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연재물은 딴지일보 편집부로 전화를 걸어온 한 필자와 오랜 시간 상담 끝에 본지 마빡에 올리기로 결정한 기고문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북한에서 스파이로 길러졌다 활동 도중 숙청된 남자로 필자는 그 남자와의 만남을 본지를 통해 풀어낼 예정입니다. 편집부 확인 결과, 필자는 오랜 시간 취재를 직업으로 삼아왔고 그의 본명으로 된 다양한 기사 및 취재물을 여러 통로를 거쳐 직접 확인하였기에 아래 글을 마빡에 올립니다.
연재물 도중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있을 수 있기에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올린 점, 독자제위의 양해바랍니다.
반신반의했다.
한국에 있을 때 만났던 '탈북자'들은 국적이 대한민국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아니, ‘미수복지역’에 있던 이들이 주민등록증을 회복하고‘대한민국’사람이 된 것이다.국정원의 관리 하에 있었지만,형식상으로는 대한민국 사람들이었다.
형식이라는 껍질의 무게는 그들의 두 어깨를 짓눌렀고,내부는 '난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차지하고 있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 이랄까?
2001~2002년 사이에 만났던 탈북작가가 내 생에 처음 본 북한 사람이었다.북한에서10여년 넘게 작가 생활을 했던 사람이었지만,나름지식인이었기에 남한 사회 적응을 위해,아니 살아남기 위해 그는 자신의 본성을 버려야 했다.아니,속여야 했다.그의 거짓말은 유치원생이 부모에게 하는 것과 같았다.그러나 느낌은 달랐다. 마치 쓴웃음 같았다.
멍했다. 흔들리는 트램 (유럽에서 많이 운행하는, 도로에 깔린 레일 위를 달리는 전차_편집자 주)안에서 나는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의 국적은 뭘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한민국? 프랑스? 시작부터 모호했다.
그의 출신을 듣자 내 가슴에 맷돌 하나를 얹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맷돌이 돌면,갈리는 건 내 심장일 것이다. 내 안에서그를 만나지 말란 말이 들렸다.이성을 앞세우니 그와의 만남이 부담스러웠지만 감정을 앞세우니... 호기심이 날 부추겼다. 일생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였다.
내가 느낀 긴장감의 강도는 십 여년 전 이맘때 마포의 허름한 족발집에서 홍세화 선생을 기다릴 때 보다 몇배나 더 강했다.망명이라는 선택을 한 이의 얼굴은 어떠할까?그는 정말 글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인물일까를 고민하던 그 찰나의 복잡함. 그 복잡함의 몇 배 무게가 내 심장을 옥죄였다.
그는 내가 만나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공산이 큰‘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출신 정치적 망명자’였다.
그의 나이는59세. (60세라는 말도 있다) 160cm가 약간 넘는 키에 깡마른 체격이지만,몸은 다부졌다.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고,그 서글서글한 눈웃음 사이로 비치는 안광은 사람을 위압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민무력부 정찰총국 소속이었다. (지금은 정찰총국으로 뭉뚱그려 말하지만,그가 활약하던 시기에 노동당 작전부 소속이었는지,아니면 군 출신인지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한국에 한 번 오시죠?남한 한 번 보고 싶지 않은세요?"
란 내 말에,
"칠십 몇 년인가에 한 번 갔다 왔어.그때 제주도였나?제주도였네"
제주도?
"그때 참 한가로워 보이더군.그때는 조선이 남한보다 잘 살았지..."
눈가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깊게 짓눌러지며 과거를 더듬는 그의 모습.노인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르신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딴 세상 말이었다.
"제주도로 어떻게..."
"배 타고 갔지"
당연하단 듯,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답하는 그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이 날 무안하게 했다.
"반잠수정... 이죠?"
당시 북한의 주요 침투수단이 언뜻 떠올라 되물었다.그는 묘한 미소를 흘렸다.긍정의 눈빛 속에 '의외'라는 기색이 묻어나왔다.그리곤 중국인 아내와 주선자에게 손짓을 했다.몇 마디의 중국어가 오갔고,나는 다시 한 번 내 신분을 말했다.
"그냥 이런저런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환한 웃음과 함께 내게 술잔을 건넸다.마음 같아선 녹취를 하고 싶었지만,그 자리는 취재하는 자리가 아니었다.그에게 넌지시, 언제고 마음이 동하면지금 이 술자리에서 오고간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며 양해를 구했다.그는 따르던 술병을 조용히 내려놓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무에 그리 대단한 이야기라고..."
(나중에 안 사실인데,프랑스에 망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연배의 '한국 동생'이 그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다며 밀착 취재를 한 적이 있다.근10년 가까이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지만, '동생'은 그의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그렇다고 프랑스에서도 정착하지 못한룸펜 동생이 그의 곁에서 기생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파리13구역. 차이나타운이자,가지지 못한 자들의 동네,프랑스로 흘러 들어온 온갖 인종들이 모여 사는 그곳에서 그는 살고 있다.당연하게도(?)그의 아내는 중국인이었고 (그의 세 번째 아내였다)그 덕분에 중국인 사회와 프랑스인 사회 모두에 연결고리를 가지게 되었다. (그의 처형이 프랑스인과 결혼했다)
그는 그 곳에서‘김씨 아저씨’로 불리고 있고,제법 유능한 건설업자다. 2~3명의 인부를 데리고 다니며 리모델링이나 전기수리,도배나,누수처리를 하고 있다.그의 실력 때문인지,아니면 그의 성실함 때문인지 그는 한국 사람 소유의 집이나 공공 건물 수리도 맡아서 한다. (사실인지,거짓인지는 모르지만 한국 대사관 건물의 작은 수리도 했다고 한다)
파리 구역도
그가 북한을 탈출한 지 벌써20여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그는결혼을 3번 했고,가족과의 이별을 2번 겪었다.
해석하기 힘든북한말로 띄엄띄엄 단어 위주로 말한(웅얼거린)그의 인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대하소설이었다.
귀국 후 진지하게 그때의 기억을 복기해 봤는데,그가 말한 이야기 중 반이 거짓이라 해도 그의 인생은지난(至難)한 고통의 연속이었고,보통 사람이라면 감내하기 힘든 인고의 세월이었다.한때 그의 이야기가 모두 거짓이길 바란 적이 있었다.이 모든 게 사실이라면,한 인간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큰 시련이었다.
마지막 날13구역의 트램 정류소 앞에서 흘린 그의 뜨거운 눈물과 내 손을 붙잡은 그의 떨리는 손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었다.나도 울고 그도 울었다.그의 울음... 그 자체가 바로 진실의 증명이었다.
50여 년 전 그는 고아였다. 40여 년 전그는 당 간부의 눈에 띄어북한의 엘리트로 성장했다. 30여 년 전그는 김책대학의대학생이자,스파이로 키워졌다. 20여 년 전그는 단 한 번의 실수로아오지로 보내졌다. 10여 년 전그는 중국에서 잘 나가는사업가였다가,탈북자 색출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쳤다. 2014년 현재그는탈북자이자,정치적 망명자로 살아가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 곳에서 그는 평범한 건설업자다. 한 번 화가 나면 사람 한 두 명 정도는 우습게 메치는 쿵푸의 고수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가끔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해도 술자리의 군대 이야기 취급을 받는다. 그러면 그 역시도 웃으며 받아넘긴다. 술자리 안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의 이야기. 그 누구도 그의 쓴웃음 뒤에 가려진 그의 인생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는통일을 말하지 않았다. 소원이 있다면,조선땅에 한 번 들어가 보는 것이란다. 그게 남이 됐든 북이 됐든 말이다.
동포에 대한 안타까움과 한민족 특유의끈끈한 정을 가진 그이기에 남북한을 가리지 않고,한반도에서 왔다고 하면 우선 품어주기 바빴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돈을 날렸다는 후문이다)
그는 눈물이 많은 남자였다. 삶의 질곡, 그 굽이굽이마다 한 양동이 가득 물을 채워놓은 듯이... 그가‘조선말’을 할 줄 아는 사람 앞에서 지난 과거를 말하며원했던 것은 같은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의 값싼 위로와 격려였다. 그 서푼어치 위로 앞에 그는 무너졌다.
그의 삶은 한 눈에 봐도 고단해보였다. 59년 그의 인생에서 단 한 순간도 편했던 기억은 없어 보였다. 육십 인생을 담담하게 토해내는 그의 입술을 보면서 문득 <반지 전쟁>이 떠올랐다.
고등학생 시절 해적판으로 본 <반지전쟁>. 그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난 그들의 여정이 빨리 끝나길 빌었다. 그들이 모닥불에 둘러 앉아 있기만 해도 한 숨 놓였고, 렘바스 빵을 뜯으며 앞으로의 여정을 논의하는 그 짧은 순간엔 안도했다. 고단한 그들의 여정 속에 작은 휴식. 작은 불빛을 갈구하며 책장을 넘기던 그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그의 삶에 작은 모닥불이 피어 있다.
앞으로 그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술자리 푸념으로 들어도 좋고,필력 좋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소설이라 생각해도 좋다.다만,그가 겪은 인생의 고통과 그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놓지 않은 삶에 대한 의지만은 놓치지 않고 봐주길 바란다.
- 2000년대 음악시장의 위기는 단순히 ‘불법 다운로드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음원당 객단가가 낮아진 새로운 시장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의 시행착오에 가깝다.
- 나름대로 회생하고 있는 해외 음악시장에 비해, 한국 음악시장이 계속 좆같은 이유는 정부관련부처- 저작권협회- 멜론류 서비스들의 카르텔 때문이다.
종합하면, 2000년대 냅스터의 등장과 mp3라는 파일매체의 보급이 가져온 급격한 환경변화로 인해 세계 각국은 각각 다양한 방식으로 적응을 해나가야 했고, 그 중 한국은 통신사가 음원시장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시장을 아작냈다는 얘기겠다. ‘한국 음악시장을 왜 아작났다고 하냐. 케이팝 열풍도 모르냐.’고 할 사람도 있겠다. 그런 분덜은 공연과 굿즈(말하자면, 아이돌들의 로고나 사진 등이 인쇄된 캐릭터 상품 등)와 같은 수입원을 제외하면, 음악시장 호황기인 90년대 김건모, 신승훈, 조성모보다 소녀시대, 빅뱅, 엑소의 수익이 더 적다는 사실을 염두해주길 바란다.
2. 대형마트의 음악버젼
2000년대 초반, 음원시장에 개입한 통신사들은 통신시장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면서, 음원시장에 좀 더 깊숙히 파고든다. 그 선두는 SKT라 할 수 있는데, 국내 1위 통신사로서 멜론이라는 1위 음원서비스를 보유한 채로, 구 ‘서울음반'을 인수하면서 음반제작과 유통에도 손을 뻗쳤다. 이것이 현재의 로엔 엔터테인먼트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파워게임이 벌어져, CJ가 음원사이트인 맥스mp3와 연예기획사인 GM기획, 음반제작사인 포이보스와 한바탕 짬뽕탕을 끓여드신 후 현재의 CJ E&M이 되어 MNET을 위시한 방송, 음반제작, 음원사이트, 음원유통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중이고, KT는 과거 ‘Dosirak’이라는 이름의 음원서비스를 보유하였던 것이 현재 KT뮤직이 되어 올레뮤직과 지니(Genie)라는 음원서비스와 음원 유통을 동시 수행 중, 벅스도 네오위즈라는 회사로서 음원서비스와 음원유통을 함께 사업한다.
말하자면, 한바탕 대기업 자본바람이 불고 나서 한국의 음원시장은 로엔, CJ, KT, 네오위즈 등 소수의 기업이 음원제작, 유통, 음원서비스, 방송까지 한큐에 끝내버리게 된 것이다. 동네구멍가게들이 죄다 프랜차이즈 편의점으로 바뀌고, 동네 시장이 죄다 대기업 대형마트에 먹힌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형마트의 재래시장 상권 위협을 많은 시민들이 우려해온 문제가, 바로 이 음원시장에서도 벌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벤처기업, 혹은 음악가 조합이 새로운 음악서비스를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이 서비스가 어찌저찌하여 가격부터 유통방식, 순위산정, 사용편의성 모든면에서 완벽했다고 쳐보자. 이 서비스가 기존의 멜론을 위협한다면, 멜론을 소유하고 있는 로엔 엔터테인먼트가 음원을 유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신생 서비스는 아이유와 시스타의 음반을 판매할 수 없게 된다.
쉽게 예상할 수 있다시피, 음원서비스는 얼마나 다양한 음원을 서비스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요소다. 그렇기 때문에 로엔, CJ E&M, KT뮤직, 네오위즈 같은 메이져급 유통사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이 유통사들이 다들 ‘경쟁서비스'를 하나씩 갖고 있는 판국. 그렇기 때문에 신생 서비스들은 이 메이져급 유통사이자 동시에 경쟁사이기도 한 회사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업을 해야만 하는, 졸라리 어려운 환경을 맞게 된다.
3. 그럼 이대로 끝인가
간만에 보는 옛날 짤
이런 판국에 시장 판도가 바뀔 수 있는 시나리오는 몇 개 안된다.
우선 위에 언급한 주요 기업들이 망해버리는 걸 생각해볼 수 있다. 이것도 음원시장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닥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아시다시피 로엔 엔터에인먼트는 이미 홍콩발 투자사에 매각된 바 있고, 시가총액은 몇 배 뛰었다. 이미 해외 자본이 한국의 특수한 시장형태에서 재미를 봤으므로 앞으로 이들이 휘청거리면 한국 음원시장의 한 축이 해외 자본에 팔려나가는 상황을 피하기 어렵고, 혹시 그렇게 팔려나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냥 없어져버릴 것이므로 시장 전체 규모가 작아지거나, 살아남은 기업들의 극심한 독과점이 형성될 가능성이 더 높다.
또 다른 시나리오는, 똑똑한 정부 관계부처나 국회의원이 이 구조적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그룹사가 음원의 제작, 유통, 소매를 모두 먹는 것에 대해 규제하는 법안을 만드는 것이 있다. 이쯤되면 문화선진국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수준높은 정치인들이 필요한 셈이다. 지금 정치권에 이걸 기대하느니 차라리 변산반도에 석유가 쏟아져나오길 기대하는게 낫겠다.
우리한테 멀 바라지는 마.
마지막 시나리오는, 자연스레 해결되는 방안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특히 산업이라는 것에 있어서 영원한 기업이나 영원한 산업구조는 없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소니도 망해가고, 20년 전만해도‘고작 전화기나 팔던' 삼성전자 통신사업부문은 어느덧 전세계의 중심에 서버렸다. 2010년대 모바일 패러다임의 혁신성에 비해 기존 한국 음악서비스들의 대응은 그닥 와닿지 않는 중이고,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 물이 아예 고여버리면 얘기는 다르다. 잘나가는 어떤 기업이 안일한 태도를 지니면 그 기업이 망하겠지만, 한 시장 전체가 안일하다면 그 시장 전체가 망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더 괜찮은건 없나?’라는 생각을 끝없이 가져줘야만 한다.
이건 단지 ‘싸고 좋은 것 없나?’라는 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너무 좋으면, 비싸도 쓴다. 2000년대 초반 휴대폰 열풍이 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2~3만원 정도의 통신비를 썼고, 10만원 가까운 통신비를 쓰는 사람들이 특이한 취급을 받았던 반면, 젊은이들도 다들 들고다니는 플래그쉽 모델은 분명 한달에 8만원 이상의 ‘기본료'를 요구하지 않던가. 한달에 7~8만원씩 내고 2년 채워가며 잘들 산다. 그럴 수 있는건, 2000년대 초반의 휴대폰에 비해, 현재의 스마트폰이, 좋아도 너무 좋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로엔, CJ E&M, 네오위즈, KT뮤직이나 3대 기획사인 SM, YG, JYP 말고도 음악은 많다. 예를 들어 인디음악 유통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미러볼뮤직만 있어도, 우리는 매달 쏟아져나오는 신선한 인디음악을 한껏 즐길 수 있고 말이다. 이 외에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개인유통 음반들, 유통되진 않았지만 사운드클라우드를 통해 들을 수 있는 뮤지션들의 숫자가, TV에 나오는 가수들의 숫자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이 음악들 중 분명 어떤 노래들은, 당신의 마음을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마치 7~80년대에 웃돈주고 LP 백판 찾아다니던 마음을 잃지만 않아준다면, 분명 크고작은 새로운 서비스들이 태어나고 유지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소비자와 사업자가 서로 새로운 깨달음을 주고 받다보면, 서로 다른 특징의 다양한 서비스들이 출시되고, 천편일률적인 서비스로 가득찬 한국 음악서비스 시장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을 수 있다.
너무 나이브 하지 않냐고?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저 공룡같은 기업들을 이길 수 있겠냐고?
불과 몇년전에, ‘엠엔톡은 단체대화방이 안되니까 카카오톡 깔아봐'라고 말하던 당신의 한마디가, 영원할 것 같던 문자메시지와, 공룡 같기만 했던 다음 커뮤니케이션을 먹어 삼켰다.
다양함을 원하시라. 그러면 다양해진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열분덜이 바라 마지않던 그 음악서비스가 여러분 손아귀에 들어올지 모른다.
글 쓰는 속도가 굼뱅이라기 보다, 군대에서 컴퓨터 할 시간이 적은 게 연재가 뜸해지는 가장 큰 이유겠다. 아니 컴퓨터하는 시간은 있는데, 수기를 옮겨 적는 시간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 눈 떠보니 8월도 꺼지고 있었다.[편집자 주: 이 글은 8월에 투고되었습니다만 11월 중순이 된 지금에야 올려드립니다. 몬난 편집자를 둔 사슴님에게 정말, 미안하다!]
한 여름밤의 술
0. intro (짝, 사랑이야기)
7월 중순 여름날 술 자리, 입대 1주년을 맞아 그리고 필자의 첫 짝사랑 K양의 생일 기념을 맞아 통칭 구인회 중 여덞 명이 모였다. (나머지 한 명은 전방에서 근무 중이다.) 나는 이제 휴가 나와도 나왔다 말을 안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날 몰래 가서 모두를 놀래키고 착석한 거였다.
사씀: 오늘 누구 땜에 모인거지?
K양: 야! 나 생일이라고!
사씀: 어, 그래 축하한다.
서로 툴툴대며 자리를 시작했다.
벌써 2번째 생일을 챙겨주다니, 처음 봤을때 K양은 그리 예쁜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안경을 벗은 모습을 보고나니 얼마나 예쁘던지... 드라마에 종종 나오는 그런 장면처럼 빛이 났는데 지금은 별로 그런 느낌이 안 든다.
이제 고개를 들면...
대학 새내기 때, 둘이 밥도 먹고, 그녀 따라 교양도 바꾸고, 집 가는 방향이 같아서 우연인 척 몰래 기다리고 했었다.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미쳤냐고 버럭 화낼 거 같다. 물론, 이렇게 써놓고 막상 상황이 되면 또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러다 경쟁자가 나타났다. 한살 많았던 남자 놈, 그 놈은 정말 놈이다. 나쁜 놈... 아니 뭐, 나 보다 잘 생기고 키 큰 어쨌든, '놈'이라 칭하자.
어영부영 때는 학교축제에 이르게 된다. 그 '놈'을 재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은 했던가. 축제가수들의 무대를 그녀와 단 둘이 보고난 후 학교 편의점에서 메로나 두 개를 사서 벤치에서 까먹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근래 메로나컵이 '와' 대신 나오는데 나는 '와'가 더 좋다. 메로나컵이 달콤하지만 여름과 같이 끈적거린다면 '와'는 말 그대로 아이스 샤베트 같다. 특히 PX에서 구할 수 있는 군대 짬밥 아이스류 중에서는 거의 최강자라 생각하는 바이다. 입에 넣으면 그저 단 한 마디 밖에 나오지 않는다. '와~')
K양: 나 있잖아, 그 사람(놈)한테 고백 받았어.
사씀: ...
그 당시를 돌이켜 보면 두려웠고 싫었다. 그녀가 다른 사람에 여자가 되는 것도 내가 고백해서 거절당해 친구로도 지낼 수 없는 상황에 말이다. 겁쟁이였다. 그래서
"잘해 보든가."
퉁명스레 내 뱉었다. 여러 날이 지나서 그녀는 그 놈의 여자친구가 되었고, 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위로를 받으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스무살의 나는 딱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이었던 거 같다. 지금이라면"내가 더 널 좋아하는데, 나는 어떠니?"라든가. '입술박치기'라도 해서 빰이라도 맞든가 할 텐데.
현재 K양은 그 놈과도 헤어지고 26살 군필자와 사귀고 있다고 한다. 하기사 한참 군필자가 좋을 때인 거다.
1. 24, 26, 30 (그래? ... 그렇구나.)
한참 무르익었던 자리의 분위기가 시들어 갈 즈음에 Y양의 발언이다.
"여자나이 스물넷에 졸업하고 여섯 쯤에 공무원되어서 서른 쯤에 결혼하면 최상이야!"
속으로 '거참 재밌는 말이네'하며 한마디 툭 내 뱉었다.
"그으래?"
실제로 그럴까? 군 생활하며 취미 활동 등으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게 학과와 꿈 그리고 목표를 물어본다. 물론 이 자리의 8명의 친구들에게도 물어봤었다. 한 명도 정해진 꿈이 없댄다. 고작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취업과 졸업을 대비해, 토익과 전공공부를 하는 사람, 거기 좀 더 나은 녀석은 동아리 활동이라든가, 각자의 연애사업을 충실히 해나가고 있는 정도였다. 물론 위에 열거한 것들 중 하나도 안 한, 혹은 못 한 나 같은 군인도 있지만 말이다. 어쩌겠는가. 이렇게 갈리는 것도 내 나이 때의 남과 여라고 생각한다.
글쎄. 말이다. 공무원... 밥그릇은 정해져 있는데 남녀노소 어중이 떠중이 다 덤벼들면, 정해진 수 만큼, 정원만큼 지 밥그릇 찾고 나머지는 굶어 죽으라는 게 아닌가? 물론 본인 선택에 올곧이 책임을 지고 사는 게 어른이라고도 말하지만,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갑한 현실 속에서 공무원이 꿈도 희망도 없는 이들에게 어느새 '갑'이 되어있는 건 아닌지. 내 주위 여자들 중에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며 카랑카랑하게 말할 여자는 없어도, '나, 스물넷 졸업. 여섯 취직. 서른 결혼한 여자야!'라고 말할 여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를 일이니 말이다.
2. 인연이든, 인맥이든
파해가던 자리에도 술이 분주했다. 얼굴들은 하나같이 벌개져 있었다. Y양은 내게 쏘아 붙이듯 말했다.
Y양: 야, 너 전역하고 나서 걱정이다. 짜샤.
사씀: 왜? 뭐...
Y양: 뭐, 임마 너 동기 중에 친한 녀석도 별로 없고 전역하면 혼자 다닐꺼 아냐?
기분이 언짢았지만 잠자코 듣기로 했다. Y양의 장점 중 하나는 본인을 제외한 다른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를 잘하는 거니깐.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다.
Y양: 넌, 너가 좋으면 다른 사람은 상관없잖아!
사납게 말하기에 그저 웃어 넘겼다. 그러자 Y양은 내게 인맥관리를 연설하기 시작했다.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이 되는 인맥이 필요하다고. 너도 쫌 인맥관리 같은 거라고 하라고 말이다.
참으로 실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인연을 이야기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아직인지 아님 영원히 모를 수도 있지만 그냥 딱 내 사람 같은 사람이 있다고. 그런 사람은 도움이 되든. 안되든. 그냥 품고 싶다고 말이다. 내 이야기를 듣다 Y양은 말했다."야, 니가 아직 군인이라서 순진하거나 내가 너무 때 묻었나봐."털털한 웃음이 번지자, 나도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입이 썼다.
3. 술자리 잔상
나는 술의 맛을 알지 못 한다. 간혹 술 한잔 하고 싶을 때, 속을 다 적시고 싶었지만 막상 들어가면 이내 입 안이 썼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돈 아깝다'하며 자책한 적도 있지만, 온 몸에 퍼진 기운은 나를 똑바로 두지 못했다. 흔들렸다. 흔들린 추는 균형을 잃어갔지만 넘어가지는 않았다. 음주 도중 소변은 언제나 불쾌한 냄새가 났다. 그럴수록 쓰디 쓴 소주가 그리도 맑게 보일 수 없었다.
'이거.슬. 다 마셔 내 가.믄. 속도 말.게.하자!'
술자리에 있었다. 허나 아무도 쉬이 잔을 채워 주지 않았다. 잔을 채웠다. 비웠다. 반복했다. 목이 타. 물이 급했다. 물잔을 들었지만, 이내 조금 흘렸다.
"아, 미안해..."
주위에서 소리가 들린다.
"또 혼자 마시다 취했네."
물이 목을 넘어간다. 입 안이 그리고 더 깊은 속이 진정된다. 온 몸이 달아오른 번개탄처럼 따스하다. 눈동자가 조금, 몸이 조금 더 풀렸지만, 정신은 조금도 풀리지 않는다. 지그시. 주변을 둘러본다. 술이 오고 간다. 말이 오고 간다. 내일을 모르고 두려운 자들의 위로가 오고간다. 하나가 오기에 하나가 간다. 늘어나는 건 술병이고, 줄어드는 건 침묵이다. 밖에서 보면 행복이고 안에서 보면 불행이다.
4. 아... "미안해"
<캐스트 어웨이> 주인공 척 놀랜드가 구조되서 사회로 돌아오고 사회에서 자기 치아를 봐주던 의사 놈이랑 아내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사실을 알게 된 날, 밤 4년이라는 시간동안 무인도에 갇혀있는 내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었던 아내 사진이 있는 팬던트를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스탠드 조명이 꺼졌다, 켜졌다, 를 반복한다. 필자는 그게 바다에서 잃어버린 배구공 친구 '윌슨'인지 아님 이제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아내'인지 헛갈리기 시작했다. 감독은 이 점을 노린 걸까? 주인공은 말한다. 아... "미안해" 윌슨에게, 그리고 또 이젠 다른 사람의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버린 사랑했던 여자에게, "미안해"
"윌슨~ 미안해... 널 구하지 못할 것 같아... 윌슨. 윌슨~! 윌슨!!"
5. outro 고마워 과연, 돈까스야.
이제 술 자리 얘기를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자. 그렇다. 필자의 휴가징크스를 소개하려고 한다. 휴가징크스란 휴가를 떠나기 전 날 저녁은 언제나 돈까스란 점이다. '돈까스' 얼마나 멋진 단어인가. 자 다 같이 소리내어 읽어보자. 돈.까.쓰. 영어로 풀이하자면 어렵지만 해보겠다.
don't gas 되시겠다. (pork cutlet 이라고 외치시는 분들 뭘 기대한거냐? 이 글은 기대 따위 하지 않아야 되는 글임은 초장부터 밝혔다.)
don't gas 해석하자면 무척이나 어렵지만 족집게 선생님처럼 풀어보겠다.
'까쓰 부리지말라'
이렇게 해석된다. 까쓰는 무엇일까? 된 발음을 빼고 순하게 표현해 보자 김빱이 아니라 김밥이 되도록 말이다.
까.쓰.
까.아.쓰
ㄱ가.아.ㅅ스
가. 아. 스.
가.스.
불필요한 것들을 지우고 보면 '가스'가 남는다. 보이시는가? 이제 독자의 의문은 '대체 웬 '가스'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로 넘어가 있을 것이다.
'가스'란 무엇일까? 정의 내려보도록 하자.
가스 : 군대 내에 심하는게 폭언, 욕설, 협박부터 약하게는 혼내는 걸 통칭한다. (대체로 언어폭력이라 이해한다면 쉬울꺼 같다. 물론 그 이상도 있겠지만 가스가 심화된 상태를 '핵가스', '독가스' 등으로 칭한다. 실제로 생활에서 쓰자면 '저기 누가 가스를 먹고 있다던가', '가스 뿌린다' 정도로 쓸수 있겠다.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어쨌든 일요일 저녁의 돈까스는 휴일이 끝나고 일과(*일과: 작전, 근무, 작업, 군대에서 일하는 것을 통칭)를 받는 주중으로 넘어가기 이전, 선후임간에 서로 가스를 덜 뿌리고 덜 먹자는 대한민국 육군 창설과 더불어 가지게 된 모종의 암묵적인 협약이자 전통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필자의 휴가 직전 최후의 만찬은 언제나 돈가스라는 것을, 소설적 표현을 빌려 표현해본다. 일요일 저녁 돈까스를 맞이하는 느낌은 이러하다고 할까나?
아아, 나는 그만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뻔햇지만. 결국 나라는 인간은... 그래서 울컥 돈까스를 보며. 겨우 이런 말이나 하는게 고작이지만.
고마워, 과연 돈까스야
(박민규 단편소설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의 인용)
편집부 주 - 지난 기사 끝에
아직은 못했지만 꿈꾸는 노력들이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려고 한다. 전역 후 내가 다녔던 초,중,고를 찾아 홀로 외롭게 있었던 장소를 사진으로 남기고 글을 쓰는 것이다. 꼭 하려고 한다. 내 과거에 대해서 다시 한번 돌아보고 웃으려 한다.
28사단에서 동반외박을 나가 휴대폰에 '힘들었다. 죽고싶었다. 홍길동 죽이고 싶다.' 단 세 마디를 남기고 스스로 목매 숨진 두 친구에게.
내 캐캐묵은 회색수첩 일기에도 당신들이 남긴 세 마디가 새겨져 있음을.
상관의 성추행때문에 자살한 여군중위에게. 그리고 내가 모를 수 많은 친구들에게.
난 놈들이 저기 저 밤 하늘에 자기 별을 가질 때, 저 별들 사이를 매꾸는 칠흑같은 어둠들에게.
죽어서 어둠은 칠흑으로 완성되고, 별의 주인은 바뀌지만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별은 더욱 빛나기에.
해피해피 쫑쫑... 강한친구 대한육군...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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