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연재물은 딴지일보 편집부로 전화를 걸어온 한 필자와 오랜 시간 상담 끝에 본지 마빡에 올리기로 결정한 기고문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북한에서 스파이로 길러졌다 활동 도중 숙청된 남자로 필자는 그 남자와의 만남을 본지를 통해 풀어낼 예정입니다. 편집부 확인 결과, 필자는 오랜 시간 취재를 직업으로 삼아왔고 그의 본명으로 된 다양한 기사 및 취재물을 여러 통로를 거쳐 직접 확인하였기에 아래 글을 마빡에 올립니다.
연재물 도중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있을 수 있기에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올린 점, 독자제위의 양해바랍니다.
새터민 청소년을 위한 기독교 교육공동체 중 '여명학교' 가 있다.탈북청소년들이 기존의 대한민국 교육체계에 녹아드는 것이 어렵다는 걸 확인하고,이들을 모아서 학교를 만든 것이다.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이 여명학교의 후원자 중 한 명은 틈만 나면 내게 제안을 해온다.
"OO씨가 걔네들을 한번 보면 좋은데... 걔네들도OO씨 참 좋아할 텐데..."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난 그들과의 만남을 의도적으로(?)피했다.내 비루한 삶을 그네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그런 '멘토놀이'는 한 번으로 족했다.목숨 걸고 남으로 넘어 온 그들에게 내 바닥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내가 딱 한 번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었다.바로 그 아이들의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그 애들이 남한에 들어 온 경위를 조사한 적이 있는데,
얘들이 백이면 백 전부 다 북한에서 바로 남한으로 넘어왔다고 하는 거예요."
그 아이들과 탈북자들. 주민등록증을 새로 만든 이들이 북한에서 바로 남한으로 넘어왔다고 말한다는 것이다.이게 무슨 소리일까?
"어떻게 남한으로 들어왔던지 기본적으로중국을 거치는 게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그 아이들에게 중국은 지옥이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런지 중국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거예요."
의도적일 수도 있고,아니면 자기방어기제를 통한 기억 탈락일 수도 있다.그러나 결론적으로 보자면 그들은 중국에서의 기억을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못할 수도 있고.그들에게 중국에서의 기억은 지옥이다.
김씨 아저씨는 북한 아이들이 남한사회에 정착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그에게 있어서 남이든,북이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단지,동포가 어딘가에서 고생하는 게 싫었다.기왕 남쪽에 갔다면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남한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 하는 건 보기 싫다는 것이다.그런 그가 특히나 신경 썼던 게 청소년들이다.자신의 아들이 생각나는지 김씨 아저씨는 탈북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그에게 여명학교 이야기를 해줬더니적잖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 여명학교 아이들이 중국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괜히 쓸데 없는 걱정을 더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다.그러나 중국에 관한 이야기는 탈북자,북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영원불멸의 화두였다.
우문(愚問)을 던졌다.
"김씨 아저씨에게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였습니까?"
눈가에 자글자글하게 맺혀있던 주름이 더욱 더 옹색해졌다.게슴츠레 뜬 눈 사이에서 희미하게 웃음 비슷한 게 스쳐지나갔다.그러나 눈이 말하는 것과 성대가 말하는 것은 억양부터가 달랐다.
"중국을 오갔을 때지"
김씨 아저씨의 말에는 어떤버릇이 있었다.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단어나 문장들 중 직접적인 느낌을 전달하는 말은 극히 적었다.누군가를 '죽였다'혹은 '죽이겠다'란 표현을 제외한 단어나 어휘들은 지극히 비유적이고,우회적이었다.일반인이 사용할 수 없는고급용어들을 무시로 사용할 때는 그의배경에 대한 증거라 생각했는데,진짜배기는 그의 언어구사력이었다.단순한 습관이 아닐까란 생각도 해 봤는데,그는 지극히 비유적이고 우회적이고 제한적으로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그걸 알아들으면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지만,못 알아들어도 개념치 않았다.
정황상 추측에 불과하지만 몇 번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느낀건 이런 언어 습관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나 활동이력에 관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선문답과 같은 말들을 사용했지만,국제정세나 외교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지극히 냉철하고 명료한 단어를 사용했다.말과 글로 밥벌이를 하는 나로서도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언어습관을 본 적이 없었다.다만 확언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추레한 행색과 다르게 그는지식인,그것도 고급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말한"중국을 오갔을 때"란그가 스파이로 중국에서 활동했을 무렵을 말한다.그는 일반적인 정보가 아니라 군사정보와 기술을 목표로 한 특수한 목적의 스파이였다. 그렇게 훈련 받았으므로 군사기술과 외교에 대해서는 정통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우방이라 할 수 있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스파이였기에 개인의 처신은 적국 그 이상으로 중요했던 상황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시기 당의 '각별한 배려'를 받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그를 믿어주는 장인이 있었다.그리고 그의 분신과도 같은 아들이 있었다.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에는 난생 처음 당의 명령을 거부할까 고민할 정도였다고 한다.그리고 '조선'으로 돌아가 처음으로 아들 얼굴을 봤을 때그는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고 한다.
당의 각별한 배려. 추측컨대 특각 (김일성 별장으로 지어진 자모산 특각을 말한다)에서 휴가를 보내는 차원(스파이들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특각에서의 휴가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은 아닌 거 같았다.평양시민으로 입성한 건 기본이고,지위나 가족들에 대한 어떤보상이 있었던 듯 싶다.
김씨 아저씨는 그 짧은 얼마간의 안식을 회상하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3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한다.
김씨 아저씨 자신의 능력도 능력이었지만,주변 환경의 도움도 컸다고 한다.김씨 아저씨는 자신에게 내려진 당의 명령에 충실했고,소기의 성과도 거뒀다고 한다.그런 그에게 조국은 확실한 반대급부를 주었다고 한다.
80년대 북한은 먹고 살만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았다. 완벽하게 남한이 북한을 추월한 건80년대부터였다. '고난의 행군'기간 동안 북한 체제가 버텼던 건 김일성 시대에 살았던 이들이 사회를 움직였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그 시절 남한을 오갔던(?)김씨 아저씨의 표현을 빌자면,
"남한이 못살긴 했지.제주도를 가봤더니 돌무더기만 보이더군."
그가 갔던 또 다른 남한 도시의 모습도 과히 기대했던 수준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건 어떤 비하의 의미가 아니다. 그는 지금의 남한 발전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중국 방송에서 남한 연예인과 남한 드라마가 나오는 걸 보면서 그도 놀랐다고 말했다.그가 말하고 싶은 건 70년대에는 확실히 북한이 잘 먹고,잘 살았다는 사실이다.어떤 자존심이랄까?그는 '조선'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 그의 주특기는 '여자'였다.
미남계라고 해야 할까?그는 중국 여성을 유혹해서 정보를 빼냈다.그가 말하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꽤 중요한 내용인 것 같았다.그 중국 여성은 핵심 코어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그 신뢰성도 높았다고 말했다.
당시 중국에서 뽑아낼 수 있는 정보란 것과 북한의 당시 상황.그리고 '전투기'란 키워드를 종합해 보면 아마도MIG-21의 기술 중 하나 (MIG-21의 중국 카피판인F-7B와 관련 된 정보일 수도 있을 듯)아니면 다른 공격기의 정보일 수도 있다.
어쨌든 당시 김씨 아저씨는 꽤 오랫동안 스파이로 활약했고,나름의 성과를 분명하게 거뒀다.그런 그에게 유일한 오점이었던 것이 마지막 임무였다.
그는중국여자를 믿었고,여자는 정보를 건네 왔다.이 정보를 얻기 위해 조선은 외교적으로꽤큰 출혈을 감내해야 했다고 한다.이게 외교적으로 문제가 됐고,그는 본국으로 소환됐다.문제는 이 중국 여자가 건넨 정보의 진위여부였다.
"F였었는데..."
라는 말은 그 정보의 코드인 듯 했다.그는 회한에 사무친 표정으로 'F'를 말했다.몇 번이고 말이다.아마도 중국여자가 건넨 정보는 가짜였던 것 같다.아니면 암호해독의 키워드를 잘못 전달 받았는지도 모른다.어쨌든정보는 잘못됐고 김씨 아저씨는 몰락하게 됐다. 끝났다. 딱 한 번의 실수로 김씨 아저씨는 모든 걸 잃게 됐다.
그는 좀처럼 자신의 훈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만그의 '죽인다'와 '죽였다'란 표현과그가 막 프랑스에 와서 있었던 사건을 통해 그의 경험을 추측해 볼 수 있었다.
막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그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돈도,가족도,희망도 없었다.만리타향이란 말이 이것과 같을까?그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했다.다행이라면,그가 중국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그는 중국말이 들리는13구역에서 자리를 잡았고,이곳에서 날품팔이를 하게 된다. 그리고 문제의 사건이 터졌다. 그가 프랑스에 망명신청을 하기 전에 일이 발생했다.
그는 프랑스의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불법이민자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던 식당이었는데,그 역시도 살기 위해 이 곳에 몸을 의탁하게 됐다. 문제는 이 업주의 성격이었다. 업주는 불법이민자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특히나 프랑스어를 못하는 김씨 아저씨 같은 존재들은 만만한 '먹이'였다.
프랑스 업주는 김씨 아저씨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았다.불법 이민자였기 때문이다.불법 이민자는 어디에 하소연 할 곳이 없었다.그는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다.몇 달 동안 임금이 밀리자 김씨 아저씨는 돈을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다.그러나 돌아온 건 욕이었다.아저씨는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요구했지만, 나중에는 숫제 무시를 했다.
결국 김씨 아저씨는 자신의 날 것 그대로의 성질을 보여줘야 했다. 업장에서 깽판을 쳤다.그리고 같이 일하던 불법이민자들을 선동했다. 돌아온 건폭력이었다. 아저씨의 거처를 알고 있던 업주는 프랑스 건달들을 동원했다. 칼과 총으로 무장한20대의 건장한 청년4명이 아저씨의 집 근처로 찾아왔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50살에 막 접어든 초로의 중늙은이를 총과 칼로 협박(혹은 살인)하는 건 누워서 떡먹기 보다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날 네 명의 청년들은 지옥을 맛보게 됐다.
김씨 아저씨는 이4명의 청년을 박살냈다.그 중1명은 중환자실로 실려 나갈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총 앞에서 겁나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해 김씨 아저씨는 묵묵히 웃을 뿐이었다. 사건은 더 커졌다.처음엔 단순한 임금체불 문제였던 게 살인교사까지 커졌다. 김씨 아저씨 표현으로는당시에는'잃을 게 없었다'고 한다.
아저씨는 업주가 보는 앞에서 식당을 때려부셨다고 한다.그리고는 당당히 임금을 요구했다.결국 아저씨는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상황은 점점 더 커져갔는데,경찰이 이 사건에 개입했다. 1명이 사경을 헤매는 상황에서13구역을 뒤지기 시작했다.재미난 건 이때13구역 사람들이 김씨 아저씨 편을 들어줬다는 것이다. 13구역 주민들의 증언과CCTV의 영상 덕분에 김씨 아저씨는 무사히 풀려나게 됐다.다행인 건 그가 그 당시 프랑스에 망명 신청 중인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에게 싸움을 잘하는 법에 대해 물어봤을 때 그는 조용히 손을 보여줬다.엄지를 편 상태로 손날을 만들더니 스윽목덜미를 밀었다.그 위압감은...
실패. 그는 단 한 번의 실패로 공화국의 영웅에서 반역자가 됐다.
폭발사고가 있었다고 한다.자세한 건 모르겠지만,중국에서 폭발사고가 날 정도로 큰 난리가 있었고,외교적으로도 적잖은 출혈을 감내해야 했다.문제는 그렇게 얻은 정보가가짜였다는 것이다. 노동교화소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폐기처분' 당했다.
어딘가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다. 기억을 지우기 위한 고문, 기억이 지워질 수밖에 없었던 고문이었다. 더 이상 스파이로서의 가치는 없었다고 한다.대 중국용 스파이였는데,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였으니 이미 신분은 탄로 났고,정보원이었던 여자한테 배신(혹은 여자도 중국 정부로부터 용도폐기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들고 온 정보가 가짜였으니)을 당했다. 더 이상 활용 방도가 없었다.
김씨 아저씨의 말을 종합해 보면,아저씨는 보위부(국가안전보위부)에 끌려간 거 같다. 그리고 몇 달인지 모를 정도의 시간 동안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약물은 물론이고(자백제인 듯) 전기고문은 수시로 당했다고 한다.
"내 머릿속을 지우려 하는 거 같았지."
김씨 아저씨의 기억은 이 고문의 후유증 덕분인지 지금도 토막토막 끊겨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그 총명했던 머리가,고문을 당한 이후에는 백지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다행인 건 그곳에서 살아나왔다는 사실이다. 그 곳에서 그는 지옥과도 같은 반년을 보냈다.
긴 한숨...
그 긴 한숨 속에 회한의 느낌이8 이라면, 2정도는 안도의 느낌이었다.
왜 들어갔는지는 안다. 그 '왜'가 얼마만한 파장을 일으켰는지도 안다. 그러나 그 '왜'때문에 치러야 하는 셈에는 이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는 왜 고문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질문이 형식적이 됐다. 고문을 하기 위해 묻는 것 같았다. 더 나올 말도 없었고,더 물어볼 말도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이 결과로 나와 버린 후 였다.
나트륨 아미탈?스코폴라민?티오펜탈? 고문과 고문 사이에 계속해서 자백제가 투여됐다고 한다.김씨 아저씨는 지금도 그것이 바로 '기억을 지우는 약'이라고 말한다.자백제일 것이다.
고문을 통해 신체를 조각조각 해체해 놓고,마지막으로 자백제를 집어넣는다. 몸에서 쥐어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실을 얻기 위한 방법. 아니,이제는 진실이 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일상이 됐다.
지난 9월 28일 과자 봉지로 만든 뗏목에 올라탄 대학생 2명이 한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다. 이 퍼포먼스는 '질소를 샀더니 과자가 서비스'라는 카피에 공감하는 이들로부터 호응을 얻으며 국산 과자를 향한 불매운동으로 번질 조짐까지 보인다. 그러나 한두 달의 시간이 흐른 지금, 분위기가 반전되며 없어서 못 파는 국산 과자가 등장한 상태다. 바로, 해태에서 나온 '허니버터칩'이다.
벙커1 근처의 편의점들을 돌아봤지만 이 '허니버터칩'을 확보하고 있는 곳은 없었다. '허니버터칩 없어요?'하고 물어보면 편의점 카운터의 사람들은 많이 들어본 질문이라는 듯 씨익 웃으면서 '네. 떨어졌어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거 어지간해서는 구하기 힘들 거에요."
혹시나 해서 홈페이지에 들어가봤다. 판매처를 알려주는 긴급 공지 같은 거나 생산을 늘리겠다는 계획의 발표 같은 거라도 있을 법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하다 못해 사과문이라도 있어야 할 홈페이지에는 쌩뚱맞은 '황금을 찾아라' 이벤트가 진행되고 있을 뿐. 조용했다.
제품 소개도 너무 무미건조하다. 제품을 구하는 건 포기하고 각종 후기를 보며 이 과자가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고민하고 있는 내가 보기 안스러웠는지 여자친구가 한 마디 거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되는가봐..."
아이스크림 회사들이 가격 담합하다 걸려도 되니 벌금 쫌 물고 계속 비싸게 팔고
아몬드 들어간 후레이크에 대장균 나와도 되니 300만원으로 퉁친 다음 팔던 거 그대로 팔고
외국에서는 카카오버터 써서 만들던 초콜릿, 국내엔 식물성유지로 바꿔 넣어도 되니 양까지 장난쳐서 팔고
정말 또 냄비 근성인가 싶다가, 아니 그렇게 몰아갈 것만은 아니다 싶었다. 일단 인터넷 상에 맛있다고 소문난 것을 간과할 순 없었다. 맛이란 과자가 추구해야할 본질이다. 양이 적어도 맛에서 가격에 부합하는 가치를 느낄 수 있다면 소비자는 당연히 지갑을 연다. 단순히 짧은 기억력 탓으로 치부할 순 없는 면이 있다.
그런가하면 이 '허니버터칩'이 중고 거래 사이트에 웃돈 주고 등장하는 현상이 눈에 밟힌다. 거기다 생산 중단 루머도 있었다니 이 정도면 단순히 맛에 열광하는 차원으로만 볼 수 있는 현상 또한 아니다.
이 쯤에 사고가 이르자 기레기의 직감이 내 전두엽에 속삭인다. 이거 생각보다 복잡한 사안이 될 것 같다고. 그래서 마치 똥꼬 덜 닦인 것 마냥 시원치 못한 부분들부터 디벼봤다. 제품을 구하지 못해, 어디까지나 수집할 수 있는 정보에 의존해야 하는 작업이다. 다소 힘겨울 듯 하지만, 거기에 뭔가 불길하고 음습한 감각까지 느껴져 거듭 중단해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굴하지 않고 정리해본다.
의문점
하나, 조용하다.홈페이지만 조용한 게 아니다. 이 쯤 되면 '창조'를 참 좋아하시는 우리 레이디 가카께서 창조경제의 모범 사례라고 한 마디 해주실 법도 한데 그런 말씀도 없으시고, 담배값 인상 때는 사재기에 5천만 원 벌금 을 때릴 거라 엄포 놓았으면서 이미 중고 거래 사이트를 통해 3배가 넘는 차익을 챙기려 한 사람이 등장한 '허니버터칩'의 사재기에는 아무런 제재를 취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부 편의점에서는 허니버터칩을 창고에 숨겨놨다가 팔기도 한다는데 정부와 해태 본사는 사태를 계속 좌시할 것처럼 보인다. (물론,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니 아직 두고 봐야 하겠지만) 정작 시끄러워져야 할 두 주체가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 허니버터칩으로 시끄러워진 곳은 오로지 SNS와 언론, 즉 인터넷 공간이다.
둘째, 생산에 관한 여러 가지 루머다. 해태는 제품을 생산하는 원주 문막공장을 2교대에서 3교대로 전환하고 주말에도 '풀 가동'한다고 밝혔다는데, 이 때문인지 무리하게 설비를 돌리다 불이 나 생산이 중단되었다는 소문이 퍼진 거다.
무슨 자동차도 아니고, 감자칩 맛 하나 개발하는데 1년 9개월을 썼다니. 더구나 과자는 1년 뒤 생존 여부를 신제품 성공의 기준으로 판단할 정도로 제품 개발의 위험이 크다. 만약 제품이 성공 못 했다면 2년 가까운 개발 기간은 회사로부터 엄청난 욕지거리를 들었을 소재다. 이렇게 긴 거 이상하다.
넷째, 이미 해태의 대표 브랜드라 홍보하는 생생감자칩이 있는데 왜 별도의 브랜드를 만든 걸까?
원래대로라면 생생감자칩 허니버터맛이라고 나왔을 제품을 갖다가 '허니버터칩'이라는 별도의 브랜드를 만들어 낸 점은 이상하다. 특히, '허니버터칩'은 브랜드 명에 아예 어떤 맛인지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추후 다른 맛의 감자칩을 개발해낼 경우, 기존의 인기에 편승해 'XXXX칩 OO맛' 같은 식으로 명명해놓고 파는 마케팅은 포기할 수밖에 없는 핸디캡이 있는 것이다.
취재
위와 같은 여러 의문점을 풀고 싶지만 벙커1의 어둡고 축축한 지하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에 용산에 있는 해태 본사로 취재를 가봤다.
본사 건물이다.
역시 건물 외부에서 허니버터칩과 관련된 어떤 홍보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부분 또한 없다고 생각하는 찰나,
건물 맞은 편으로 눈을 돌린 나는, 순간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수가... 오피스텔이...
완공되어 분양 중이었던 거시다.
본 기레기도 용산구 주민이기에 이 오피스텔이 멀리서 보인다만, 이거 얼마 전까지 공사 중이었다. 왜 완공된 것을 눈여겨 보지 않았을까. (이런 거에 왜 얼어붙냐고? 원룸 오피스텔, 인터넷... 뭔가 연상되지 않나? 자세한 내용은 아래 추리 부분에 몰아 쓰겠다.)
사람이 살고 있는 정도로 미루어 분양은 한두달 전부터 시작되었을 터였다.
그렇게 오피스텔 쪽을 취재하고 본사 쪽으로 돌아오다 해태의 차들이 주차 중인 것도 목격했다.
그렇다. 이제야 막연했던 불길함이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형상화되는 느낌이다. 가설이 굳은 심증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해태제과 건물에 주차장이 없으니까 세워둔 거 아니냐고?
명색이 본사다. 주차장이 없을 리가...
위 취재 내용을 통해 도출한 결론은 아래와 같다. 물론, 아직 물증은 없기에 어디까지나 추리에 그치지만 너무 똥꼬털이 빳빳하게 서버리는 내용이라 발설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추리
추리 하나, 하필이면 근처 오피스텔이 분양을 하기 시작했을 때, 허니버터칩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사건을 어디선가 경험했었다. 바로 이거.
한 여성이 원룸 오피스텔에 박혀 인터넷만 주구장창...
해태가 고용한 어떤 여성이 오피스텔에 은둔하며 다수의 계정을 생성해 댓글 작업을 하고 있다 가정해보자.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이것만으로도 '허니버터칩'의 열풍이 유독 인터넷 상에서만 시끌벅쩍한 이유가 쉽게 설명이 되어버린다. 맛있다는 다수의 입소문, 그것만 만들어낸다면 각종 마트나 편의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움직였을 것이다. (물론, 제품 자체가 맛 없으면 이런 인터넷 여론 조작도 아무 소용 없었으리란 거는 잘 알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글의 마지막에 설명할 것이니 조급해 마시라.)
추리 둘, 위의 댓글 알바 가설은 인터넷 상에 특화된 '허니버터칩' 열풍의 성격만이 아니라 생산을 늘리거나 프로모션을 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이 없다는 것도 설명할 수 있다.즉, 그런 걸 할 마케팅비가 원룸 임대비와 알바비 등 별도의 지출로 인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는 인과를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추리 셋, 제품 개발에 2년이 걸린 것이 아니라 2년 째에 출시하기 적합한 시기가 도래한 것으로 바꿔 생각해보면 역시 너무 긴 개발기간도 설명이 된다.하필이면 질소 과자를 디스하는 뗏목 퍼포먼스가 잠잠해질 시기에 이런 제품이 출시되다니. 너무 절묘한 시기다. 때문에 제품 개발이 이 시기에 맞춰 끝났을 뿐이라는 설명은 지나친 우연을 담보로 한다. 한겨레 기사에서 언급된 TFT는 사실상 불매 운동에 대비한 한방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졸라 끼워맞추는 쪽이, 아니 설명하는 쪽이 더 핍진성을 얻는다. 이런 팀을 둘 필요성을 본사가 지속적으로 느꼈으리란 정황도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다.
MBC 모 다큐에서 상품명도 가리지 않은 채 나왔던 맛동산, 해태 꺼였다. 이런 국내외 상품의 차별을 두면서부터 이것이 문제될 경우의 대비책, 생각해둬야 했을 것이다. '댓글 공작을 통해 열풍을 조성했을 때 이것이 쉬이 사그라지지 않을 정도의 맛을 가진 제품이 필요하다. 그리고 시기가 도래해 이것을 풀었을 경우, 모든 사람들이 이 제품을 실제로 맛 보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도록 하여 이슈가 되는 시간이 짧아지지 않도록 콘트롤해주는 것도 필요하다' 아마 기사의 TFT가 올린 보고에 이런 내용이 있는 건 아니었을까?
추리 넷, 남은 의문은 기존 브랜드에 편승하지 않고 나중에 제품을 다각화하기도 어려운 브랜드'허니버터칩'을 새로 런칭한 것이다. 이는 앞서 추리한 해태의 전략을 관통하는 어떤 의도를 읽어내면, 간단히 설명해낼 수 있다. 바로, '이미지 쇄신'이라는 의도 말이다.
우선 허니버터칩의 봉지 디자인을 보자. 노란색이다.
반면, 9월, 한강 도하를 위해 뗏목을 만드는 장면을 보자.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이 있을 뿐, 노란색 포장의 과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허니버터칩의 포장지를 노란색으로 디자인한 건 이러한 소비자들의 경험을 고려, 다른 이미지를 주기 위한 치밀한 계산에 바탕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감자란 단어 없이 '허니버터칩'이라 작명한 것과 서툴게 손으로 쓴 듯 보이는 폰트, 복고적 디자인, 하나하나 계산이 깔려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내용물은 어떤가?
왼쪽은 포카칩이고 오른쪽이 허니버터칩이다. 양적으로는, 욕을 먹던 기존 국산 제품에 비해 크게 나아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비자 호응을 얻는데 성공한 것을 보면, 이 제품을 통한 국산 과자의 이미지 쇄신은 성공적이었다 평해도 좋을 듯 하다.
본 기레기의 추리는 여기까지만 정리해드리려 했다. 그러나 타자를 치는 손은 계속 쌀쌀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다. 벙커1이 난방이 잘 안 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싶지만, 나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다. 이 기분, 분명 단순한 체온 저하가 아닌, 어떤 소름 돋는 기시감에 의한 것임을, 나는 안다.
해리포터의 볼드모트 같이 언급하기 어려운 그 경험, 바로 하나의 당명을 역사 속으로 떠나보낸 경험이다.
'나는 꼼수다'가 질소 과자 뗏목이었다면 이전에 쓰지 않던 색을 채택하고 이미지 쇄신에 성공한 새누리당은 '허니버터칩'에 정확하게 대응이 된다. 달라지지 않은 내용물에 대한 근본적인 혁신은 없었다는 점마저 판박이라는 것과 현재 '허니버터칩'의 품귀 현상에 대해 정부가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은 것은 새누리당과 해태 사이 어떤 전략적 제휴가 있었던 건 아닐까하는 의혹을 갖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기에.
그렇다. 이미 전세계 5번째로 기업하기 좋다건만 그냥 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졸라 하기 좋은 나라'를 꿈꾸는 새누리당 정권에 소비자의 불매 운동 조짐은 통제할 수 없는 변수였을 것이다. 자신들이 이미 성공한 바 있는 전략, 공유해주면 좋았겠지.
본사 규모를 보면 알 수 있듯, 롯데나 농심, 오리온 같은 그룹에 비하면 작다. 하지만 해태 홈페이지에 모든 공장이 안내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저 건물 규모가 훼이크일 가능성 또한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다.
아무튼 추리를 통해 완성한 순차적 시나리오는 이러하다.
해태가 내수용 제품과 수출용 제품을 차별화하기로 하면서 이에 비난이 일 것을 대비해 TFT를 구성.
'허니버터칩'이 개발되었지만 이것은 TFT의 전략에 의해 바로 출시되지 않고 홀드.
2014년 8월 MBC 보도와 2014년 9월 질소 과자 뗏목 사건으로 소비자 불만이 극에 달하자 '허니버터칩'의 출시 준비에 들어감.
제품 출시만으로 여론을 뒤집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 이미지 쇄신 전략을 수립. '허니버터칩'이라는 이름과 기존 감자칩에 잘 사용되지 않는 노란색 등으로 포장을 하나 양을 늘리진 않음. 양이 많아 인기있단 소리를 들으면 안 되니까.
때마침, 본사 건물 근처 원룸 오피스텔이 완공. 국정원처럼 이곳을 이용해 인터넷 여론 조작에 들어감.
이미지 쇄신 효과를 최대한 오래 보기 위해 설비는 늘리지 않으나 공장 가동 시간을 늘리거나 생산 중단 루머 등을 뿌리며 소비량을 콘트롤.
이 이미지 쇄신 전략은 그 수법의 유사성으로 볼 때 현집권당과 전략적 제휴가 있었을 것으로도 의심해볼 수 있음.
어떤가. 똥꼬 주름 하나하나에까지 닭살이 전이되지 않나?
그러나 아직 모든 것은 추리에 불과하다. 다만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허니버터칩'은 몹시 음험한 과자라 판단이 되는 바, 현 시간 부로 당 과자에 대한 수배령을 내리는 바이다.
JINO 님의 글은 2번 더 납치될 시, 삼진 아웃의 원칙에 따라 딴지 필진으로 임명되어 강제 노역에 동원됩니다.
"Man kann beim Thema Religion sicherlich verschiedene Meinungen haben. Gleichwohl können Meinungen nur am Ende des “Verstehens” stehen. Stehen Meinungen am Anfang, dann sind es lediglich Vorurteile.
종교라는 테마와 관련하여 확실히 다양한 견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견해들은 '이해하기'가 끝난 다음에야 비로소 와야 한다. 견해가 앞서면 그것은 단지 선입견일 뿐이다."
Gerald Willms, Die Wunderbare Welt der Sekten (2012) 중에
한국에서 살고 있지 않다 보니 내게 한국의 상황은 일종의 가상현실이다. 분위기 파악도 잘 안 되고 피부에 잘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12월에 전쟁이 날 것이라 예언을 한다는 말을 우연히 듣고 "여기 병신 하나 추가요~!" 정도로 생각하고 그냥 넘겨 버렸었는데 이게 한국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닌 것 같더라.
한성주 소장의 남침 땅굴위기 강연
내용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시간과 정성을 들여 논하기엔 들인 시간과 정성이 아까울 정도로 수준이 너무도 형편없다. 그런데 이렇게 무시해 버리고 말 것을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진지하다. 받아들이는 쪽도, 반대하고 비판하는 쪽도 그렇다. 내용상 무시당해 마땅한 것을 무시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하튼 '12월 전쟁설'은 '예언'이라는 장르로 전달되었고, 그 내용도 상당히 구체적이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그때가 되면 확실히 판가름이 날 것이다. 또한, 이것이 특정 종교집단(여기서는 기독교)이 취하고 있는 '예언'이라는 장르 형식에 맞는지도 따져봐야 하는데, 낸시랭 언니가 진행하는 <낸시랭의 신학펀치> 37회를 참고하면 되겠다.
앙~
그런데 12월 전쟁 예언에 대한 신학적, 종교 비평적 분석만으로는 이것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현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내용상 무시당해 마땅한 것을 무시하지 못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 현상" 말이다. 종합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왜 이런 예언을 하는가?'와'그 효과는 무엇인가?'
1. 왜 이런 예언을 하는가?
내 경험담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3~4주 전쯤 어느 분이 내게 물었다. 혹시 홍모 전도사와 서모 목사의 예언을 들어봤느냐고. 이분은 파독 간호사 출신으로 1970년대 독일에 와서 지금까지 지내시며, 매우 진솔하고 순수하다. 그리고 기독교인이다. 내가 예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했더니, 이분은 정색하며 지금 한국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나를 붙잡고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씀하시기 시작한다. 그 예언의 내용을 구구절절 잘 요약하여 말씀하시는 걸 보니 이분은 이것을 잘 경청하고 정말 심각하게 여기는 것 같다. 어쩌면 여러 번 반복하여 들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 그렇기 때문에 전시작전권 환수가 연기된 것은 잘된 결정이고, 또 박근혜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 저도 지금까지는 미국이 한국의 상황에 너무 많이 개입하는 것에 부정적이었는데, 이분 말씀을 들으니까 생각이 조금 바뀌더라고요. …"
예언은 이 같은 이유에서 나온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보시는 바와 같이 성과가 있다. 진중권 쌤이-한창 나꼼수 및 ‘나꼼빠’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을 때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나꼼빠'의 한 명으로 당시 진쌤에게 개기다가 장렬히 블락 당했던 흑역사가 순간 떠오름)-트위터에서 음모론에 대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음모론은 유포자와 수용자가 둘 다 안 믿으면 '놀이', 유포자와 수용자가 둘 다 믿으면 '종교', 유포자는 안 믿는데 수용자가 믿으면 '선동'이라고. 그랬더니 누가 '유포자는 믿는데 수용자가 안 믿으면 뭐냐'고 물었더니 그건 '허경영'이란다. 이 예언은 교회 내부에서는 '종교'내지는 '선동'이며, 교회 밖에서는 '허경영'으로 소비되고 있다.
RPG대통령 소환
'내재적 입장', 즉 예언을 생산하는 '예언자'와 이를 유포하는 교회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면 이 예언이 교회 밖에서 '허경영'으로 여겨져 조롱 및 비판을 받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고 또 별로 관심도 없다. 교회 내에서의 성과가 더 중요할 뿐이다. 한국의 주류 개신교가 '친미, 반공'인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 '12월 전쟁예언'은 이 이해관계에 제대로 부합한다. 자신들과 기조를 같이하는 현 정권을 뒷받침하고 교회 밖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반미종북'세력들의 '선동' 앞에서 결속을 다지는 것이 그들에겐 중요하다. 사례에서 보듯 이 예언은 교회 내에서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다.
2. 그 효과는 무엇인가?
의외로 많은 사람이 이 같은 일을 대할 때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이건 '종교현상'이다. 이를 종교현상으로 보지 않으면 이 같은 일이 왜 벌어지는지, 왜 먹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어떤 현상을 '종교현상으로 본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근대의 종교연구는 종교를 일종의 사회적 (부수) 현상 내지는 개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으로 보고 이에 대한 사회학적, 심리학적 여하튼 종교 외적 원인을 찾으려 했다.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탁(Rodney Stark)은 이를 "옛 방식(old paradigm)"이라 칭한다. 이에 반해 오늘날의 "새로운 방식(new paradigm)"은 종교현상에 대한 종교적 원인을 찾고자 한다는 것인데, 종교를 종교적으로 보는 것, 스탁은 이것이 종교 연구의 합리적 태도라고 이야기한다.
일례로 전병욱 목사 성추행 사건을 들어 보면, 성추행 사건 이후 우리가 전병욱 목사를 비판하는 지점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과 일치한다. 바꿔 말하면 이 사건은 합리적 판단 기준으로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인데, 우선 목회자가 자신의 집무실에서 여신도를 성추행했다는 것 자체도 기본적으로 말이 안 되는 행위다. 그런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목 좋은(?) 곳을 골라 교회를 개척했다는 것도 잘 납득되지 않는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전 목사의 성추행이 처음 사실로 드러났을 때, 그를 쉴드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것과 그가 새로 개척한 홍대새교회가 무척 잘 나간다는 것이다. 즉 그의 추종자가 있다는 것이다. 것도 아주 많이.목사가 여신도를 성추행하는 것, 그런 자를 교회가 쉴드치는 것, 성추행으로 사임한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교회를 연 것 그리고 그 교회가 잘 나가는 것. 이 모두가 비판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상식적으로 납득이 잘 안 가는 부분이다. 어쩜 저럴 수가 있지 하면서 말이다.
'전병욱 현상'은 하나의 '종교현상'으로서 로드니 스탁이 말한 "합리적 태도"로 들여봐야 하는데, 이 현상은 '카리스마'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어느 종교집단이든 특유의 존재감으로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는 지도자가 한 둘은 있게 마련이다. 조용기 목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축복을 강조하는 것이 그의 컨셉이고, 이따금 안수 기도로 병을 고치는 임펙트를 통해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전병욱 목사도 카리스마형 지도자 중 하나다. 물론 그가 신유 능력을 발휘하지는 않지만, 본래 카리스마라는 것이 사람마다 발현하는 모습이 다르고, 또 그게 카리스마가 가진 전형적 특성이다. 전병욱 목사에게서 보이는 카리스마는 '언어적 호소력'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이렇게 인물마다 발현되는 내용은 달라도 이들이 가진 종합적 특성이 있는데, 막스 베버에 따르면 이들의 카리스마는 "초자연적 또는 초인간적이거나 또는 적어도 특별한 비일상적인 그리고 다른 이들에겐 없는 힘 또는 특성"이다.
전병욱 목사의 카리스마는 역시 비일상적이다.
이러한 카리스마는 특수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한다. 역사적으로는 대게 셈족 계열 종교에서는 예언자의 형태로 나타났고, 동양 종교에서는 현자(Guru)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추종자의 형태도 전자에서는 주로 ‘군중’의 형태였고, 후자에서는 ‘제자’의 형태였다. 카리스마의 근본적 특성은 그 추종자 집단 내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특정 인물의 카리스마를 토대로 형성된 집단에서는 리더와 추종자의 개별적, 감정적 결합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집단을 결속시키는 유일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같은 집단의 최대 위기는 카리스마적 리더가 부재했을 때 찾아온다. 적잖은 집단이 곧바로 와해되거나, 유지하더라도 전혀 새로운 형태로 그 집단의 모습이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카리스마는 그 사람의 고유한 것이고 유일한 것이며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전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일회적 특성을 기반으로 형성된 집단에서 그 기반 자체가 사라지면 결과는 와해 또는 변모뿐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 존재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종교는 초기 카리스마 부재라는 위기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변모한 종교들이라 볼 수도 있겠다.
전병욱 목사 사임 후 삼일교회가 시스템을 통해 교회를 유지해 나간다 하더라도 더는 그전에 보여주었던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역동적인 모습은 잘 보여주지 못할 것이다. 그런 모습은 오히려 홍대새교회에서 나타날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바로 전병욱의 카리스마다. 물론 그의 카리스마가 삼일교회 시절의 파워를 발휘할지, 또 당시만큼의 역동적 반응을 불러일으킬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병욱 목사와 그의 추종자 사이의 내적 관계는 그 집단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약해지지 않을 것이며 외부의 영향도 받지 않을 것이다. 어떤 현상을 종교현상으로 본다는 것은 이런 의미이다.
3. '12월 전쟁 예언'의 효과
다시 주제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12월 전쟁 예언'의 효과는 무엇인가? 이 종교현상에 대한 종교적 원인과 동기를 두 가지 차원에서 한 번 따져보자.
처음 것은 간단히 다루겠다. 위에서 언급한 파독 간호사 출신의 교포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미국에 대한 인식이 토론과 설득을 통해 바뀌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신앙적으로 접근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것은 이분 특유의 순수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신앙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개개인을 선동하고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하는 데는 종교만 한 것이 없다. 그래서 지구 상의 많은 국제 분쟁이 그 근본 동기는 특정 세력의 권력이나 자본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종교 분쟁처럼 비치고 있고, 실제로 그 분쟁의 선두에서 참여와 동시에 이용되고 있는 개개인은 종교분쟁으로 믿고 있다. 경제적 동기를 경제적으로 설명하자면 복잡하고 또 듣는 사람들도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려워서 효과도 별로 없다. 이때 권력자가 이용하는 것이 바로 종교다. 적은 노력으로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을 선동할 수 있는 것이 종교가 가진 특유의 힘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종교는 그런 특유의 힘을 가지는가 또는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질문이 가능하지만 그건 별론으로 하자.
두 번째로 이 예언의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몇 가지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서 볼 필요가 있다. 몇 해 전 레이디 가가가 한국에 왔을 때 교계의 반응 및 한국 개신교의 대중문화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전에 딴지에서도 소개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유튜브에서 '미디어의 실체'라고 검색해보면, 어느 젊으신 분께서 교회에서 집회라고 해야 할까 강연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뭔가를 하고 있다. 내가 알기로 이거 한국교회에서 꽤 많이 회자 됐다고 하던데, 그중 가장 인기 있는(?) 대목은 소녀시대 언니들의 노래를 거꾸로 돌리면-이를 전문용어로 백 워드 매스킹이라고 한다-거기에 매우 음란한 내용이 있으며, 이는 악한 영이 대중매체를 통해 역사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연식이 좀 되시는 분들은 94년에 나온 서태지와 아이들 3집을 둘러싸고 일어난 난리를 기억할 것이다. 거기 교실 이데아란 곡의 피쳐링 부분을 거꾸로 돌리면 악마가 헌혈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나온다는 주장이 있었고 이게 온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었다. 그때로부터 십수 년이 흐른 후 악마가 이번엔 소녀시대 언니들의 노래 속에 나타나 이른바 섹드립을 치고 있다는 주장이 어떻게 나오는 것일까?
교회가 이렇게 대중문화를 직접 겨냥하여 악으로 규정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모습을 종교(경제)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한 마디로 교회시장에서 하나의 '블루오션'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겠다. 쉽게 말해 교회에서 장사 되는 신상품을 하나 만들었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소비자가 아닌 사업자(?)가 되는 전통적인 방법은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레드오션'이 된 지 오래다. 이미 포화상태이고 그래서 성공 가능성도 적다.
그래서 이렇게 문화상품(?)을 새로 개발하고 문화사역자란 타이틀도 붙이고 해서 새롭게 시장을 넓히고 그걸 판매하는 것이다. 이것이 잘 팔리려면 그 대상이 계속 거론돼야 한다. 교계의 시위, 이를 전하는 언론, 이를 조롱하고 성토하는 네티즌들의 반응 등이 매우 훌륭하게 마케팅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교계의 반응 때문에 오히려 매우 잘 팔렸던 '다빈치 코드'란 소설을 생각해 보라. 덕분에 레이디 가가도 한국에서 장사 잘 하고 돌아갔지만, 그녀를 교계의 이슈로 만듦으로써 생겨나는 교회 내의 부가가치 역시 결코 작지 않았다.
한 대학 기독교문화학과의 전공 소개
'12월 전쟁 예언'도 마찬가지다. 이것 역시 하나의 훌륭한 '블루오션' 개척사례다. 앞서 소녀시대 언니들을 걸레로 만들어 버린 이 문화사역자가 백워드메스킹이란 복고열풍을 통해 성공했듯, 기독교 내에서 구약성서 시대에 매우 성행했고, 늦게 잡아도 신약성서 초기시대 이후로 거의 자취를 감춘 '예언'이라는 상품을 들고 나와서, 현재 교회에서 행해지는 종교형식과는 다른 새로운 것을 선보임으로 또 다른 복고열풍을 일으킨 것이다. 한국의 현재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기조를 고려해 보면 이거 나름대로 시장조사가 잘 된 상품이다. 게다가 '예언'이라는 아주 좋은 도구를 발굴하는 영리함도 돋보인다.
12월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 문제 없다. 이 예언으로 본인은 물론 정계, 교계 등의 이해 관계자들은 이미 유무형의 성과를 얻고 있거나 얻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원외교로 이미 한 몫 단단히 챙겼을 (것으로 매우 강하게 추정되는) 가카의 입장에서 지금 폐광에서 자원이 안 나오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미 저 예언 상품은 폐기수순에 들어갔다. 당사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이 안 일어날 수 있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이단이라고, 거짓 선교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의 기도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그런 비난은 감수할 수 있다" 라며 슬슬 빠져나가고 있다.
사나이로 태어나건 여걸로 태어나건 웬만한 팔자 아니면 세 번 이상 장가 또는 시집을 가기란 힘들어. 세기의 미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8번의 결혼식을 올렸다지만 이건 정말 슈퍼 스타급에 해당하는 일이고 '화류계(?)'에 종사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천국보다 낯선 얘기가 되겠지. 사실 그렇게 끈질기게 결혼하기도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너도 결혼 서너번 하라면 하겠냐? 그 서너 번 모두가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다면 말이야.
그런데 여섯 번씩 줄기차게 결혼을 했고 그 마지막에야 진정한 반려라 할 사람을 만났던 행운아 겸 불운아가 있지. 중국의 전 국가 주석 유소기(류사오치)야. 중국 혁명가들은 결혼을 서너 번 정도는 우습게 했던 이력의 소유자들이기는 하다마는. 나는 중국 인명에 관해서는 원음 표기보다는 우리식 표기에 익숙하니 유소기라고 할게. 유소기는 내가 몇 달 전 다녀온 중국 호남성 출신이야. 즉 모택동하고 동향이지. '음식이 맵지 않을까봐 무서워한다.' 는 호남성 사람이니 어지간히 매운 음식을 좋아했을 것이고, 모택동이 즐겨 먹었다는 홍소육을 함께 탐닉했을지도 모르겠어.
유소기는 중학교에 다니던 중 전보를 받아. '모친위독급래' 허둥지둥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강녕하셨고 전보의 이유는 자신을 불러내려 혼사를 치르게 하려는 것임을 알게 돼. 어찌어찌 예식은 치렀지만 즉시로 학교로 돌아간 뒤 다른 데 시집 가라는 편지를 보내지만 이 시골 처녀는 요지부동이었지.
“나중에 다른 여자하고 아들 낳으면 하나만 나한테 보내 주세요.”
이게첫 번째 '아내'의 요청이었고 유소기는 자신의 땅을 그녀에게 주고 후일 다른 부인과 태어난 아이를 보내 키우게 함으로써 의리를 지켜.
두 번째 결혼한 여자는 하보정이라는 혁명 동지였어. 유소기는 하보정을 깊이 사랑했고 아이도 셋 낳지만 하보정은 국민당군에 체포돼 감옥에서 살해돼. 그때쯤 유소기는 '나는 백년해로 할 팔자가 아닌갑다' 라는 직감을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유소기 주변에는 자의건 타의건 끊임없이 여자가 맴돌았고 유소기도 굳이 마다하지 않아.세 번째 결혼한 이도 혁명 동지였는데 무척 성정이 드세고 독립적인 여자였지. 남편을 쥐고 흔들고 주방으로 들여보내 요리를 시킨 뒤 그 음식을 즐기는 무서운(?) 중국 여자의 전형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이 여자는 남편이면서 혁명 지도자이고 당 간부인 유소기의 존재를 힘겨워했고 결국 유소기의 곁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어.
첫 번째는 듣도 보도 못한 시골 처녀, 두 번째는 애틋하지만 비극으로 끝난 사랑, 세 번째는 "당신 명령을 받는 건 싫으네요." 하고 떠나버린 왈가닥, 그리고네 번째는 뭐게? 슬프게도바람둥이. 왕건이라는 이름의 이 여자는 신사군 간호사 출신이었는데 유소기는 이 여자가 자신에게 가장 아픈 상처를 줬다고 술회하기도 했지. 상당한 바람둥이였던 이 여자를 유소기는 감당하지 못했고, 이혼 후 이 여자와 사이에서 난 아이들도 엄마와 만나지 못하게 했는데 이후 문화혁명 때 이 왕건은 작심을 하고 유소기를 물어뜯어.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는 말을 유소기는 절감했을 거야.다섯 번째 여자는 뜻밖에도 건강상 문제가 있었어. 그래서 요양원으로 보내졌고 평생 그곳에서 살게돼.
박상민의 <무기여 잘 있거라>가 문득 생각났다.
이거 어쩌나... 다섯 명의 여자를 설명하는 데만 숨이 차구만. 하지만 유소기에게는 진짜 사랑이 남아 있었어. 나이 쉰에 애들은 다섯 명 딸린 홀아비. 거기다 늦게 낳은 1남 1녀 (왕건의 아이들)은 아직 어린애들이었으니 장가가기에는 거의 최악의 조건이었다고 봐야지. 아무리 혁명 지도자라고 해도 말이야. 그때 나타난 게왕광미(왕광메이)라는 명민한 아가씨였지.
원래 그녀는 이과였어. 북경의 명문 중학교에서 '수학여왕'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재원이었고 '퀴리부인'을 꿈꾸는 물리학 석사였지. 하지만 중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와중에 공산당의 영어 통역으로 나서게 됐고 어찌어찌 유소기와 엮어지게 됐어.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이였고 또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유소기가"같이 움직입시다."해도"그냥 여기 있을래요."하면서 멀뚱멀뚱 바라보던 감성 제로의 아가씨였다고. 후일 "내가 공부한다고 연애를 못해 봐서 그랬다."고 투덜거렸다고 하는구만.
나이 차이와 감성 차이와 전공 차이와 이력 차이를 뚫고 둘은 결혼에 골인 했어. 왕광미에게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느냐고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은 전혀 '물리학 석사'답지 않아.
"이전에 그이의 책도 읽었고 그이를 존경합니다.
남자가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림하는 것을 보니 측은했고
내가 잘 보살펴드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그이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니까요."
이 결혼은 유소기에게는 그야말로 뒤늦게 찾아온 축복이었어. 결혼 후 그가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온갖 수모를 당하고 유폐된 끝에 사망한 1969년 11월 12일 이전까지 20여년 간, 왕광미는 스물 세 살 연상의 남편을 받들고 내조하면서 전처의 아이들까지 살갑게 거두는 현모양처의 역할을 다했지. 전처의 아이들도 이 어진 새어머니에게 예를 다했고 유소기는 국가 주석으로서 새로이 설립된 신생 사회주의 공화국의 초반 항해를 주도해. 국가 주석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는 중국의 '제1 부인' 즉 퍼스트 레이디로 세계에 알려졌지.
그런데 유소기는 고향 친구 모택동에게 배신을 당했어. 모택동은 중국 혁명 직후 유소기에게"지금 우리는 자본가들과 단결해야 한다. 동지들이 감히 말을 못하지만 자본가가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다"고 말했고 유소기는 자기들 세상이 왔다고 기세 등등한 노조 지도자들에게"자본가들은 투쟁대상이 아니다. 쟁취대상이다. 합작과 투쟁을 병행해야 한다. 투쟁만 하고 합작을 거부하는 것은 착오다. 합작만 강조하며 투쟁을 뒤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면서 유연함을 발휘했었지.(출처_김명호, <중국인 이야기>) 그러나 모택동은 그의 이전까지의 업적을 송두리째 지워버릴만한 만행을 기획했어. 알다시피 문화혁명이야.
주자파, 즉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족속들, 그리고 봉건주의자, 전쟁범죄자, 미 제국주의자의 간첩 등등 별의별 희한한 죄목들이 모택동 어록을 들고 설치는 홍위병들에 의해 창조됐고, 단죄됐고, 내걸리고, 조리돌림당했어. 칠십 노구의 노혁명가 유소기는 그 죄수(?)들의 맨 앞에 있었지. 유소기가 고향 친구에게 당했다면 왕광미는 그 마누라 강청의 질투 때문에 다쳐. 자기보다 예쁘고 우아한 여자가 중국의 퍼스트 레이디로 행세하는 것을 배 아파 못견뎌 했던 이 모진 여자는 왕광미에게 최대한의 복수를 퍼부어.
버마 방문했을 때 너무 장식품이 없으면 없어 보인다는 관료들의 강권으로 진주 목걸이를 했는데 그걸 바다에 빠뜨렸어. 당시 버마의 실력가 네윈이 "버마 땅에서 잃었으니 버마가 보상한다."면서 버마 특산 루비 목걸이를 선물했는데 강청은 이를 보고 부득득 이를 갈았고 후일 왕광미는 홍위병들이 그 목걸이를 비난하며 조롱삼아 둘러 준 탁구공 목걸이를 걸고 인민재판정에 서야 했지. 강청은 왕광미의 친정 오빠가 국민당군 출신으로 미국에 있다는것을 빌미 삼아 간첩으로 몰아 죽여 버리려고까지 해. 막판에 모택동이 그건 너무하다고 막았다지만.
1963년 버마를 방문한 유소기와 왕광미
문화혁명 때 탁구공 목걸이를 걸고 모욕을 당하는 왕광미
유소기는 자신을 구타하고 모택동 어록으로 찔러대면서 악을 쓰는 홍위병들에게 이렇게 피를 토했어.
"여러분들이 나 개인에게 어떻게 대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이미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광기에 사로잡힌 홍위병들은 모택동이 아닌 주석 따위는 안중에 없었어. 그는 두 팔을 뒤로 뻗고 허리를 굽히는 치욕적인 자세로 대중 앞에 서게되. 곤욕을 치르고 있는 유소기를 본 왕광미는 자신의 목을 잡고 있던 홍위병을 뿌리치고 유소기 앞에 다가서 그 손을 잡아 줘. 아마 적어도 그 해 시뻘건 모래에 뒤덮인 중국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숨구멍 같은 장면이었을 거야.
끝내 유소기는 유폐 끝에 죽었고 왕광미는 장장 12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하게 되었지. 그녀는 모택동이 죽고 그 아내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이 숙청된 뒤에야 복권 되었어. 그녀는 여전히 유소기의 아내였어."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다."라는 남편의 말을 되새기기라도 하듯, 그녀는 '행복공정' 이라는 이름의 빈민 돕기 봉사 활동을 여생 동안 하다가 여든이 넘어서 생을 마치게 되지.
그녀가 죽기 전 했던 가장 감동적인 풍경 중 하나는 자신이 거느린 유씨 집안과 모택동의 집안 사람들을 죄다 불러서 화해의 자리를 만든 거란다. 유소기 뿐 아니라 유소기의 장남은 핵물리학자로 중국 핵폭탄 개발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었지만 홍위병에게 시달리다 자살(또는 타살?) 했고 그 외 가족들의 고생 역시 말도 못했었지. 하지만 왕광미는 화합의 자리를 만들고 화해의 웃음꽃을 피웠어. 이때 모택동의 외손녀가 했다는 말은 가히 왕광미라는 여자에 대한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해.
"바다보다 넓은 것은 하늘이며, 하늘보다 넓은 것은 사람의 마음"
아마 하늘에서 유소기와 모택동도(모택동 이 사람은 하늘에 있을지 솔직히 모르겠다. 너무 사람을 많이 죽여서)그 자리를 바라보며 웃었을 것 같애. 그러면서 유소기는 고향 친구 모택동의 어깨를 치며 이렇게 얘기했겠지.
"이거 봐. 내가 마누라복은 자네보다 열 배 낫다고."
그러면 모택동은 이렇게 답하지 않을까?
"이거 봐. 나도 여섯 번씩 결혼했으면 저런 여자 만날 수 있어. 난 네 번 밖에 안하지 않았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