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이라크에 꼭 가보고 싶었다. 유서 깊은 도시인 모술에는 성경 <요나서>의 주인공이기도 한 요나, 그의 무덤이 있다. 티크리트 시에는 내가 빠심으로 찬양하는 간지의 군주, 살라딘이 직접 지었던 요새도 있다. 이런 거를꼭 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있었다'는 과거형으로 써야 한다. IS가 다 때려부쉈기 때문이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찬란한 유적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는 같은 수니파의 사원도 부수고 있다고 한다. ㅇㅅㅂ 점점 가서 볼 것들이 줄어간다. 모술은 특히나 심하다. 도서관의 장서들을 끄집어내어 태우기까지 했다.
현재 IS 지역의 모든 기독교 교회는 문을 닫은 상태다. 같은 유대교 계열 종교 중에서는 야지디교라는, 신학적인 특성 때문에 평소에는 악마숭배자로 경원시 당하곤 했던 소수 종교가 있다. 지금 야지디 교도들은 차별 이상을 받고 있다. 야지디 교인 중 남자는 학살 당하고 여자와 아이는 인신매매로 팔려간다. 여자의 경우엔 강간도 옵션이다. 결국 기독교도와 야지디교도도 살기 위해 무기를 든다. 이들은 사무치는 원한 때문인지, 자신의 몸에 자기 종교의 상징을 문신으로 새기고 전투에 나간다. 붙잡혔을 경우 목숨을 빌 옵션조차 없애기 위함이다. 만약 IS가 2022년까지 존속한다면, 카타르에서 열릴 월드컵은 위험할 수도 있다. 이슬람에 맞지 않는 이런 퇴폐적 행사는 스커드 미사일로 때려버리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행정 조직은 잘 만든 건 같지만 그 행정 조직이 부과하는 형벌의 대다수는 사형이다. 라마단 금식의 의무는 미성년자에게 해당되지 않는데, 라마단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10세 소년을 십자가형으로 사형했다. 시리아의 기독교인들도 십자가에 달리고 있다. 절도는 손목 절단으로 처벌한다. 여성 법조인과 여성 정치인은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든 체포하고, 고문 후에 사형한다. 여성형 마네킹에도 부르카를 씌워야 한다. 여성 400만 명에게 여성 할례를 강요하고 있는데, 위생도 별로인 시설에서 하려 들어서 매우 위험하다. 담배 자체가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 되었기에, 아랍 특유의 물담배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알라와 이슬람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자료용 짤을 넣을까도 생각했지만, 그건 아닌 거 같았다.
드디어 오랜 낚시가 끝나고 미끼로 썼던 문장의 해답을 독자 니덜의 입에 물려줄 때가 도래했다. IS의 배경에 어떤 역사적 맥락이 있고, 그래서 IS는 어떤 과정으로 생겨났는가를 지나,
"그래서 IS는 왜 수니파이며 뭘 원해서 저 지랄인데? 거기 동조하는 젊은애들은 뭐고?"
물론 내가 그리 호락호락한 강태공은 아니다. 지난 회에 이어, 얘들의 정체성은 무엇인지부터 보면서 상큼하게 시작하자.
물론 등장할 단어들은 그리 상큼하지 않을 거다.
IS는 일단'이슬람 원리주의'로 불린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문장을 뒤집어엎어놓고 해체해보겠다.
'원리주의'란 영어로 풀이하면Back to Basic, 기초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따라서 어느 종교를 불문하고 원리주의자는 경전과 교리의 최초 정신 및 최초 형태를 연구하고 주장한다. 일견 괜찮아 보인다. 초심으로 돌아간다잖냐. 그런데 원리주의에는 함정이 있다. 종교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면서,그 시절의 정치제도나 사회적 인식 체계까지 같이 가져와버리는 실수를 매우 자주 저질러버린다. 특히 이슬람은 신정일치로 시작한 종교라 더 심하다. 게다가 그렇게 오래 전으로 돌아갈 정도니 보수주의 성향도 상당히 강하다. 그러다 보니 종교의 원래 의미로 돌아가기보다는 그저 옛날 그 시절로 돌아가는 반동주의로 더 잘 빠진다.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나, 종교를 불문하고 원리주의는 이런 함정에 늘 노출되어 있다. 단어의 표층 의미대로 초심으로만 돌아가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말이다. 원리주의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 괴리를 보면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대표적인 게지하드이다. 성전(聖戰), 성스러운 전쟁이란 의미의 지하드는 너님들이 흔히 알고 있는 '이교도들을 다 죽이자!'란 소리가 아니다.
요새는 SNS에서도 한다는 그것.
원래는 이렇다. 자기 영토 내에서, 개종도 않고 세금(인두세)도 안 내는, 이교도나 이단, 즉 체제 전복 세력에 대해서 선포하는 전쟁이다. 알리 vs 아이샤 때도 두 사람은 상대의 세력에 지하드를 선포했다. 내전이었고, 서로 상대를 이단이라 규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적 의미는 이렇고, 신학적 의미로 들어가면 좀 더 고상해진다. 세상에는 수많은 유혹거리가 있고, 이게 내 마음 속에서 자꾸 내 신앙을 방해하고 있으니, 이런 것들과 싸우는 것이 지하드이다. 즉내면에서의 전쟁인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같은 걸 '영적 전쟁'이라 칭한다. 불교에서는 '선(禪)'이 되겠지.
이걸 가지고 원리주의자들은 첫 번째 의미의 변주인, '이교도 및 이단과의 전쟁'으로만 써먹는다. 이런 의미로 사용하니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에, IS가 세계 각국에 지하드를 선포할 수 있었던 거다. 이슬람이 절대 우세한 나라라면 이단이라 해버리고, 아니면 이교도이니 어쨌든 지하드!(미국의 기독교 원리주의자들 또한 영적 전쟁의 의미를 '이슬람 주겨라'로 이해하는 놈들이 많다. 원리주의의 함정은 차별이 없다.)
그리고, 놀라지 마라. 원래 이슬람은포교를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다.오히려"믿음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쿠란에 있다. 때문에 종교세, 인두세 같은 단어들이 나오는 거다. 신정일치인 이슬람이 어느 지역을 정복했는데, 정복지에 이교도가 있다? 잡아죽이거나 개종시키는 것이 첫 번째 선택지가 아니다. 개종을 권유한 후, 거절하면 세금만 더 물리고 끝인 것이 이슬람 선택지의 전부다. 때문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의 쏘쿨한 태도가 나올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현재에는 이런 인두세를 개종과 탄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너희를 박해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여기는 우리 성지이기도 해서 온 것이니,
우린 우리대로 하고 너흰 너희대로 하자.
우리 종교가 더 나아보이면 개종은 그때 해도 된다.
대신 피정복민으로서 세금은 좀 더 내라.
(1편에서 그대로 발췌)
초기 이슬람의 모습을 왜곡하고 있다는 데에서, 무언가 위화감을 느낄 수 있을 거다. IS는 원리주의라며? 물론 위화감이 안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1편에서 우마르는여성혐오의 혐의가 있었다고 살짝 언급했다. 당시 이슬람은 여성이 곧 물건이던 사회 인식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무제한적 일부다처제를 제한이 엄격한 일부다처제로 끌어올렸다는 것도. 덕분에 사도 무함마드의 제3부인인 아이샤는 그녀 자신이 학자로서 자취를 남길 수도 있었고, 알리의 정치적 라이벌로 등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2대 칼리파가 될 정도의 유력자인 우마르가 여성혐오의 상태를 채 벗지 못했다는 것은, 그 시절 그 동네의 일반 인식이 그 정도였다는 의미다. 중세 중동은 사회 발전도가 비슷했던 다른 문화권과 비교해도 여성 인권이 현저하게 낮았던 동네다. 그래서 우마르는 서로 반대되는 두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는 유닛이다. 타 종교에 대한 관대한 혁명성과 당시 그 지역의 보편 인식의 반동성을 둘 다 보여주기 때문이다.
동네 상황이 이러니 이슬람은 쿠란에 '어떤 경우라도 여성을 강간하거나 죽이지 말라'는 내용을 넣었다. 살인은 이슬람뿐 아니라 같은 계열 종교인 유대교/기독교에서도 강한 죄로 규정하지만, 전쟁과 같이 특수한 상황에서는 허용이 되기도 한다. 암묵적이든 명시되어 있든 간에. 하지만 이슬람 율법은 여성에 대한 강간과 살인은 '어떤 상황 하에서도' 죄라고 명시한다. 물론 IS가 이걸 지키냐고? 이교도는 물론 자국민 여성도 율법을 어겼다고 강간 살인하는 판에 별 걸 물어본다. 이슬람의 여성 인권 실태 하면 꼭 따라나오는 단어인 '여성 할례'와 '명예 살인'은 원래 이슬람 율법에 없다. 이건 아랍 지방 전통의 악습이다.근세를 거치면서 없어져야 했을 악습이이슬람에 묻어서 생존한 것이다.
결국 현재의 이슬람 원리주의는 우마르의 장점은 따르지 않고 단점은 적극 계승하는 꼴이다. 지하드를 선포하고 역사적 유물까지 박살내면서 여성을 찍어누른다. 각각 도달하는 루트는 다르지만 결론은 똑같은, 묘한 일관성이다. 위화감이 안 느껴져야 했던 측면조차 잘 보면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리주의자의 함정, 그 프로세스를 도출할 수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명목 하에 머리 속을 과거로 점프 시킨다. → 그 과거 시절에서 혁명적이었던 것들은 껍데기만 가져오고 반동적인 것들은 정신까지 가져온다. → 이 취사 선택의 기준을 물어보면, 맞는다. 지하드!
아마 그 취사 선택의 기준은 '그러고 싶어서'가 될 것이다. 그럼 결국 초기 이슬람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 이슬람의 형태, 그 중에서도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회복하여 옛날 중세 시절로 돌아가겠다는 게 진짜 의도 되겠다.
초기 이슬람의 정신으로 돌아간다더니, 그 정신을 이런 식으로 위배하는 자들이 원리주의 칭호를 가져가고 있다. 시아파 원리주의 국가인 이란 또한 여성 인권 상태가 낮긴 하지만 최소한 여성의 교육 기회를 보장해주기는 하는 등, IS 정도의 막장은 결코 아니다. 이러니 IS를 '원리주의'라 칭하는 건 부적절하다. 더 적절한 용어는 현재 대다수의 언론이 사용하고 지난 2회 마지막에도 사용했던 단어,'극단주의'다.
그래서 우리의 질문은 이것만 남게 된다."왜 얘들은 이렇게 극단적으로 가버렸을까?"
극단적으로 가버렷-! ...미, 미안타;;
역사에는 극단적으로 가버렸(...)던 예가 몇몇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은 나치. 우리 주변에도 있긴 하다. 일베?
이런 케이스를 모아보면 원인 부분에서 하나의 공통점이 나온다.상대적 열등감이다. 나치는 1차 대전 패배 후 전쟁배상금을 물어내고 망가진 경제 상황 속에서 국민 전체의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었고, 일베는 사회적으로 무력한 '잉여'들의 해방구 역할을 하면서 탄생하고 성장했다.극단주의는 열등감과 소외감 속에서 시작한다.이슬람의 경우에는, 그게 한 시대 전체였다.
중세의 이슬람은, 최고였다. 사도 무함마드와 정통 칼리파 왕조 이후, 이슬람 제국은 사회 체계가 잘 정비되어 사람 살기 좋은 쪽이 되었다. 바로 이웃의 유럽은 로마 제국이 망한 후의 기나긴 추락 상태를 수습하기에도 바빴고, 신생 제국인 이슬람의 사회 체계는 페르시아, 비잔틴 등의 경쟁자들보다 월등히 나았다.(그리고 페르시아는 아예 우마르가 집어삼켰다.)최종 승자가 되어 제국을 움켜쥔 무아위야 왕조의 통치도 괜찮은 편이었고, 그 뒤를 잇게 되는 왕조들도 문화권 전체를 말아먹을 정도의 병크는 터뜨리지 않았다. 당연히 학문과 문화는 한껏 진흥될 수밖에. 로마의 정통을 이은 비잔틴 제국이 바로 근처여서인지, 시대를 앞서갔던 로마 제국의 학문적 유산도 대부분 이슬람으로 넘어왔다. 때마침 비잔틴도 골골거리고 있겠다, 실전된 기술을 재발굴하거나 기존 철학을 정리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등의 역할은이슬람이 싹쓸이해갔다. 당시 세계 문명 발달사를 재구성해보면 중국의 당 제국이 가장 앞선 테크트리를 올리고 있었고 그 바로 뒤에 이슬람 제국이 있는 형국이었다.
화학의 아버지인 연금술? 이슬람에서 처음 꽃을 피웠다. 커피의 전파? 이슬람 제국이 시작했다. 그리스 철학? 이슬람이 문헌을 보존하지 않았으면 실전되었을 문헌, 많다. 역사적 영웅? 12세기 최고의 쿨간지 계몽군주였던 살라딘을 배출했다. 오죽하면 유럽 문명의 르네상스가 십자군 전쟁을 하면서 이슬람으로부터 그리스-로마 시절의 유산을 이어받았을 때부터 싹텄을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이슬람 버전.
문제는 이런 중세가 끝나가면서, 이슬람권이 서서히 역사라는 무대의 뒤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첫 빠따는 결국 비잔틴의 숨통을 끊는 데 성공한오스만 투르크 제국이었다. 비록 과거의 통일 이슬람 제국이라는 간지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강력한 왕조들이 할거하고 있던 아랍 지역이 싹 정복당해 버렸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았다. 정복을 벌였던 셀림 1세의 후임 술탄이 지금도 명군으로 추앙받는 쉴레이만 1세였고, 오스만 투르크 역시 이슬람교 계열 제국이었으니까. 이슬람 원조 지역이라고 내세우던 자부심이 무참히 꺾인 것만 빼면 괜찮았다.
그리고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다. 쉴레이만 1세를 기점으로 오스만 투르크가 쇠퇴해가더니, 무서운 속도로 테크를 올린 유럽이 근대 세계의 패자로 떠올라버렸다. 그리고 나서 이어진 운명은식민지의 운명이다. 400년을 들여 성장한 오스만 투르크는 역시나 그 정도 시간을 들여가며 쪼그라들었고, 그 시간 내내 오스만 투르크에게 정복당했던 혹은 그 근처의 이슬람교 국가들은 하나둘 유럽 국가의 식민지로 떨어져갔다. 이게 크리티컬 히트였다.
식민지가 되지 않은 국가들도 사정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유럽 세계의 빠른 테크 덕에 상대적으로 밀리더니, 나중에는 확연한 차이로 밀려버렸다. 이미 국력, 문명 발전, 군사력, 정치 체제 등의 모든 분야에서 총체적으로 뒤쳐져버린 것이다. 10세기 가량 되는 시간 동안 유럽보다 앞서거나 유럽과 비슷했던 문명권이, 대항해시대 이후 200여 년만에 3류 문명권으로 전락해버렸다. 제국주의의 식민지 시대를 벗어나면 이젠 냉전 시대다. 미국/유럽의 자본주의 권역과 소련/동유럽의 공산주의 권역이 세계를 주름잡는다. 이슬람 권역은 대부분 '제3세계'라는 식으로 묶여버렸다. 여전히 국제 사회의 관심은 2등급에 머문다.
한때는 세계의 중심이었는데 왜 우리가 저런 가난뱅이 미개인들과 묶이는 거지!
(듣는 인도 화날라)
우리 자신도 개털이 되었고 우리를 마지막으로 정복했던 지배자도 개털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19세기와 20세기를 맞게 되었는데, 각국의 지배자들은 자기 종파가 아니면 극심한 탄압을 했다. 각각의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한때 세계의 중심에 섰던 기억은 있는데, 현재에는 그냥 무식한 개털이 되어버린 사람들. 석유는 많아서 돈은 벌었는데 그 돈은 내 것이 아니라 소수 계층의 것이다. 수니파/시아파 할 것 없이 이러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게 된다.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 '그때는 좋았다던데...' 불만이 쌓이니 무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수니파는 절대 다수다. 당연히 극단주의 무장단체는 수니파가 많을 수밖에 없다.(이렇게 1회의 떡밥을 회수한다.)이들이 시아파를 죽인다. 시아파도 무장단체를 만들어 수니파를 죽인다. 서로 죽이다 보면 세계의 경찰이라는 미국이 끼어든다. 미국은 유럽의 후예이고 제국주의 국가이니 미국도 싫다. 다른 종파 독재자들이 싫어 죽겠는데, 몇몇은 미국 후원도 받는댄다. 그놈들을 죽이고 우리가 집권해서 독재하면 또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가 태클을 건다. 다 싫다. 그냥 세계의 짱짱 문명이었다는 중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ㅅㅂㅅㅂ
쩔었던 그때 + 초라한 현재 = 극단적 반동성
이렇게 이슬람 극단주의가 탄생한다.이런 원리에 따라, 이슬람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체제가 안정적인 국가들에서는 극단주의 무장단체가 전무하다. 상실을 달래주고 심리적으로 보상해줄 수 있는 시스템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실감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심리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이슬람권에 칼리파라는 낭만적인 칭호를 던진 IS의 한 수는, 그래서 신의 한 수다. 자신들이 자라난 토양 자체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거다. 덕분에 같은 극단주의 계열에서조차도 '야 이건 너무 하잖아! 사람 좀 그만 죽여! 게다가 칼리파라니, 이게 뭐야!'라는 소리가 나오지만, IS에 합류하는 각국 젊은이들이 생겨나게 된 거다.
대부분 이민자의 후예들인 이들은 자국에서는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다.그들의 부모 세대는 어렵게 어렵게 정착해 살아왔고, 그래서 현재 가진 것이 어느 정도는 있다. 때문에 극단주의에 완전히 경도될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가진 것도 없고, 그래서 결코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하지만 이슬람 특유의 상실감을 공유하고는 있는, 또한 높은 확률로 인종 차별 혹은 종교 차별의 대상이 되고 있을 젊은 세대는 극단주의 발흥에 최적 조건이다. 그래서 IS에 합류하려고 출국하는 사람들이 젊은이들인 것이다.(이렇게 2회의 떡밥도 회수했다.)
역사적인 상실감 때문에 과거로의 회귀를 원하는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이 출현하고, 이들이 원리주의를 내세우며 지지 기반을 얻어 성장하고, 더더욱 극단으로 나아가 건국까지 해버린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까지 설명한'역사적 박탈감'이고 다른 하나는 이제부터 설명할'이슬람의 게으름'이다.
인종차별적 의미가 아니다. 극단주의 무장단체가 IS로까지 성장하게 만든 원인 중 반은 이슬람교 자신의 탓이다. 이슬람, 특히 수니파 자체가역사적인 진화/적응에 실패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사실 현재까지 설명한 역사적 환경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극단주의가 나올 가능성이 더 높은 종파는 시아파다. 시작부터 알리에 대한 신격화로 시작한데다 이맘의 권위와 권한이 크다 보니, 시아파는 독재 정치가 매우 쉽게 끼어들 수 있는 구조다. 반면 수니파는 시아파에서 이맘이 하는 역할의 대부분을 이슬람 공동체에 부여했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결합하기 좋다. 그런데 IS도 탈레반도 죄다 수니파라는 것을, 단순히 수니파가 많기 때문에 확률상 그런 것이라고 설명하면 뭔가 모자라 보인다.(회수한 떡밥을 다시 뿌린다!)
해답으로 가는 길은 이렇다. 이맘들이 진보적이라면 진보적이 되는 시아파 신학과 달리, 수니파 신학은 그 지역의 종파 평균을 따라가게 된다. 즉, 수니파 민중의 평균 신학 수준이 극단주의를 배양하기 좋은 상태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같은 계열의 다른 세계 종교인 기독교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에서 원리주의를 내걸고 극단주의가 되어있는 인간들은, 주로 현대 미국에 몰려 있다. 그 이전까지는 IS처럼 유의미한 집단 행보를 보인 기독교 극단주의가 거의 없었다.
기독교가 극단주의를 방지했던 첫 번째 원인은 교황청이었다. 신학의 최종 해석권을 쥐고서, 너무 많이 나가버린 사람들은 이단 판정을 내리고는 파문을 던져 잘라내어버린다. 두 번째 원인은 토론이다. 정통과 이단의 사이에서는 마냥 토론이 벌어져도 용납한다. 옆동네 아랍에서 사촌인 이슬람이 발흥한 후로는 적극적으로 대응 논리를 개발해야 할 필요도 있어서 지속적인 신학 발전이 이루어진다. 발전이 지나쳐서 이단이 되면 다시 쳐낸다. 이 사이클이 돌면서 기독교는 역사의 발전 상태를 따라가며 진화했다.
기독교 가톨릭이 종교적 공룡을 면한 가장 큰 이유, 교황청 체제.
사이클의 기능이 퇴화해서 타락상이 손대기 힘들어지자, 마르틴 루터 같은 원리주의자들이 등장해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 이번엔 경쟁자로 형제가 뜬 것이니, 졌을 경우 영업상 문제가 크다. 초반엔 시아파와 수니파만큼이나 서로 물어뜯고 싸웠지만, 그런 게 중요하지 않은 세계가 되자 전쟁은 신학적인 토론과 경쟁으로 바뀐다. 세계 역사가 변화하는 만큼 구교와 신교는 각자의 방식으로 변화에 적응하고 진화한다.
권위 있는 어르신 - 즉 정론의 존재, 그리고 토론이라는 두 가지 핵심을 통해 신학을 진화시키는 게 적응의 테크트리이건만... 기독교가 성공한 이 지점에서 이슬람은 계속 실패해왔다.토론은 충분했으나 그 결과 지나치게 나가버린 케이스를 규제하거나 금지할 권위가 없었다. 칼리파? 그거 유명무실해진 게 언제인데. 술탄? 정치하기도 바쁜 애들인데 뭐. 이맘? 자꾸 새 학파만 만들고 뭘 바로잡는 쪽엔 약한 듯. 현재 슬슬 문제가 되고 있는 기독교 극단주의 세력 또한 같은 프로세스로 성장하고 있다. 기독교 신교 강세의 국가 미국에서, 당연히 파문 등의 신학적으로 강력한 이단 제제 조치가 없는 상태에서, 흑인이나 여성의 인권/민권이 강화되고 세계 패권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상실감을 느낀 자들이 극단주의에 빠져든다. 근대 이슬람이 빠졌던 함정에 그대로 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병신짓을 막을 사람은 바로 옆에서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형제자매들이다.
말 통하는 그들이 이들을 말릴 정도의 역량이 있어야만 한다.
이슬람은 실패했고, 미국도 지금...?
그리고 극단주의의 선배인 이슬람 극단주의는 현재 IS까지 와있다. 명예 살인 같은 중세의 미개한 악습까지 극단주의의 반동성을 타고 생존했으니 기독교 극단주의보다 상태는 더 심각하다. 이 글을 쓰면서 초고의 파일명을'종교적 공룡'이라고 붙여놓은 상태인데, 이슬람이 현재 딱 그런 모양이다. 초기 이슬람의 교리와 그 해석은 진보적이었고 세련되었다. 신자의 5대 의무에 '자선의 의무'를 넣을 정도로 경제 정의를 챙겼고, 여성을 비롯한 일반 인권의 개념을 발명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그 후예들은 여전히 오일 머니의 분배에 게으르고, 옆동네 극단주의자가 오늘 내 딸을 강간하지 않기만을 바라다가 강간을 당하면 딸을 죽여버리는 식의 인권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슬람의 신학이 그만큼 게을렀기 때문에 생긴 나비 효과다.
그래도 '게으름'이라는 강한 단어로 욕할 필요까지 있겠냐고 묻는다면,게으르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욕을 먹어야 하는 거라고 대답하겠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은 수니파의 한 사람과 시아파의 한 단체로 장식하도록 하겠다. 전혀 게으르지 않았던 이들의 신학적 태도에 이슬람의 미래가 있다. 이제부터 그 희망적 반례들을 설명해야 하겠지만... 다음 편으로 미루도록 하겠다.나도 독자도 슬슬 이번 주 공부 한계선에 다다랐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IS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의 대부분은 한 것 같다. 마무리는 다음 편에 하도록 하자. 다음은 진짜 마지막이다. 진짜다!
친환경농업(농가, 농산물) 인증제가 시행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고 합니다. 이제 마트와 장터에서 ‘유기농’ 또는 ‘친환경’이란 이름이 붙은 먹거리를 만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고, 그것들 중 일부는 ‘친환경인증’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기도 합니다.
좋은 먹거리를 찾고자 하는 우리 소비자들은 자연스레 ‘친환경’, ‘유기농’, ‘착한’ 농산물이라 이름 붙여진 것들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고, 그런 현상은 자연스레 관행농으로 지어진 농산물과 소위 ‘친환경 농산물’이라 불리는 먹거리들 간의 가격 격차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소비자는 자신의 경제사정에 여력이 있다면 마땅히 그 차이만큼의 돈을 더 지불하고 친환경 농산물을 먹으려 합니다. 그 먹거리가 ‘친환경’이라는 이름값을 하길 바라 마지않으며 말이지요. 친환경 농산물을 먹고자 하는 바람과 그것을 구입하기 위해 마땅히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결정 사이에는 분명 ‘믿음’이 필요하겠지요. 그냥 아무 농산물에나 ‘친환경’이라는 이름 붙인다고 모두가 다 비싼 값에 팔릴 수 있다면 그 어떤 소비자도 그 친환경이란 이름값에 돈을 더 지불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땅을 살리고 먹거리의 건강함을 지키고자 하는 농부와, 내 가족의 건강과 환경을 지키고자 하는 소비자가 서로의 바람과 노력을 믿고 생산과 소비를 이어갈 수 있는 장을 마련하는데 정부가 힘을 보태고자 시작된 것이 바로 ‘친환경농업인증제도’입니다. 친환경 시장에서 가짜 친환경농사와 농산물을 몰아내고 제대로 된 친환경 먹거리를 소비자들이 믿고 안심하는 마음으로 구입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서, 환경농업을 짓는 농가도 좋은 먹거리를 소비할 수 있는 소비자도 모두 웃을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친환경농업인증제도’가 시작된 동기요 이뤄야 될 목표일 것입니다.
화두
얼마 전 TV를 통해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친환경 유기농의 진실]이라는 KBS 파노라마 1~2부작이었습니다.
1부는 ‘가짜 인증의 덫’, 2부는 ‘농약의 유혹’이라는 이름의 이 다큐는 꽤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며 ‘친환경인증제도의 그림자’를 이야기하고 있더군요. 다큐를 접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에 관한 반응들을 한 번 검색해보았는데 역시 친환경농가 측의 반발이 꽤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부의 문제일 뿐이다!”
“단편적(부정적)인 측면만 강조한 보도 때문에 나머지 성실한 친환경농가들마저 죽어난다!”
“보도의 전문성이 부족하다!”
등등...
반면에 이런 의견들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터질 게 터졌을 뿐이다.”
“일부, 일부, 일부, 일부들이 모이면 전부가 되는 것이다.”
“이제 친환경 유기농산물을 어떻게 믿고 먹을 수 있겠는가?”
등등...
아무래도 (적어도) 친환경 먹거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겐 KBS의 이번 다큐가 하나의 화두로 작용했던 듯 느껴졌습니다.
친환경농업이란 무엇인가?
친환경 먹거리란 무엇인가?
친환경 인증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진지한 고민 없이 이어져 온 친환경인증제도의 현재를 되짚어보자는 다큐의 기본 취지는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생산자와 소비자 양쪽 모두에게 참으로 많은 ‘할 말’을 남겨 놓게 된 것 같습니다.
다큐의 시작에 이런 말이 나오더군요.
농부의 땀방울이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
자연이 대지에 생명을 불어 넣으면, 흙은 뿌리를 품었다.
주는 만큼 베푸는 자연. 친환경 농업은 자연에 순응하는 농법이다.
친환경 농법은 자연에 순응하는 농법이지요. ‘친환경’이란 말에서 느낄 수 있듯 자연환경과 최대한 닮은 모습으로 공생의 길을 도모하는 농법이 바로 친환경 농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자연과 닮은 농사로 지은 먹거리니 당연히 사람에게도 좋겠지요. 소비자 대부분은 그런 생각으로 친환경 농산물을 선택할지 모르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친환경 농법은 농작물이 자라는 터전인 대지 그 자체도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농사이기 때문에 더불어 환경에게도 좋은 농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관행농산물 보다 다소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 구입하는 친환경 농산물의 가치에는 그것을 먹는 우리네 건강뿐만이 아닌 자연환경 전체에 대한 대가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맞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면? 대지의 생명을 살리는 농사는 고사하고, 심지어는 관행농법으로 지은 농산물과 별 차이가 없어 그것을 먹기 위해 구입하는 소비자들만 손해 보는 격이라면? 과연 누가 친환경 농산물에 기꺼이 더 많은 돈을 써가며 구입하고 먹을지 굳이 궁금해하지 않아도 쉬 답을 찾을 수 있겠지요. 아마 아무도 그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행하게 된 제도가 바로 ‘친환경인증제도’이고 그것이 믿을 수 있는 검증과 인증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는 형태로 시작되게 된 것이지요. 이익에 휘둘리는 민간기업보다 국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부야말로 공신력 있는 검증과 인증 절차로 생산과 소비 모두의 권익을 지켜낼 최적의 적임자일 것입니다. (이 부분을 쓰면서도 말도 안 된다고 느껴지기는 하지만 말이지요.)
이 다큐의 기본적인 주제이자 물음은 바로 여기에 자리합니다.
과연 친환경인증제도는 우리의 기대대로 공정하고 정확하게 이뤄지고 있는가?
친환경인증농가들의 반발을 접하다보면 다큐가 마치 부정적 결론을 마음속으로 이미 내려놓고 그에 합당한 증거들을 찾아 모은 짜깁기 영상인 듯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이 다큐가 의외로 충실히 스스로의 물음인 “친환경인증제도는 공정하고 정확하게 이뤄지고 있는가?”의 답을 찾기 위해 나름 꼼꼼한 준비들을 해왔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많은 수의 친환경 농가들이 ‘자연에 순응하는 농사’로 ‘친환경인증’을 받고 유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들이라도 듬뿍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논란의 화두를 던질 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행농업? 친환경농업?
영상에 등장하는 어느 농부들의 이야기입니다. 제게 저 위의 두 말이 참으로 진실 되게 다가온 이유는 저 두 이야기에 제가 생각하는 현재의 농사와 농부들의 문제 모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농약이 몸에 해롭다는 것을 알고 있는 농부. 하지만 농약 없이는 깨끗하고 품질 좋은 농산물을 원하는 수량만큼 거둘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는 농부. 친환경이란 농약을 지양하는 농사라는 사실도 알고 있는 농부. 친환경인증을 받는 것이 자신의 작물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값에 팔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절감하고 있는 농부.
농부의 깨달음과 경험, 배움과 앎 모두가 이렇게 모순되고 상충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누군들 친환경이 무엇인지 몰라서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들 거짓 인증이 잘못인 줄 몰라서 그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이 모순의 악순환과도 같은 현실의 깨달음들이 한 번 잘못 발을 내디디면 쉬 유혹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작물은 이랑에 심으니, 이랑 사이사이에 자리한 고랑에는 해도 된다는 생각. 이 또한 참으로 문제입니다. 농약을 사용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농약, 벌레는 잡기 위한 농약, 병해를 방지하기 위한 농약, 이렇게 세 종류이지요. 잡초를 제거하기 위해 이랑에 비닐을 멀칭하고 제초제는 보통 고랑에 뿌립니다. 제초제가 농작물에 닿으면 농작물도 당연히 식물이니 잡초와 마찬가지로 죽게 되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보통 제초제는 고랑에 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병충해를 방지하기 위한 농약은 어떨까요? 작물에 뿌리지 않으면 별 효과 없는 농약들을 과연 굳이 고랑에만 뿌리고 말 것인지...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런 지엽적인 것들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농약과 화학비료, 화석연료 투입에 의존하는 관행농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당연히 환경의 파괴이고, 그 환경 파괴의 원동력이 되는 기본적인 인식은 바로 ‘농작물에만 집중하는 농사’입니다. 오로지 크고 깨끗하며 수량도 많은 수확물을 위해 나머지 텃밭의 모든 생명력은 잊고 무시하는 농사가 바로 관행농이지요. 헌데 ‘친환경’이란 이름표를 받고 있는 텃밭과 그 텃밭의 주인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정말 큰 문제라 생각합니다. 작물에만 집중되는 시선을 유지한 체 인증 조건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최대로 관행농을 따라하는 농법이 과연 진정한 친환경농법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일까요?
친환경인증은 돈이 된다, 라는 기본 명제만 없다면 아마도 많은 농부님들이 친환경인증농가가 되기 위해 그 까다로운 절차와 검증을 스스로 자처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생각과 선택으로 어렵고 험난한 환경농업의 길에 뛰어드신 농부님들을 향한 비판이 아닙니다. 눈 가리고 아웅으로 ‘인증’을 받는 것에만 열중하는 가짜 친환경농부님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친환경농업일지를 쓸 소양도 의지도 없어 월례로 연례로 여럿이 한데 모여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으면 밀린 일지를 받아쓰기하는 농부님들, 수확 전 인증이 끝나면 수확과 동시에 밀린 약들을 죄다 뿌려대는 농부님들, 비검출항목에 해당되는 농약을 골라 마음껏 쓰며 농사짓는 친환경농부님들을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들에게 ‘친환경인증’이 돈이 되지 않는다면 왜 그러한 수고들을 자처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인증에는 정확함과 공정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 수고를 감내하며 진정한 친환경 농사를 짓고 계신 농부님들에게 그 수고만큼의 합당한 이익이 마땅히 돌아갈 수 있도록 인증은 정확하고 공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억울하게도 늘 전면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저 농부들뿐입니다. “그저 ‘욕심 많은 농부’가 나쁜 일을 저질렀다!!”라고 말이지요.
정말... 진정 모든 책임은 그들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유기적인 부패
유기농의 유기는 ‘얽혀 있는 생명력’의 ‘유기(有機)’입니다.
유기(有機)
1. 생명을 가지며, 생활 기능이나 생활력을 갖추고 있음.
2. 생물체처럼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이 서로 밀접하게 관련을 가지고 있음.
진정한 유기농이란 농약 적게 쓰고 자연의 퇴비를 사용하는 등의 제한적 의미에 머무르는 개념이 아닌, 텃밭의 생명들 모두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전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분임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농사입니다. 유기적이란 것은 참으로 유기적이지요. 어느 하나 따로 떼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내 몸부터가 유기체이니 말 다 했지요.
어떤 악취나는 악순환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면, 그 탓을 어느 하나를 따로 떼어내 그에게만 돌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순환 고리 전체가 썩어있다면 그것은 분명 구성원 모두가 유기적으로 얽혀 썩어가고 있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순환 고리가 건강하다면, 설혹 구성원 중 어느 하나가 썩어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금세 순환의 자정작용을 통해 건강을 회복할 것입니다. 악순환의 반복에서는 설혹 어느 하나가 깨끗하고 건강하더라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썩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지요.
현대농업과 친환경농업에 대한 이야기들이 불거질 때마다 마치 농부의 욕심만이 만악의 근원인 양 뭇매를 맞곤 하는데, 정말... 진정 모든 책임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이게 사기잖아요. 농민들도 사기꾼이 되는 거고. 소비자들은 속아서 쓰린 거고. 관에서 확실하게 책임져 주고 확실하게 관리, 감독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면서 실적 위주로 정책만 만들어서 쏟아내고, 실적만 올리려고 하니까 악순환이 계속되고... 정부에서 그걸 끊어줘야 하는데 계속 쉬쉬하고 있으니까 계속 더 키우는 꼴밖에 안 되잖아요. 친환경 보조금은 계속 나가고...“
친환경인증심사를 진행했던 어떤 이의 이야기입니다. 제보자라 소개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악순환의 주체가 단지 농민 하나만이 아닌 정부와 기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친환경인증제가 만들어낸 폐해의 주범이 바로 정부와 기관임을 역설하는 증거들을 하나둘씩 잔뜩 풀어 놓더군요.
영상에서 언급된 관련 문제들을 순서대로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풀어서 하나하나씩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 친환경 인증지역 위성사진을 보면, 인증대상지역이 ‘야산, 무덤, 둑, 도로, 시설부지 등’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역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 농사를 짓지 못하는 노인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자신도 모르는 사이) 친환경농가로 등록되어 있다. (심지어는 2년 전 세상을 떠난 이가 등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 사용금지 약물들이 친환경인증 농지와 농가에서 쉽게 발견되는 현실 (심지어는 관행농에서도 금지된 약물들도 다수 포함.)
- 사용금지 약물들이 발견된 농가의 농지에 대한 토양분석을 요청하자 거부하는 ‘농산물품질관리원’ 조사관. -> 거부의 이유로 32만원 정도하는 검사비를 언급
- 제작진 측에서 토양시료를 채취해 자체 분석한 결과 의심농지 두 곳 모두에서 농약 검출
- 친환경농사가 불가능한 간척지의 토양을 친환경농지로 등록해 인증을 받고 지원금을 수령하고도 친환경농사를 짓지 않은 농부들에 대한 재판이 있었다. (죄목은 사기) -> 농민들은 유관기관과 정부의 허술한 정책과 유혹을 탓함 -> 친환경 농자재 업체가 불법인증을 부추겼다는 농민의 주장
- 알고 보니 친환경농업인증 시장에 흐르는 막대한 자금들이 자재업체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현실. (인증대행, 자재납품, 친환경단지조성지원금 등)
- 친환경 인증농가 수는 1999년 대비 100배 이상 증가하였으나, 인증 시스템이나 인프라는 그에 발맞춰 발전하지 못한 현실적 문제.
- 그 과정에서 ‘고인 물’이 되어버린 친환경인증관련 시장에 자연스럽게 ‘유착관계’가 형성되었음. (정부기관 – 자재업자 – 민간인증기관 – 농민)
- 자재업자와 기관인원들이 아예 인증신청서 작성부터 영농일지와 심사 관련 서류 작성을 돕거나 혹은 불러주는 대로 받아쓰게 하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음
- 엉터리로 이뤄지는 심사와 토양분석자료들을 살펴보니 Ctrl+C 한 다음 Ctrl+V 한 문서들이 다수 발견 됨.
- 인증 검사에 사용될 시료를 바꿔치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함. (그것을 돕는 것이 심지어는 인증기관 인력이기도 했음)
기타 등등... 다 적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내용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모든 문제들은 죄다 돈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모든 썩은 내 나는 부패들이 죄다 그렇듯이 역시나 문제는 돈입니다. 친환경 인증이라는 사업을 하나의 블루오션으로 보고 그 안에서 어떻게 돈을 긁어모을까 하는 궁리가 넘쳐나는 곳에는 실상 진정한 의미의 친환경농업이니 소비자의 건강이니 하는 문제는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건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영상에서 소개한 ‘친환경인증에 따른 돈의 흐름’이란 부분을 잠시 소개해 봅니다.
친환경인증기관에서 친환경농가를 선정
-> 지자체가 친환경인증농가에게 보조금 지급
-> 인증비, 자재비, 분석비 등의 명목으로
보조금을 관련 기관(자재업자, 인증기관, 분석기관)에 거의 대부분 지급
농민들이 백날 뼈 빠지게 농사 지어봤자 돈 되는 것 하나 없다고 하소연하는 현실에는 다음과 같은 흐름이 그 이유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단 친환경농가가 아니어도 상황은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자본농업이라는 악순환의 놀음에 휘둘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자체는 실적을 위해 친환경 농지를 늘려가려 합니다. 그래서 무분별하게 친환경인증 농가가 늘어납니다.
친환경 농가를 늘려가는 과정에서 자재업자와 민간친환경인증기관, 그리고 분석기관들이 돈을 법니다.
돈이 되는 것을 안 자재업자와 인증-분석기관들이 지자체와 농민을 더욱 부추깁니다.
정말 완벽하게 썩어있는 악순환의 구조인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유기적인 부패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 느껴지기도 하고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지금 도에서 100%를 채우라고 해요. 얼마나 긴박한가를 아셔야 합니다. 인사에 파격적으로 반영하겠다. 우리가 원리원칙대로, 책대로 하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어요. 자로 잴 필요 없어요. 저기서 저까지 대충 한 번 딱 해서 감 잡아서 하면 돼요. 면적이 적다고 생각하지 말고 대충 하세요. 조금씩 심은 것은 그냥 곱하기 얼마 해버리세요. ..(중략).. 농약 사다가 뿌려, 뿌려버리고... 누가 농가 가서 다 보나요. 안 봐요.“
어느 군의 부군수의 회의 내용 녹취록에서 느낄 수 있는 건 정말 ‘미쳤다’ 같은 느낌 정도랄까요. 실적에, 승진에, 돈에 미친 사람들이 ‘친환경농업’을 가꿔나가고 있으니, 그 과정에서 소비자와 농민의 건강과 권리 같은 것이 고려될 틈이나 있겠습니까.
이러한 과정에서 ‘친환경농산물’이니 ‘안전한 먹거리’니 ‘그런 것들을 인증으로서 믿게 하겠다’느니 하는 헛소리들이 어떻게 진정성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 영상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곳에 적은 것은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고, 2부 영상에 대한 언급은 시작도 않았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서는 한 번 찾아서 보심이 좋을 듯합니다.)
내 탓도 있음이니...
우리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정 친환경농법으로 지어진 좋은 먹거리인지 아닌지. 비단 내 건강 하나 때문만이 아니라 좋은 길을 걷는 농부들을 격려하는 의미에서라도 꼭 진짜 친환경농가의 농작물을 애용하고 싶더라도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믿음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섰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정부를 탓할 수도 있겠지만, 일정부분은 아마도 소비자인 우리의 몫이라 여기는 것이 맞는 이치라 생각합니다.
좋은 먹거리란 무엇일까요? 친환경농업으로 지은 먹거리만이 좋은 먹거리일까요? 관행농업의 수확물은 모두 농약덩어리에 쓰레기 같은 것들일까요? 과정에 무관심한 채 인증마크라는 결과물만 맹신하려 한 나의 어리석음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일까요? 친환경-유기농-신선-고단백-프리미엄 등의 말장난으로 먹거리 시장을 도배하게 만든 원인은 생산자의 몫일까요? 아니면 소비자의 몫일까요? 아니면 둘 모두의 몫일까요?
우리 아이를 위해, 가족을 위해, 환경을 위해 친환경농산물을 구입한다는 생각과 실천 그 자체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지만, 과연 무엇이 진짜 친환경농산물인지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에서 이미 우린 실패자이자 피해자일지 모릅니다. 그런 순수한 마음을 악용하는 정부기관과 사업자들을 탓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스스로의 노력으로 상황을 극복하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던 소비자로서의 자신을 탓하는 시간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 생각이 없다면... 차라리 그냥 맘 편히 모든 먹거리를 고마운 마음으로 맛있게 먹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좋은 먹거리를 먹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먹거리는 고맙고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지요. 모든 먹거리에는 대지의 푸근함과 태양의 따뜻함, 그리고 비의 촉촉함이 스며있음을 알고 그것이 비싼 것이든 아니든 프리미엄이든 아니든 유기농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고마움 마음으로 맛있게 먹는 것이 좋은 먹거리를 먹는 가장 간단하며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착한 농사니 나쁜 농사니를 따지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요? 그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농사에 대해, 환경에 대해 자연스레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그러한 작은 변화야말로 ‘과정’이 되어 결과에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와 혁명은 언제나 자기 스스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이 썩어빠진 악순환의 고리 한 부분엔 소비자로서의 나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때로는 나의 무관심이, 결과에만 연연했던 어리석음이, 좁은 시선이, 이기심이 악순환의 먹잇감이 되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금부터라도 스스로 먼저 변화하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변화하면 되느냐???
이것이 지금부터 우리 소비자들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야 할 중요한 부분이겠지요.
사족
세상엔 정말 자연의 힘만으로 농사를 지어가는 농부님들이 계십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런 농부들 중 하나이고요. 물론 저는 농사 실력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형편없어 파는 것은 고사하고 이제사 겨우 우리 가족 반찬 만들어 먹을 정도를 자급하며 지내고 있지만 그래도 엄연히 자연의 힘으로 농사를 짓는 자연농부입니다. 하지만 저와는 다르게 자연의 힘으로 농사지으면서도 남부럽지 않은 수확물을 거두는 대단한 농부님들도 세상엔 존재합니다. 몇몇은 눈으로 확인하기도 하였지만,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그런 분들이 세상에 존재하리라는 생각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눈과 생각을 텃밭에서 땀 흘려본 후에야 어렵게 얻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농부가 될 수도 될 필요도 없는 일이니, 그렇다면 다른 많은 분들은 어떻게 그것들을 분간하여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답이 소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의 농사를 짓고,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의 소통, 교류, 사랑. 도시와 농촌이 둘이 아니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둘이 아니며, 대지와 농장물이 둘이 아님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소통과 교류.
그것이라면 아마도 많은 분들에게 밝은 눈과 생각을 선물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요즘 대부분 식품에 칼로리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식당의 메뉴판에도 과장 봉지에도 적혀 있습니다. 다이어트에 참조하라고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음식에 지방이 10g 탄수화물이 10g 그리고 단백질이 10g이라고 칩시다. 지방은 1g에 9kcal 고 탄수화물과 단백질은 1g에 4kcal입니다. 이 음식의 칼로리를 계산하면10*9 + 4 *9 + 4* 9로 총 170kcal입니다.만일 이 음식을 먹었을 때 우리 몸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음식의 성분대로 지방이 10g 생기고 단백질이 10g 생기고, 탄수화물이 10g이 우리 몸에 축적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각종 영양분은 소화기관에서 흡수되는데 이 작용과 동시에 우리 몸에서 대사가 됩니다. 예를 들어 지방의 대사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방 대사과정
매우 복잡한데 참고로 빨간색 인슐린의 작용을 주목하십시오.(앞의 글참조. 아무튼 인슐린이 지방 대사에서도 지방 생성을 조장하고 있습니다.)많은 부분이 에너지로 바뀌고 일부는 케톤으로 바뀝니다. 아, 물론 콜레스테롤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탄수화물 역시 에너지로 많이 쓰이지만, 나머지는 근육이나 간에 글리코겐-포도당-으로 저장되고, 그 외는 지방으로 변환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우리가'지방을 먹는다고 우리 몸의 지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뒤에서 잠깐 언급하겠지만 지난 몇십 년간 미국에서는 저칼로리 음식 먹기운동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모두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칼로리 높은 음식을 피하려고 저지방 우유를 선호하였고, 이제 완전히 우유의 스탠다드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무지방 아이스크림도 나왔습니다. 사실 이것은 이제 저칼로리 먹기 운동은 실패로 규정지어도 되지 않나 싶습니다. 고칼로리 음식 섭취와 비만과의 상관성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규정이 명확히 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다면, 비만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더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위키피디아는 칼로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물 1g을 1°C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이나, 물의 비열이 온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정확히는 "1기압 하에서 14.5℃의 물 1g을 15.5℃까지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이다.
1cal는 4.184J(줄) 이다.
여기서 칼로리는 알기 쉽게 자동차로 예를 들어 이야기하면 연료(디젤이건 가솔린이건)가 되겠습니다. 음식물은 아무튼 우리 몸에서 여러 대사 작용(연료가 소진되어 에너지를 내듯)을 거쳐 우리 몸의 에너지를 냅니다. 지방은 우리 몸의 가장 큰 에너지원, 그러니까 연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지방을 없애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그러니까 차로 이야기하면 달려야 연료(지방)가 없어집니다. 그럼 연료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서 질문하나 해 봅시다.
"휘발유 1L에 자동차는 몇 km를 주행할 수 있나요?"
이런 질문을 하면 욕을 먹을 겁니다. 차가 트럭인지 불도저인지 아반떼인지 에쿠스인지 혹은 티코 같은 경차인지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요.당연히 다 다를 것입니다. 제조사가 같은 똑같은 차라고 할지라도 주행거리는 운전 환경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포장도로인지 포장도로인지 시내 주행인지 고속도로 주행인지에 따라 엄청 달라집니다. 또 운전하는 곳이 시베리아 벌판인지 적도인지 아니면 비가 오는지 바람이 뒤에서 부는지 앞에서 부는지. 암튼 많이 복잡합니다.
똑같이 만들어진 기계도 이렇게 복잡한데, 똑같은 경우가 없는 사람의 경우는 더 다를 것 같습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몸무게가 무거운지 가벼운지 그리고 나이는 어떤지, 또 가장 중요하게는 체질에 따라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남자 그리고 몸무게가 무거운 경우에 그리고 나이가 어릴수록 같은 움직임에서 에너지 소비가 많습니다. '걷기는 시간당 몇 칼로리', '뛰기는 시간당 몇 칼로리' 이런 것을 현실에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기는 무리가 있습니다.
250kcal를 소모하기 위한 운동량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의 연료가 지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포도당이 있는데 아시다시피 운동을 처음 할 때 우리 몸은 지방보다 포도당을 먼저 에너지원으로 사용합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9cal 만큼의 운동을 하면 지방 1g 이 제거되지도 않고, 9cal의 음식을 먹었을 때 지방 1g 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칼로리는 그냥 참고 하는 정도로만 합시다.
사실 이러한 '생리적 열량'이라는 것이 개념 자체는 틀리지 않았으나, 이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표현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칼로리라는 개념은 1800년대 후반 에트워터의 실험에서 나왔습니다.다시 말씀드리지만 120년 전의 개념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이 개념을 사용할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만일 칼로리의 허구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남세희의 '다이어트 진화론' 을 참조하시면 더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2. 포만감
솔직히 말씀드려서 몸무게를 줄이고 싶다면 운동 보다는 먹는 것을 줄이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운동하면 근육량이 증가하여 처음에는 오히려 몸무게가 늘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계속하면 빠지기는 하겠지만. 결론은 덜 먹는 것이 몸무게 감소를 위해서 중요한데, 여기서 포만감이 중요하게 작용합니다.(포만감을 느끼면 많이 못 먹으므로)
사람들은 포만감을 느끼는 기관이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물리적으로 느끼는 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중추 신경계입니다. 위가 음식물로 가득 찬다면 더는 못 먹을 겁니다. 위는 대단히 신축성이 뛰어난 장기로 많이 먹으면 배꼽 아래까지 내려옵니다. 그래서 다이어트 때문에 수술을 하는 사람들은 위를 잘라 주거나 위에 무엇을 걸어서 조금만 먹어도 포만감을 느껴 음식 섭취를 더는 못하게 합니다. 위암 환자같은 경우 어쩔 수 없이 위를 잘라내는데, 이 경우 많이 못 먹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먹다 보면 위는 늘어납니다. 참고로 위는 늘어나기는 하는데 조금 먹는다고 줄어들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토리묵이나 우뭇가사리같이 양은 많고 흡수는 잘 안 되는 것을 먹으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됩니다. 사실 물만 먹어도 배고플 때 어느 정도 허기가 채워지는(것 같은)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매번 조금씩 먹다 보면 우리 몸이 적응해서 '아 이제 배부르다'고 느끼며, 조금만 먹어도 배부르게(것처럼)됩니다. 계속 많이 먹는다면 우리 뇌는 그 정도는 먹어야 배가 부른 줄 알고 실제론 많이 먹었음에도 평소보다 조금만 덜 먹어도 배가 고픈 줄 알게 됩니다. 위를 줄일 수는 없으나 우리 몸에 그 크기를 적응시킬 수는 있습니다.
반복적인 폭식으로 늘어나서 처진 위
또 다른 한가지는 중추 신경계의 작용인데, 중추신경계에는 여러 호르몬이 있어 포만감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포만감이 들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음식물이 들어온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호르몬이 나옵니다. 만일 폭식을 하게 된다면 중추 신경계가 느끼기도 전에 많이 먹을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경험은 다 한 번씩 있을 것입니다. 저도 예전 레지던트 할 때 맛있는 짜장면을 먹다가 응급 환자가 와서 해결하고 나니 결국 남은 짜장면을 다 먹지 못하고 버린 아픈 추억이 있습니다.(불어서 버린 것도 좀 있는 것 같기도) 간만에 고기 회식을 하는 데 전화가 와서 전화받고 왔더니 그 맛있는 고기가 별로가 되었던 적 다들 있으실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포만감을 빨리 느낄 수 있을까요?
일단 물리적 포만감을 위해서는 위에서도 잠깐 설명해 드렸다시피 부피는 큰 데 흡수가 잘 안 되는 그런 음식을 먹으면 됩니다. 묵이나 우뭇가사리 같은 것을 먹어도 좋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은 칼로리도 낮다고 알려졌습니다. 섬유질이 많은 음식도 좋은 데 과일이나 채소가 좋습니다. 다만 몸에 좋은 것이라고 많이 먹겠다기 위해 믹서로 갈아서 드시진 마십시오. 믹서로 갈게 되면 섬유소가 다 파괴되어 많이 먹을 수는 있으나 섬유 효소가 없어지게 됩니다. 참고로 섬유질은 식물의 세포에서 소화되지 않은 부분입니다. 섬유소(fiber)는 장에서 콜레스테롤에 붙어 제거를 용이하게 하고 게실염(Diverticulitis)을 감소시키며, 변비를 막아주고 장에서 박테리아 독(톡신)을 없애는 데 도움을 줍니다. 당연히 과일을 통째로 먹으면 다른 음식물을 많이 먹을 수 없습니다.
또 중요한 한 가지는 지방과 단백질을 섭취하라는 것입니다. 왜 단백질과 지방이 많은 고기를 먹으면 속이 든든할까요? 그것은 소화가 잘 안 되기 때문입니다. 소화가 잘 안 돼 위나 장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으므로 배가 부릅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지방을 먹는다고 다 지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슐린이 분비되는 탄수화물보다 지방이 덜 생깁니다.
국가별 비만율
맛있는 음식이 많고 미식가가 많기로 유명한 이태리와 프랑스의 비만율이 낮은 것에 주목하십시오. 반면 맛있는 음식이 드문 영국이 상위권인 것 역시 눈여겨봅시다. 과거 미국에서 저지방 다이어트가 유행하고 그 소모량 역시 줄었으나, 뚱뚱한 사람은 더 많이 늘었고 심장병 환자도 급증하였으며 동맥 경화 등 환자는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이는 저지방 다이어트의 실패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반면 프랑스 사람은 푸아그라, 버터, 치즈 기타 등등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고도 미국 사람들보다 훨씬 날씬하고 아름답습니다. 단순히 많이 먹는다고 뚱뚱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지방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물질이고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영양분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저평가되어 있습니다. 저지방 우유를 먹어보면 정말 묽고 맛도 없고 배부르지도 않아 결국 다른 것을 먹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베스킨라X스에서 무지방 아이스크림을 파는데, 무지방으로 만드느라 설탕을 많이 넣어 결국 탄수화물이 증가해 우리 몸의 지방은 불어납니다.아무튼 탄수화물 대신 지방을 섭취 함으로 필요한 에너지도 확보하고, 저장된 지방이 분해되고 남은 케톤이란 물질은 식욕도 저하해 다이어트를 용이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몇십 년 동안 저지방 다이어트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비만 조절에 실패했는지 상기해봅시다.
중추신경계의 포만감을 위해서는 별거 없습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라'
우리가 우리 애들에게 흔히 하는 말입니다. 물론 천천히 씹어 먹으며 음식을 잘게 부숴주고 침에서 나온 효소가 소화를 도와 체하지도 않지만 꼭꼭 씹는 사이에 위로 음식물이 천천히 넘어가고 그동안 중추 신경계의 호르몬이 나와서 우리 몸의 포만감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뇌에서 '어 이제 음식이 들어오네. 속도 좀 조절해야겠다.' 라며 '너 이제 배부르지?' 하는 사인을 보냅니다. 인슐린도 포만감에 어느 정도 작용을 하는데 만일 너무 급하게 먹는다면 당 수치가 급속히 올라가고 당 수치를 낮추기 위해 많은 인슐린이 출동하게 됩니다. 이는 다시 지방분해를 막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딴지스들은 천천히 먹읍시다. 아니면 밥 먹다가 한 5분 정도 딴 데 갔다 오던지.
못생기기만 합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규칙적인 식사. 우리 몸은 항상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호르몬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떨 때는 배가 몹시 고프고 어느 때는 배가 많이 부르면 항상성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찍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도 아침은 꼭 간단하게라도 챙겨 드시는 것이 좋습니다. 아침을 먹으면 끼니 중간에 간식을 자제하게 되고 자연히 점심시간이 되어서 배가 고프게 됩니다.(이는 인슐린 농도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아침 챙겨 먹는 것이 다이어트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회식때 폭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당장 다음 회식부터라도 위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 지켜봅시다. 비계도 좀 드시고 꼭꼭 씹어 천천히 드시고. 참고로 고기만 먹으면 밥이나 냉면을 많이 먹고 싶은데, 이때 참으면 그 다음날 속이 훨씬 좋습니다. 지방인 비계를 먹으면 밥이나 냉면 섭취를 줄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rabbit starvation과 연관 있는데 다음 기회에.)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배부를 때는 먹지 말자'
배가 부른데도 뭘 먹는다면 포만감을 느끼는 것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배부를 때 먹는 음식 중 소화된 것은 전부 잉여 영양분, 그러니까 지방으로 갑니다.(가끔 비만 목적으로 위 수술을 받으시는 분들이 수술 후 우울증에 빠지는데 이런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먹는 데 재미(?)가 들었는데 갑자기 적게 먹으니 우울해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암튼 이는 수술 실패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뭐라도 해볼 양 컴터 앞에 앉아 뉴스 기사를 클릭하다 보면, 끝말잇기 하듯 클릭질이 멈추지 않는다. 회사를 다녔다면 오늘 일당은 벌었겠지만, 백수인 지금 지출이 없는 하루도 위안이 된다. 백수가 되니 시간이 빠르다. 벌써 6시? 남들 퇴근하는 6시가 되면 그나마 자유롭다. 대낮에 가기 뭐했던 마트도 가고, 남들처럼 거리도 활보한다. 집에 돌아와 씻고 인터넷 조금 하면 어느새 밤이네. 내일 약속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내일을 위해 일찍 잠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내일이 오늘 같고, 그 다음 내일도 오늘 같은 무한 반복의 꿈.
갑자기 'VD=R' 생생하게 꿈꾸면 이뤄진다는 어느 개떡 같은 자기계발서가 떠올라 그 꿈이 제발 이뤄지지 않길 바라고 있다. 부모님은 다락방이란 공간 자체를 모르고 있고, 방 안에 갇힌 나는 매일밤 꿈을 꾼다. 언젠가 이 다락방을 부수고 나가는 꿈을.
쾅쾅쾅- 쾅쾅-
대학 입시에 낙방해 화장실에서 질질 짜고 있던 소싯적 김어준 총수에게 ‘내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며, '그까짓 대학입시가 뭐라고, 얼른 나오지 못하냐'며 화장실 문짝을 부수고 들어왔다던 그의 어머니처럼 나의 다락방을 부수고 ‘네가 왜 여기 있냐, 그까짓 백수가 뭐라고... 얼른 나오지 못하냐'며 소리쳤던 그를 소개하려 한다.
잠깐 BGM 같은 거 있나? 아저씨 생각하면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생각나서 말야.
이름: 쿠로사와 (만 44세)
외모: 각진 턱, 튀김과 맥주로 인해 부풀어진 술배가 인상적
직업: 공사판 현장감독
취미: 퇴근 후 오돌뼈 튀김에 맥주 먹기
친구: 타로 (공사판에 세워둔 안전 인형)
애인: 그런 건 없다.
성격: 소심과 찌질. 뒤를 안 보는 성격 탓에 평범한 일도 엄청난 사건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축구대표팀 선수를 열렬히 응원하던 어느 날. 쿠로사와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지금 왜 남의 이름을 외치고 있지?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나에 의한, 나만의 감동이었는데…’
친구 하나 없이 비좁은 단칸방에 홀로 누워있던 쿠로사와는 그때부터 인망을 얻고 싶어 안달이 난다. 애초부터 인간관계에 서툴렀던 그는 없던 인망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사실, 계획이라는 것도 되게 하찮아. 딱 쿠로사와 다운 단순한 생각이지.
매일 먹는 동료들 배달 도시락에 전갱이 튀김을 추가로 넣고, 이 사실(도시락에 웬 전갱이 튀김이지?!)을 알게 된 누군가가 감동 어린 눈빛으로 전갱이 나눔의 주인을 찾으면 이때 쿠로사와 자신이 '짜잔!' 하고 등장하겠다는 상상!
하지만 쿠로사와의 이런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괜한 오해로 신망을 얻고 있는 다른 동료와 비교되어 속 좁은 상사로 전락하게 된다. 게다가 외모 또한 그의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돼서 유괴범으로 몰려 경찰서에 갇히기도 하지. 점점 회사에서의 쿠로사와에 대한 소문은 안 좋게 흐르는데...
오히려 다른 사람 전갱이를 훔쳐 먹은 놈이 된 쿠로사와
이렇게 하루하루 되는 일 없이 살던 어느 날. 쿠로사와는 혈기 왕성한 중학생들과 시비가 붙는다. 팔딱거리는 활어 같이 젊고 어린애들에게 '처'발린 쿠로사와는 순간, 개죽음 만은 모면해야겠다는 생각에 바지까지 벗으며 중학생들 앞에서 싹싹 빈다. 불행은 항상 또 다른 불행을 낳던가? 중요부위를 가린 채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던 그 순간 쿠로사와는 동료들에게 그 모습을 들키게 된다.
인망은 커녕 개망신을 얻게 된 이 상태로는 도저히 회사에 출근할 수도, 동료들과 마주할 수도 없는 쿠로사와. 우연히 읽게 된 <시튼 동물기>에 나오는 토끼를 알게 되고, 다시금 용기를 얻는다.
‘라그’라는 토끼 녀석은 여우나 들짐승을 피해 항상 도망 다녀,
도망치고 숨는 게 그들의 일평생인 거지.
그런데도 그놈들은 비굴함이란 게 없다. 그놈들에게는살아있다는 거 자체가 승리라고!
쿠로사와는 ‘라그’에 빗대 그 날의 자신을 위로한다.
하지만... 암만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다. 그딴 건 동물한테나 통하는 거고, '나는 인간이다!'라고 발악하며 동료들에게 일진 중학생과 맞짱을 뜨겠다고 선포하고 만다.
드디어 결투날! 44살 남자의 중학생과의 결투라니, 이건 이겨도 자랑이 아니고, 지면 말 그대로 개망신인 거다. 괜한짓을 벌였다고 후회하며 '이제라도 포기할까?'라는 번뇌 속에서 중학교 앞을 서성이던 쿠로사와. 하지만 동료들이 지켜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어떨결에 날린 주먹이 상대에게 정확히 꽂히고, 물러설 수 없기에 공격을 피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에 상대는 차츰 겁을 먹는다.
어찌저찌하여 상대 중학생을 쓰러트리긴 했지만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져 학교 일진인 나카네와 맞붙게 된다. 죽을 각오로 덤비는 무사 같은 심정으로 쿠로사와는 싸움에 임하고, 죽기로 덤벼드는 쿠로사와를 보며 살기를 느낀 나카네는 도망간다. 중학생 일진을 이긴 쿠로사와! 어찌보면 크윽- 웃음이 나지만 그는 싸움의 전설이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노숙자들을 괴롭히는 깡패들과 시비가 붙고, 그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싸움에 가담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최강전설이 된 그의 이야기다. 중학생과 맞짱 뜬 아저씨 이야기. 별 거 없지?
근데 말야, 다락방에 있을 때 나를 깨운 건 스티븐 잡스도 아니고, 김연아도 아니었어. 그 별거 없는 쿠로사와 아저씨였지. 쿠로사와를 생각하니까 내 안에 있던 뜨거움이 울렁 거리는거야. 그런 거 잊고 산지 정말 오래 됐었거든.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길에서 만난 '도를 아십니까?'의 말처럼 나를 향한 우주의 기운은 개뻥이고, 나를 따라다니며 비춘다고 생각했던 핀조명은 사실상 시야가 좁은 내 탓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 회사나 세상은 내가 없어도 태연하게 돌아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고, 내가 태어난 건, '그날 밤 부모의 성욕이 빚어낸 해프닝인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인간의 자긍심과 자멸감은 한 끗 차이라서 나를 향해 비추던 무한한 자긍심도 추운 날씨에 쪼그라든 고추마냥 밑도 끝도 없이 쪼그라 들고 있었다. 이러다 자칫 포도씨 크기만큼 작아져 포도씨까지 씹어 먹는 녀석에게 걸린다면 한 번에 누군가 뱃속으로 사라지겠구나... 아, 씨바, 이렇게 죽는건가?
쾅쾅쾅- 쾅쾅
'이봐! 나는 고흐와 찌질함 배틀을 붙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규!' 그렇게 쿠로사와는 나의 다락방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쿠로사와는 객관적으로 가진 것도 없고, 연애 한 번 제대로 못했고, 소심했고, 매우 찌질했다. 그랬던 인간이 피하고 싶은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했고, 그 마주한 모습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다. 여기서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건 쿠로사와가 찾았던 자신만의 행복이지.
중학생 무렵, 지방에서 공부를 곧 잘했던 나는 의사가 될 거라 말하고 다녔다. 고등학생이 되니 점수 맞춰 의대는 포기했고, 대신 서울에 있는 명문대에 가야겠다는 꿈을 꿨다. 의대는 아니었지만 서울권 대학에 입학했고, 졸업 후엔 티비나 잡지에 가끔 얼굴을 비추는 유명인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취업이나 돈 문제로 고민하는 건 나와 먼 얘기였다. 그랬던 내가 졸업 시즌이 되자 토익책을 들고, 취업과 돈 문제로 고민하고 있더라고. 다행인지 취업은 했고, 전공과 그닥 관련 없는 회사를 3년 정도 다니다 너가 아니어도 얼마든 니 자리는 대체할 수 있다는 회사의 소모품 정책에 열 받아서 현재는 백수가 되었지.
간만에 누리는 늦잠. 그리고 주말만 기다리는 바보 같음에서 벗어났다. 한 2주는 몸과 마음이 편했는데, 가끔씩 걸려오는 엄마 전화와 나날이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니 나도 모르게 밤마다 회사에 출근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겠어? 요즘은 하루하루 불안감과 친구하고 있는 중이야.
그러다 문득 나를 돌아보게 되었지. 여태껏 자신만의 행복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거였어. 틀에 맞춰 대학도 다니고 회사도 다녔지만 뜨거움 같은 게 없더라고. 미지근한 거 말고, 가까이 가면 데일지도 모르는 그런 뜨거움 말야.
쿠로사와는 만 44세니까 시간으로 따지면 오후 3시쯤 된 거야. 오후 3시라는 시간은 뭘 시작하기도, 포기하기도 참 애매한 시간인데, 그런 시간에 자신만의 행복을 찾았다는 게 위안이 되더라고. 싸움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게 된 쿠로사와처럼 인생은 정답이 없다고 생각해. 그 말의 의미를 머리로는 알지만, 늘 보기 좋은 답과 내가 이끌어 낸 답 사이를 저울질하며 항상 고민했던 나에게 쿠로사와의 이야기는 많은 위안이 되더라.
백수가 된 10월의 어느 날, 내 다락방을 부수고 쳐들어온 쿠로사와를 떠올리며 이만.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쿠로사와의 시선. 뜨거운 땡볕 아래 개미를 괴롭히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이 보인다. 점점 다가가면 쿠로사와의 어린시절이다. 순간, 개미에게 손바닥을 물린 어린 쿠로사와>
잘했다 개미야... 장하다 개미야... 한방은 갚아줬구나. 무자비하고 압도적... 부당한 폭력... 강요되는 일방적인 고통과 압제... 절망적... 어쩔 수 없는 운명에 한방 먹인거야... 보복이다.
그래... 훌륭하다. 그 녀석은 훌륭했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히 싸웠어.
나는 어떻지? 될 수 있을까? 그 날, 그 여름날의 그 개미가...
좌우간 너무 강적이었어. 세상은. 이 세상은 역시 너무 강대해.
너무 강해서 마음 속은 언제나. 가득했다. 무력감으로... 사춘기 무렵에는 이미 알 만큼 알아버렸지.
원래부터 타고난... 그대로 어쩔 수도 없는. 태어난 집, 재산, 머리, 재능.
내 카드는 최악이었다. 그냥 꽝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주제에 꿈만은 있었다.
그게 서글펐다. 혹독했다. 여자한테 차이고 직장에서 물 먹고, 생각한 건 반대로 되고,
마치 거대한 손바닥. 이길 수가 없다. 너무 강해. 서서히 압사하는 듯한 나날.
그래도... 저항했다. 나는 저항했다.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싸웠다. 싸웠다고 생각한다.
사무실 직원들과 담소를 나누다 어느 여직원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다. 프로그램에 대해 뛰어나다는 기준이 사람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행정업무를 맡아 보는 직원이 그 말을 하는 것은 타당해 보였다. 업무용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쓰는 것 중 '아래아한글'과 같은 워드프로세서도 해당되겠다만 사무 업무의 많은 부분을 해결하여 주는 것이 엑셀이라 해도 될 테니 말이다.
기획이든 경영이든 행정 일 대부분이 숫자로 하는 일이다.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은 얼마를 벌었냐'(성과), 혹은 '얼마를 벌 것인가'(목표)가 중요한 일이기에 따지고 보면 화이트칼라가 하는 모든 일은 숫자와 관계된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이 없었을 때에는 숫자로 된 칸(Cell)이 수백 줄로 구성된 표에서 어느 한 칸의 수를 변경하면, 표 맨 오른쪽 혹은 아래쪽 합계 등 전체 표 숫자를 수작업으로 다시 맞추어야 한다. 그야말로 노가다다. 스프레드시트가 사무실에서 사용된 이유는 '엄청난 노동을 덜어준다'는 이유가 제일 컸다. 스프레드시트의 가치는 표에 입력된 숫자들의 변경을 자동 계산하여 주는 것에 있었고 그 축복은 사무직원 뿐 아니라 회사 전체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씁쓸하지만 회사에서 컴퓨터를 도입했던 이유는 사무직원을 어여삐 여겨 노가다를 줄여주기 위해서라기 보단 인건비를 아낄 수 있었기 때문이겠다.)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은 개인용 컴퓨터를 게임기에서 사무용 기기로 전환하게 하는 결정적인 프로그램(Killer App)이 되었다. 그 시작이 바로 VisiCalc다.
2. Spreadsheet의 탄생, VisiCalc
또다시 등장한 Apple II에서 실행한 Visicalc 화면.
플로피디스크 덕분에 컴퓨터 속도가 빨라졌다. 하지만 우리 컴퓨터가 더 강력한 성능을 갖출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비지칼크(VisiCalc)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는 보스턴에서 친구들인 밥 프랭크스턴(Bob Frankston)과 댄 브릭클린(Dan Bricklin)이 마이크 마쿨라(Intel에서 퇴사한 후 Apple에 처음 투자했다. 애플사 2번째 CEO)와 협력하여 만든 것이었다. 정말이지 때 맞춰 나온 알맞은 상품이었으며 딱 그 컴퓨터에 그 프로그램이었다.
(중략)
비지칼크(VisiCalc)는 강력한 기능을 갖췄기 때문에 Apple II에서만 돌아갈 수 있었다. 즉, 우리 컴퓨터만이 그것을 돌릴 수 있는 충분한 램(Apple II 는 48k, PET 등은 32k 메모리)을 갖추고 있었다. 라디오 샤크의 TRS-80과 코모도어의 PET는 그 프로그램을 감당할 수 없었다.
iWoz <3장 행복한 컴퓨터 애플의 탄생> - 스티브 워즈니악
최초의 Spreadsheet 프로그램은 1979년 댄 브릭클린(Dan Bricklin) 개발하여 발표한 VisiCalc다. VisiCalc는 1977년 나온 Apple II를 가정에서 가지고 놀던 게임기에서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업무용으로 용도변경하게 한 (어쩌면) 유일한 프로그램이다.
Apple II는 1978년 7,600대 팔렸다가 VisiCalc가 선보인 1979년에 35,000대 이르게 된다. 1980년 이후 Apple II 뿐 아니라 다른 플랫폼에도 지원하기 시작했다. APPLE II와 더불어 플랫폼 확장으로 VisiCalc는 시판 후 6년동안 70만 이상 카피를 팔아 치웠다.
3. 1981년 지각 변동, IBM PC
1981 년에 처음 선보인 IBM PC 5150
1981년 가정용 데스크탑 컴퓨터에 관심이 없었던 IBM은 데스크탑 시장에 진입하게 된다. 당시 컴퓨터의 주류 시장은 가정용이 아닌 은행 등 기업에서 사용하는 메인프레임 컴퓨터(Mainframe Computer)였고 그 업계의 절대 강자는 IBM이었다. 메인프레임 절대강자 IBM이 가정용 데스크탑 시장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3편下참조)
1981년 이후 데스크탑 컴퓨터의 주류는 IBM PC가 된다. 그 흐름에 따라 VisiCalc 또한 IBM PC에서 실행되도록 포팅되었다.
4. 강자의 탄생, 1983년 Lotus 1-2-3
DOS에서 구동되는 'Lotus1-2-3'의 1985년 두 번째 버전.
VisiCalc는 IBM PC에서 실행은 되었지만 16bit CPU 최적화 등 근본적인 개선이 없었다. Apple II에서 구동하든 IBM PC에서 구동하든 별 차이가 없었다.최신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하드웨어 이점을 사용자는 느낄 수가 없었다고 할까. VisiCalc는 대세가 된 IBM PC를 위한 버전업을 신속하게 안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SuperCalc와 Multiplan(MS) 같은 경쟁사가 VisiCalc에 비해 기능적인 개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의 반응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다 VisiCalc 개발자들의 친구였던 미셀 캐퍼(Mitchell Kapor)가 '로터스사'를 설립 후 1983년 1월 26일 'Lotus 1-2-3'을 발표한다.(개발은 Jonathan Sachs) Lotus 1-2-3은 IBM PC에 최적화하여 작성된 프로그램이었다. Intel 16bit CPU 최적화, 보다 많은 메모리 접근, 진일보한 비디오 그래픽 처리 등 IBM PC 하드웨어를 충분히 활용하는 프로그램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1-2-3의 이름 처럼 Lotus 1-2-3은 스프레드시트 기능 뿐 아니라 수요예측 등 가능한 그래픽/차트 기능과 부가적인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 및 매크로 기능 등을 추가하였다. 1983년 Lotus 1-2-3은 발표하고 6개월 만에 30만 카피를 팔아 VisiCalc의 판매량을 압도하게 되고 VisiCalc는 3년 후 로터스사에 인수되고 만다.
Lotus 1-2-3은 IBM PC와 MS-DOS의 플랫폼이 대세가 될 것을 정확하게 바라 보았다. 하드웨어 사양을 면밀히 분석하여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그 결과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IBM PC 프로그램의 절대 권력으로 자리하게 된다.
5. MS Rising, 1985년 Excel
<MS Excel 1.X>는 맥에서만 출시했다. 1987년 1.06버전
MS는 1982년 Multiplan으로 스프레드시트 시장에 진입하였지만 VisiCalc와 Lotus 1-2-3 모두에게서 처절하게 패하고 만다. 자신의 플래폼인 MS-DOS에서 또한 Lotus 1-2-3의 아성에 접근조차 못하고 있었다. MS에게 Multiplan으로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 곳이 MS-DOS보다 오히려 Apple의 Macintosh였다.
1985년 MS는 Multiplan이란 이름을 치워 버리고 향후 30년 가까이 스프레드시트 시장의 최고 영예의 자리에 앉게 되는 ‘Excel’로 이름을 변경하게 된다. Excel Version 1은 Macintosh System Software에서만 발표하였다.
나름 절친.
MS가 Excel을 맥킨토시에서 시작한 건 신의 한수가 아닐까 한다.이 선택이 MS가 PC 플랫폼 전체를 뒤흔들게 하는 계기가 된다. MS-DOS 환경에서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의 절대자는 Lotus 1-2-3이었다. 사용하는 문서 형식(Lotus에서는 WKS, WK1 등)이 한번 결정되면 이를 변경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문서를 서로 주고 받을 때 문서 형식이 다르면 호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MS-DOS에서 스프레드시트 문서의 사용 표준은 Lotus 1-2-3으로 이미 결정이 된 상황이었다.
MS는 자신의 플랫폼이 아닌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의 불모지인 맥킨토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Apple Macintosh는 기존의 OS 환경과 다른 GUI(Graphic User Interface / 사용자가 그래픽을 통해 컴퓨터와 정보를 교환하는 작업환경. 명령어(text) 방식의 DOS와 대조적인 방식) 환경이었다. 이는 그래프와 차트를 만드는데 MS-DOS보다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할 뿐 아니라 MS-DOS와 달리 컴퓨터를 잘 못다루는 사람이 사용하기 쉬운 마우스를 키보드와 함께 주 입력장치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MS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애플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맥킨토시용 프로그램을 작성하게 된다.*MS는 워드프로세서, 스프레드시트 등 OA 프로그램에서 강자가 아니었다. MS-DOS에서 사무용 주류 프로그램은 워드프로세서 에서 WordPerfect, 스프레드시트에서 Lotus 1-2-3, 데이터 베이스에서 dBase였다.
나름 풋풋했던 3인방.
1983년 10월 스티브 잡스는 3명의 젊은 개발자를 모셔와 The Macintosh Software Dating Game(당시 유행하는 1:3 데이트 TV 프로그램을 패러디)라는 이벤트를 개최하였다. 참석한 개발자는 Fred Gibbons(SPC / 우), Mitch Kapor(Lotus / 가운데) 그리고 Bill Gates(Microsoft / 좌)였다. 빌 게이츠는 2년 전(1981년) 부터 맥킨토시를 만졌다고 한다.(아래 동영상에서 확인) 친목을 위한 이벤트였지만 결과는 전쟁이었다.
1983년 Apple Event에 함께한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
MS는 GUI의 가능성을 간파하였고 맥킨토시를 위한 프로그램을 설계하게 된다. 애플 또한 새로운 플랫폼 맥킨토시에 그럴싸한 프로그램이 없을 경우 사용자들이 외면할 것이라 생각했다. 목적을 달랐지만 서로 애타게 원하는 상황이었다고 할까? 당시 애플은 MS에 비한다면 공룡기업이었다. 애플 입장에서 MS를 단지 BASIC 프로그램과 IBM 휘하 아래서 MS-DOS를 만든 기업으로만 알았기에 맥킨토시 플랫폼에 경쟁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초창기 애플은 MS를 경계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훗날 애플과 구글. 역사는 반복된다!?)
MS는 맥킨토시를 통하여 GUI와 CLI(Command-line interface, DOS 처럼 명령어를 키보드로 입력하는 방식)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다르게 설계, 구동해야하는지 알게 된다. MS는 내부적으로 새로운 OS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IBM에게 복종하듯 OS/2(1988년 버전 1.1까지 GUI가 아니었다.)를 설계하고 있었지만 암암리에 Windows를 준비 중에 있었다.(IBM에게는 Windows를 DOS 혹은 OS/2 프로그램이라고 속였겠지!) Windows용 Excel은 1987년 Windows 버전 2에서 맥용과 함께 버전 2로 발표한다. MS는 더이상 MS-DOS에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가지지 않았다.
구도는 명확해졌다. MS 입장에서 Excel의 성공을 위해서는 Windows는 반드시 시장에서 성공하여야 했다. 의미있는 성공을 한 Windows 3.0 기점으로 MS는 IBM과의 관계를 청산하고자 OS/2 개발에 손을 떼게 된다.
6. Lotus 1-2-3의 실패
Windows용 1-2-3
Lotus 1-2-3은 MS-DOS에서 주 프로그램이었다. 80년대 IBM PC의 거대한 시장에서 큰 이익을 얻고 있었다. MS Excel이 1985년 맥용으로 발표되었지만 경쟁상대가 아니었고 1987년 윈도우용으로 나왔지만 당시 IBM PC에서 주류는 여전히 MS-DOS였다.
그렇지만 이 당시 Lotus는 프로그램 설계에 있어 여러 난관에 부딪치고 있었다. Lotus 1-2-3은 버전 3을 새롭게 작성 중이었는데 개발기간이 1년이상 지체되고 1989년 발표할 때 고사양 PC용은 버전 3으로 기존 PC 사용자는 2.2(확장 메모리를 사용하지 않는 버전 2.01의 업그레이드)로 어이없이 이원화하여 발표하였다.(이원화 전략은 대부분 실패한다. Apple II와 Apple III, PC와 PCjr(PS/2) 등이 그러했듯이...)
1990년대가 되자 Windows 3.0의 성공으로 MS Excel은 기세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격 Lotus 1-2-3은 GUI에 최적화된 Windows용 프로그램을 제대로 설계하지 않았다. MS-DOS 프로그램을 Windows 용으로 포팅한 수준이었다. VisiCalc가 MS-DOS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기회삼아 성공했던 Lotus가 똑같은 실수로 Windows에서 좌초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1995년 MS Windows 95로 Lotus 1-2-3은 더 이상 주류 프로그램이 아니게 되었고 결국 MS가 배신한 IBM에게 인수 당한다.
그리고... 2013년 6월 11일 Lotus라는 브랜드는 세상에서 없어지게 되었다.
7. 플랫폼 승리자 MS Excel
1992 년 기점으로 Excel은 주도권을 잡는다
90년대 이후 MS는 절대권력을 행사하였다. 감히 말하지만 그 시작을 알린 건 1985년 Multiplan에서 이름 바꾼 위대한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Excel’이라 생각한다. Windows와 달리 Office 아니 Excel의 기세는 지금까지 유효하다. MS는 Excel을 통하여 GUI 프로그램을 설계할 수 있었고 결국 GUI OS인 Windows를 만들 수 있었다.
플랫폼의 가치를 미리 깨닫고 미래 가치에 도전한 결과 지금의 MS가 되었다. MS는 어찌되었든 (운도 작용했겠지만) 플랫폼을 구축함과 동시에 승리자가 되었다.
1985년 당시 MS는 강자였을까? 절대 아니었다. MS 위에는 컴퓨터 권력 그 자체인 IBM이 호령하고 있었다. IBM과 비교 할 것도 없이 그 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가정용 데스크탑을 만들고 있는 Apple Computer보다도 작은 회사였다. MS는 자신의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약자로 있을 상황에서 직접 경쟁을 하기 보단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장소(플랫폼)를 만들고 적들과 일전을 벌렸다. Lotus는 자신이 지배한 MS-DOS 플랫폼이 지속될 줄 알았고 MS는 새로운 플랫폼 GUI의 가치를 미리 깨닫고 시장을 바라보며 내달린 결과 지금의 MS가 된 것이다.
MS의 성공의 근저엔 씁쓸한 면이 있지만 그들의 성공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잡스도 인정했으니까.
아아아아... 슬프다.
"내가 슬픈건 마이크로소프트가 성공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성공은 대부분 그들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취향(taste)이 없는) 3류 제품을 만들었다는 것에 있다."
TBS Triumph Of The Nerds 스티브 잡스 인터뷰 중에서
MS의 성공은 Excel에서 멈추지 않았다. OA프로그램 진영에서도 약자였던 MS는 그들의 리스트에 워드(Word)와 파워포인트(Powerpoint)를 추가함으로서 소프트웨어로 IT계의 진정한 세계정복을 시작하게 된다. 그 성공의 과정은 절대 3류가 아니었다.
다음편에서는 워드프로세서시장을 정복한 MS 워드(Word)와, 그의 경쟁자들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건물이 무너졌고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차갑고 딱딱한 돌 사이에, 정신을 갉아먹는 어둠 속에 갇혔다. 그리고 이런 국가적인 재난이 벌어지면 국가는 당연히 구조에 나서야 하는 법이다. 삼풍이 무너지고 구조가 시작되었으나 현장은 말 그대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수 많은 곳에서 구조의 손길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 법. 당시 구조를 위해 온 단체만 하더라도 소방서와 경찰서는 기본이요, 특전사에 지역주민들과 민간봉사자, 그리고 어디든지 빠지지 않는 해병전우회에다가 심지어 주한미군까지 왔다.
현장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소방본부와 서울시, 중앙재해대책본부 등에서는 내가 이 일을 지휘하겠다면서 서로 싸우니 필요한 장비를 가져와도 굴릴 수 없고, 애써서 장비를 빌려와도 ‘허가’가 없어서 그 장비를 돌려보내는 등 대가리 굵직한 이들이 모이니 어떻게 하면 빨리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란 생각보다는 누가 왕초노릇을 하느냐 라는 싸움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몇몇 영웅적인 투쟁으로 30여명을 구해낸 민간인도 있었지만, 살려달라는 아비규환 속에서 실질적인 구조활동은 고작해야 파이프나 두드리면서 생존자들이 어디쯤에 있는지 짐작하는 정도였다.
당시 상황을 자세히 복기하자면, 구조의 가장 기초적인 장비인 헬멧과 손전등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고, 한 미군의 말에 의하면 붕괴된 구조물의 틈을 벌리는 에어백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구조장비조차 없었을뿐더러, 산소절단기라던지 콘크리트 분쇄기는 민간업체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었다. 이런 혼란스런 판국에 생존자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질서정연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생존자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물과 구급약품조차 제대로 구비되지 못해 그것들을 찾아 우왕좌왕하는 판국이었으니 더 말을 해 무엇을 하랴.
게다가 사고 당일 현장에서는 화마가 치솟아 이를 진압하려했으나 옥외소화전이 고장나는 바람에 진압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다. 결국 화재를 진압하는데에 성공은 하나 갑자기 쏟아져내리는 물은 갇힌 생존자들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되기도 했는데, 몇몇 생존자는 이 물에 익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물은 다른 생존자들에게 수분을 공급하고 열기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여 그들을 생존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하였다.
결국 보다 못한 청와대가 개입하여 소방본부를 중심으로 하여 지휘체계를 일원화하여 구조작업의 효율을 높여보려고 했으나, 앞서서 말한 민간봉사자들은 이러한 방침의 본부와 여러 마찰을 겪었고, 이에 상당히 뿔이 난 소방본부가 이들을 싹 다 치워버리고 전문인력만으로 구조작업을 진행한다. 이는 앞서서 말한 이유도 있었으나 자원봉사를 빌미로 불법적인 이득을 취하는, 굳이 말하자면 도굴꾼 같은 이들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심지어 발굴을 미끼로 유가족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정신나간 놈들 또한 있었으니 이는 당연한 조치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라고 생각되는건 나뿐인가?
이러한 진통을 겪으면서 구조작업은 서서히 속도를 타기 시작했고 사고 52시간이 지난 후에 24명의 생존자들을 구해내는 등 제대로 된 구조가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워낙 조각난 시신들이 많아 대강 조각이 맞으면 사람 1명으로 취급하는 등 거센 비난을 받을 행동들이 이어졌었다.
후일 많은 참사를 겪으면서 국가적인 대재난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 생각되어 중앙 119구조대가 설립되었다.
2. 기자
당시 구조현장을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데에는 기자들 또한 일조했었는데, 이쯤되면 이건 전통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대표적인 예로 MBC는 좋은 그림을 잡겠다고, 구조하는 소방대원을 방해하며 ‘취재를 위해서는 자리를 비켜줄 수 없다.’는 말을 날리면서 꿋꿋하게 방송을 계속한다. 방송사들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위해서 헬기를 띄우고 구조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바람 때문에 붕괴의 위협을 더 높이는 일까지 저지른다. 그렇다고 다른 종이 신문 기자들은 달랐느냐면 그것도 아닌게, 사선을 넘나드는 생존자의 인터뷰를 듣겠다면서 잡아 세우고, 구조작업에 여념이 없는 소방대원을 방해하는 등 아마도 지옥에서 악마가 이것을 봤다면 진지하게 주소지 이전을 고민하게 할만한 행태가 어김없이 벌어졌다.
소방본부가 자원봉사자의 출입을 막는데에 기자들 또한 한 몫을 했는데 생생한 현장을 찍기 위해서 자원봉사자들의 조끼를 빌려입고 현장으로 들어가 작업을 방해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런 기자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자원봉사 조끼가 돈받고 팔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3. 도굴꾼
참사가 벌어진 현장이 백화점인지라 도굴꾼들 또한 성행했는데, 살려달라는 지옥 속에서도 제 욕심을 먼저 챙기는 이들의 모습에 많은 이들은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아래는 그 대표적인 사진이다.
이 여인 외에도 바지 안에 몇 벌의 바지를 껴입고 도주하다가 잡힌 청년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4. 삼풍그룹일가와 재판
이 지옥같은 참사에 화룡점정을 찍은 이들은 참사의 책임자들이었다. 이준 회장은 본디 중정출신 인사로 인맥을 통해서 삼풍그룹을 결성한 인물이다. 공격적인 인수확장의 대명사로서 단박에 재계 30위까지 뛰어오르는 기염을 토해낸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이었는데, 진짜 비범한 것은 이 작자의 정신상태다. 아래는 그의 인터뷰 영상이다.
삼풍 참사의 재판은 1996년 8월에 확정되는데, 당초에는 책임자들에게 미필적 고의를 바탕으로 무기징역을 때려야한다는 말이 높았으나, 이 미필적 고의를 증언해줄 증인이 참사로 사망하는 바람에, 이들은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처리되었다. 이는 행위자가 중한 죄를 벌이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검찰이 밝혀내야만 중한 죄가 적용되는데 그것을 밝혀내지 못한다는 법적 원칙의 결과였다.
참고로 미필적 고의는 무기징역 내지는 5년 이상의 형량을, 과실치사는 5년이하 내지는 2천만원의 벌금을 내야한다. 이 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냐는 것이다. 제대로 인식하는 것과 안일하게 생각하는 차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보험금을 타기 위해 집에 불을 질렀을 경우에 옆집까지 불이 번져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어쩔수 없다고 생각하고 저지르면 미필적 고의, 만약 불이 번지면 연기 때문에 바로 깨어나기 때문에 절대로 죽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저지르면 과실치사가 된다. 문제는 둘의 입증이 어렵다는 것_편집자 주)
왼쪽부터 이영길 시설이사, 이한상 사장, 이학수 구조기술사, 이준 회장
결국 이준 회장은 7년 6개월의 형량을, 이한상 사장 또한 7년 정도를 받았는데 이는 사법계에서 최대한으로 때릴 수 있는 최고 형량이었다. 원래는 5년이 한계였지만 뇌물혐의의 가중처벌로 간신히 7년을 집어넣은 것이다.
후일 이준회장은 2003년에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으나 노환으로 당년도에 사망했다. 부디 지옥에 이 자를 위해 마련된 자리가 있었기를 간절히 빈다.
이한상 사장 또한 출소했는데 아무래도 유전적으로 하자가 있는 집안이었는지 나와서 한다는 이야기가 자신이 겪은 시련은 영적전쟁의 일부분으로 하나님이 내게 내리신 시련이라는 귀신 시나락까먹는 소리였다.
이들이 받은 형은 실질적으로 솜방망이 처분이나 다름 없었지만, 이들에게 내려진 벌금만큼은 막대했는데, 삼풍이라는 거대기업을 다 거덜내고도 부족할 정도였다. 이 부족분은 서울시에서 충당했다.
결국 삼풍기업은 순식간에 폭삭 망해버렸고, 삼풍에서 일하던 이들과 그 하청업체 사람들은 순식간에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로 내몰리는 등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또 많은 사람을 못 살게 만들었다.
끔찍한 참사에 많은 국민들이 불안에 떨자 국가에서는 대대적인 안전검사를 실시했으나 절망적이기 짝이 없는 성적표를 받아든다. 한국 건물의 단 2%가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부실시공이 단순한 재물사고가 아닌 자기 목숨이 걸린 일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박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부실시공이 비리와 연계되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부정부패에 대한 막대한 관심으로 비리척결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건축계에서는 무량판 구조는 절대 지어서는 안 되는 금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무량판 구조였기에 5년이나 버틴거라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현재까지 무량판 공법은 시공 되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무량판 구조 mushroom construction
건축물의 뼈대를 구성하는 방식 중 하나로 보(beam) 없이 기둥과 슬래브(slab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바닥)로 구성된다. (그림 1의 B 플랫 슬래브 참조) 간단히 말해 기둥들이 각 층의 무게를 지탱하는 방식이다. 철제 대들보를 설치하지 않아도 되지만 설계시 정확하게 무게 배분을 해야 하며, 기둥 주위의 슬래브는 하중을 많이 받기 때문에 보강을 해야한다. (아래 그림 2 참조) 그러나 삼풍백화점은 건물 구조 변경, 시공 후 일부 기둥 제거, 설계시 32인치였던 기둥을 23인치로 만드는 등 여러가지 요인들로 인해 무게 배분에 문제가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옥상이 견뎌낼 수 있는 하중의 4배가 넘는 냉각탑의 무리한 이동으로 결국 붕괴되었다. (작성_편집자)
그림 1
그림 2
6. 여담
세월호가 우리나라 정치계의 바닥을 보여줬었다면, 오래전 일이지만 삼풍은 우리나라의 바닥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특종을 위해서, 욕망을 위해서 고통받는 이들을 외면하는 풍조가 있다는 것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그러한 것을 고치기는 커녕 오히려 남의 상처를 보지 못하는 괴물이 되어버린 실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괴물은 오랫동안 수면 근방에 있었지만 이제는 거리로 나오고 있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는 심연 또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는 말을 니체는 남겼다. 우리는 대체 그 긴 세월동안 무엇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한때 이성을 부르짖으면서 본능을 몰아내고 자신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없다. 인문학이라 부르는, 자신을 찾는 구도의 행위는 배고픔을 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척받는다. 이는 하루하루 먹을 것을 찾아 허덕이는 비루한 짐승이나 다름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허나 사람이 발전함에 있어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퇴화로 가는 길일지니, 변화는 없고 단지 고여 썩어가는 물에 불과하게 된 것이리라. 부디 우리가 들여다보는 심연이 판도라의 상자이길 빈다. 적어도 인간이라는 종은 많이 먹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를 고민할 줄 아는 생물이기에 희망 또한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옛날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같은 것이다. 절망적인 순간에 어떻게 나아질 수 있겠냐는 의문이 들면서 포기하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지나가는 순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결국 끝에는 빛이 있고 그 어느 때 보단 빛보다도 환하게 빛나는 빛이 비칠 것임을 우리는 배웠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에게는 몇 번이고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돌아서지 않는다. 왤까?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이상이 있었기 때문에 돌아서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이상이 무엇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 대답은, 적어도 세상은 아직 선함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싸울 가치가 있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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