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연재물은 딴지일보 편집부로 전화를 걸어온 한 필자와 오랜 시간 상담 끝에 본지 마빡에 올리기로 결정한 기고문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북한에서 스파이로 길러졌다 활동 도중 숙청된 남자로 필자는 그 남자와의 만남을 본지를 통해 풀어낼 예정입니다. 편집부 확인 결과, 필자는 오랜 시간 취재를 직업으로 삼아왔고 그의 본명으로 된 다양한 기사 및 취재물을 여러 통로를 거쳐 직접 확인하였기에 아래 글을 마빡에 올립니다.
연재물 도중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있을 수 있기에 필자의 요청에 따라 익명으로 올린 점, 독자제위의 양해바랍니다.
북한 사람들과 남한 사람들의 차이를 말하라면난 이 단어를 입에 올린다. 자존심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흔한 연애에도 가장 빈번하게 사용하는 말이 자존심일 것이다. 남한에서 사용하는 그 '자존심'이란 단어의 용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나의 나약함 혹은 약점을 '급하게'수습하고포장할 때 사용하는 단어
탈북자들을 만날 때 그들에게 가장 부러웠던 게 바로 이 자존심이었다. 가진 것 없는 자의 허세일 수도,자격지심에 의한 반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감안해도 그들이 말하는 자존심은 우리의 그것과 달랐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들의 '교육'이었다. 주체교육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그들은 '자신'에 대한 자아가 우리의 그것을 뛰어넘었다. 어떤 때에는 그들의 자존심이 부담스러운 순간도 있지만,기본적으로 난 그들이 부럽다.
아는 교인이 내게 전해 준 이야기가 있다.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용돈을 전해준 적이 있다. 이때 교회에서 하느님을 소개하자는 의도로 교회 예배에만 나오면 지원금을 준다고 말했다. 그때 한 아이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하느님을 믿지 않아도 된다고, 요식적인 행위라 설명했지만 그 아이는 끝까지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 그 전까지 교회도 곧잘 나왔고, 지금 기독교 재단의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인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 물어보니하느님을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였다. 자신이 제 발로 교회문을 열고 들어간다면그건 인정하겠지만 돈 때문에 교회를 간다는 건 자기 자존심상 용납 할 수 없다는 거였다. 부끄럽기도 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말끝을 흐리는 그 교인의 얼굴을 보면서그 탈북청소년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 보였다.
(특정 교회나,기독교를 비난할 의도는 없다.그들이 탈북자들을 위해 하는 노력과 봉사는 충분히 인정받아 마땅한 일이다.우리가 말로만 '우리 동포'를 말할 때혹은 아예 '무시'할 때 그들에게 손을 내민 건 종교였다.탈북자들 상당수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목사,선교사들의 주선 혹은노력에 의해 한국으로 들어왔고그들의 노력 덕분에 훨씬 더 수월하게 한국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물론그들의 노력에도 명과 암이 존재하고,그 목적이 불분명한 경우도 간혹 존재한다.그러나 이런 생각과 행동 자체를 아예 하지 못하는 이들이 압도적 대다수임을 생각해야 한다.다만 그들이 좀 더 세련되게 지원을 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그런 아쉬움의 발로라 생각해 주길 바란다.)
김씨 아저씨가 보위부로 추정되는 곳에서 나온세상은 변했다.그의 신분상의 문제 또는그의 과오가 낳은 결과 같은 미시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세상이 변했다.
핵 위기가 한 바탕 지나갔고, 영원한 지도자 김일성이 죽었다. 동구권의 붕괴는 냉혹한 현실세계를 보여줬다. '고난의 행군'이 막 지나가던 찰나였다.
사회의 내구도
90년대 북한을 보면서 그 '내구도' 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클린턴 행정부를 비롯해 서방의 거의 모든 나라들은 북한의 사회적 내구도를 낮게 잡았다. 북한은 독재자의 나라였고, 소련의 그늘 밑에서 살았던 나라였다. 기아의 나라였으며,아사자들이 속출하던 시절이었다. 누가봐도 무너질 것이라 예상했다. 핵은 그 최후의 단말마라 생각했다. 그들은6~70년대 김일성 '영광의 시대'를 과소평가했다. 회상할 아름다운 추억은 희망이 되었고,그 희망은 사회적 내구도를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의 행군'은 힘겨웠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고 해야 할까? 만약 이때 누군가가 문을 걷어찼다면북한은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른다.
만약 통일이 된다면, 그리고 먼 훗날 통일에 대한 연대기 혹은 평가를 내릴 상황이 된다면, 이 '고난의 행군'시기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통일의 촉매제 혹은 변곡점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이건 한 세대 자체가 붕괴된 경우다. 국가의 시스템이 무너지면서도 끝까지 부여잡았던 것이 배급이었지만,그 배급은 겨우 평양과 그 인근을 지켜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북한을 '평양공화국'이라 부르는 이유가 이것이다.북한은 평양과 그 이외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평양에 입성하는 것 자체가혜택이며 북한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이다.최근에 평양의 경계를 줄였는데,이 역시도배급을 줄이기 위한 꼼수로 볼 수 있다.
북한의 사회적 내구도는 '고난의 행군'은 버텨냈지만 그 여파는 상당했다.
북한은 2012년3월 북한은 징집하는 신병의 키 하한 기준을142cm로 낮췄다. 이전까지의 기준은145cm였다.
징집병의 숫자가 부족하자 군복무 기간을 늘리겠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여군의 숫자도 늘리고 있다.
이게 뭘 의미할까?
고난의 행군 시절 많은 영유아들이 사망했고,그나마 살아남은 아이들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굶어죽는 이들이3~4백만이 넘어갔던 시절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면서 배급경제는 무너졌고, 장마당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가 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가부장적이 사회였던 북한이 어느샌가 여자들이 득세하는 사회가 됐다. 남편 손님이 오면 같이 겸상도 하지 않고 대기하던 여자들이 이제는 가정경제를 이끌고 있다.
독일 구호단체 '캅 아나무르'가 미국의 소리(VOA)를 통해 공개한 장마당 사진
탈북자란 단어. 그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의 낯섬을 지금 세대는 알고 있을까? 초등학교 시절 '귀순용사'란 말을 들었건만, 어느새 이들은 뭉뚱그려 '탈북자' 가 됐다. 북한을 나온 이들이 많아지면서그 희소성이 떨어졌다. 물론 더 이상 무의미한 체제경쟁이 필요 없었기에 나온 말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쨌든 간에 탈북자가 흔해진 건 사실이다. 체제 자체가 헐거워진 것이다.
김씨 아저씨가 본 북한은 어느새 지옥이 돼 있었다. 북한 사회는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김씨 아저씨는 이지옥을 체험할 기회가 없었다. 아니,지옥을 겪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그대로탄광으로 끌려가게 됐다.
막장에서의 삶. 땅의 끝이었다.
원래부터막장인 곳에 죄를 짓고 끌려갔다. 그의 고난이 어느정도였을까?
“내가 특수훈련을 받아서 살았지.아니었으면...(못 버텼을 거야)”
'...아니었으면' 에는 단서가 붙었다. 살겠다는 의지.그 의지의 시작은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걸 먹는 것이었다.
'진흙쿠키'(클릭하시면 관련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를 보면서 사람이 흙을 먹을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김씨 아저씨의 말을 듣고 나서는 흙을 먹는 것도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탄가루를 먹으면서 버텼지.”
갱도 아래에 차 있는 지하수를 보면 석탄가루가 둥둥 떠다닌다. 그 탄가루 중에서 기름이 묻어있는 걸 봤다고 한다. 그 기름과 탄을 건져 먹었다고 한다. 어쨌든 살아야 했기에 말이다.
살기 위해 탄가루를 훑어 먹으며 버텼던 그.
스파이로 만들어졌던 인물이다.
인간병기로 키워졌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6개월 만에 내뱉었던 말은,
“이대로 있다간 죽는다.”
김씨 아저씨가 탈출을 결심했던 시절은 이미 북한이란 나라가 나라로서의 기능을 포기했던 시절이었다. 북한 사회의 엘리트로 키워졌던 인물이 탈북을, 그 누구보다 투철한 국가관과 당성을 인정받던 그가 북한을 버릴 생각을 할 정도로 북한은 헐거워졌다. 국경선은 이때쯤이면 그냥 '선'일 뿐이었다.
문제는 가족이었다.
생존보다 가족을 걱정하던 이였지만, 남은 가족의 안녕을 생각하기에는 현실은 위중했다. 그리고 그에게 한 줄기 기대를 걸 만한 긍정적 신호가 있었다.
그가 사랑했던 조국은 이제 국가로서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생존 앞에서 국가체제는 무너졌다. 국민이 굶어죽는 와중에도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국가. 국민들은 국가를 버렸고,국가의 시스템은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탈출은 비장하지 않았다. 심장을 조여 오는 긴장감은 더더욱 없었다. 잠입과 탈출,위장은 그가 몇 년에 걸쳐 배워왔던 것들이었다. 냉정한 상황판단과 결단력은 그의 자질 중 하나였다. 많이 쇠잔했지만,그는 특전사에 버금가는(혹은 뛰어넘는)체력훈련을 받은 이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다해 수용소 탄광에서 탈출하려 결심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허술했다. 고문을 당했을 무렵에 보여줬던조국의 예리함은 온데간데 없었다.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할까?조국은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함경북도 은덕군. 우리에겐 아오지 탄광으로 더 잘 알려진 곳. '혁명화 대상' 가족들을 몰아넣어 강제로 채탄작업을 시켰던 곳.(그가 정확히 어디 탄광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대외적으로 알려진 오봉탄광이나6.13탄광은 아니었을 것이란 판단이다) 그는 두둑한 배짱과 약간의 뇌물,그리고 독도법을 익힌 두뇌를 가지고 탈출을 시도 했다.
너무도 쉽게 나왔다.최초의 생각으론 탄광을 벗어나는 게 가장 힘들 것이라 생각을 했지만,그 부분이 가장 쉬웠다고 한다. 그가 정말 힘들었던 건 탄광을 나온 뒤 중국으로 길을 잡고 올라가던 시기였다. 그가 탈출을 결심한 시기가 겨울이었다.갈수기였기에 두만강의 수위가 낮을 것이고,강이 얼었을 때 수월하게 국경을 넘을 것이라 생각했다.
연변 두만강변 숭선과 남평 사이 언덕에서 바라본 북한 무산시
이 지역은 외곽지역인데다가 경계가 삼엄하지 않아 주요 탈북 루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최근에는 북한이 이곳에 간이 저수지를 만들어 탈북을 봉쇄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는 탈출을 했다. 탈출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이미 그들을 관리할 의지가 상당부분 저하된 상태였다고 한다. 만약 탈출을 했다고 하더라도 낙반 사고나,영양실조,병사 등등의 이유로 죽은 걸로 처리하면 그만이었다.이미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고 있기에 말이다.
김씨 아저씨는 탈출이 아니라 마실 나가는 느낌이었다며탄광을 나온 것보다 두만강을 건너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한다.적절한 뇌물을 통해 나왔고,이후의 검문 같은 것은 아예 길을 우회했기에 제지당할 이유가 없었다고 한다.
탈출,그리고 민가를 피해 산길을 따라 움직였다. 생존을 위해 가끔 민가로 내려갔지만,그곳에서도예리함은 없었다. 북한을 북한답게 만들었던 예리함은 사라졌고,그 빈자리를 생존과 타성이 자리 잡았다. 국경을 넘는 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게 됐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탈북이란 게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김씨 아저씨의 생각은 명징(明澄)했다.
“압록강은 수위가 높지만,두만강은 아니다.
압록강 쪽은 한족들이 살지만,두만강 쪽은 조선족 자치구다.
같은 민족이니까 최소한 비빌언덕은 돼 줄 것이다.”
김씨 아저씨의 판단은 정확했다.이후 탈북자들의 탈북 러쉬를 보면,거의 대부분의 탈북자들이 함경북도 무산,회령,온성을 통해 넘어갔다.조선족 연변 자치구가 있고,강물 수위가 낮다는 점,겨울에도섭(渡涉)하는 것이 쉽다는 점 등등의 이유로 이쪽이 애용되고 있다.이렇게 탈북자가 많아지자 중국 정부는 두만강 일대에 철조망을 치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평소 입어보지 않던 점잖은 옷을 주름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입고, 머리를 한 번 더 만져보고, 잘 손질된 깨끗한 구두를 신고, 휴, 얕은 한 숨 한 번 쉬며 집 나서기 전에 엄마한테, 아빠에게, 가족을 향해서, 혹은 빈 방을 바라보면서라도
나 잘하고 올게.
다들 이러고 나오지 않았을까. 약 90명의 명단을 천천히 훑어 보며 기대했던, 새로운 사람에 대한 흥미보다는 왠지 슬픈 마음만 더 커져갔다.
몇 주 전, 기획팀에 있는 동기로부터 전화가 한 통 왔다. 전화를 들며 '어느 부서 누굽니다,' 라는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나보다 두 살 많은 동기 형만이 낼 수 있는 그의 천연덕스럽고 끈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의 통화였다. 같은 건물안에 있으면서 얼굴 못 본지도 꽤 오래다. 뭐가 그리 유난스럽고 바쁜지 사람 얼굴도 잘 못보고 산다.
“어, 형. 오랜만이네~ 무슨일이야?”
“어. 딴 건 아니구, 이번에 신입사원 면접있는데, 니가 영어면접관으로 정해졌네. 그거 알려주려고.”
“어. 알았어. 어. 어? 뭐라고?! 어!?! 왜?!?”
크레센도, 점점빠르게, 마지막은 스!타!카!티!시!모!
아니, 이건 무슨 귀신도 헉 할 소린가 말인가, 아니 우선 이게 말이긴 한 건가. 내가!! 영어면접이라니???
하아…………
긴 한숨만 전화기에 대고 불었다.
형이 정한 것은 아닐테니 더이상의 분노는 의미없었고, 어찌 내가 들어가게 되었냐고 따지려다보니 이 역시 아이고, 의미없고,
“아... 나 영어 못하는데, 잘하는 모모 과장이랑 모모모 과장있잖아. 그 사람들 들어가면 되지, 왜 나를...”
“아, 그 사람들도 들어가. 너까지 세 명이야. 요즘 바쁜데, 너 요즘 많이 바쁘지? 어떡하냐, 이틀은 종일 해야할 것 같은데.”
내가 어느 하루라도 열정적으로 일하고, 보람을 느끼며 퇴근을 하고, 아 먼저 출근을 해야지, 난 퇴근만 먼저 떠오른다니까, 활기차게 출근해서 계획적으로 업무를 시작한 적은 있겠냐만은, 하! 물론 요즘도 역시 그러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내가 지금 이순간에 여기서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는데, 누가 누굴 면접 하고, 점수를 준단 말인가. 내 자질을 떠나서 나 그럴 여유없는데! 아! 씨! 이 회사에 애착이 있고, 아 뭐 그건 있으면 좋은 거고 없다하더라도, 능력있고, 활기찬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하지 않을까......
어쨌든 이 또한 다른 업무 지시처럼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세 사람의 언어 면접관이 필요했고, 그 중 하나가 나였나보다. 그런 거지.
전화를 받고 며칠 지난 후에 영어면접관으로 선정(?)된 사람들과 만나 짧은 회의를 두세 번 했다. 진행방식과 채점기준을 정하고, 면접용 질문지를 준비하고, 각자 리뷰하고 수정하고, 최종 결정하고, 최대한 깔끔하게 편집해서 프린트하고, 하나하나 클리어 파일에 넣는 것으로 모든 준비는 마무리 되었다. 그런 것 같았다.
면접 하루 전날 저녁, 면접을 볼 인원의 이름과 태어난 해, 최종 학력과 전공, 100분위 환산 학점과 각종 언어 점수, 기타 특이사항이 적힌 꽤 두툼한 서류를 받았다. 의도치 않게 내 면접준비는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이것도 무려 2년 전 이야기. (출처 - 잡코리아)
짧게 훑어보고 그만두려 했는데, 칸 안에 써 있는 것들을 천천히 읽게 되었다. 그걸 천천히 읽는데,마음이 무척 무거워졌다.
면접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링크 참조)내가 떨어졌던 수많은 면접 중 기억에 남는 것에 대한 글이었는데, 심지어 이 회사에서도 난 떨어졌었다. '헤헤 또 떨어졌네, 아 조때따, 나 이제 어떡하지, 헤헤', 거리며 법률 사무소 계약직으로 정신 안 차리고 열라게 복사하던 도중 추가 합격 전화를 받았었다. 기합격자가 입사를 포기한 덕분에. 아니 그 때문에! 고로 나는 한 번도 면접에 통과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내가 면접관이라니!!! 이런 젠장!!!
오전 9시. 면접은 9시 30분 부터다. 언어 면접실로 들어가니 아직 다른 면접관들은 오지 않은 텅 빈 방이었다. 면접관들이 앉을 넓고 긴 테이블 위에 생수 세 병이 각각 종이컵을 뒤집어 쓰고 일정한 간격으로 서있었다. 그마저 권위적으로 보였다. 면접자들을 위한 좁고 짧은 테이블은 그 앞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면접자들을 위한 자리에 앉아 보였다. 햐. 저 건너에 내가 앉아 있을 생각을 하, 권위권위 열매가 내 어깨에 부풀어 열리는 것 같다. 부우웅.
“왜 거기 앉아있어요?”
면접관1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와, 여기 앉으니까 정말 저 자리, 권위적으로 보이네요. 그렇지 않아요?”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네. 아직 시간있죠? 저, 담배 하나 피고 올게요.”
뭔 맛인지도 모르게 담배 하나를 급하게 태웠다. 화장실에 들러 가글을 충분히 하고 손을 깨끗하게 씻고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면접관 1,2 모두 와 앉아 있었다. 저 넓고 긴 테이블 건너편 의자에. 면접 시작 13분 전. 나도 착석. 생수 뚜껑을 열고, 종이컵에 물을 또르르 따라 마시려는데, 면접관2가
“휴, 왜 내가 떨리는거죠?”
동감. 나도 긴장된다. 훑어본 면접자들의 소위 스펙을 보자면 정말 대단했다. 토익점수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말하기 관련 시험 점수도 다들 상위권, 백분위 환산 학점 역시 얼마나 치열하게 대학생활 했을지 눈에 훤했고, 만약 입사한다면 당장 인정 받고 쓸 수 있는 자격증을 보유했거나, 관련 자격을 위한 과정을 수료한 이들도 꽤 있었다. 면접 시작 7분 전.
현업인 나보다 오히려 업무에 준비가 더 잘된 이들 같았다. 한마디로 훌륭했다. 내가 여기 앉아 있는 이유는 뭘까. 이 친구들 보다 내가 좀 더 일찍 입사해서? 어찌되었든지간에 나는 이들을 평가 해야한다.
나는 내 직업, 직장에 만족하는가. 아니. 아니. 아니다. 절대로. 요즘들어 특히 더,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우울한고 불안하다. 물론 이는 내가 일단 생계에 대한 불안을 떨쳤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이런 고민이 가능할 만큼 월급을 받으며 백수십 개월을 다닌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러면서 또 뭐하며 사는 건지 모르겠고. 작은 부조리.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고. 면접 시작3분 전.
내가 계획하지 않은 내 인생이라. 그렇다고 닥친 현실을 또 열심히 살아냈느냐 하면 또 그것도 아니고. 참 우울하고 우울한 내 인생 아니겠나. 더군다나 이제 내 나이 38과 11/12이다. 결혼 안했고, 여자친구도 없다. 하. 참 우울하고 우울한 인생아닌가 말이다. 면접 시작 시간이다.
'난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는 거지' 하며 머리 속에서 한참 방황하고 있는데, 따라 놓은 물도 한 컵 다 마시지도 못했는데, 면접 바로 시작하겠다는 알림이 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여러 구두소리가 겹쳐서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숨을 고르는 듯, 구두 소리가 멈추고 노크 소리가 바로 들리진 않았다. 두근두근. 어휴 떨려. 똑똑!
앗!
이거 뭐라고 하지? 우리말로, 들어오세요? 여.. 영어로, 컴 인?!?
아무튼, 뭐 대충 그렇게 면접은 1조부터 시작되었다. 각자 순서대로 자기 소개를 하고, 나름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어? 전혀 떨지 않는다. 와 강하다. 너무 잘하는데? 역시 요즘은 다르구나! 하는 순간,
문장과 문장 사이의 숨소리가 가늘게 한 번 떨리더니, 유창하게 말하던 그 면접자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안 그래도 하얗고 이쁜 얼굴인데 더 하얘지는 것 같더니 눈을 꽉 감아 버린다. 아. 긴장. 실수. 정적. 휴우. 나마저 흔들리면 안된다. 나는 차분해야지. 마음 속으로 세어봤다. 하나아, 두우울, 세엣.
무척 긴 시간이다. 삼초. 시계도 없는 면접실이다. 너무 인공적이고 어색한 적막. 며칠동안 몇 번을 주르륵 외웠을 그 문장을 갑자기 까먹다니. 꽉 감은 그녀의 눈에 무슨 장면을 떠 올랐을까. 보는 내가 다 손을 꽉지게 되더라.
“잇스 오케이. 니드 모어 타임? ... 테이크 유어 타임... 잇스 오케이”
겨우 그녀의 눈이 떠지고 입술이 살짝 떨리더니, 겨우겨우 마무리를 해냈다. 그 이후로 자신감을 잃은 그녀는 면접 내내 꼬이고 꼬였다. 하지만 그녀의 영어 실력은 좋았다. 그래도 그 실수 때문에 잘 될리가 없겠지. 면접을 모두 마치고 세 명이 일어나 인사를 하는데, 나도 모르게
“고생했어요.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라고 했다. 세 사람 모두 웃으며 자리를 떠나 다른 면접 장소로 옮기긴 했지만, 정말 웃고 싶어서 웃었을까. 뭐 이렇게 저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면접은 모두 끝이 났다. 언어 면접관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영어 면접 점수가 합불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 어쩌면 이럴지도 모른다. 간부들이 모두 합격자를 정한 후에,
“아 맞다. 영어 면접 점수를 안 더했네? 하하하하”
이럴지도 모른다. 딱 이렇진 않겠지만, 그럴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말이다, 제발 사람 고생좀 그만시켜라 이새끼들아. 지들도 영어 못하면서. 뭘 그리 요구하는거야 도대체. 애들 긴장만, 고생만 죽어라 시키고 말이야. 나도 고생이고!
아무튼, 꽤 잘한 사람도 있었고, 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대부분은 평이했다. 특별한 실수를 한 사람이나, 재치있는 유머를 구사한 사람이나, 자신의 주관을 이야기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기억에 남는 사람 한 명 없이 대부분 평이했다.
내심 작은 기대를 하긴했다. 혹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하고. 그런 기대를 한 내가 얼마나 잔인하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지를 깨달았다. 취업 전쟁이라는 말이 어울릴만한 상황에서 난 뭘 기대한건가.
생계를 위한 직업을 얻으려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면접에서 재미있는 일이란? 아빠가 사장님이라면 모를까. 미안하다. 부끄럽다.
내 사정이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흘러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났다. 약 90여 명 중 합격자는 10명. 합격자 이름을 보면서 그들의 얼굴을 떠 올리려 노력했는데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친구들도 내가 누군지 기억 안나겠지?
취업난
음... 언제나 그렇듯이 두서없이 글이 길어졌는데. 오늘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와 면접을 본 모든 이들에게.
모두들 훌륭하게 잘 하셨다. 스스로 실수라고 여긴 부분이 있을텐데, 대부분 거기서 페널티 없었다. 부디 마음에 남겨두지 마시길. 내가 여러분들과 경쟁했다면꼴찌는 응당 나다. 그런 내가 면접관이어서 정말 미안하고. 죄송하고. 하지만 여러분들의 점수를 볼펜으로 기록하기 전에 얼마나 많이고민했는지.
점수를 어떻게 구분을 할지. 카테고리 별로 어떤 경우에 점수를 주고 안 줄지. 면접자 전원에게 기본 점수를 주고 더하기 빼기로 할지, 그렇다면 그 점수 간격은 어떻게 할지. 그 기준은 무엇인지. 0점에서 시작하는게 더 공정한지. 너무 잘 하거나, 못하는 이들과 한 조에 섞여 상대적으로 손해 혹은 이익을 받을 여지는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 등등을 두고 한참을 고민하고 토론했다. 면접이 끝나면 다시 꽤 긴 시간 토론을 하며 최대한 공정한 채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까지다. 최종 결과는 모른다. 아무튼,
이곳에 합격한 이들에게
추운 겨울날 겨우 한 숨이라도 쉬며 지낼 만한 장소를 찾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정말 고생 많았고, 여기서 얼은 몸 녹이길 바란다. 여기도 사회다. 만만치 않다. 밖에 있던 것 보다는 한결 나을 꺼다. 하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절대 너 자신을 잊지 말기를.
이곳에 합격하지 못한 이들에게
아침부터 발 불편한 구두를 신고, 몸에 어색한 정장을 입고 힘들게 고생했는데, 원하는 것 얻지 못해 나도 마음 아프다. 여기 그리 좋은 곳 아니다. 겨우 추운 바람 피하는 곳이지 네가 생각하던 바로 그곳은 아니다. 여기에 합격하지 못한 것이 사소한 실수 때문일까. 질문 하나에 답을 잘 못해서일까. 스펙 중 뭔가 모자라서 그런 것일까. 그런 거 아니다. 그런 거 아니다. 그냥 여기서 당신을 뽑지 않은 것 뿐이다. 필요없어서.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실로 가혹한 말이기도 하고.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나. 네가 싫어서, 미워서, 능력이 없어서, 뭐가 모자라서 안 뽑은 게 아니고 필요하지 않아 안 뽑은 거다. 사회는 그렇다. 서로 사랑하는 곳이 아니다. 그저 모든 게 필요에 의한 계약 관계다. 그러니 부디 큰 상처는 받지 마시라. 얼마나 이 추운 겨울이 계속될지 모르겠다. 겨울이 가야 봄이 오지, 봄이 온다고 겨울이 알아서 갈까. 힘들다. 꼭 버텨라. 버티는 동안 절대 너 자신을 잊지 말기를.
입시,취업과 함께 인생의3대 퀘스트로 불린다.즉, 3대 스트레스라 불러도 좋겠다.인생게임으로 치면 보스급 몹 중 하나,이 미션을 클리어 하지 않으면'쪼렙'이라는 분위기가 만연한 서버가 있으니 사람들은 그곳을 한국이라 부른다.
무분별한 화학 조미료가 범람하여 혀고자가 양성되듯, 괴이한 사건 사고로 줄빠타를 맞고 있는 한국 서버 이용자들은 불감의 단계에 이르렀고 급기야 다채로운 분야에서 급속도의 고자화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특히 결혼에 관해선 마치 지 일인 양 상냥한 사람이 되는 속성을 보이는 무수한 서버 이용자들 덕에 안 그래도 범람하는 짜증이 분출,경제적 결혼고자는 물론 자발적 결혼고자를 양성하는 것이 현 시대의 범고자적 자화상 되겠다.
<사진 :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한 중년여성이 이 미션을 클리어 하지 않고 대통령이 되는 바람에 사회적 고정관념을 바꾼 탁월한 업적을 쌓은 바 있다.현재로선 미혼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 가장 큰 업적으로 손 꼽힌다.입시와 취업에 관해선 개발자 전용 툴을 썼다는 일부 의혹이 존재한다>
2.
이혼한 사람들,이혼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들과 제법 이야기를 나누었다. 2.8쌍 중1쌍이 이혼하는 것이 한국 평균(2014사법연감 기준)이지만 딴지 관계자는 일반적으로2.8쌍 중2.8쌍이 이혼하는 퍼펙트 게임의 양상(2014딴지연감 기준,마사오 속마음 포함)이라 사람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헤어짐 또는 헤어지고 싶은 이유는 각양각색이다.성격문제,잠자리문제,아이문제,외도,가치관,등등.하여 이런 사람 만나지 마라,이렇게 결혼하지 마라,조언도 다양하다.의외인 점은 많은 사람들이'별 생각 없이 결혼한다'는 것이다.사회에서 정한 결혼적령기가 넘어가면 에라 모르겠다 하고 결혼한다든가,주위에서 호들갑을 떨어 될대로 되라 하고 결혼한다든가,집이 답답해 빨리 나오고 싶어 결혼한다든가.
마치'저 사람은 타인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쿨한 사람이군'이라 생각했지만 사실은'으허허헝.나 맨날 혼자 울고 사람들이 안 놀아줘서 강한 척 하는 거란 말이야.트위터랑 페이스북 허세도 남들이 알아챌까 겁나.우에에엥.'하는 비율 만큼'만연한 의외'였다.
결혼이라는 제도의 오남용에 책임을 떠넘길수 있겠으나본지는MB를 근간으로 하는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하매 피도 눈물도 없는 문어발 글로벌 기업인 관계로 언제나 니가 잘못한 거다.하여 다양한 불화의 줄기를 잡고 거슬러 올라갔을 때,개개인이'대충'결혼한 경우가 꽤 많다는 건,결혼을 마치 복권 긁기 하듯 하는 국민의 도박성이 문제라는 보편타당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본인마냥 '될대로 되라'는 굳건한 가치관을 중심으로 에라 모르겠다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제법 만나고 나니, 고위 공직자 한 분이 이런 사회적 비용을 없애고자 싱글세같은 훌륭한 세금징수 방안을 흘린 것도이해된다. 결국엔 농담으로 밝혀졌다는데 농담을 하다 얼마 전에 압수수색 영장을 받은 본지는, 대통령께서 형평성을 고려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3.
궁금했다.그럼 나에게 유전자를쏘아준 사람은어떻게 결혼했나.마침 오랜만에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와 반갑게 받았다가'너는 아부지가 외쿡에 나갔다 왔는데 전화 한통이 없냐'라는 말을 들은 상황에서'그건 그렇고 어무이랑 왜 결혼했나요?'라고 물으면 호로자식이 될 듯하여 약간 만만,아니,어무니에게 콜. '아부지랑 왜 결혼했나요?'라 물었다.
자초지종을 생략한 질문에 그녀는'하하하하하하하하'하더니'사랑해서 결혼했지 임마'라고 하더라. '진짜 이유를 말해봐요.왜 그랬어요?'라고 한 건 아니고,거룩한 육하원칙에 의거해 달라 했다.
연애만5년,했단다.시시콜콜한 이야기는 개인사니 내비두고 왜 결혼을 결정했는지 물었더니'매일 같이 있고 싶어서'였댄다.당시는 지금과 달라서 길거리에서 쪽쪽하는 것도 어렵고 손잡고 다니기도 매우 부끄러웠다는데(두 사람만 그랬을 수도 있겠다)하도 손을 잡고 싶으니 버스를 탔단다.둘이 각자 팔짱을 끼고는 한 사람은 왼손,한 사람은 오른 손으로 손에 손 잡고 다른 승객들은 눈치 못 채게 하는(역시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두 사람만 첩보작전을 편 걸 수도 있겠다)고도의 스킬을 쓰며 격렬한 스킨쉽을 행사했다는 말이다.
연애 중 가장 많이 했던 말은'벽이 있으면 좋겠다'인데 다른 이들이 주위에서 안 볼 때 마음 껏 서로의 손을 만지작 만지작 하고 싶었다는 음흉한 얘기다.우리 부모님도 젊었을 때는 꽤나 격렬했던 모양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시부모,즉,나에겐 조부, 조모가 된다.어느 날 집에 놀러 갔는데 두분 인품이 좋아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들었댄다.고등학생 때 집을 나와쭉 혼자 살았는지라 지난한 과정을 다 알 순 없지만 어릴 때를 돌이켜 보면아부지와 어무이가 격돌할 땐,할부지,할무이가 조건반사적으로 어머니 편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를 매우 아꼈다.
4.
결혼은 인생 최대의 행복치를 결정할지도 모르는 문제,즉,인생 최대의 불행치를 안겨주는선택일 수도 있겠다.인간 본능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사회 제도의 의미가 무색해지니 거기까진 가지 말고스스로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이 제도가 죽지않는돌고래와 잘생김마냥, 마치 한 몸처럼 착착 달라붙는 사람이 있을 테고 마사오와 도덕성마냥, 그러니까 물과 기름처럼 엉킬래야 엉킬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게다.
모든 결정의 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본질처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결혼을 질러대는 게 문제의 포인트로 보이는데 적어도 이 제도는 그렇게 하면 제법 좋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결혼, 또는 이혼 관련 대화에 응해준 많은 이들이 '에이 씨바, 될대로 되라지'식으로 산다는 점에선 많은 위안을 얻었기에 고맙게 생각한다. 다만 다들 그렇게 살면 내 개성이 사라지는 듯하여 섭섭하다. 본인이 살아온 방식을 바꾸긴 다소 성가신 면이 있기에 열분덜이 생각이란 걸 좀 하면서 뭔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방향으로 삶의 태도를 수정해줬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