몫이 적어진다. 통화론자들이 통장에 찍히는 동그라미를 무한대로 찍어낼 수 있겠지만 아랫 쪽 사람들의 통장에는 도달하지 않고, 어차피 현실의 재화는 한정되어 있다.
오늘 열두 살 딸아이를 포함한 일가족 3명이 연탄가스를 이용해서 죽었다. 빚 생활과 남겨진 아이에 대한 미안함이 일가족 동반 자살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생활고에 지친 엄마는 죽음을 선택할 마음을 먹고, 아이는 엄마와의 죽음을 선택하고 저에게 잘 대해줬을 선생님을 그린 그림을 남겼다. 엄마에게 뒷일을 부탁받은 아빠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 옆자리에 누워서 시신이 되었다.
피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아이가 안타깝지만 어쩌면 함께 죽은 게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고, 이제 힘없어서 죽는 사람들에게 차라리 잘 죽었다는 생각을 한다. 씨발 이러면 안 돼는 거잖아 하는 묵직한 욕이 치밀어 오른다.
경제구조의 아래쪽 사람들 중에 요령 없는 착한 사람들이 먼저 죽는다. 착한 사람들이 다 죽고 나면 그냥 곱게는 안 죽을 사람들만 남아서 당분간 굽신거리는 시늉을 하긴 할 것이다. 운전기사와 정원사가 주인 목을 자르고 약한 척, 선량한 척하던 사람들이 폭도가 되어 사모님과 아가씨를 윤간하고 죽이던 일들이 몇 해 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었다. 보고 배운 게 있으신 분들이니 방비는 하시겠지만 모르겠다. 멕시코는 개인경호원에게 총을 지급한다고 해도 판검사님들이 죽어나가고 부자들의 납치 살해가 일어난다. 물론 가난한 이들끼리 죽고 죽이는 일이 훨씬 많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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