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은 하나의 세계였다. 월남전은 군대라는 바퀴와 함께 파월 기술자라는 또 다른 바퀴가 함께 굴러가는 수레와도 같았다.
당시에는 월남에서 제대 한 후 현지 회사에 취직을 해서 눌러 앉은 사병들도 있었다.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일자리를 찾기 힘든 때였기에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몇 달씩 제대를 연기하면서까지 취직을 하기 위해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있었다.이것도 말단 중대에 있는 사병들은 정보가 없기 때문에 그런 기회가 있을 수 없었고, 보직이 좋은 사병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물론 기술자들이나 현지 취업을 한 사병들이나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지만 보직에 따라서는 단순히 월급만 받는 것이 아니었다.대부분 미군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융통성이 많았다.왜냐하면총알을 쏘는 것이 아니라 달러를 갖다 붓는 것이 미국이 월남전을 수행한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군수물자를 빼돌려서 재미를 보던 사람이 처음에는 현지 실정을 잘 몰라서 엉뚱한 물건을 잔뜩 빼돌렸다가 낭패를 본 적도 있었다.전쟁통이기 때문에 생활용품이 필요한 것인데 당장 필요가 없는 고가품을 빼 돌렸다가 처분을 못해서 낭패를 본 것이다.보급품에는 책걸상을 비롯하여 침대,이불,담요,식기 등 식품과 소모품들을 제외한 온갖 잡다한 것들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전쟁 중이었기에 언제 어디로 피난을 떠나야 할지 알 수 없는 월남인들에게 주로 필요했던 품목은1인용 모기장,모기약,홑이불로 쓸 수 있는 침대 시트 등 어떻게 보면 시시한 것들이었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 보급품 중 하나인 방충제
다음은 한 파월기술자(이하 A)가 경험한 일이다.
보급창에서 짐을 싣는 동안 기다리는데 옆에 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어서 그 곳을 관리하는 미군에게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왜? 좀 실어 줄까?재봉틀인데."
했다.박스 하나를 뜯어보았더니'싱거'표 재봉틀이 여러 대씩 들어있었지만 월남에서는 인기가 없으리란 걸 짐작했다.피난 다닐 때 그 무거운 재봉기를 들고 다닐 리 없었다.그렇지만 한국에 가져가면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만 실어 줄래?"
A가 부탁하자마자 미군은 그걸 처분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났었던 사람처럼 여러 상자를 차에다 올려 주었다.보급창을 빠져나온 나는 곧바로 부두로 향했다.부두에 한국LST가 정박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걸 실어드릴 테니까 가져가서 알아서 처분하시고 돈이 되면 그중 얼마를 나눠주쇼."
A는 함장을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찔러 보았다.처음에는 딴 사람한테 부탁하라고 고개를 가로젓다가 한 번만 해 보라고 강권하자 마지못해 응낙을 했다.A는 트럭에 실려 있는 박스를 배에다 부려 놓았다.
석 달 정도 지나자 그 함정이 다시 돌아왔다.한국까지 다녀오려면 그 정도 걸린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어 A는 때를 기다렸다가 부두로 찾아갔다.배에 오르자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석 달 전에 실었던 재봉틀이 틀림없었다.
"아니,왜 도로 가져왔습니까?"
"부산에 가보니까 상륙할 방법이 있어야지요.
아무 서류가 없으니까 세관원도 어쩔 수 없더라고요.
돈도 돈이지만 재봉틀 한 대가 아쉬운 게 우리 나라 실정 아닙니까.
공업용이니까 마산 공단에 갖다 주면 그걸로 엄청난 외화를 벌수도 있는데...
그래서 사정을 해 보았는데 끝까지 안 된다는 거예요."
선장은 돈벌이보다는 애국심 때문에 더 재봉틀이 아까운 모양이었다.
"그냥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당신이 날 의심할 테니 할 수 없이 다시 싣고 왔지요.
그런데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다시 싣고 갈 수도 없고."
매우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A는 선장을 괜히 부대물건 도둑질에 끌어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선장에게 미안했다.재봉틀을 한국에서 못 내린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장과 A는 머리를 맞대고 재봉틀 처리 방법을 찾았다.보급창으로 되돌려 줄 수도 없었다. 그들은 궁리 끝에 바다 속에 처넣기로 했다.그 날 저녁 선장과 A는 땀을 흘려 가며 재봉틀 수십 대를 캄란만 바닷물 속에다 밀어 넣었다.
한 번은 자동차 타이어가 많이 쌓여 있어서 싣고 나온 적이 있었는데 월남에서는'천하에 쓸모 없는 물건‘이어서 남몰래 숲 속에다 버리느라고 애만 먹기도 했다.그러고 나서 언젠가 인근 지역을 지나다 보니 돼지우리 앞에 타이어를 서로 묶어서 담을 쌓아 놓고 그 속에 돼지를 기르고 있었다.
월남전 당시 흔히 신었던 타이어로 만든 신발
1971년 이후 한 때 월남엔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많이 주둔하고 있었다.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은 잘 모르지만 내 짧은 생각으로는 한국군이 미군 보다 철수가 늦었던 것은 아마도 돈이 필요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어려운 국가의 처지에서는 월남에 하루라도 더 있는 것이 돈을 버는 셈인 것이었다.실제로73년3월에 철수 하는데72년9월까지 새로운 병력이 충원되었다.
1973년1월27일 자정(현지시간1월28일08시)을 기해 휴전이 공표되었다.
전쟁터에서는후퇴 할 때가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것은 상식이다.그런데 이 상식을 무시했다가 피해를 보는 일이 월남전에서도 역시 벌어졌었다. 1맹호사단에서는19번 도로 안케 패스 전투의 치욕을 들 수 있고, 백마사단은1번 도로 붕로만 사고를 빼놓을 수 없다.
붕로만 고개에 대한 경계책임은 제29연대 제1대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휴전을 하루 앞둔1973년1월27일 밤23시경 붕로만 고개의 목교가 베트콩에 의해 폭파되고 베트콩기가 초소에 걸렸다.베트콩은'현상 동결의 휴전협정'에 따라 그들의 지배지역을 증명하기 위하여 베트콩기를 휴전 전날 밤 전국적으로 게양하라는 월맹의 비밀지령에 의해 휴전 발효와 함께 베트콩기를 게양한 것이다.
사단장과 연대장의 질책을 받은 제1대대장 유재문 중령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날이 밝아지자 자신이 직접 현장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3중대에서1개 분대를 차출하여 함께 장갑차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현장 도착시간은 휴전 발효 불과1시간5분을 남겨놓은06시55분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대대장 일행은 베트콩을 우습게 알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장갑차에서 내려서"웃기는 놈들..." 하고 코웃음을 치며 교량에 다가갔다.맨 앞에서 심재철 중사가 문제의 베트콩기를 뽑아가지고 장갑차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부근에 잠복하고 있던 베트콩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며B-30적탄통을 발사했다.순식간에 대대장 유재문 중령과 심재철 중사 등6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6명이 부상했다.
배원식 연대장은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 일대에 포병사격을 퍼부었다.그러나 베트콩은 암석지대의 천연동굴에 몸을 숨겨 아군의 포병화력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이제 연대가 당면한 문제는 적의 제압이 아니라 숨진 시체의 회수에 있었다.특공조까지 투입하며 시체 회수 작전에 돌입했으나 적의 저항은 누그러들지 않았다.
이세호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소탕작전을 명령했지만 막상 저녁 무렵 작전을 개시하고자 하는 시점에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사연은 이세호 사령관이 흥분해서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깜박 잊고 있고작전을 승인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휴전이 발효된 것을 깨닫고 취소시킨 것이다.한 마디로 최고 사령관부터 일선 지휘관까지 갈팡지팡이었다.
연대장은 닌호와 군청에 파견했던 연락장교 이형관 대위에게 확성기가 달린 장갑차를 빌려오도록 하여 백기를 달고 현장에 보냈다.그리고 확성기를 통해 적측에 방송을 했다.
"우리는 휴전협정을 지켜 공격하지 않겠다.
그러나 우리는 숨진 장병의 시체를 찾아야 되고 그래야만 철수를 할 수 있다.
시체를 돌려 달라."
고 애걸복걸하였다.아마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저자세로 베트콩에게 사정사정한 예는 이 경우가 유일할 것이다.이렇게 확성기를 통해2일간에 걸쳐 그들을 설득시켜 겨우 시체를 회수할 수 있었다.이러한 굴욕적인 과정을 겪어가며 백마 사단 제29연대는1번 도로를 사용하지 못하고 미군 수송기를 이용하여 도망치듯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제29연대는2월3일부터6일 사이에3.900명의 병력을39회,화물3,080톤을77회 C-130송기로 나르며 냐짱 공항을 통해 철수를 완료하였다.
나중에 영현을 수습할 때 대대장의 손목에 있어야할 롤렉스 손목시계가 대대장을 경호해야할 중사의 손목에 있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아마 전사한 중사는 자기가 전사할 줄 모르고 대대장보다는 명품을 사수(?)해야 할 사명감을 더욱 강하게 느꼈던 같다.
당연히 한국은 미군이 제공했던 장비를 최대한 보유한 상태에서 철군을 원했지만 미국의 계획은 남베트남에게 이양하려는 것이었다.미국이 한국군에게 제공했던 장비의 소유권과 철수비용,국내에서의 운용방안 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군은71년12월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1973년2월6일 십자성 부대 산하 수송부대는 물건 하나도 베트콩에게 넘어 가지 못하도록 땅에 묻을 것은 묻고, 태울 것은 태우라는 지시와 함께 모든 차량의 부속품을 신품으로 갈아서 완전히 새 차를 만들어서 고국으로 보냈다.정 병장은 철수 차량 대열의 마지막 후미5톤 견인 트럭을 탔다.냐짱으로 향하는 다리를 이미 베트콩이 파괴를 하는 바람에 월남군이 엉성하게 설치한 부교 위를 차량이 한 대씩 조심해서 건너갔다.마지막으로 견인트럭이 통과하려고 하자 월남군 공병 장교가 다가오더니 견인차가 지나가면 다리가 무너질 우려가 있으니 자기들이 제공하는 지프차를 타고 견인차는 놓고 가라고 했다.이미 선두의 모든 차량들은 다리를 건너가 버렸고 무전기도 없어서 누구에게 보고를 하거나 지시를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월맹군 장교의 말대로 견인차를 두고 가거나 끌고 가거나 독자적으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때 운전병이 정 병장에게"야!공포 쏴!"라고 해서M16으로 월남군 장교의 발밑에 발사를 하자 월남군 장교가 놀라서 뒤로 물러선 틈에 전진을 해서 월남군 장교의 말대로 금방이라도 걸고 부서질 듯 흔들거리는 다리를 숨도 못 쉬고 건너서 무사히 견인차를 한국으로 가져 올 수 있었다.견인차를 탐내는 월남군의 속셈을 알고 있으면서 자기들의 안전만을 위해서 지프차로 갈아 탈 수는 없는 일이고 차 한 대라도 고국으로 가져가려는 마음에 생명을 걸고 감행한 것이었다.정 병장 일행뿐만 아니라 당시 파월 장병 모두는 가난한 나라 살림 때문에 이렇게 해야만 했었다.
월남에서 철수 할 때 우리는 가난한 나라 군대답게 가지고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간다는 원칙으로 짐을 꾸렸다.심지어는 베갯속은 버리고 베갯잇까지,깔판으로 쓴다고 탄약상자를 분해해서 챙길 정도였다.
귀국박스 쌀 때 저런식으로 비닐을 넣어 방수처리를 했다고.
50년 전 한국군에게 월남전은 새로운 세계였다.한국보다 더 가난하고 후진적인 월남과 물자가 풍부하고 선진적인 미국 사이에서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많았다.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월남에는 적과 동지가 있었고, 한국군의 물주인 미국한테는 감시와 후원을 받아야 했다.월남과 미국 사이에서 비록 병력 5만 정도의 군단 수준이었지만 넓고 큰 세계가 있어서 사령관이라고 해도 전체를 알 수 없고,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이 아니면 전혀 알 수가 없는 일들이 무수하게 존재했다.그렇기 때문에 참전의 경험이 있는 이들끼리 만나서 이야기를 해도 서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할 정도로 놀랄만한 일들이 많았던 것이다.전반적으로 한국군으로서는 믿을 수도 없고 아쉬울 것도 없는 월남과의 사이에서 보다는 미국과의 사이에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80년대 젊은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던 <전환시대의 논리>의 저자 이영희 교수는 최초로 월남전에 관한 흑과 백의 이분법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비로소 베트남전을 '이성의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정권에 의해 금서가 된 이 책에서는 베트남전 개입은 공식적으로는 월남 정부의 요청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먼저 미국에‘월남전 카드’ 를 제시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민주주의 질서를 무너트리고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소장은 쿠데타 승인을 받기 위해1961년11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해서 미국에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먼저 밝혔다.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과 전면 철수,두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는 중이었던 케네디는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결국 케네디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댈러스에서 암살되고 만다.
그러나 후임 존슨 정부는1964년 봄부터 베트남 전쟁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최대54만 명까지 병력을 늘리는 한계에 도달하자 한국 등25개 우방국에게 베트남 파병을 요청했다.여기에 긍정적으로 응답한 나라는 한국과 태국,호주,필리핀,뉴질랜드에 불과했다.이때부터 미국은 적극적으로 한국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1965년5월16일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어 다시 미국을 방문 하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사정이 달라졌다.박정희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들은 존슨 미국 대통령이 보낸 대통령 전용기 보잉707에 몸을 실었다.그 당시 가난한 한국은 대통령 전용기가 없었지만,미국 대통령이 자기가 타고 다니는 전용기를 이 작은 나라에 보낸 것은 매우 드문 사례였다.그만큼 당시 베트남 전쟁이라는 개펄에 빠진 미국으로서는 한국의 도움이 절실했다.
다음날 워싱톤에 도착한 박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영접한 존슨 대통령은 큰 리무진에 동승해 영빈관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13만 명의 시민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앞차에는 양국 정상이,뒤차에는 양국 영부인이 타고21대의 모터사이클이 선도하는 행렬이었다.이날 오후5시 백악관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렸다.
이틀 후 뉴욕에 도착한 박정희 대통령 일행은 시내로 들어가면서 또다시 카퍼레이드를 벌였다.번화가인 브로드웨이를 지나가는 동안 고층 건물에서 오색종이들이 눈처럼 쏟아졌다.한국 대통령에 대한 이 같은 융숭한 대접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
해외나들이 매니아이신 따님 생각이 절로 난다능...
그러나 월남은 힘을 가진 놈들끼리 서로 정권을 강탈하는 곳이었다.대통령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도둑놈 투성이었기 때문에 그 탓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죄 없는 민중들뿐이었다.
미국은 월남전을 핑계로 군수산업이라도 일으켰지만,남의 나라 전쟁에 끼어들어 아쉬울 일이 없는 한국군이 하는 일은 도둑질뿐이었다.군대 안에서 상납을 하는 풍토가 고질화된 것도 월남전 참전 이후부터라고 하니 월남전이 한국군을 얼마나 병들게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하다못해 내가 겪은 것처럼 때가 되면 일등병이 상병으로 자동적으로 진급이 되는 것 -월급은 어차피 미군이 주는 것인데도- 에서도 진급한 첫 달 월급은 사병계에 상납을 해야 되는 판이니 다른 일을 말해 무엇을 하겠는가?
잘못된 전쟁답게 전투에서 죽는 사람은 죽고, 조금이라도 힘을 이용하여08 (헌병 주특기가80으로 시작되는 것에서 연유한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다는 군대 은어,즉 헌병은 '도둑'이라는 의미) 을 쳤다.국가는 국가대로 미국을 상대로08을 쳐서 막대한 군사 장비를 한국으로 빼돌렸다.
장교 사병할 것 없이 돈을 만질 일이 전혀 없어서,아무 것도 모르는 전투원들을 빼놓고는 조그마한 특권이라도 있다면 그것을 최대한대로 이용해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긁거나 뜯어서 한 살림 장만하기에 급급했다.차만큼 흔해빠진 헬리콥터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주야로 높은 사람들의 구두나 닦고,아침이면 치약까지 짜서 바치며 입맛 없는 장교를 위하여 땀을 흘리며 밥을 짓고,찌개를 끓이고 팬티까지 다림질을 해서 줄을 세우던 딱까리 (당번병)들의 머릿속에도 "어떻게 하면 돈을 벌어 갈까?" 하는 생각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원들은 귀국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본국의 은행에 송금한 몇 백 달러짜리 저금통장을 손에 쥐거나,눈치껏 모은 일본제 전자제품 몇 점을 베니어로 짠 귀국 상자에 넣어서 배에 싣고 돌아가게 된다.그러나 철수 병력인 우리들은 더블백만 짊어지고 돌아왔다.
월남에서 물자와 함께 들어온 것이 바로‘짜웅’문화이다.
베트남에서는,할아버지나 손윗사람인 남자에게 인사를 할 때,Chao (안녕하세요) Ong (할아버지)라는 두 단어가 합쳐져‘짜오 옹’이라고 부르게 되는데,이것이 한국인에게 좀 더 발음하기 편한 한국화(?)된 베트남어로 변해서‘짜웅’이 된 것이다.
미군은 막대한 예산을 써가면서 대민 사업을 진행하였지만 소수 부정부패한 권력층에게만 혜택이 집중적으로 돌아갔다.한국군도 대민사업을 했지만 가난한 사정을 알기에 주로 초등학교 설립,교량/배수구 공사,도로건설,의료사업 등 주로 지역주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유익이 가는 것으로 위주로 대민사업을 펼쳤다.그러나 아무렇게 해도 이러한 대민사업에서 '떨어지는'각종 콩고물(?)을 챙겨보고자,몇몇 베트남 관료나 지방 유지들은 끊임없이 한국군 요새를 드나들었다.콩고물을 챙겨먹기 위해서라도 이들 베트남 인들은 한국군에게 무조건 잘 보일 필요가 있었고,따라서 요새에 드나드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한국 병사들에게 나이와 계급을 불문하고 계속 "Chao Ong!"이라는 인사를 던졌다.
대민사업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담당자에게라면 그렇다 치더라도,나이 지긋한 아버지뻘 되는 베트남 사람이20대 초반 한국 병사들에게 굽실거리며 인사를 하고 기분을 맞추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좋게 보이지만은 않아서 병사들은 "저 쌔기 또 짜웅하러 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각종 아첨,부패,비리,뇌물의 상징어인 '짜웅'이란 말은 월남에서 돈을 만지다 돌아온 한국 군대에 급속하게 퍼진 부패와 함께 '공용어(?)'로 확산이 된 것이다.
미군과 한국군의 아사무리한 관계
모든 전쟁에서와 같이 월남전에서도 처음에는무공훈장은 적 사살자의 수를 기준으로 삼았었다.그랬더니 베트콩으로 확인되지 않은 양민의 희생이 늘어났다.이러한 부작용이 심해지자 훈장 수여 기준에 무기의 노획 수를 적용했다.그러나 이번에는 군수품을 팔아 그 돈으로 월남군이나 민병대로부터 소총 등 각종무기를 구입해서 노획무기라고 전투상황을 꾸며 보고하는 또 다른 병폐가 생겨났다.전쟁터에서 지휘관들의 공명심에 사로잡힌 지나친 경쟁이 가져온 허위전과보고는 사령부를 골치 아프게 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골치가 아픈 문제가 있었다.그것은 한국군이 전사했을 경우이다.전공에 따른 훈장이야 한국 정부가 주는 것이지만 한국군이 전사하면 보상은 미국에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남의 나라 돈으로 싸우는 기묘한 전쟁에서는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72년4월에 벌어진 악명 높은 안캐패스 전투는 과거와 달리 월맹 정규군과의 전투였기 때문에 포격을 당하여 아군의 피해가 심했다.이전의 전투처럼 총알이나 적이 설치한 지뢰 때문에 전사를 해도 비교적 신체가 온전히 보존된 채로 전사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이 조각이 나서 전사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다.이 전투에서 미군은 한국군이 전사자 숫자를 부풀릴 우려가 있다고 보고 훼손 되지 않은 시신을 요구했다.그 결과 지옥 같은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전우들이 전사자들의 시신을 조립하기 위해서 멀리 날아 가버린 팔 다리,목을 찾을 수가 없어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월남군의 시신을 야전삽으로 찍어서 숫자를 맞추는 곱빼기 지옥의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었다.생사가 갈리는 것 이상 의미가 있을 수 없는 것이 전쟁터이지만 한국군의 월남전은 훈장과 전상보상금이 걸린 이상한 전쟁이었다.
1970년 주 월남미군사령부가 돌연군표개혁,즉 군대 내에서 화폐개혁을 단행한 사건이 있었다.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한국군이 보유하고 있던 군표가 미군이 한국군에게 할당한 군표의 액수보다 엄청나게 많은 액수를 보유했던 것이었다.뿐만 아니라 한국기업과 기술자들이 보유한 군표액수도 엄청났고 또한 미 군표를 이용하여 미국 본토 달러와 교환하는 돈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 되었으니 그 액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연히 우리정부의 지시는 어떻게 해서든지 미군과 협상하여 군은 물론 민간인이 가지고 있는 군표까지도 전액을 교환하라는 것이었다.주월사령부 부사령관이 협상대표로 나서서 앞으로 한국군은 미 군표를 사용할 때 주 월남한국군이 발행하는 쿠폰을 같이 사용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한국인이 보유한 막대한 미 군표를 전액 교환하여 휴지조각이 될 번한 한국인의 돈을 살려내는데 성공하였다.
주 월남미군사령부로부터 퀴논지역에서 담배가 가득히 적재되어 있는 미군PX대형 컨테이너1대가 실종되었는데 컨테이너가 한국군 부대의 영내로 들어갔으니 조사하여 주기를 바란다는 요청이 정식으로 들어왔다.우리 사령부에서 현지부대에 나가 조사할 때는 이미 컨테이너 자체를 통째로 땅에 파묻어버린 후였다.이 사건은 고급지휘관까지 인지된 사건이었기에 사령부의 입장에서는 문책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미군 측에는 사실무근이라고 통보한 것은 물론이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1972년 여름의 어느 날 주 월남미군 항만사령부는 귀국Box를 실고 퀴논 항을 출항하여 항해중인 수송선을 돌연 귀항시켰다.그 이유는 수송화물의 적재 착오로 재점검을 실시하기 위해서라는 핑계였다.그리고 한국군의 귀국Box를 다시 하역하면서 기중기로Box를 들어 옮기다가 실수인 것처럼3개를 떨어트리자 Box가 깨지며 물건들을 쏟아졌는데 특히 탄피들이 우루루 쏟아졌다.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미군측은 한국군이 주 월남한국군에게 지급한 미군의 최신무기와 장비를 귀국 Box속에 담아서 한국으로 운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공작이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미군은 한국군을 어떻게 평가했던가?
스탠리 로버트,제임스 라우톤 콜린스 공저의<베트남 참전 동맹국(Allied Participation in Vietnam)>에서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여러 동맹국의 참전배경 및 주요 전투성과를 설명하고 있다.
참전 초반에는 한국군 지휘부가 지나치게 신중하게 준비하는 모습에 미군 수뇌부는'한국군이 적극성이 결여되어 있고 사상자를 내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오해를 하였으나1966년1월'플라잉 타이거'작전에서11명의 한국군이192명의 베트콩을 사살한 전과를 보자 단숨에 뒤집어졌다. 그러나 초반의 이런 긍정적인 평가와 달리 파병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미군의 평가가 점차적으로 나빠졌다.
70년부터71년까지 제1야전군 사령관이었던 콜린 중장은
"한국군은 헬기를 비롯한 각종 지원을 과도하게 요구하고 있으며
한 번의 작전 종결 후 다음 작전까지 너무 소극적이다."
"한국군2개 사단의 성과는 미군1개 여단정도에 불과하다."
"이전과 달리 한국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자
오히려 소극적이 되었으며 덜 주는 쪽이 오히려 더 낫다."
라고 혹평했다.
콜린의 후임인 브라운 중장 역시
"한국군은 융통성과 창의성이 없으며 자기 책임구역에 대해서만 치중하고 있다."
"한국군은 자기 책임구역에 대해서는
베트콩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성과를 냈고 안전을 확보했으나
남베트남군과의 협력이나 지역 주민과의 관계에서는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고 평가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군을 필요로 할 때에는 매우 효율적인 군대라고 높이 추어올리다 한국군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여야 할 필요가 생길 때에는 한국군이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평가했다.
PS. 딴지 편집진에서 내 글을 소개 하면서 발뺌용(?)으로'보내 온 글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긴 어렵지만'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본 글에서는 단 한 글자의 허위나 심지어는 과장 조차 없다.왜냐하면 만일에 그렇다면 함께 떠났다가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온5099명의 전우들의 명예를 욕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전체 내용은 주변 전우들 사이에서 교차 확인한 것이거나 오랜 시간을 거쳐 온라인에서 확인된 내용들이다.
오늘 얘기는 그야말로 '사람들 다 아는 얘기'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11월의 찬 바람 맞으며 오들오들 떨다 들어온 오늘 같은 날 해 봤으면 싶어서.
2007년 8월 경향신문과 음악전문 웹진 가슴네트워크(이하 '웹진')는 53명의 심사위원단이 선정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발표한다. 물론 음악의 세계를 랭킹으로 구분할 수는 없고 사람에 따라 거기에 들어간 음반에 야유를 보낼 수도 있고 못 들어간 음반을 들고 항의의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음악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은 나로서는 그 가치를 논할 깜냥은 되지 않고 그 리스트를 훑어 보는 것만으로 황홀하다. 이 100대 명반을 묶어 판매하는 상품이 있다면 카드를 만지작 거릴 것 같아.
그 랭킹 1위는 들국화의 첫 음반 <들국화>다.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세계로 가는 기차'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등등 곡 하나하나가 레전드가 된 음반이고 "한국 대중가요 르네상스의 신호탄"이자 "한국 대중음악을 들국화 이전과 들국화 이후로 나눈" 명반이었지. 이 뒤를 이어 2위를 마크한 음반은 "발라드를 이 음반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는 극찬의 대상이지. 바로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야.
이 음반에 실린 감사의 인사는 세 사람과 기타 등등에게로 향한다. 자신의 창작 과정의 산고를 지켜봐 준 서울 스튜디오 최세영. 그리고 '음악적으로 인간적으로' 도움을 준 조원익 그리고 '반주를 도와주신' 김애란이 세 명이지. 여기서 우리는 김애란이라는 이름을 주목해 보자. 그녀는 바이올린 전공의 음대생이었는데 플롯도 잘 불었어. 이 <사랑하기 때문에> 음반에 등장하는 플롯 연주는 그녀의 것이지. 하지만 그녀는 플롯으로만 이 음반에 기여한 건 아니야. 오히려 유재하는 '반주를 도와주신'이라기보다는 '이 음반의 실질적 창조자'라고 부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왜냐면 그 음반의 노래는 죄다 그녀 때문에 만들어진 노래였으니까.
그녀는 유재하의 여자친구였고 보통의 연인들처럼 밀당을 했고 때로는 토라지고 헤어지자는 야멸찬 선언을 주고받기도 했고 떨쳐지지 않는 그리움에 몸서리도 쳤고 다시 한번 잘해 보자고 두 손 모으기도 했고 재회의 기쁨을 누리기도 했어. 유재하 음반의 노래들은 글자 그대로 그들의 연애사(戀愛史)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하네.
유재하는 그녀를 음악대학 연합 동아리쯤 되는 곳에서 만났다고 해. 유재하는 꽤 오랫동안 짝사랑을 했고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며 구애를 했다는구나. 그때 마음을 담은 노래가 <그대 내 품에> 겠지. 이 노래는 짝사랑 심하게 하는 사람들이 부르면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해질 것 같다."내 취한 두 눈엔 너무 많은 그대의 모습 살며시 피어나는 아지랑이 되어 그대 곁에서 맴돌고 싶어라"
화류계 쪽으로 안테나가 잘 발달하지 못해서 학창 시절에도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가장 늦게 아는 축에 들었고 네가 그 녀석이랑 연애한다는 것도 아마 한참 뒤에 알았었지만 일단 정보가 입수된 뒤엔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몃 슬쩍 내비치는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한 행동들에 혼자 미소를 지은 적이 많았네. 특히 에로스의 황금 화살 꽂은 채 누군가를 마주하게 된 가련한 청춘들의 가슴앓이들이란. 허긴 뭐 어디 청춘 뿐이겠느냐만. 언젠가 친구 한 녀석은 좋아하는 여자가 든 소주잔에 질투를 느낀다는(그 예쁜 손끝과 닿아 있으므로) 경천 동지의 멘트를 쳐서 내 배꼽을 천정에 붙여 놓기도 했었다만 유재하도 비슷했던 것 같아."술잔에 비치는 어여쁜 그대의 미소 사르르 달콤한 와인이 되어 그대 입술에 닿고 싶어라"
그렇게 그녀 주위를 맴돈 지 2년 만에 유재하는 답장을 받는데 그 답은 흔쾌하지 않았다고 해. 사실 이때가 제일 애매하겠지. 완전한 '뻰찌'도 아닌 것이 시원스런 오케이도 아닌 것이 우리 이래도 될까? 내지는 마음에 확신이 안 선다 뭐 이런. 가부간에 결단을 내려 달라기엔 무섭고 이쪽이 끊자니 싫은 상황. 그때 지은 노래가 영화 <살인의 추억>에 등장한 '우울한 편지'였다지."나를 바라볼 때 눈물짓나요. 마주친 두 눈이 눈물겹나요. 그럼 아무 말도 필요없이 서로를 믿어요. 어리숙하다 해도 나약하다 해도 강인하다 해도 지혜롭다 해도 그대는 아는가요 아는가요. 내겐 아무 관계 없다는 것을"
그렇게 밀고 당기고 타전하고 반송되고 등등을 거듭한 끝에 사랑의 문이 열린 순간만한 축복의 기쁨을 무엇에 비기리오. 유재하 1집 속에서 유재하는 아픔과 갈구와 좌절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신 난다. 그리고 그 신명은 모든 거리낌을 없애고 다소 무리한(?) 요구까지 하게 되지."가슴으로 느껴보세요. 난 얼마만큼 그대 안에 있는지 그 입술로 말해보세요. 오래전부터 나를 사랑해 왔다고 말이에요."(우리들의 사랑 중에서)
하지만 항상 그렇듯 사랑을 이뤄가는 과정이란 게 무수한 오해의 크레바스와 어긋남의 절벽으로 점철돼 있는지라 그들에게도 이별은 찾아왔고 여자친구는 유학을, 유재하는 군대를 선택하게 돼. 이쯤 되면 꽤 극단적인 분리 설정이고 대개는 인생의 새로운 장르에서 새로운 인연을 찾아서 과거를 돌돌 말아 추억장이라는 이름의 장롱에 넣어 두는 게 일반적인 흐름이지만 유재하는 끝내 그녀를 잊지 못해. 무작정 옛 연인을 찾아 비행기를 타고 미국까지 가지만 그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어. 일설에 따르면 통화는 됐는데"그런 사람 없다."는 애인의 목소리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 채 꺼이꺼이 태평양을 넘어왔다는 말도 있고.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 그 어디에서 날 기다리는지 둘러보아도 찾을 수 없네"(가리워진 길 중)
잡힐 듯 말 듯 잡히지 않던 그녀는 마침내 무지개다리를 건너 목메어 기다리던 유재하에게로 돌아왔어."그대여 힘이 돼 주오. 나에게 주어진 길 찾을 수 있도록"(가리워진 길 중)이라고 노래한 유재하에게 화답하기라도 하듯 그녀는 유재하의 1집 제작에 자신의 음악을 보탰고 그녀의 플롯 소리는 한국 대중 음반 역사 100대 명반 중 랭킹 2위 <사랑하기 때문에>의 일부로 길이 남게 된다.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유재하의 노래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지고 지금도 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11월 (1일)이 되면 그의 독특한 목소리와 함께 리바이벌되는 '사랑하기 때문에'는 바로 돌아온 그녀를 위해 지은 노래였다는구나.
세상에는 음반도 많고 사연도 다양하고 곡절도 풍성하고 스토리도 지천이지만 음반 하나에 이렇게 한 천재의 연애사가 오롯이 담긴 일은 그렇게 흔치 않을 것 같다. 더하여 영화 같은 이야기 하나. 유재하가 죽은 뒤 서럽게 울었던 여자친구는 다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는데 까페에서 우연히 유재하의 노래를 들었다고 해. 영국인 주인에게 영문을 물어보니 가게에서 일하던 한국인 유학생이 선물하고 간 노래고 가사는 모르지만 멜로디가 좋아 가끔 튼다는 대답이었다지.
자신의 사랑이 불멸의 나이테가 돼서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대중음악사 불멸의 음반으로 남게 된 것은 그녀에게 영광일까 슬픔일까. 나이를 넘어 시대의 고개를 넘어 여전히 울리는 유재하의 노래를 스마트폰 버튼 몇 번을 누르고 듣는 가운데 떠오르는 질문이다. 너는 어떨 거 같니?
사진은 <사랑하기 때문에> LP판 표지라고 하네. 담뱃불을 형상화하여 아랍 글씨같이 휘갈긴 한글이지만 웬지 향불이 피어오르는 느낌을 주지 않냐? 이것도 천재의 예감이었을까?
어야다 보니 4일간 '택시총량제'라는 조사 알바를 하게 되었다. 처음엔 정말 생소했다. '교통량조사'라고 적혀있어서 일정 구간을 지나가는 택시의 대수를 세는 건 줄 알았다. 근데 알바하기 전날 10분 정도 만났더니 종이를 나눠주면서 숙지하고 오라고 하더라. 난 그때 "이게 뭐야 시바." 이러고 말았다. "뭐 어떻게 되겠지." 하고 한번 읽어보고 치웠다. 그리고 출근을 했다.
암튼, 나를 포함한 총 5명의 남자 알바와 'XX산업관계연구원'에서 우리 '시'로 출장을 나온 직원 3명 총 8명이 우리 '시'의 모든 택시들 중 컴퓨터로 무작위로 뽑은 (개인택시+법인택시) 500대의 택시를 작업하게 되었다. 직원분의 말에 의하면 택시가 몰려들어 정신이 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약간의 추위만 빼면 개꿀알바였다.
2. 미터기엔 신비로운 구멍이 있다
알바들은 직원들한테서 SD카드를 지급받았다. 이걸 잘 조준해서 미터기에 '삽입'한 후 입력 버튼을 누르면...
으잉? 말이여 방구여?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딜, 뭐 시바 어떻게 꼽고 누르란 거야? 그런 신비한 구멍이 있긴 해?
그런 우리들의 황당한 표정들을 본 직원은 택시 한 대가 오자 시범을 보여주었다. 졸라 쉬웠다.
먼저 우리가 다룬 미터기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미터기에도 종류가 있다. 우리가 다룬 종류는 4가지다.
한국MTS, 광신GIT-SMART, 드래곤 골드, 금호KH-TOP(300)
내가 담당한 것은 한국MTS와 광신 미터기이다. 작동하는 방법은 둘 다 같다. 조또 복잡해 보이는 것은 드래곤 골드가 가장 복잡해 보였다. 금호미터기 역시 난이도는 낮다. 몇 번의 버튼질만 하면 끝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 볼 것이다. 기사님들도 처음 본다고 하더라. 한국MTS와 광신의 미터기 여는 방법과 SD카드를 넣는 구멍이 달린 위치는 같다. (위 사진은 한국MTS 미터기를 열고 왼쪽 측면에서 구멍이 보이도록 찍은 사진이다.)
SD카드를 넣으면 이렇게 화면이 바로 바뀐다. 만약 바뀌지 않았을 경우엔 미터기를 OFF하고 다시 ON하면 된다. 그래도 작동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그냥 보내드린다. 아마 기계적 이상이 있겠지. 물론, 그 기계 이상인지 뭔지 모를 원인 때문에 미터기가 고장나 운행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렇게 파란 화면이 나오면 '구분↓' 버튼을 눌러 '5.운수회사 타코 자료 저장'으로 간 뒤 '입력' 버튼을 누른다.(위 사진) 다음엔 '구분↓' 버튼을 눌러서 '4.전체 데이터 저장'으로 간 뒤 '입력'을 누른다. (아래 사진)
직원분 말에 의하면 2개월 정도의 자료를 복사해서 가져간다고 하던데 '전체 데이터 저장'이라는 문구를 보면 그런가라는 궁금증이 들기도 한다.
자, 다음엔 저장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린다. 저장이 다 되면 완료되었다고 글자가 나온다. 그럼 빈차 버튼을 누르고 SD카드를 빼고 인사를 하고 서명을 받은 뒤 끝내면 된다.
그리고 택시마다 저장되는 시간이 다른데. 졸라 짧은 택시도 있고 2~5분 정도 걸리는 택시도 있다. 왜냐고? 아마 미터기에 저장된 데이터 양이 택시마다 다르기 때문이겠지. (저장된 정보가 뭔지는 다시 다루겠다. 뭐 추측이 가능하기도 하다. 별거 아니다.)
아래는 드래곤 골드를 작업하는 모습이다.
미안하다. 이것 밖에 없다. 대놓고 찍기가, 좀 그래서.
드래곤 골드는 2인 1조가 되어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게 된다. 알바생이 조수석으로 들어가서 미터기를 열고 노트북에 연결된 선을 미터기 구멍에 꽂는다. 그러면 나머지 한 명은 밖에서 노트북을 보면서 데이터 복사 (노트북으로 전송)가 잘 되는지 확인한다. 복사된 데이터를 다루는 특정 프로그램이 있더라. 신기했다. 택시와 관련된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니. 이름은 잘 모르겠다. 이것 역시 미안타. 나의 불찰이다.
노트북이 직원분의 몸에 가려 보이질 않는다. 시바... 존나 미안하다. 독자님덜.
그리고 금호는 사진이 없다. 그냥 하다 보니 못 찍었다. 광신미터기 역시 한국MTS와 작업 과정이 같아서 찍지 않았다.
그러면 미터기에서 컴퓨터로 복사해가는 정보가 뭔가? 나도 100% 확실하진 않지만 프로그램 작업을 하는 걸 뒤로 보고나서 졸라 추정하는 바가 있다. 그 화면에 해당 택시가 운행한 거리 / 운행중 영업한 거리 / 금액 2달치(아니면 1달 정도의) 자료가 옮겨져 있는걸 봤으니 아마 이게 포인트일 듯하다.
그럼 왜 이런 작업을 하느냐? (실제로 기사님들 오면 짜증 내는 분들도 있다. 돈도 안 되는데 왜 하냐고.) 궁금한가? 눈치챈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이짓을 하는 우리의 목적은 처음 밝혔듯이 '택시총량제조사'이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택시의 대수를 줄이겠다' 라는 거다.
3. 택시총량제라는 건 왜 하는 거?
택시총량제
택시의 공급과잉 방지를 위해 지역별로 택시총량을 설정해
총량을 넘지 않도록 택시 대수를 제한하는 제도
그럼 택시가 왜 과잉 공급되었느냐? 따져봐야 할 문제다. 근데 여러 이유가 있더라.
먼저 대중교통의 확충, 자가용 및 대여 자동차(렌터카)의 증가와 대리운전업의 성행 등으로 택시 수요는 매년 감소하는데 비해 택시는 과잉 공급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신규 면허에 대한 제재가 없는 것과 감차 보상금에 대한 부담 등도 감안, 감차가 더디게 진행되는 원인으로 꼽힌다. 과잉공급의 이유는 이 외에도 있다. 분명. (그것까지 쓰지 못하는 건 나의 한계다. 정보력이 미개하니, 이해 바란다.)
택시총량제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택시가 너무 많은 것 같으니 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감차하겠다는 것.
이제 저렇게 자료를 모은 뒤에 어찌어찌해서 한다고 결정이 나면 감차는 어떻게 하느냐? 국가에서 택시면허를 사가지고 없앤다고 말하더라. 기사님들에겐 보상금 즉, 면허 값을 받게한다는 것.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쉽지않은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국토부에서 지자체에게 지원금을 쏴준다고 하더라. (택시면허 살 때의 일정 금액) 그게 얼만지 들어보니 기가 막히더라. 대당 350만 원으로 줬다는데 물어보니 택시면허 가격이 약 9000만 원 정도 한다하더라. (물론 지역, 사람마다 다르다.) 나머지는 지자체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만약 100대 정도 감차한다고 치자. 나머지 86억 5천만 원은 지자체가 부담하는 거다.
너무 많은 부담이다. 그래서 계속 운행하는 택시들의 유류보조금 거기서 몇 % 떼서 기금을 따로 만들어 보탠다고 하던데, 아무튼 이거 어려워 보인다. 돈도 많이 들고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해도 보상금이 양도-양수 시 실거래가격으로 따졌을 때 기사님들 스스로가 만족을 해야 하는데, 과연? 연구원 직원 역시 가능성이 낮다고 말하더라.
그리고 감차를 하게 될 경우 대상 선정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걸 직접 물어보기는 초큼 거시기해서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찾아봤다. 택시감차를 신청한 자 중에서 질병 등으로 인해 택시영업을 못하게 된 자와 연장자 순으로 대상자를 선발한다고 하더라. 즉, 지원자를 받는다는 건데 만약 감차를 해야 하는 숫자에 비해 지원자 수가 턱없이 모자랄 경우는 어떻게 하나? 국가에서 면허를 사서 그 돈을 기사님에게 주는 보상금 방식으로 면허를 줄여나가는 건데 아까 말했듯이 어려워 보인다. 역시 돈 문제는 해결하기 졸라 어렵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다른 도시도 힘들어 보이더라.
4. 택시기사의 고뇌
만나게 되는 분들에게 물어봤다.
"장사 잘 되세요?"
"아휴... 손님이 없어... 아침 7시 30분부터 나와서 지금까지 (낮12시) 7천 원 벌었어."
미터기에 약 7만 원 넘는 금액이 찍혀있어서
"오늘은 좀 잘 됐나 보네요."
"아휴... 잘 되긴... 없어."
"네?"
"남는 게 없어. 사납금 내고 나면. 11만 원은 벌어야 본전이야. 7만 원 회사에 주고 점심 저녁 먹고 깨스값 내고 나면 본전이야."
"그면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지..."
어떤 기사님은 하루 종일 했는데도 5만 원을 벌었다고 했다. 법인택시라서 자기돈 까서 사납금 채워야 된다더라. '막말로 2~3만 원만 회사에 쏴줘도 지들은 남는 게 있을 텐데'라고 하는 기사님도 있었고.
"기사님, 사납금은 왜 그렇게 비싼 거죠?"
"뭐, 물가도 오르고 기름값, 깨스값 오르고 하니까 비싸지고 하는 것 같은데."
어떤 분에게는 다음과 같이 물어봤다.
"기사님 궁금해서 그런데 사납금을 낮추기 위한 어떤 파업이라든지 그런 활동은...?"
"모래알 조직이야. 우리도 노조 같은 게 있는데, 위에 있는 사람들은 회사랑 결탁이 돼서 영향력도 크지 않고 단합도 잘 안되고 완전 모래알이야."
"사납금은 지역마다, 회사마다 다 다르죠?"
"그렇지. (집에서 관련 자료 찾아보다가 12년도 기준으로 12만 원 정도의 사납금이 있다고 한 뉴스 기사를 봤다.) 워낙 손님은 없고 하니까 그냥 손님 찾으러 돌아다니면서 기름/깨스 쓰는 것보다 터미널이나 백화점 앞에 순번 기다리면서 손님 태우고 가는 게 나을 때도 있어. 근데 우리가 터미널에서 줄 서있으면 단속 뜨고 골치 아파. 대책 좀 세워주지." (사실 이런 부분 때문에 감차를 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이분들도 그게 불법인 건 안다. 근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돌아다니다 기름/깨스만 쓰게 되니 스스로도 답답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동네에 택시 전용 승강장이 따로 있어서 거기에 사람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남들은 길을 가다가 택시를 욕한다. 하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없고 동네든 시내든 사람이 워낙 없으니 그분들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게 아닐까? 저분들 모두가 게으르다? 글쎄. 모두가 사정이 있듯이 겉만 보고 판단하지는 말자. 이제부터.
5. 편의점 알바보다 못하다
이 조사를 하기 전부터 난 아주 단순하게 택시요금이 오르면 기사님들이 더 많이 버는 줄 알았다.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생각해보니 아니다. 요금이 오르면 오를수록 사람들은 값싼 시내버스를 타고 다닌다. 결국 택시를 타고자 하는 수요는 줄어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택시 기사님들 입장에서는 힘들게 된다. 물어봤더니 기사님들 대부분이 그러더라. 그냥 막 비싸지면 오히려 좋은 게 없다고. 적정선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우린 기본 2800원이다.
그리고 조사를 하게 되면서 기사분들이 이거 "왜 하냐고" 물을 때마다 난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다 말해줬다. 미터기 안에 있는 데이터를 복사해서 '시'에서 용역 받아서 조사하고 있는 연구원 측에서 평균을 내고 나서 가공된 자료들을 '시'에 넘겨주면 '시'에서는 택시가 어느 정도가 적정한지 따지게 될 거라고. 증차냐, 감차냐 말이다. 모든 기사분들은 택시가 많은 걸 알고 있으니 감차라고 생각을 하더라. 그래서 민감해하는 분들도 계셨다. 그럴 수 밖에 없다. 돈을 벌든 말든 일단 당장 할 일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두려운 거다. 이거 역시 괴로움이다.
조사를 하다 보니 택시들이 너무 안 오니까 '시'에서 독촉 문자를 넣었던 것 같다.
'안 가면 불이익이 있다, 참석하기 바람.'
이런 식의 공무원들의 일처리? 역시 그네 누나의, 아니, 공주님 아래에서 일하는 분덜 답다. 자기들 딴에는 저렇게 문자 보내면 독촉효과가 있을 것 같으니 저리 보낸듯하다.
기사님들 입장에선 황당하지 않나. 무작위로 선발된 것 뿐인데. 안 가면 불이익이라니. 기사님 몇몇 분은 빡쳐서 '시'에 전화하고 그랬었지. 아무튼 일처리 하는 방식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은 말이 있다.
"편의점 알바보다 못하다"
이외에도 좀 더 쓰고픈 말이 있지만 글빨이 저질이라 더 이상의 저질은 님덜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서로에게 좋을듯해서, 이만 물러난다.
R&D와 R&B를 각각 설명해 보라고 하면, 제 생각에는 R&B를 설명할 수 있는 분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R&D보다는 R&B를 더 잘 설명하는,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이 아름다운 민족에게 R&D라는 이 딱딱한 주제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 근심 속에 며칠을 지냈습니다. 사전적 의미부터 짚어본다면 R&D는 Research And Development의 약자로, 보통 '연구개발'이라 번역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유체이탈화법이라는 말 많이 들어 보셨을 겁니다. 당사자가 제 자신이 아닌 듯 헛소리를 하는 경우에 요즘 사람들은 '저 사람이 유체이탈화법을 하는 구나'라며 비웃습니다.
사장님들은 새로운 획기적인 상품을 내놓으라고 기획자와 직원들을 닥달하면서 우리는 왜 애플처럼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지 못하느냐고 일갈을 하면서도, 자신은 스티브 잡스가 가졌던 철학의 1g마저도 배우려하지 않습니다.이런 유체이탈 화법 사장님이라도 대부분의 직원들은 그 앞에서 고개를 조아릴 따름이지만 그러는 그들의 속마음, 아마 아래 사진 같을 겁니다.
벤처기업 사장님들을 만나보면, 아무리 좋은 제품을 내놓고 연구원들까지 동원해 고객응대를 해도 뒤 늦게 나온 대기업 제품에 고객을 뺏기기 때문에 신제품을 개발할 때면 이게 라이프 사이클이 얼마나 될까 항상 걱정이랍니다.
히트앤드런, 신제품이 히트하면 바로 후속제품을 내놓고 현재 히트친 제품은 버린다는 식의 전략을 구사하는 사장님들도 있습니다. 어차피 대기업이 따라오거나 대기업들이 거느린 상사나 TF팀이 시험(?)삼아 시장에 진입해도 자기들은 망하는 거니까요.
앞에서는 대기업을 욕하고 막상 자기 지갑을 열어 제품을 살 때는 중소기업 제품은 일단 제외하고 버킷리스트를 만드는 유체이탈 소비자들, 이런 소비자들의 냉대를 대할 때마다 사장님들은 소비자들이 대기업 브랜드에 맹목적으로 보이는 충성도가 한 없이 야속하겠지요.
정부 기관의 과장님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한 적 있습니다.
"우리 기관에서는 매 해 엄청난 금액의 연구개발자금을 출연금 형태로 지급하고 있는데, 어떻게 성공하는 기업이 하나도 아 나옵니까? 아니 성공은 차제하고 상용화되어 팔리는 제품을 찾아보기 힘든 겁니까?"
참으로 답답한 질문이었기에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은지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느냐고 호통을 치고 싶었으나 화를 내서 그이에게 도움이 될 것도 아니고, 세세히 문제점을 알려준들 이해할까 싶어 그냥 한두 가지 얘기만 해줬습니다.
"중소기업들이 연구개발을 통한 상용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연구개발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출연자금 수혜기업 심사 시에 구성되는 심사위원들이 대부분 대학 교수 위주의 학계 전문가와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연구원들로 짜여있어 이런 부분들을 지적하기 어려우니 산업계 전문가들을 포진시킬 필요성이 있겠습니다. 또한 연구개발 이후 상용화에 드는 비용을 기업들이 융자로만 조달하려니 그 위험부담이 너무 큰데 국가 모태펀드를 이런 기업들에게 자연스럽게 연계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런 조언을 드린 지 벌써 십년이 다되어가는데 그때에 비해 유체이탈화법의 공무원들만은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만 정부 출연자금 지원 문제는 여전한 것 같아 씁쓸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혁신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나라, 해외 기업의 사례를 대면서 우리는 왜 못하냐고 분개하지만 막상 기술과 산업, 문화 혁신의 주체인 '나'는 유체이탈화법을 즐기고 있는건 아닌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연구개발은 시행착오를 즐기는 일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실패로 인해 기업이 사라지는 일을 방지할 수 있도록 작은 실패(?)의 백신을 미리미리 맞아 두는 거죠.
정부든 기업의 경영자든 연구개발의 결과물에 조급해 하지 않고, 기업의 일상적이고 당연한 업무분야로 인식하는 때가 오면 풀리지 않는 이 경제 문제가 조금이나마 풀려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의 사례는 연구개발에 대한 기반을 마련하지 않고 있던 회사와 아이디어만 있고 신규 사업을 위한 자금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던 기업의 얘기입니다.
사례 1. 너 자신을 알라!
서글서글한 얼굴에 오로지 정직과 성실이라는 신념 아래 믿을 수 있는 식품을 공급하기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시는 사장님이라고 소개를 받은 O社의 사장님은 제가 보기에는 발이 지면에서 10cm는 떠 있는 듯 한 인상이었습니다. 나라에서 여는 경영과 마케팅에 관련된 많은 교육을 받으셨고, 지역의 타 기업보다 앞서 나간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수도권에서는 연 매출 8억원 수준의 식품기업이 구멍가게 수준이겠지만 시도 아닌 군급의 지자체에서 우물 안 개구리의 울음은 사자후로 들릴 수도 있는 일이지요.
신제품을 개발하는 프로세스는 사장님의 영감(?)에 의해 좌지우지되었고, 기실 제대로 된 신제품이 나온 적도 없었습니다. 기계공학을 전공하셨다는 사장님이었기에, 식품 관련 전문가가 따로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연구개발을 전담할 수 있는 직원을 두는 것도 아니요, 제대로 된 특허 하나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현재의 상태에서는 외부 컨설팅을 통해 변할 것이 없었기에, 본인이 이끌고 있는 기업의 현실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라 판단하고 이 사장님한테 중소기업 성공사례 대회에 나가자고 꼬드겼습니다. 사장님은 컴퓨터 앞에 앉고, 저는 옆 자리에 앉아 신청서 작성을 해나갔습니다. 젊은 사장님이라 컴퓨터 사용은 능숙히 해내는 편인데 작성이 너무 더딥니다. 왜냐하면 연구개발 능력에 대한 자체평가 항목이 사장님의 폐부를 사정없이 찔러 댔기 때문입니다.
아래는 당시 자체 평가 항목에서 나온 질문들입니다.
- 귀사는 연구전담반이나 부설연구소를 두고 있습니까?
- 귀사의 종업원 총원 대비 연구개발 전담인력 비중은?
- 연구개발 전담인력의 평균 근속연수는?
- 전년도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 비중은?
- 연구개발을 위해 종업원들에게 교육훈련을 시행한 회수는?
- 연구개발의 결과물들을 문서화, 전산화 하고 있습니까?
- 경쟁사의 산업재산권(특허 등) 동향을 분석하고 있습니까?
- 귀사는 종업원의 직무발명에 대한 보상을 시행하고 있습니까?
기업의 연구개발은 좋은 영감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대우이기도 하고, 컴퓨터와 SW의 준비이기도 합니다. 연구개발을 위한 투자비용도 마련되어야 하고, 끊임없는 교육도 함께 진행되어야 합니다.
연구개발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어떠한 기반도 마련되지 않은 조직에서 영감에 기대어 혁신을 꿈꾼다는 것입니다. 그 영감이란 것은 기업이 또는 경영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던 무위(無爲)에 대한 죄책감이 만들어낸 변명이기도 하고, 거짓 전문가들의 말에 현혹되어 무지개 밑에 있다는 보물상자를 찾아나서는 어리석은 짓이기도 합니다.
위에 잠깐 보여드렸던 질문지는 기업이 혁신을 위해 갖춰야 할, 기업 상황에 따라 늦어지더라도 언젠가는 갖추고 있어야 할 시스템입니다. 잘 갖춰진 연구개발 시스템은 누가 앞장서서 이끌어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습니다. 연구소장이, 최고경영자 만이 기업의 혁신적 기술과 제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최고경영자가 기업의 모든 자원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상황에서 연구개발을 진두지휘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합리적인 시장 예측이 가능한 마케팅 담당자가 신기술과 제품의 개발을 요구하는 것은 안전한 신제품 런칭의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타 기업과 경쟁기업의 구매 동향을 꿰고 있는 구매담당자가 특정한 부품의 추세를 분석해서 기술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 또한 대단히 신뢰도 높은 미래예측입니다.
사례 2. 대박 아이디어가 있어요!
인터넷 컨텐츠 서비스를 하는 작은 회사가 있었습니다. 이 회사에서 어느 날 불현듯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SNS와 인터넷서비스와 관련된 온라인 플랫폼이라고 합니다.
내부에서 직원들과 모여 검토회의를 해봤는데 시장성이 대단히 좋을 것 같다고 합니다. 게다가 아는 변리사님께도 의견을 여쭤봤는데 그 분도 좋은 사업 아이템이라고 극찬을 했다네요. 그런데 저를 찾은 이유는 이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기술자가 회사에 없어서 개발력이 있는 다른 회사에 개발의뢰를 하려고 하는데 그 방식을 묻더군요.
이제부터는 A라는 회사가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회사, B라는 회사가 개발력을 갖고 있는 회사라고 하죠.
개발비를 지급하고 외주개발 형태로 하면 간단할 일이나 A회사에는 그 만큼의 자금이 없다고 합니다. B 회사에게 개발비를 줄 수 있는 방법은 개발을 다 한 후에 A 회사가 서비스를 런칭하고 그 수익금을 나눠주는 방식이 있습니다만 이 제안은 B가 탐탁해 하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B 회사에서는 신규법인을 설립하고 그 회사의 지분을 요구했으며, 해당 지분에 대해 일정기간 지분율 보호 및 유지를 요구했습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B회사에서 특허를 출원하고 가치평가를 해서 자본금으로 전입시켜서 신규법인에 참여시킬까요?
아니면 A회사가 인터넷 유명성이 있으니 주식 스와핑(swapping)을 할까요?
이런 얘기들은 가끔 신문에서 볼 수 있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일이지만 현업에서는 결코 이뤄지기 힘든 꿈같은 얘기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법률과 사례에서 나타나지 않은 매우 선진적 기법(?)을 써서 억지로라도 이 일을 성사시키려 해도 두 회사는 전혀 그런 모험을 겪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우선 B사의 플랫폼 개발비용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고, 더구나 A사는 개발비용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분위기였습니다. 뭘 알아야 프로젝트 원가에 대한 검토를 하는 것이죠. A사에는 컨텐츠 개발을 직접 할 수 있는 개발자 출신의 PM(Project Manager) 또한 없습니다.
B사의 일정기간 지분율에 대한 보호 및 유지 요구는 자신의 주식가치가 최고의 금액이 되도록 신규 투자 유치(유상증자 및 채권 발행)를 막아내겠다는 욕심이 엿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욕심은 막연한 것이었지, 컨텐츠 사업의 특성 상 성공적인 데뷔를 위해 많은 광고비와 마케팅 비용을 쏟아 부으려면 필수적인 자금 확충, 그것도 미래의 가능성에 투자해주는 위험자본의 진입기회를 자신들이 스스로 막아버리는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좋은 개발자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력 있는 경영진이 없는 기업이란 확신은 들더군요.
더군다나 대화 내내 제가 느낀 것은 A와 B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결국 저의 컨설팅 보고서는 이렇게 작성됐습니다.
이마저도 한 줄로 요약하면, '돈 없으면 그 사업하지 마세요'가 되겠군요.
'그것 참 야박하다, 이 사례가 나와 비슷해서 어떻게 잘 성사되었는지 궁금했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 다음 시간에는 연구개발을 위한 자금을 이끌어 내는 방법과 아이디어의 보호를 위한 특허 출원에 대한 얘기들로 이어나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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